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합의 가정을 살려주다
수 6:22-27
22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라 하매
23 정탐한 젊은이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의 부모와 그의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고 또 그의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의 진영 밖에 두고
24 무리가 그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불로 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더라
25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26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
27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
수 6:22-27 /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의 형편을 살피러 온 적이 있었던 정탐꾼 두 사람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전에 약속한대로 몸을 팔아 먹고 사는 여인 라합의 집으로 들어가 그 사람과 그 집안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나오너라.' 23) 그래서 그들은 라합의 집으로 찾아가 라합과 그 아버지와 어머니와 오라비들 그리고 그 집안에 딸려 있는 온갖 것, 또한 그의 가까운 친척들을 모두 다 이끌고 이스라엘 진영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24) 그런 다음 사람들은 그 성읍에 불을 질렀다. 다만 은과 금, 그릇과 쇠그릇만을 가져다가 여호와의 집 곳간에 보관하였다. 25) 이렇게 여리고 성을 모조리 불살랐지만 라합과 그의 집안 사람들과 그들의 재산은 손대지 않았다.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의 형편을 알아보고자 정탐꾼들을 보냈을 때 라합이 그들을 잘 숨겨 주었기 때문에 그 집안 사람들을 잘 보호하라고 일러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라합의 후손들이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살고 있다. 26) 이때 여호수아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였다 `이 여리고 성을 다시 건축하겠다고 나서는 자는 내가 분명히 말해 두지만 여호와의 저주를 받으리라. 집의 기초를 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고 집의 문짝을 달 때에 그의 막내 아들을 잃을 것이다.' 27) 여호와께서는 이렇듯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면서 그를 애지중지하셨다. 그러므로 그의 명성이 온 땅에 자자하게 퍼져 나갔다.
정탐꾼을 살려 주었던 라합과 그 가족들은 약속대로 구원 받았고 하나님은 그 성을 다시 재건하지 못하도록 명령하십니다.
라합에게 속한 모든 것이 구원받음(22-25) 우상 숭배와 온갖 죄악으로 가득한 여리고 성을 멸망시키시는 중에도 구원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기생 라합입니다. 라합이 거룩하고 완전한 의인이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라합이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겨 주었기 때문입니다. 라합은 소문으로 들었던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고 그 믿음으로 정탐꾼들을 숨겨 주어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당하지 않았습니다(히 11:33). 라합의 믿음이 그의 가족과 친족들 그리고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이 멸망에서 벗어나게 하였습니다. 노아도 하나님께 은혜를 입고 방주를 만들어 그의 가족들도 함께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창 6:8, 18). 라합은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자신과 가족이 구원을 얻었습니다(행 16:31). 부활하신 주님도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20:29).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26-27)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다시 건축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맹세합니다. 이 맹세는 가나안 족속의 도시 여리고 성이 맨 처음으로 함락된 것에 대한 상징적인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은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심판하신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 줍니다. 또한 여리고 성이 완전히 파괴된 상태로 내버려 두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고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 성을 다시 건축하거나 다시 요새화하는 것은 여호와의 명령을 어기는 것입니다. 아합 왕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습니다(왕상 16:34).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습니다. 여리고 성을 다시 건축하며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거나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원하십니다.
적용: 믿음의 분량만큼 순종할 수 있고, 순종하는 만큼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기록된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순종할 때 당신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신 행위로 많은 불의한 자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의로운 행동을 보이셨던 예수를 기억하며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드림으로써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설 교 >
여리고의 축복
수 6:22-27 / 김창인 목사(광성교회)
이 시간에는 망한 것을 생각하기보다는 그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축복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더러운 연못에 연꽃이 핀 것처럼 멸망의 와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예를 들면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물로 심판을 하실 때 온 천지가 물 바닷가 되었습니다. 천하에 모든 사람들이 다 죽었지만 노아의 가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축복은 너무 아름답습니다. 선지자 하박국의 말을 빌리면 진노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망할 일만 하는 우리들의 주변에서 이런 축복이 나타났으면 해서 여리고 성에 나타난 하나님의 축복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I. 구원의 축복 (22-25)
22절에서 25절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여자가 생가루 속에 누룩을 조금 갖다 넣었더니 누룩이 발효가 되고 부풀어서 떡을 해 먹기 좋은 재료가 된 것과 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예수님도 모르는 가정에 복음이라고 하는 누룩이 들어가서 한 사람이 예수를 믿기 시작하더니 누룩이 가루반죽을 부풀게 하듯 온 가정이 예수 믿고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빌립보라고 하는 마게도니아, 지금의 그리스의 한 도시를 찾아갔습니다. 그 곳에서 전도하는 중에 점치는 귀신들린 여자를 만났습니다. 점을 치는데 돈을 많이 벌고 있습니다. 귀신의 앞잡이 노릇하고 마귀에게 속한 사람도 돈은 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돈은 벌었다 싶은데 뒤로 다 빠져나갑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벌지 않은 돈은 뒤로 다 빠져나가는 겁니다. 바울이 너무 불상해서 그 귀신을 쫓아내 주니 점을 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여자는 할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주인들이 너무 속상하여 바울을 붙잡고 이웃을 충동질하고 소란을 일으켜 관가에 고소를 합니다. 무수히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바울은 이때 빠져 나올 길이 없습니다.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사방이 막힌 감옥이지만 하늘로 향하는 문만은 열려 있었습니다. 이런 때는 기도하는 길밖에 달리 길이 없습니다. 하늘을 향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는 응답을 받고 찬송을 하는데 문이 열립니다. 착고를 채웠는데 벗겨지고 간수가 놀라 깨어보니 죄수가 모두 도망간 것 같았습니다. 죄수가 도망가면 자기가 대신 징역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살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도망을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당당히 살아나간다고 응답하셨는데 비겁하게 도망가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간수에게 나 여기 있으니 자결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간수는 바울에게 달려와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예수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래서 밤중에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어떻게 감옥에 갇힌 죄수를 데리고 갑니까? 구원의 길이 있는데 무엇이 무섭겠습니까? 복음을 전해 듣고 온 집안식구가 얼마나 기뻐하는지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교회가 그 곳에서 시작됐습니다. 이때 바울은 도망가도 되지만 감옥으로 가자고 하면서 앞장을 섭니다. 아침에 상관들이 와서 바울을 석방합니다. 바울 사도가 당당히 걸어 나갔습니다. 간수 하나가 그 일이 계기가 되어서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계기가 꼭 있습니다. 같을 수는 없지만 간수의 집은 이일이 계기가 되어 예수를 믿기 시작했고 온 가정이 믿었기에 교회가 시작되고 엄청난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나 혼자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고 하는 사실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가족에게서 핍박받고 있는 분들은 염려 걱정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온 가족이 예수 믿게되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천국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은 누룩과 같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집안에서 핍박 받고있는 여러분이 복음의 누룩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나 혼자 예수를 믿기 시작했다고 하는 사실이 이렇게 복된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핍박받고 있는 분들은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문제는 시간문제인데 복음은 반드시 가루 서말 속에 누룩처럼 퍼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정이 다 구원의 반열에 동참할 줄 믿습니다.
