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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고틀리프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년∼1814년)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 1762년 5월 19일∼1814년 1월 27일)는 독일 철학자이다. 헤겔, 프리드리히 셸링과 더불어 독일 관념론을 대표하는 사상가이다. 철학사적으로는 지식학(Die Wissenschaftslehre)을 주로 하였으며 칸트의 비판철학의 계승자 또는 칸트로부터 헤겔에로의 다리 역할을 한 철학자로 인정되고 있다.
단지 일반적으로는 통속철학의 저작이 유명하게 된 경우가 많아 당시 나폴레옹 1세에 점령되어 있던 베를린에서 행한 교육 등에 관한 강의록의 강의자로서 유명하게 되었다.
피히테는 가난한 삼베직인의 아들로 태어나 예나 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였다. 그 후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전학하였고, 졸업 후 가정교사 시절에 저술한 《종교와 이신론(理神論)에 관한 아포리즘》(1790년)은 B. 스피노자의 결정론의 영향을 받았으나, 1791년에 칸트 철학을 알게 됨에 따라, 특히 그 실천이성의 자율과 자유사상에서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 후 쾨니히스베르크로 임마누엘 칸트를 찾아 그의 주선으로 《모든 계시의 비판 시도》(1792년)를 익명으로 출판하였는데, 사람들은 처음에 칸트의 저서로 알고 있었으나, 칸트 자신의 정정(訂定)과 천거(薦擧)에 의해 피히테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1792년에 예나대학의 교수가 되었고, 1793년 요한나 한(Johaanna Hahn)과 결혼하고 1797년에 [지식학(知識學)]에 대해서 몇 가지 중요한 논고를 발표하였다. 1798년 철학잡지에 포르베르크(Friedrich C. Forberg, 1770년∼1848년)의 논문에 서문으로 발표한 《신의 세계지배에 대한 우리들의 신앙 근거에 관하여》라는 논문이 무신론이라는 의혹을 받아, 유명한 무신론 논쟁을 야기(惹起)시켰으며, 결국 1799년 예나대학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 후 베를린에서 슐레겔 형제를 비롯하여 낭만파 사람들과 교유하였고, 사상적으로는 신비적·종교적 색채를 더해 갔으나, 동시에 시국 정치문제에도 활발한 발언을 시도하였고, 특히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한 프로이센의 위기에 처하여 행한 “독일 국민에게 고함(Reden an die Deutsche Nation, 1807년∼1808년)”이란 강연은 너무나 유명하다. 종군간호사가 된 부인에게서 옮은 발진티푸스(epidemic typhus)에 감염되어 죽었다.
칸트로부터 촉발되어 발전해나간 근대 독일 관념론의 대표적인 철학자들 중 한 명으로 그의 사상의 정수는 주관적 관념론(주관속에서 모든 것이 가능)이다. 그에 이어 쉘링은 객관적 관념론(객관속에서 모든 것이 가능)을 내세웠고, 헤겔은 피히테와 쉘링의 철학을 정리하여 절대적 관념론을 내세워 근대철학의 하나의 완결된 형태의 것을 창출해내었다.
피히테는 칸트의 오성과 이성에 대한 개념 구분이 애매하다고 생각했고 필연성의 세계를 다루는 순수이성과 자유의 세계를 다루는 실천이성이 모순적인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피히테의 철학은 그것을 해결하려는 데서 출발하게 되는데, 그는 이성이 윤리의 세계뿐만 아니라 필연성에 관계하는 학문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관계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피히테에게 있어 경험은 대상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앎(Wissen)에 대한 경험인데, 이에 따라 그는 앎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인 지식학(知識學, Wissenschaftslehre)을 정초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자아는 앎의 출발점인데 이는 더 이상의 전제를 가지지 않는, 모든 앎이 이끌려 나올 수 있는 원칙으로서, 데카르트의 것과 유사한 면모가 있다. 자아는 단순히 사유하는 주관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자아(自我)아며, 자아는 절대적으로 독자적으로 활동하며, 자아의 활동은 무한한 것이다. 자아는 결코 외부의 어떤 것에 의하여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끊임없는 활동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다.
피히테의 자아의 본질은 하나의 고착화된 사실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역동적인 작용인데, 이를 사행(事行, Tathandlung)이라 한다. 사실이라는 것은 이러한 자아의 적극적인 행위, 즉 사행의 결과이며, 자아는 자기의식(Selbstbewußtsein)으로 표현된다. 사행은 판단(判斷), 추리(推理)하는 이론적인 힘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存在)를 스스로 정립하는 실천적인 힘이다.
사행을 근본적인 존재특성으로 가지는 자아엔 지식학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도구로서의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로, 자아는 스스로를 정립한다.(동일률의 근거) 이것은 범주의 하나로서 실제성을 유도한다. 둘째로, 자아에 대하여 비아가 정립된다.(모순율의 근거) 이것은 범주로서 부정성(Negation)을 유도한다. 셋째로, 자아는 나눌 수 있는 자아에게 나눌 수 있는 비아(非我)를 정립한다.(근거율의 근거) 이것은 자아에게나 비아에게만 머무르는 정립이 아니라 양자를 모두 포괄하는 정립으로 제한(Limitation)의 범주를 유도한다.