본문 25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탐지하려고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었더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까지 인도했고 이제는 여호수아의 인도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복지로 들어가려 합니다. 요단강을 건너가면 조그마한 평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여리고 성이 있습니다. 여리고 성을 점령하지 않고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가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여리고 성에 정탐꾼이 나타났다 하니 관리들이 샅샅이 뒤집니다. 정탐꾼들은 쫓기다가 기생 라합의 집에 뛰어 들었습니다. 라합이 그 정탐들을 숨겨 줍니다. 그리고 정탐들에게 하는 이야기가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분명히 가나안을, 당신들에게 준 줄 내가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들을 인도할 때 홍해를 갈라 육지같이 건널 수 있게 해 주셨고 광야 40년을 기적같이 당신들을 돌보아 주시고 요단강 동편을 점령하게 하신 일도 그리고 요단강을 건널 때의 일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즉 이런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를 나는 믿습니다. 라고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나를 좀 살려주십시오. 라고 라합이 간청을 합니다. 그때 정탐꾼들이 그러면 두 가지 조건이 있는데 "여리고 성이 점령될 때 절대 이 집 문밖을 벗어나지 말라 문밖을 벗어나는 날 절대로 구원을 보장 못한다"고 하여 집을 지정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창문에 붉은 줄을 내리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다 뜻이 있어 그랬습니다.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 하나님의 기적 같은 도움으로 성은 무너지고 불바다가 되고 모든 사람들이 진멸을 당할 때 여호수아가 명령을 내립니다. 기생 라합의 집은 절대로 손을 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기생 라합이 혼자만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 즉 자기의 부모 형제들까지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집에 있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지정해 준 집, 그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죽음을 면하고 삶을 얻고 구원을 얻습니다. 하나님이 정해 준 집이 어딥니까? 바로 하나님의 집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입니다. 이 안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신앙을 지키면 기생처럼 아무리 손가락질 받는 죄인일지라도 구원 얻습니다. 기생은 존경받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멸시를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도 믿고 구원 얻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온 가정을 구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붉은 줄을 달아 내리라고 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혀 붉은 피를 흘리신 보혈의 상징입니다. 기생 라합이 혼자 믿기를 시작하더니 자기 형제가 구원 얻고 부모가 구원 얻고 온 가문이 전부 구원을 얻었습니다. 내가 혼자 믿었다고 하는 사실이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이룩하였습니다. 기생 라합이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윗 왕의 증조 할머니가 됐습니다. 예수의 족보에 들어갔습니다.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믿음으로 구원 얻고 예수의 족보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도 망할 수밖에 없지만 예수 믿고 천국의 족보에 올랐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가족이 다 믿지 않아도 라합처럼 온 가문에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 질 줄로 믿고 힘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여리고 성에 나타난 구원의 축복이 여러분의 가정에도 나타날 것을 확신합니다.
II. 유산의 축복 (26-)
우리가 돈을 벌어서 자손들에게 많은 유산을 주는 것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으로서 믿음은 꼭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주어야 합니다. 믿음을 유산으로 주지 못하면 믿는 사람으로서의 인생은 실패입니다. 이 믿음의 유산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체험하고 그 은혜를 대물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모세는 나일강에 버려지고 공주의 손에 구원을 받아 왕궁에서 40년 동안 잘 지냈습니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왕궁에서 미움을 받고 저 미디안 광야로 망명을 했습니다. 졸지에 망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광야에 모세를 위하여 보금자리를 예비하셨습니다. 장가를 들고 40년 동안 처가의 도움을 보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두셨으면 그렇게 살다가 죽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호렙산 가시떨기 나무가 불이 붙었는데도 꺼지지 않고 가시나무가 타서 없어지지 않습니다. 참 묘하다 싶어서 가 보았습니다. 그 불은 세상 불이 아닙니다. 그때 하나님이 음성으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이제는 처가살이 그만하고 애굽 땅에 들어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어 그들을 이끌고 나오라고 하십니다. 엄청난 사명을 하루아침에 받았습니다. 자기 평생에 두고 잊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평생을 두고 그 은혜를 간직하고 기억하고 기념합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안 땅, 요단 강가에 오기까지 40년의 세월이 흐릅니다.
죽을 때가 되어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축복할 때 특별히 요셉 자손에게 "가시떨기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자의 은혜로 인하여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두고두고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서 여호와의 은혜를 받던 그때 그 은혜를 기억하고 기념하다가 요셉자손에게 그대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유산으로 주는 축복입니다.
본문으로 26절에 여호수아가 그때의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요단강을 여호수아의 인도로 건너기는 하였지만 여리고 성이 버티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뚫고 들어가 승리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명하십니다. 너희들이 일주일동안 여리고 성을 도는데 마지막에 소리를 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소리를 쳤더니 사람의 손은 하나도 대지 아니했지만 보기 좋게 무너졌습니다. 100%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었습니다. 그리고 들어가서 모든 사람을 진멸하고 완전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현장이었고 하나님이 역사 하신 능력으로 진멸하고 완전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축복의 현장이요, 하나님이 역사 하신 능력의 현장이요, 승리의 현장입니다. 승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대로 무너진 여리고 성에 너희들은 손을 대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내신 능력과 축복과 승리의 그 모습을 그대로 자손에게 두고 보게 하라는 겁니다. 만약 그 현장을 훼손하는 자는 성을 쌓을 때 맏아들을 잃어버리고 다 쌓고 문을 세울 때 둘째 아들을 잃어버리고 그 집안은 완전히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아합 임금 때 히엘이라고 하는 사람이 여리고 성을 고쳐 쌓았다가 그 집안이 완전히 망함으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왕상16:34). 하나님의 놀라운 그 권능이 나타난 현장, 축복의 현장, 승리의 현장을 철저하게 보전하여 자손들에게 그대로 유산으로 몰려 주도록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도우셨다, 우리를 이렇게 구원하셨다, 우리에게 이런 능력으로 축복하셨다는 사실을 체험하시고 그 체험을 자자손손에게 유산으로 줄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지 순례를 하면 세 곳은 꼭 가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애굽의 카이로에 가면 인간 역사 5천년의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예루살렘을 비롯해서 성지, 즉 이스라엘 땅에 가게되면 신구약 성경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로마에 가면 원형극장을 보게됩니다. 원형극장은 우리 교회 10배는 되는데 가운데를 지하로 만들어 놓고 칸칸이 막고 위에는 바닥을 깔았습니다. 그 지하에서 사자를 기릅니다. 네로 황제를 비롯해서 못된 자들이 백성들을 모아 놓고 사자를 굶겨 놓았다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사자들의 먹이로 주었습니다. 산 사람을 사자에게 주었습니다. 사자가 사람을 찢어 먹으면 좋다고 아우성 치고, 사람을 산채로 태우면서 타는 불빛 아래서 술을 마시고 잔치를 하곤 하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그렇게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나중에는 승리하고 그 나라가 기독교 국가가 되고 천주교의 본산지가 되었습니다. 그 중심지가 로마입니다. 교황청이 그곳에 있습니다. 그 곳을 그대로 남겨두고 자손들에게 보여 주는 겁니다. 우리 조상들은 믿음을 이렇게 지켰고 승리해서 오늘날 기독교의 본산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겁니다. 또 로마에서 두 번째로는 공동묘지를 보게됩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공동묘지가 아닙니다. 기독교를 박해 하니 지하에 땅굴을 팠습니다. 한군데만 파는 것이 아니라 연결해서 수도 없이 파고 들어가는데 사람이 죽으면 자기들이 숨어있는 땅굴 벽 쪽에 파서 장례를 지내고 또 파고 들어가고 또 파고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늘어나고 또 죽고 하다 보니 수백리를 얼기설기 파고 들어가는 데 그냥 들어가면 찾아 나오지 못합니다. 안내자를 따라서 조금만 돌아보고 나와야 합니다. 지금도 몇 개인지 정확히 모릅니다. 기독교인들이 그 곳에서 300년 동안 숨어서 신앙을 지키고 승리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대로 보전하여 자손들로 하여금 보게 하고 신앙을 지키게 합니다.
오늘날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너희 조상들이 이렇게 믿음 지키고 승리했다는 현장이 바로 공동묘지 즉 카타콤베입니다. 승리의 현장을 잘 보존해서 자손들에게 유산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큰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과 축복의 현장을 자녀들에게 보여주고 믿음을 간직하고 키워줄 수 있는 유산 적인 축복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III. 인물의 축복 (27-)
27절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명성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 여호수아는 처음에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그 이름이 온 땅에 퍼지고 세계적인 인물이 되고 역사적인 인물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사 그를 키워주시고 내세워 주시고 등용해 주셔서 그렇게 된 겁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은 초등학교도 졸업 못한 사람입니다. 유목민의 아들이라 봄철에는 이 들판, 여름철에는 저 들판, 가을철에는 또 다른 들판으로 옮겨다녀야 되는데 무슨 학교를 다닐 수 있습니까? 나이 17살, 우리 나이로는 18살, 형들에 의해서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옷을 벗기고 찢어서 양의 피를 발라 아버지께 보냈기 때문에 옷 한 벌 못 입고 팔려갑니다. 억울하고 말 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이겨냈습니다. 보디발 장군은 요즘으로 말하면 대통령 경호실장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그 집에서 종살이를 하는데 남편은 출근하고 그 집 주모가 요셉을 유혹합니다. 유혹을 받을만한 외로운 처지였습니다. 마귀는 항상 성도의 절실한 점을 통해서 유혹합니다.
시험에 넘어질 수도 있었겠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시험을 이깁니다. 나이 30에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남의 집 종살이하던 사람이 국무총리가 되어서 일을 잘해 아주 명재상이 되었습니다. 역사적인 인물이 되고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성경이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일하게 하시고 이기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시고 복되게 하시니 요셉이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인물이 된 겁니다. 즉 그 당시 요셉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졌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아닌 여호수아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도와주시니 승리하고 성공하고 그 이름이 온 땅에 퍼지는 세계적으로 이름이 나고 역사적으로 이름이 남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의 자손들 중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사 이런 귀한 인물이 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것이 인물의 축복입니다.