자아(Ich)는 자신을 정립하면서 세계와 관계하고, 자아의 정립하는 활동에 거스르는 비아(Nicht-ich)가 다가오는데, 비아는 자아에 속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서, 사행을 통한 자아의 자기정립에 거슬러 자아에 대해 반정립(反定立)한다. 비아의 반정립은 이미 자아의 정립을 전제로 하기에 첫번째 원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자아와 비아는 갈등관계이다.
피히테의 철학을 종합하자면, 자아의 정립과 비아의 반정립이 대립하는 구도에서 절대적 자아가 그 대립을 지양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비아가 자아를 제한 또는 규정하는 것은 이론적인 것이며 이론적 학문을 성립시키고, 자아가 비아를 규정하는 것은 실천적인 것이며, 자아의 정립을 통해 대상인 비아를 규정하고 제한하는 실천적 학문을 정립시킨다. 그런데 이 구분은 자아가 비아와 관계하는 방식을 통해 구분되는 것일 뿐이다.
피히테는 자아의 정립하는 행위를 근본적으로 긍정하였고, 실천적 자아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를 통하여 칸트의 철학에 있어서의 이론이성과 실천이성간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비아는 모든 대상들의 전체를 의미하며 자아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해 생기고, 자아의 존재는 궁극적인 출발점이 되는데 여기서 ‘궁극적 자아’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궁극적 자아는 비아에 의하여 생기는 부정과 갈등을 넘어 자신의 존재를 궁극적으로 정립하는 탁월한 자아이다. 피히테의 철학은 자기 자신만을 정립하는 유한한 자아가 비아의 저항과 부정을 제거하고 자신을 정립시키는 절대적인 자아로 나아가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절대적인 자아는 실체로서 스스로를 정립하는 자아, 즉 절대자인데 이는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비주의적인 개념이 아니고, 자아의 사유 활동과 능동적으로 자신을 정립시키는 도덕적인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자아 속에 숨은 신이다. 여기서 사행은 변증법적인 것으로서 자아와 비아의 갈등을 거쳐서 자기 자신을 무제약적으로 정립시키는 탁월한 능력이다. 자아의 자기정립은 비아와의 대립을 넘어 절대적 자신을 정립하는 것으로서, 절대적인 자아를 논리적으로 전제해야 한다. 즉 이미 자아 속에 비아의 반정립을 극복할 수 있는 도덕적 힘이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저서로는 프러시아 학사원에서 행한 연설을 책으로 묶은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 단연 유명하다. 이 책에서 그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독일이 패배한 근본적인 원인은 이기심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 교육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1807년 나폴레옹과 프로이센의 전쟁은 굴욕적인 틸지트(Tilsit)의 강화로 끝났다. 종군을 원하였으나 허가되지 않았고, 적의 치하에 있는 것을 불결하게 생각해 아직 점령되지 않은 각지로 전전하였던 피히테는 강화조약이 체결된 이후에 베를린으로 돌아와, 최악의 불행한 상태에서 조금씩 자유와 독립을 되찾으려고 하는 기운이 고조되어 가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1807년 12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매주 일요일의 저녁 때 프러시아 학사원의 대강당에서 연속 강연을 하여 독일인의 애국심을 환기시켰는데, 그 강연 내용이 바로 이 저서이다. 프랑스군의 엄격한 점령하에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목숨을 건 일이었고 출판업자인 파름은 피히테에게 공감하여 반불적(反佛的) 서적을 펴냈다는 이유로 총살을 당하였다.
그의 열렬한 애국심은 후에 파시즘에 이용되기도 하는 쇼비니즘(Chauvinism)적인 면이 없지도 않지만, 그가 호소하려던 근본적인 것은 그 자신의 역사철학에 입각한 인간적 자유의 실현이었다. 그는 현실을 이기심만이 현저하게 발달한 ‘완성된 죄의 상태’의 시대라 하였고, 그것을 ‘이성 학문의 상태’로 높여야 할 시기에 도달하였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일 국민 전체의 자각이 필요하고 거기에는 교육이 불가결하다. 그 교육이란 참다운 인간적 자유를 자각시키는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Johann Heinrich Pestalozzi, 1746년∼1827년)의 신교육이다. 인간의 완전성이라는 자질에서 독일인은 가장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독일인이 망한다면 전 인류도 희망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독일의 청년을 교육시킴으로써 독일을 구하고, 그것을 근본으로 하여 전 인류의 도덕적 개혁을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피히테는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강연을 통해 나폴레옹에 의해 유린당하고 있는 조국 독일의 국민들에게 애국적인 견지의 국민교육론을 펼쳐나간다. 이 강연은 피히테의 애국심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는 외세 치하의 국민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단순한 정치적 강연이 아니다. 여기에는 피히테의 역사관뿐만 아니라, 피히테의 주된 철학 사상을 비롯하여 당대의 주된 정신적 흐름인 낭만주의 이념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따라서 이 강연은 낭만주의 정신의 소산으로 보아야만 하며, 낭만주의 시대정신의 총화로서 고찰되어져야만 한다.