여리고가 망하는 중에서도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 구석구석에 나타났습니다. 첫째가 기생 라합과 그 가문의 구원입니다. 분명히 멸망 중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리고 무너진 여리고 성 자체가 승리와 성공의 현장으로 남았습니다. 자손들에게 그 현장을 두고두고 보게 하였습니다. 역사적인 승리였기 때문입니다. 그 현장을 자녀들에게 유산으로 주는 축복이었습니다. 즉 유산의 축복입니다. 그런가 하면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던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의 멸망 중에 높은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즉 인물의 축복입니다. 여리고의 축복이 여러분들의 것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주받은 성, 구원받은 사람들
여호수아 6:22-27
여리고 성이 무너져 내리기 직전에 승리를 선포하기 전에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두 가지를 명령합니다. 17절과 18절의 말씀을 읽어봅시다.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살리라 이는 그가 우리의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니라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함이라 은, 금과 동, 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된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첫 번째 명령은 라합과 그의 가족을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여리고 성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임으로 그 성과 성에 무릇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불살라 죽이고, 금, 은, 동, 철기구들은 여호와의 곳간에 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성 소리와 함께 모래성처럼 힘없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성과 함께 그곳에 살던 모든 사람들은 심판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주받은 성에서 심판을 당하는 사람들 틈에서 라합과 그의 가족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저주받은 성에서 구원받은 사람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공부하려는 주제입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여리고 성
17절 상 반절에 보면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무너져 내린 여리고 성은 하나님께 바쳐져야 했습니다. '바친다'는 뜻의 히브리어는 케렘인데, 일단 케렘이 선포되면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완전히 멸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광물질(금, 은, 동, 철 등)은 여호와의 창고에 들여져야 했습니다. 21절을 봅시다. "성중에 있는 것을 다 멸하되 남녀노유(男女老幼)와 우양(牛羊)과 나귀를 칼날로 멸하니라" 24절도 읽겠습니다. "무리가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 은금과 동철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더라"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가장 곤혹스럽고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바로 성전(聖戰, holy war)에 대한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 주민 전체를 철저하게 멸절(滅絶)시킬 수 있는가?" 또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이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도구가 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떻든 우리로서는 아주 곤란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당시의 역사적인 상황과 연관지어서 깊이 생각해보면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당시 가나안 사람들은 매우 발전된 문화를 이룩하고 있었습니다. 독자적인 언어가 존재했으며, 뛰어난 건축술과 함께, 음악, 그림, 그리고 화려한 종교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40년 동안 문화적으로 무미건조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가나안 사람들의 현란한 문화 생활에 매혹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나안의 문화를 구성하고 있는 기본 요소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 이방종교문화에서부터 나온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랫동안 가나안 사람들이 지켜 온 바알과 아스다롯을 숭배하는 종교의식은 그 사회를 성적으로 윤리적으로 문란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라 철저하게 영적, 도덕적, 윤리적으로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요구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가나안의 문화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첫 성이 여리고 성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순수성과 영적인 가치관을 얼마나 바르게 지키고 사는 것인가?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의 모든 것을 다 멸하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 윤리적 순수성을 유지시키기 위한 극단적인 조치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하고 능력 있게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삶아가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의 요구가 고리타분하게 여겨질 만큼 찬란하고 화려함으로 치장하고 우리들의 거룩성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온전히 지키고 거룩하게 살기에는 손해가 너무 클 것 같아서 하나님과 세상사이에서 끊임없이 긴장하며, 갈등하며 사는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쾌락을 찾고 유흥을 즐기려 합니다. 어제 신문에는 60대 노인이 원조교제라는 것을 한 혐의로 실현을 선고받았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들을 파멸시킬 수 있는 유혹들이 찬란한 네온사인으로 위장한 채 우리를 넘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술 취함과 방탕함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뇌물에 떨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음란의 문화에 노출되어 가정이 파괴되는 아픔을 겪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도박에 빠져있습니다. 마약과 약물에 정신과 육신이 무너져 내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탄이 만들어 놓은 세상문화의 덫은 그리스도인들을 예외로 여기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더 강력하게 그리스도인들을 유혹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원수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후5:8)"라고 경고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리고를 비롯한 가나안 땅의 사람들을 진멸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순수성이 파괴되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의 일관된 주제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는 오늘날도 한결같습니다. 그러면 타락한 세상 문화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영적 가치관을 확고히 다져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하는 영적 가치관을 온전히 세울 때, 우리는 타락한 세상 문화에 의해서 넘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타락한 바벨론의 문화를 거부하고 당당하게 하나님 신앙을 지킨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우상의 제물과 술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지 않겠다고 "뜻을 정하고" 그들과 맞서서 싸웠습니다. 금 신상을 세워놓고 절하라는 왕의 명령 앞에서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도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라고 하나님 중심의 영적 가치관으로 무장된 신앙을 고백하였습니다. 다니엘도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음모를 알면서도 하나님께 드리던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영적 가치관이 흔들리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세상의 문화에 무릎 꿇지 않도록 도우셨고, 그 신앙과 삶이 빛나게 하셨습니다. (위폐 선별교육 - 진폐만 보여준다)
다음은 주변에서 우리를 넘어지게 할 수 있는 타락한 문화를 없애는 것입니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입니다. 어떤 환경에서 자라느냐에 따라 그의 성격이나 삶의 가치관이 정해집니다. 사람들은 익숙한 문화가 편리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타락한 문화 속에 젖어 사는 사람들은 그 외의 것에서 기쁨이나 만족을 누릴 수 없습니다. 모든 타락은 아주 작게 그리고 표시 나지 않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환경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비근한 예가 마약입니다. 처음에는 돈도 받지 않고 공짜로 가져다주면서 유혹합니다. 그러다가 한번 두번, 빠져들면서 파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술, 담배, 그 외에 음란 등 우리를 타락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100% 그렇게 시작되어 발전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주변에 우리를 넘어지게 만드는 요소들을 차단하고 없애야 합니다.