본 연구는 피히테의 ❮독일국민에 고함❯이라는 강연 속에 나타나 있는 동시대의 주된 정신적 흐름을 고찰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피히테가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을 점령한 1807년부터 1808년 초까지 매주 일요일마다 14회에 걸쳐서 행한 이 연설은 외세에 의해 예속된 조국 독일의 절망적인 상황 하에서 독일 국민을 각성시키기 위해서 행한 바, 이 속에는 피히테의 주된 철학 사상, 자국민의 민족적 정체성, 애국적 견지의 교육 이념 등을 담고 있는데, 바로 여기에서 당시 독일의 시대정신과 독일 낭만주의 문학이념을 고스란히 읽어낼 수가 있다.
독일 낭만주의에 철학적 기초를 제공한 피히테는 자아의 절대성, 자아의 절대적 자유를 주창하였는데, 동시대 낭만주의 작가들과 이론가들은 피히테의 철학을 문학의 영역에 도입하여 낭만주의 문학관과 세계관으로 정착하였던 것이다. 동시대를 지배했던 문학사조인 낭만주의의 정신이 곧 시대정신으로 대변되고, 이러한 시대정신이 곧 피히테의 강연 속에 녹아있다는 것이다.
피히테는 자신의 연설을 통해 독일 멸망의 원인을 이기심에서 찾았으며, 이러한 이기심은 새로운 교육에 의해 타파되어야 한다고 주창했다. 요컨대 이 새로운 국민교육에 의해 참된 민족적 공동체 의식이 각성될 때, 독일 국민은 외세로부터 해방되고 세계사적인 민족으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피히테가 주창하고 있는 국민교육은 지식을 축적하는 교육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하나 터득해나가는 인간 교육으로서, 학생들이 정신 발달의 필연적 법칙을 스스로 발견하여 자신의 정신을 계발하도록 나가도록 하는 교육이다. 이처럼 스스로에 대한 주체로서의 자아는 피히테의 관념론 철학에 기본이 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초기 낭만주의 문학의 철학적 기반이 되는 이념이기도 하다.
피히테는 독일어 사용이 독일인이라는 민족 정체성에 가장 중요한 요건이며, 독일인은 독일어라는 민족 정체성이 담긴 살아있는 언어를 통해서만 독일적인 발전을 꾀할 수가 있다고 주창한다. 이러한 피히테의 사상은 언어와 같은 민족의 정신적, 정서적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는 중기 낭만주의 문학의 사상적 흐름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고 하겠다.
피히테는 자신의 강연을 통하여, 인간은 의지의 자유, 즉 저급한 의미에서의 자유를 부정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절대적인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필연성을 인지하여 선을 지향하도록 규정되어 있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독일철학의 의의는 바로 이 점을 밝히는 것이며 새로운 교육을 통해서 이러한 존재임을 깨닫는 인간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인간이야말로 고급 의미에서의 자유를 실천하는 인간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살아있는 언어를 말하는 독일인은 인간 자체에 존재하는 절대적이고 근원적인 것을 믿고 무한한 개선과 영원한 진보를 믿는 자라는 것이며, 바로 여기에 독일인의 우수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피히테의 사상은 주체적 자아의 절대적 자유를 핵심으로 삼았던 초기 낭만주의 정신과, 언어와 같은 민족적 정체성을 바탕으로 애국적인 견지에서 문학활동을 펼쳤던 중기 낭만주의의 시대정신과 부합한다고 하겠다.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바탕으로 하여 독일 국민의 역사적 사명을 강조하며 새로운 역사의 전개를 전망하고 있는 피히테의 ❮독일국민에게 고함❯이라는 강연은 피히테의 애국심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는 단지 외세의 침략 하에 놓여있는 독일 국민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단순한 정치적 강연이 아니다. 이 속에는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피히테의 역사관이 녹아져 있으며, 시대가 요구하는 민족관이 들어있고, 나아가 온 인류에게 바라는 원대한 피히테의 희망이 담겨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주체적이고 절대적인 자아론적인 관념철학, 역사의식에 바탕을 둔 애국심, 자민족에 대한 신념, 인류의 개선을 위한 새로운 교육론을 펼친 피히테의 ❮독일국민에게 고함❯을 본 연구는 독일 낭만주의 정신이라는 큰 틀 속에서 고찰했으며, 이러한 낭만주의의 시대정신과 정체성과의 연관 속에서 피히테의 강연을 심층적으로 해석했다고 할 수 있다.
독일 국민에게 고함
1807년 12월에 시작하여 이듬해 3월까지 나폴레옹 군의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베를린 학사원에서 매주 일요일에 한 번씩 열린 이 강연을 통해 피히테는 독일 재건의 길은 무엇보다도 국민정신의 진작(振作)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독일 국민의 분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피히테는 패전 후 독일 국민에게 만연한 패배감·이기심·나태함을 지적하면서 국가 재건에 필요한 새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암기(暗記)는 어떤 다른 정신적 목적에 이바지하는 것으로서가 아닌 그 자체만으로 요구된다면 심성의 활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심성의 고뇌가 된다. 학생들이 이러한 고뇌를 마지못해서 받아들였으리라는 사실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학생들에게 전혀 관계도 없고 거의 흥미도 없는 사물과 그 특성을 가르치는 것은 그들의 고뇌에 대한 대가로서는 결코 유익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학생의 학습에 대한 혐오는 이러한 인식이 장차는 필요하리라는 위안, 이러한 인식을 매개로 해서만 빵과 명예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위안에 의해서, 그뿐 아니라 눈앞의 상벌에 의해서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피히테는 독일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자긍심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직 독일인-자의적인 규정 속에서 죽어 버리지 않는 근원적 인간인- 만이 참으로 민족이라고 할 수 있고 일체(一體)가 될 자격을 가졌으며, 오직 독일 사람들만이 그 국민에 대해 본래적이고 이성적인 사랑을 할 수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구실을 하는 어떤 책, 혹은 어떤 장전(章典)을 가질 수 없는 걸일까요? 개인적으로 다 훌륭하고 지혜롭기 때문에 미국인이나 일본인, 독일인들처럼 함께 추구해 나가야 할 그 따위 것들을 정하는 건 저주해야 마땅한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요?
자신의 자주성을 상실한 자는 동시에 시대의 흐름 속에 뛰어들어 그 내용을 자유롭게 결정할 능력도 상실한다. 이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그 시대뿐만 아니라 시대와 함께 그 자신의 운명까지도 그의 운명을 지배하는 외세에 의해 결정된다. 또한 그는 앞으로도 스스로의 시대를 갖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민족과 다른 나라의 사건 및 시대 구분에 따라 자신의 연대를 계산하게 된다.
어떠한 인간도, 어떠한 신도, 또한 가능성의 영역에 있는 어떠한 사건도, 우리를 도울 수는 없다. 만일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면 단지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돕지 않으면 안 된다.
이기심은 - 중요하지 않은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 우선 피지배자 전체를 사로잡은 다음, 지배자까지도 정복하여 지배자의 유일한 생활 충동이 될 때 최고도의 발달에 이른다. 이러한 정부는 우선 대외적으로 그 나라의 안전을 다른 나라의 안전과 결합시키는 모든 유대를 소홀히 하고 자기 나라의 타성적인 평화를 교란시키지 않기 위해 자기 나라가 그 한 부분으로서 속해 있는 전체를 포기하고, 자기 나라의 국경만 침범당하지 않는 한 평화로울 수 있다는 이기심의 한심스러운 기만에 빠진다. 이어서 대내적으로는 연약한 힘으로 국가를 지도한다. 이러한 연약한 지도를 외국어로는 인도주의, 자유주의, 민중주의라고 부르지만, 독일어는 무기력 또는 품위 없는 행동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전체주의 교육 나는 여기서 내가 생각하고 있는 새로운 교육을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해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곧, 학생의 자유 의지를 인정하고 여기에 의지를 한 점에 종래 교육의 첫 번째 오류가 있고 그 무능과 무력이 명백히 드러났다는 것이다. 종래의 교육은 온갖 강력한 효과를 거둔 때에도 자유 의지가 있었다. 다시 말하면 선과 악 사이에서 망설이면서 방황하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의지를, 따라서 인간 자신 - 의지는 인간 자신의 참된 근원이므로 -을 육성할 능력도 욕망도 열망도 전혀 없음을 고백하고 또한 인간의 육성 일반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함을 고백한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새로운 교육은 인간 형성의 과제를 스스로 담당한다는 기반 위에서 자유 의지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한편 의지에 대해 결단은 냉엄하고 필연적이며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밝힌 다음 비로소 이러한 의지를 확실하게 신뢰하며 거기에 의지하는 것이다.
모든 교육은 확고하고 한정된 존재, 곧 더 이상 생성되지 않고 지금과 같은 것 이외의 것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를 확립하기 위해 노력한다. 교육이 어떠한 존재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일종의 목적 없는 유희일 것이다.
당신이 그에 무언가 하고자 한다면 설교 이상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당신은 그를 만들어야 한다. 곧 당신이 원하는 것 이외에는 그가 결코 의욕(意欲)하지 못하도록 그를 만들어 놓아야 한다.