더 적극적인 방법은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우리를 넘어지게 만드는 요소들을 차단하는 것은 아주 소극적인 방법입니다. 귀를 막고 살수 없고, 눈을 감고 살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방 신의 문화,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의 문화를 하나님의 문화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앙으로 복음으로 이 세상에 거룩한 문화를 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어디에서나 우리 자녀들이 마음놓고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나 찬송이 들려지고, 세상 어디에서든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영적인 공간이 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우리 부모 세대들이 자녀들에게 물려줄 유산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세상의 문화를 거룩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삶이 복음의 능력으로 충만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렇게 산다"라고 하는 선언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선배들, 즉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은 말 그대로 움직이는 가치관이었습니다. 윤리와 도덕의 표준이었고, 진정한 믿음의 실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가는 곳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람이 변하고 지역이 변했습니다. 술 취함과 방탕함이 우상숭배가 떠나갔습니다. 죄악이 사라졌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 나타난 복음의 능력으로 타락한 세상 문화를 거룩하게 변화시키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서 타락한 문화가 다시는 재건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26절입니다.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
히브리말로 '여리고'라는 말의 의미는 향기의 도시 혹은 종려나무의 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화려함 속에는 타락한 바알의 문화가 숨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성을 무너뜨린 다음에 다시는 이 성을 재건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그 저주는 이것입니다. "기초를 쌓을 때,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 막내아들을 잃을 것이라" 실제로 열왕기상 16:34 아합 왕 시대에 '벧엘'의 '히엘'이라는 사람이 여리고를 요새화 시키려고 건축할 때에 그 성의 기초를 놓으면서 장자인 '아비람'을 잃었고, 성문을 달면서 막내아들 '스굽'을 잃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재건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선언하신 이유는 무너진 성을 바라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승리의 확신을 주변의 이방 국가들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갖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그 성이 다시 요새화 되어서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는 것을 방지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섭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무너진 여리고를 보면서 죄의 습성들, 우리를 타락하게 만드는 요소들은 우리 주변에서 영원히 물리쳐야 할 것임을 기억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삶의 주변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축복을 세상의 타락한 문화와 바꾸려다가 비참하게 되는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보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서 자신 속에 있는 타락한 본성을 회개하고 다시는 우리 주변에서 이러한 죄악이 우리에게 침범하지 못하도록 다짐하고 경성하는 계기를 삼아 날마다 은혜와 기쁨의 삶을 사는 주의 종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저주받은 성에서도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25절입니다.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음으로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탐지하러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었더라"
저주받은 여리고 성은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케렘이 선포된 여리고 성의 모든 생명 있는 것을 완전히 멸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라합과 그의 가족이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의 기생이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창녀였습니다. 몸을 팔아 가족들을 먹여 살리던 라합은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여리고에 들어왔을 때, 그들을 숨겨주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성을 정복할 때에, 자신과 가족들을 구원해 줄 것을 약속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라합은 비록 하나님께서 증오하시는 창녀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은 그녀의 믿음을 귀하게 보시고 그를 구원하셨습니다. 한 도시, 한 나라 백성 모두가 심판을 받아 죽어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항상 신실한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땅에서도 하나님은 롯을 구원하셨습니다. 아합 왕 시대에 엘리야 선지자는 홀로 고독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나중에는 너무 힘들어서 자기 홀로 이러한 짐을 맡고 있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불평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아합 왕에게 아부하면서 목숨을 부지하는데, 왜 자신만이 이 고독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불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꿇지 아니한 사람 칠 천명을 남겨두었다"(롬11:3-4)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남은 백성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모두가 타락하고 세상의 모든 문화가 더렵혀졌다고, 또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가 희망이 없어 보인다고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바르게 서고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바르게 일어서 있으면, 절대로 희망은 꺾이지 않는 것입니다. 모두가 타락한 여리고 성에서 홀로 믿음 지키고 살았던 라합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당당히 기록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악한 사탄의 영이 세상의 문화를 지배하면서 많은 영혼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두신 것은 타락한 세상문화를 복음으로 새롭게 하고 그곳에 하나님의 거룩한 문화를 세우게 하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신앙 인격과 온전한 영적 가치관으로 무장하고 세상 구석구석을 거룩하게 만들어 가는 능력 있는 주의 종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너희는 이렇게 축복하라
민 6:22-27
복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동양에서는 다섯 가지의 오복(五福)을 말해 왔다. 수(壽)·부(富)·강녕(康寧)·유호덕(攸好德)·고종명(考終命)이 그것이다. 부하게 장수하며 건강하게 지내며 이웃에 덕을 세우고 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평안하게 생을 마치는 것을 말한다. 중국의 <서경>에 실린 내용이라고 전해진다.
성경에서도 복에 대한 언급이 많다. 창세기 1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라는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만드신 것 자체가 복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시며 또 말씀하셨다. “생육하라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고 하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범죄하고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생명의 구주로 영접함으로 이 땅에서부터 천국 백성의 은혜와 평강을 누릴 뿐만 아니라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하는 권세를 누리게 된다.
유명한 외과의사 선생님과 목사님이 아래 이웃집에 살고 있었다. 의사는 잔디밭과 수영장이 있는 대궐 같은 집에서 살았다. 여러 명의 남녀 관리인이 집 안팎의 살림을 맡아 하였다. 목사님은 가난하여 단칸방에서 5남매와 함께 어렵게 살고 있었다.그런데 외과의사는 물질, 명성, 지위를 가지고 있었으나 아내와의 사이가 나빠서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는 소리가 요란하였다. 주인 내외가 싸우면 마당에 있던 개까지 덩달아 짖다 보니 사람소리와 개 소리가 뒤 섞여 들렸다. 그와 반면 목사님의 식구들은 가난하지만 늘 찬송과 기도로 시작해서 즐겁게 살고 있었다. 어느 날은 외과의사가 목사님을 만나서 물었다. “우리는 목사님 가정보다 부유하고 이렇게 넓고 좋은 집에 살고 있지만 화목하지를 못한데 목사님 가정은 가난하게 살지만 화목하면서 즐겁게 사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목사님 대답하였다. “나와 우리 가족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이 주시는 복으로 살기 때문에 기쁨과 평안이 넘칩니다.”고 대답해 주었다. 시간이 흐르며 그 외과 의사 부부도 예수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의 가치를 깨닫고 전도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인생은 선택이다. 우리는 날마다 매 순간마다 그 무엇인가를 선택하며 살아간다. 하나님은 각 사람 앞에 생명(生命)과 사망(死亡) 그리고 복(福)과 화(禍)를 두셨다. 그것들 중에 사망이 아닌 생명을 선택하고 화가 아닌 복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복된 인생의 길이다.