창조적 쾌감은 학생의 자주성이 자극되고 동시에 주어진 대상에서 개방적으로 되어 그 대상이 단지 그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정신적 힘의 표현 대상으로서도 적당할 때에만 불붙여지며, 이러한 정신적 힘의 표현은 직접적이고 필연적으로 그리고 예외 없이 쾌감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육은 결국 학생의 인식 능력의 배양을 위한 교육이며, 사물의 지속적 상태에 대한 역사적 교육이 아니라 이러한 지속적 상태를 필연적인 것으로 만드는 법칙에 대한 보다 높은 철학적 교육이다. 이렇게 해서 학생은 배움을 얻는다.
학생의 이러한 독자적인 정신 활동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어떤 점에서 우선 자극하는가 하는 것이 교육 기술의 첫 번째 비결이다. 이것이 달성된 후 다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점으로부터 자극된 활동을 언제나 신선한 생활 속에 유지하는 것이다.(중략) 인간이 정신적 활동을 스스로 열망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의 정신적 본성에 대한 영원하고도 예외 없는 근본 법칙이다.
암기는 어떤 다른 정신적 목적에 이바지하는 것으로서가 아닌 그 자체만으로 요구된다면 심성의 활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심성의 고뇌가 된다. 학생들이 이러한 고뇌를 마지못해서 받아들였으리라는 사실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또한 학생들에게 전혀 관계도 없고 거의 흥미도 없는 사물과 그 특성을 가르치는 것은 그들의 고뇌에 대한 대가로서는 결코 유익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학생의 학습에 대한 혐오는 이러한 인식이 장차는 필요하리라는 위안, 이러한 인식을 매개로 해서만 빵과 명예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위안에 의해서, 그뿐 아니라 눈앞의 상벌에 의해서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경험을 통해 밝혀진 것은 오직 교육에 의한 정신적 발전만이 순수한 인식 그 자체에 대한 즐거움을 갖게 하고, 도덕적 교양을 가지려는 심성을 열어 주며, 반대로 단순한 수동적 수용은 도덕적 심성의 근본적이고 철저한 타락이 인식의 요구이거나 한 것처럼 인식을 불구로 만들고 죽어 버린다는 것이다.
‥‥새로운 교육은 신중하고 확실한 도의 교육 기술이다. ‥‥새로운 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올바른 때에 이 기술의 확고부동한 작품으로서 출발하게 되는데, 이러한 작품은 새로운 교육 기술에 의해 세워진 방향 이외에는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으며 어떠한 후원도 필요로 하지 않고 그 나름의 법칙에 따라 스스로의 힘으로 전진한다.
우리들의 의견으로는 시간상으로 지금이 바로 그때이며, 지금 두 시기의 중간에서 지상의 생활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에 대해서 우리는 다른 민족을 위해 선구가 되고 모범이 되어 새로운 시대를 출발시키는 일을 독일 사람들에게만 기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새로운 철학은 현대인을 단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도 이 철학이 언제까지나 방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므로, 현재 이 철학이 속해 있는 세대를 육성하는 과제를 떠맡아야 한다.
다른 유럽의 어떤 국민보다도 뛰어난 교육적 수용력이 그 근본적 특징에 이미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한다.
우선 독일 사람은 자신의 살아 있는 언어를 그 상징화(象徵化)의 과정을 전혀 달리하는 죽은 로마어와의 비교에 의해 더욱 깊이 규명할 수 있는 한편 동일한 방법에 의해 로마어도 더욱 명백하게 이해하는 수단을 갖고 있으나, 새로운 라틴 민족은 동일한 하나의 언어 환경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이러한 규명은 불가능하다는 것, 독일 사람은 로마의 모어(母語)를 배우면서 동시에 그 파생어(派生語)도 어느 정도 배울 수 있으며 외국인보다도 더 근본적으로 모국어를 배울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앞에서 말한 이유에 의해 그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 동시에 이 외국인 자신의 언어를 그 언어를 사용하는 그들보다도 훨씬 깊이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훨씬 독특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으므로 독일 사람이 자신의 이익이 될 것만을 이용한다면 외국인 언제나 내려다보며 그들을 완전히, 뿐만 아니라 그들이 그들 자신을 이해하는 것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고 그들의 말을 전면적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외국인은 대단한 노력을 기울여 독일어를 배우지 않는 한 참된 독일인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순수한 독일어를 번역할 수 없다는 것 등을 추측할 수 있다.
다른 게르만 민족과 대조해서 독일인을 근본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나는 우선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곧, ① 살아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의 경우에는 정신적 발달이 그 생활 속으로 파고 드는데 그 반대인 경우에는 정신적 발달과 국민의 생활은 각기 다른 길을 가게 된다. ② 같은 이유로 해서 살아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은 모든 정신적 발달에 대해 참으로 진지한 태도를 가지며 그것이 생활 속으로 스며들기를 바라지만, 반대로 그렇지 못한 민족에 있어 정신적 발달은 천재의 유희에 지나지 않으며 그들은 이러한 유희 이상을 바라지 않는다. 후자의 민족은 정신을 갖고 있을 뿐이지만 전자의 민족은 정신과 함께 정의(情意)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③ 그 결과로서 살아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은 모든 일에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반대로 그렇지 못한 민족은 요행만을 바란다. ④ 결국 살아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에게서 위대한 민족이 형성되며, 이러한 민족을 육성하는 자는 그가 발견한 방법을 대중을 통해 시험하고 대중에 영향을 미치려고 하지만, 반대로 살아 있는 언어를 갖지 못한 국민의 경우에는 교양 있는 계층이 민중과 분리되어 민중을 자신의 계획을 위한 맹목적인 도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근본적인 일에 전념하는 연구는 여러 가지 논쟁과 그리고 다양한 질투로부터 생기는 흥분을 초월할 수 있다.
이러한 외국 숭배가 얼마나 깊은 영향을 주고 있고, 지금 우리를 몰락시키고 있는 모든 악폐는 그 원인이 외국적인 것에 있으며, 이런 원인은 독일인의 진지성 및 그것이 생활에 미치는 영향과 결합되어 독일인을 타락시킨다.
현대를 영원한 시간의 일정에 오르게 하는 진보는 국민을 인간으로서 완전히 교육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애써 획득한 철학은 결코 광범한 이해에 이르지 못하고 생활에도 일반적으로 이용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철학이 없으면 교육기술이 스스로 완전한 명석성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상보관계에 있어 하나는 다른 하나 없이는 완전하지 못하고 쓸모도 없다. 독일인은 지금까지 문학의 각 단계를 완성시켰고, 원래 이를 위해서 새로운 세계에 보존되었다고 하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교육의 경우에도 그들의 임무는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교육문제가 일단 해결되면 인류의 다른 관심사도 쉽게 해결될 것이다.
독일 정신을 부흥시키는 여러 가지 특수한 방법 중에서도 우리가 이 시대에 대한 독일인의 감격적인 역사책을 갖게 된다면 그야말로 가장 강력한 방법일 것이고, 이 책은 우리 자신이 다시금 특기할 만한 일을 이룰 때까지 성서나 찬송가집처럼 국민적ㆍ민족적 필독서가 될 것이다. 이 역사책은 단지 행위나 사건을 연대적으로 설명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놀랍게도 우리를 사로잡고 우리들의 관여나 명백한 자각 없이 우리들을 당시의 생활 한가운데로 들어가게 하며, 따라서 우리 자신이 그 시대 사람과 같이 걷고 같이 서고 같이 결정하고 같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 그러면서도 많은 역사 소설처럼 어린애 장난 같은 날조가 아니라 진실에 바탕을 둔 것이어야 한다. 곧 이 책은 당시 사람들의 생활에 의해 그 생활의 실증으로서 행위나 사건을 실감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저술은 사실상 광범한 지식과 아마도 일찍이 시도되지 못한 연구의 성과로서만 가능하겠으나, (그 역사책의) 저자는 이러한 지식과 연구의 나열을 삼가하고 단지 그가 파악한 핵심만을 현대 독일어에 의해 독일인이면 누구나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우리들에게 제시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저술에서는 앞에서 말한 역사적 지식 이외에도 고도의 철학적 정신이 필요한 것이며, 그것도 겉치레에 불과한 것이 아닌, 무엇보다도 충실하고 사랑스러운 심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정신성(精神性)과 정신성의 자유를 믿고 자유에 의한 정신성의 영원한 발전을 바라는 사람은 그가 어디서 태어났든, 또한 어떤 국어를 사용하든, 우리들의 동포이고 우리들에게 속하며 우리들에게 가담할 것이다. 정체, 퇴보, 윤무(輪舞, Reigen)를 믿거나 또는 죽은 자연이 세계 지배의 열쇠를 잡고 있다고 믿는 사람은 어디서 태어났든, 또한 어떤 국어를 말하든, 비독일적이고 우리들에게 익숙하지 않으며 우리들로부터 완전히 떠나가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바람직할 것이다.
오직 독일인 - 자의적인 규정 속에서 죽어 버리지 않는 근원적 인간인 - 만이 참으로 민족이라고 할 수 있고 일체(一體)가 될 자격을 가졌으며, 오직 독일 사람들만이 그 국민에 대해 본래적이고 이성적인 사랑을 할 수 있다.