신명기 30장에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정하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이 땅에서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며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에서 복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다.
그러나
만일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우상에게 절하고 다른 신을 섬기면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하나님을 떠나면 요단을 건너갈지라도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은 그를 믿는 자의 생명이시며 이 땅에서도 오래 살며 장수하게 해 주실 것이시니 여호와께서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네가 거주하리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사망을 버리고 생명을 택하고, 화와 저주를 버리고 복을 택하며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돌과 나무를 깎아 만들고 금과 은을 녹여 부어 만든 우상 앞에 절하면서도 출세하고 성공하고 자녀가 잘되고 부귀공명을 누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나님만 믿어야 한다는 말이냐”
예수님의 비유 중에 부자와 나사로를 보라. 그 나중에 어떻게 되었는가. 그 비유 속에 나오는 부자는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고 잘 먹고 잘 입고 떵떵거리며 살았기 때문에 지옥에 간 것이 아니지 않나. 또한 그 비유 속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 너무 불쌍하게 살았기 때문에 주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셔서 천국에 간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럼 복이 무엇인가.
복 중의 복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거듭나고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상급으로 받은 백성답게 이 세상의 나그네 인생길에서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명을 갖고 청지기의 삶을 살며 전도자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에 산상수훈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처럼 밤낮 염려하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라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고 하셨다.
어느 교회 30대 젊은 의사의 간증을 보았다. 그는 의사는 부업이고 하나님의 일 하는 것이 본업이라고 했다. 시간마다 예배드리고, 하나님께 헌신하고 충성하고 선교와 교육과 봉사와 구제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의사로 일하며 사는 이유라고 했다.
과자 좋아하는 이들은 미국의 크래프트 과자 회사를 안다. 우리들 가운데 ‘크레프트 오레오 쵸코 과자’를 단 한 번도 안 먹어 본 분은 단 한 사람도 없을 정도이다. CRAFT FOOD COMPANY의 설립자인 제임스 크래프트(James L. Craft)는 “나는 미국에서 가장 큰 과자 회사의 사장이 되는 것 보다 내가 다니는 시카고 노스쇼 교회의 집사로 충성하는 것이 더 기쁘고 감사하고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무엇이 복인가. 성경이 교훈하는 복은 크게 2가지이다.
그 첫째는 죄 사함 받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나그네 인생길인 이 땅에서도 복되게 살아가는 것이다.
430년 동안의 애굽에서의 종살이를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육지처럼 건넜다. 하나님께서 모세 시대에 모세를 앞장세우셔서 이룩하신 기적이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백성들의 광야 생활 중심에 성막을 건설하게 하셨다. 민수기는 출애굽한 지 둘째 해 둘째 달 첫째 날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신 말씀으로부터 시작된다. 각 지파의 20살 이상 된 남자의 수를 계수하였다. 60만 3550명이었다. 레위 지파의 태어난 지 한 달 된 남자 아이로부터 남자의 수를 계수하였다. 22,000명이었다. 레위 사람들 중에서 성막에서 섬길 30살 이상 50살까지의 남자를 계수하니 8,580명이었다.
하나님은 나실인으로 살아갈 자들의 태도에 대하여도 자세하게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어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이 본문이다.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전달해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라.”고 명령하셨다.
24절부터 26절까지를 다 같이 읽어 보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그러면 축복의 내용을 차례대로 좀 더 자세하게 묵상해 보자. 지키시고 은혜 베푸시고 평강 주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다. 세 문장의 앞부분에 세 번 반복하여 “여호와는”이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은 구약시대이기는 하지만 마치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듯한 형식을 갖고 있다. 세 문장의 이 아름다운 축복의 내용은 이 땅에서의 일반적인 주의 복과 죄 사함과 구속의 은혜의 복과 주님과 동행하는 영광스러운 평강의 복을 소원하라고 했다. 이러한 축복의 소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시는지를 절절이 느끼게 한다.
지키시는 하나님.
여호와는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여기서 ‘복’이란 ‘베라카’는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되는 온갖 좋은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영육간에 누리는 현세적이고 구체적이며 또한 영적인 면의 전인격적이고 총체적인 모든 복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나. 육신의 부모라도 자식에게 온갖 좋은 것을 해 주고 싶어 하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모든 필요한 복을 풍성하고 넘치고 온전하게 공급하기를 원하시는 아버지이시다. 그 하나님이 나를, 우리를 지켜 주시도록 복을 빌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을 악과 불의와 사탄의 간계함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지키시는 전능자이시다.
옛날이나 오늘 날이나 얼마나 위험한 일도 많고 무서운 일도 많고 두려운 일도 많이 일어나는가. 심지어는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까지도 뱀의 유혹 앞에 무너지지 않았는가. 우리가 신학교 1학년 때 교수에게 많이 질문한 것이 그런 내용이다.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뱀을 창조하지 않으셨다면 아담과 하와에게 그런 불행이 찾아 오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여러분도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지으실 때에 어둠과 죄와 악이 없는 세상을 만드셨다면 인간이 사탄의 유혹과 공격을 받지 않고 살 수 있지 않았겠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이 세상을 보라. 밤이 있고 낮이 있다. 어둠이 있고 빛이 있다. 선이 있고 악이 있다. 공의가 있고 불의가 있다. 이 세상의 창조는 그렇게 되어 있다. 그것들 중에서 빛과 선과 진리와 공의를 택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요즘의 세상을 보라. 세계 처처에서 전쟁과 테러와 사고와 사건과 전염병을 비롯한 각종 질병과 지진과 쓰나미와 가뭄과 홍수와 같은 자연 재해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 세상에는 악이 부글부글 끓는 것과 같은 악의 도가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한 순간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입의 말과 발걸음 하나하나를 지켜 주지 않으시면 마음 편하게 살 수 없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각 사람을 지켜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 여기 지키신다는 ‘솨마르’라는 말은 ‘가시 울타리로 치다. 온갖 주의를 기울여 신중하게 보존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택한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10:30)라고 말씀하셨다.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의 손길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한 앗시리온에 팔려 가는 두 마리의 참새의 운명을 비교해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그 많은 참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 받음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임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요즘처럼 불안한 사건들과 우울한 일들이 많은 세상에서 절망으로부터 소망으로 나를 지켜 주시고, 의심으로부터 믿음과 신뢰로 나를 지켜 주시며,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으로부터 평강으로 나를 지켜 주시고 시기와 질투와 미움으로부터 나를 사랑으로 지켜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 험한 세상에서 우리 각 사람을 지키시되 죄악에서 보존하여 구원 받게 하시고 사망으로부터 건지셔서 영생하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보내 주신 사랑의 아버지이시다.
생각하여 보라.
죄와 악에서 지키시고, 굶주린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사탄의 사망 권세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지키시고 건지셔서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으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구원의 은총인가.
이 험한 세상에서 물과 불로부터 지켜 주시고, 하늘과 바다와 땅에서 총알처럼 빠르게 오고 가는 그 모든 세상살이 중에서 순간마다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매 순간마다, 날마다 진심으로 감사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질병으로부터 건지셔서 어제 세상을 떠난 이들이 그렇게도 더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란 시간을 오늘의 시간으로, 지금의 시간으로 지키고 인도하셔서 누리며 살게 하시니 감사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성도들은 지금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삶에 잇대어 살아 갈 줄 아는 그런 시간관과 그런 인생관을 갖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그런 의연한 모습으로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을 쓴 잔으로 받아들이시지 않았나.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신앙은 헛것이다.
오늘은 예수 승천 기념 주일이다. 사도행전 1장에 소개된 예수님의 승천을 믿으라. 예수께서 승천하시며 말씀하신 재림의 약속도 믿으라. 그것이 나를 지키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살아가는 자녀들의 모습이다.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뒤 돌아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은혜 중의 최고의 은혜는 나 같은 죄인이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예배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여기 은혜라는 ‘하난’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돌아보기 위해 상체를 구푸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지 않은가. “지금까지 지내 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이런 찬송을 송구영신예배 때에 한 번 부르고 일 년 내내 더 이상 부르지 않고 살지는 않는가.
은혜로다 주와 함께 거함이 은혜로다
은혜로다 주와 함께 거함이 은혜로다
주가 계신 지성소에서 주를 찬송함이
내 영혼에 부어주신 주의 큰 은혜로다
우리가 한 동안 이 찬양을 얼마나 자주 부르며 지내 왔나.
야곱은 아버지 이삭도 속이고 형 에서도 속이며 장자의 명분과 축복에 대한 집착을 갖고 앞만 보고 달려갔다. 그런 그가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서 거기서 장가들고 거기서 아들딸 낳고 거기서 빈털터리가 산허리를 덮는 어머 어마한 양떼와 염소 떼와 소와 약대를 거느리는 대 족장이 되었다.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는데 앞 서 보낸 자들이 달려 와서 소식을 전했다. 형 에서가 400명의 무장한 이들을 앞장세우고 주인 야곱을 죽이려고 한다는 전갈이었다. 그런 지경에서 야곱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은혜를 베풀러 달라고 기도하였다. 야복 강가에서 혼자 남아 밤 새도록 기도하였다. 창세기 32장과 33장에 보면 그 때에 야곱이 가장 많이 언급한 단어가 ‘은혜’이다. 은혜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비추셔서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셔서 이 땅의 식물과 동물과 인생이 산다. 낮의 해와 밤의 달과 그 수많은 별들 가운데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와 그 베푸시는 은혜를 간절히 의지하며 살아 갈 줄 알아야 한다.
내 힘으로, 내 지식으로, 내 경험으로, 내 능력으로, 내 역량으로, 내 수단과 내 방법으로 세상을 이기며 산다고 말하면 안 된다. 겸손해야 한다. 주님이 내 호흡과 맥박을 주관하신다. 주님이 내 손의 맥을 풀어 버리시면 순간 아무것도 아니다.
심근경색이나 호흡 장애를 겪어 보신 분들이 있는가. 심장, 신장, 간, 폐, 위장, 소장, 대장, 췌장 등등 그 모든 것 어느 하나라도 병들고 상하고 약해지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나.
638장 찬송의 가사가 본문 민수기 6장 24절부터 나오는 모세의 축복의 가사이다. 이런 찬송을 예배 시간에 어쩌다 부르고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살면 되겠는가. 그 찬송의 가사에 보면 “......주의 은혜 주의 은혜 그 크신 주의 은혜 내게 있으라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이라고 아멘이 7번이나 반복된다. 그렇다. 주의 은혜가 내게 베풀어지기를 소원하는 우리의 간구는 아멘이고 또 아멘이고 아멘이고 또 아멘이다. 우리는 그 어느 누구이든 여호와의 은혜를 덧입고 살아 왔고 앞으로도 주의 그런 은혜를 덧입고 살아갈 것이다.