국가의 주권을 장악하고 불안하게 여기저기 둘러보지 않고 자신과 확신을 갖고 결단하며 해당자들에게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명령을 내리고 반항하는 자에게는 생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바치라고 강제할 당연한 권리를 가진 것은 과연 어떤 정신인가? 그것은 국가 조직과 법률에 대한 안이한 시민적 사랑의 정신이 아니라 영원한 것의 보호자로서 국민을 둘러싸고 있는 보다 높은 조국애의 타오르는 불꽃이다. 고상한 사람은 이러한 조국애를 위해 즐거이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고상하지 못한 사람은 오직 고상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역시 자기 자신을 희생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통치자가 노예 상태를 원하더라도 그대로 내버려 두라(노예의 효용은 그 생활, 그 많은 숫자, 그 복지로부터도 생기므로), 만일 새로운 통치자가 어느 정도의 계산가라면 그의 밑에서의 노예 상태는 참을 만한 것이리라. 적어도 생명과 생계만은 언제나 보장될 것이다. 그렇다면 노예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 생명과 생계에 이어서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안식이다. 그러나 안식은 투쟁이 계속되면 오직 교란될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가능한 한 빨리 이 투쟁을 끝내기 위해 모든 수단을 사용할 것이고 양보도 하고 타협도 할 수 있건만 왜 그들은 이렇게 해서는 안 되었는가? 그들은 견딜 만한 조건 밑에서 산다고 하는 관습에 따라, 계속되는 것 이외의 일은 할 필요가 없었고 생활에 대해 그 이상을 희망하지도 않았다. 이 지상에서 이 세상에서의 삶의 지속을 초월하는 삶의 약속 - 이것만이 죽음을 무릅쓰고 조국을 위해 분기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희생에 한정된 목적을 설정하고 일정한 정도 이상으로는 싸우려고 하지 않는 자는 더 이상 버틸 수도, 또한 벗어날 수도 없는 위험에 직면하게 되면 저항을 포기한다. 그러나 어떠한 목적도 설정하지 않고 모든 것, 다시 말하면 최고의 것, 곧 인간이 이 세상에서 상실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최고의 것인 생명까지도 내건 사람들은 결코 저항을 포기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들이 한정된 목적을 가진 적과 싸워 승리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독일인의 독자성 및 독일인의 조국애라고 설명한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또한 이러한 독자성이나 조국애가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고 이를 위한 노력이 보람 있는 것인가 하는 데에 달려 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해 외국인 - 밖에 있든 안에 있든 - 이 부정적 대답을 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과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는 대다수의 학생에게 육체, 물질, 자연만이 살아 있었으나 새로운 교육은 대다수의 학생에게, 아니 머지않아 모든 학생에게 오직 정신만이 살아 있게 하고 이 정신이 그들을 움직이도록 해야 한다. 앞에서 잘 정비된 국가의 유일한 근거라고 말한 바 있는 확고하고 확실한 정신이 일반적으로 탄생되어야 하는 것이다.
신체를 사용하는 것을 배우지 않고 획득한 인식은 결코 인식이 아니며 자의적인 언어적 기호의 단순한 암기에 지나지 않으며, 말하는 것을 과대평가하기 때문에 이러한 암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인식 대상에 대한 사랑이 동시에 생기지 않는 경우 학생의 인식 능력은 자극되지 않는다. 사랑이 생기지 않으면 인식은 죽어 버리기 때문이다. 또한 인식이 명석하지 않으면 사랑은 자극되지 않는다. 인식이 명석하지 않으면 사랑은 장님이기 때문이다. - 이것이 우리가 제안한 교육의 주요한 원칙의 하나이며, 이 원칙에 대해서는 페스탈로치도 그의 전체적인 사상 체계로 보아 틀림없이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의 자극과 발달은 감각 및 직관을 실마리로 하여 계통적인 교육 과정에 스스로 연결되므로 우리의 계획이나 도움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어린이는 명석성과 질서에 대해 자연적인 충동을 갖고 있다. 이러한 행동은 앞에서 말한 교육과정에서 언제나 만족을 얻으며, 따라서 어린이는 충분한 기쁨과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나 이 충동은 가장 만족할 때에 나타나는 새로운 불명료성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자극되고 그 자극에서 또 다른 만족을 얻으므로 삶은 배움에 대한 사랑과 즐거움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것이 각자를 사상의 세상에 연결하는 사랑이고 감각 세계 일반과 정신세계 일반을 연결하는 유대이다. 이러한 교육에서는 이 사랑을 통해 인식 능력의 용이한 발달과 여러 학문 분야의 적절한 연구가 확실하게 계획되는데, 이것은 종래의 교육에서는 우연히 머리가 뛰어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장래의 학자를 인간 일반으로 육성하는 교육은 종전과 마찬가지로 국민 교육이 맡아야 하고 국민 교육을 위한 수업에는 장래의 학자도 다른 학생들과 함께 출석해야 하지만, 다른 학생들이 작업을 하는 시간만은 그의 장래의 천직이 특히 요구하는 것을 배우는 수업 시간으로 할당되어야 한다. 차이는 이 정도일 것이다. (장래의 학자는 물론)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농업이나 그 밖의 기계적 기술 및 취급 방법에 대한 지식을 1학년 과정에서 이미 배웠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이러한 지식을 보충해야 할 것이다. 장래의 학자도 다른 학생과 마찬가지로 이미 말한 체육을 면제받지 못한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국가와 국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희망하고 있는 효과가 전도요원(前途遙遠)한 것이라고 하여 국민 교육이라는 이 과제의 파악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의 현재 운명을 초래한 복잡하고 다양한 여러 원인들 중에서 원래부터 정부가 책임을 져야 했던 원인을 가려낸다면, 어느 누구보다도 미래를 투시하고 이를 지배할 의무가 있는 정부가 중대한 시대적 과제에 직면하여 현재의 난국으로부터 빠져나가려고만 하고 미래에 대해서는 현재를 바탕으로 하지 않고 끊임없는 인과(因果)의 줄을 끊어 줄 요행에만 의지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허망한 것이다.
보다 나은 미래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도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의 근거를 미래 발전을 위해 스스로 현재 속에 심어 놓을 수 있는 것 이외의 일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공상가나 할 일이다. 우리를 다스리는 통치자들로 하여금 우리가 서로 생각하는 것처럼 그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더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느끼도록 하라. 그리고 위정자로 하여금 완전히 명백한 교육의 선두에 서게 하라. 그러면 우리는 우리들의 눈앞에서 독일인의 이름에 가해진 치욕을 언젠가 우리들의 기억에서 씻어 줄 사람들이 우리들의 눈앞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들의 감성적 생활의 지속이 방해받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노예 상태에조차도 익숙해지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예 상태에 애착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것이 복종 상태의 최대의 위험이다. 복종 상태는 모든 사람들의 참된 긍지를 마비시키고 게으른 사람들에게 많은 걱정과 많은 자주적 사고를 면제시켜 줌으로써 매우 즐거운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의 동물적 생활은 모든 시대를 통해 동일한 법칙에 따라 영위되며, 이 점에서 모든 시대는 동일하다. 시대의 차이는 오직 오성에 대해서만 존재하며 이러한 개념에 철저한 사람만이 그 시대와 함께 살고 그의 시대에 존재한다. 그렇지 않은 생활은 단지 동물적 생활, 식물적 생활에 지나지 않는다. 일어나는 모든 일을 알지 못하는 채로 그냥 지나가게 하고 그 절박성에 일부러 눈과 귀를 가리며 이러한 경솔함을 대단히 슬기롭다고 자랑하는 것은 파도가 몰아쳐도 느끼지 못하는 바위와 같고 폭풍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이를 알지 못하는 나무와 같으며, 이것은 사고하는 존재에게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보다 높은 사고의 세계로 비상하는 것조차도 자기 시대를 이해해야 한다는 이 일반적 의무를 면제받지는 못한다. 모든 고상한 사상은 그 나름으로 직접적인 현재와 교섭을 가지려고 하며 참으로 고상한 세계에 사는 사람은 동시에 직접적인 현재에 산다. 그가 직접적인 현재에 살지 않는다면 이것은 그가 고상한 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세계를 꿈꾸고 있다는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의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하고, 주의하려는 마음이 생기면 언제나 다른 대상으로 주의를 돌려버리는 것은 우리들의 자주성의 적(敵)이 바라는 것이다. 우리들의 적은 우리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면 마치 생명 없는 도구를 다루듯, 그가 생각하는 모든 일을 익숙하게 일침(一鍼)하기 시작할 것이다.
곧 ① 독일 국민이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독일 국민이 그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본질을 갖고 존속하는 것이 위기에 놓여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아닌가? ② 독일 국민을 유지하는 것이 노력할만한 보람이 있는 일인가? ③ 독일 국민을 유지하는 확실하고 철저한 방법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방법인가?
피고들이 아직 권좌에 있어서 그 권력 행사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길 불행을 방지할 수 있었을 때에 그들이 지금 통찰하고 있는 바를 통찰하고 지금과 마찬가지로 소리 높혀 외쳤더라면, 그들이 당시에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책임 있는 자들을 강력하게 규탄하며 조국을 그들의 수중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사용했는데도 단지 전혀 귀기울이는 사람이 없었을 뿐이라면, 그때 배척받은 경고를 지금 회상하더라도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현재 그들이 그들의 지혜를 단지 결과로부터 이끌어냈다면, - 그 후로는 모든 국민이 이 결과로부터 그들과 같은 지혜를 이끌어냈다 - 이제 와서 그들은 왜 모든 사람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는가? 한편 그들이 이전에는 권좌에 있었으나 지금은 권세를 상실하고 부당한 문책을 받고 있는 계급이나 인물에 대해 당시에는 이기심 때문에 아첨했거나 공포 때문에 침묵한 일이 있었다면 오, 잊지 말라, 앞으로는 우리들의 불행의 원천에 귀족, 무능한 장관 및 장군 이외에 정치 평론가들도 덧붙여진다는 사실을. 일정한 결과를 본 다음에야 그 필연적 원인을 아는 정치 평론가는 민중과 다를 바가 없으며 권력자에게 아첨하고 실각한 자에게는 무자비하게 조소를 퍼붓는 무리에 불과한 것이다!
자각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을 어제를 헛되이 흘려보내고 오늘도 자각을 바라지 않는 자가 내일 자각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늦추면 늦출수록 우리는 더욱더 게을러지고 우리들의 불행한 상태에 익숙해져서 달콤한 꿈에 빠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