지난 5월 24일에 대통령에 당선된 레닌 모레노(Lenín Moreno, 1953-)는 에콰도르의 첫 장애인 대통령이다. 1998년 1월, 식료품점 주차장에서 차와 돈을 요구하는 2명의 강도에게 지갑과 차 열쇠를 주고 돌아서는 순간에 강도가 쏜 총탄에 허리를 다쳐 하반신이 마비됐다. 총격 후 극심한 육체적 고통과 심리적 상실감을 겪던 그는 가족들의 헌신적인 웃음 치료법 덕에 4년 만에 휠체어를 타고 세상과 사람들 앞에 다시 나섰다. 웃음 치료법의 효험을 경험한 그는 '에벤타'라는 재단을 설립하고 책을 펴내는 등 웃음 전도사로 활약했다. 모레노는 장애인 권익 신장을 위해 일한 공로로 2012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는 부통령과 유엔 특사를 거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렇지 않나. 한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다가 보면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만날 는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그 얼굴을 비추어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호렙 산에서 양떼를 이끌던 나이 80세 된 모세가 애굽의 바로 임금을 만나고 동족을 이끌고 홍해를 육지처럼 건널 수 있었겠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전쟁도 벌이지 않고 어떻게 여리고 성이 무너졌겠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렇게 도망 다니고 숨어 다니던 다윗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될 수 있었겠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모압의 과부 룻이 베들레헴의 대 지주 보아스의 아내가 될 수 있었겠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사렛의 동정녀 마리아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낳아 기를 수 있었겠나. 여러분은 어떤가. 나는 어떤가 말이다. 내게 있어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란 어떤 것인가.
평강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이 얼굴을 비추시고 얼굴을 돌이켜 향하여 드신 다는 표현이 시적이지 않나. 하나님께 얼굴이 있으신가. 아니다. 그러면 무슨 말인가. 평강이란 ‘샬롬’이다. ‘온전, 완전, 평안, 우정, 건강, 번영’등을 의미하는 복합적인 뜻을 담고 있다. 거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평화’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최고의 선이며 절대적인 평강이다. 시편 4편 6절 이하에 보면 다윗도 그런 기도를 드렸다.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시4:6-8)
하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들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이 땅에 죄와 사망을 해결한 완전하고 영원한 평강을 선물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 자신과 주변을 둘러보라. 예수님 모시고 살아가는 인생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평강을 말이다. 예수께서는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골로새서에 보면,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1:20)
평강이 어디서 오나. 성도가 하나님 안에서 주어진 사명을 다할 때에 그 마음에 주어지는 선물이 평강이다. <영광>(GLORY)이란 영화로도 만들어진 미국 남북전쟁 당시의 실화가 있다. 미국 군대 최초의 흑인 부대였던 매사추세츠 제 54연대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 당시에 연대장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하였다. “오 주여 내일 우리가 죽는다면 우리 후손들이 딛고 일어설만한 바위가 되게 해 주소서.” 이런 마음가짐과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죽음도 두렵지 않다. 죽음의 순간 앞에서도 그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으로 가득 찰 수 있다.
불평과 원망을 그치고 주 안에서 절대 감사하며 살아가는 자에게 이런 평강이 임한다.
환경과 자신의 절망을 딛고 주 안에서 산 소망을 갖고 살아가는 이에게 이런 평강이 임한다.
미움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이기며 살아가는 이의 마음속에 이런 평강이 자리 잡게 된다.
라바이 러브맨이 쓴 <마음의 평화>라는 책이 있다. 그 책의 내용은 우리 인간이 건강과 돈과 아름다움과 재주와 지위와 모든 공명을 다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 마음에 평화가 없게 되면 모두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돈도 없고 명예도 없고 집 한 칸 없이 모든 것이 없다 할지라도 내 마음에 평화가 있다면 그것이 곧 축복 받는 사람이라고 했다.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는 원래 귀족 출신이었다. 그는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그러나 그는 인생의 참 만족을 얻지 못했고, 작품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에게 갈채를 받았으나 죄에 대한 공포와 불안한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가 한적한 시골 길을 걸어가던 중에 순박한 시골 농부를 만나게 되었다. 그 시골 농부의 얼굴은 유난히도 평화로워 보였다. 톨스토이는 농부에게 가서 평화로운 삶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농부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이죠. 그래서 내 마음은 기쁨이 가득 차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 말을 들은 톨스토이는 그날부터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 후 그의 마음속에 들어차 있던 죄에 대한 불안과 공포는 사라져 버렸다. 작곡가 하이든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작성한 50항목에 이르는 긴 유서의 한 구절을 보면 이렇게 썼다. “나는 나의 영혼을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과 자비와 평강에 맡깁니다.”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84세로 죽기 직전까지도 왕성하게 활동 했다.그는 건강비법을 묻는 사람들에게 항상 “적당한 운동, 적당한 음식, 신선한 공기 그리고 마음의 평화인데 그중에 제일은 마음의 평화”라고 대답 했다.
성 프란체스코는 어느 날 우물에서 물 긷는 여인을 관찰했다. 물통에 물을 가득 담은 뒤 작은 나뭇조각을 물위에 띄우고 어깨에 메고 가는 것이었다.“왜 물 항아리에 나뭇조각을 띄우고 갑니까?” 그녀는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군요? 항아리가 흔들려도 물이 넘치지 않게 하려는 것이죠.”라고 대답 했다.프란체스코는 “화와 분노가 일어날 때, 마음의 평안이 금이 가고 깨어질 때,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띄우면 되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분노와 갈등, 마음의 동요가 일어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과 인내를 생각하면 마음속에 평강이 찾아온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군천사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 중에 평화로다”라고 노래했다. 예수님은 평화의 터전을 이루려 십자가 위에서 화목제물이 되셨다. 우리는 부활 승천하신 주님, 다시 오실 재림 약속의 주님 안에서 그 얼굴을 나에게 향하여 드시는 여호와의 평강을 덧입고 누리며 증거하면서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멸시에서 존귀로
여호수아 6:22-27 / 322장(통395)
올해 2월에 JTBC에서 “이영돈 PD가 간다”<대한민국 10대 점술가를 찾아라> 편이 방송되었다. 이를 제작하기 위해 제작진은 무려 복채로 1,000만원을 썼다고 한다. 역술인들의 복채는 정가가 정해져 있지는 않지만 보통 방문 상담은 5만원에서 많게는 10만원까지 받는다고 한다. 제작진이 만난 역술인(무속인 포함)은 어림잡아 100명 정도 될 것이다. 첫 번째 테스트는 91년 실종되어 사망한 이형오군, 연쇄살인마 유영철, 산수유 천호식품 김영식 회장이다. 이들의 사주를 들고 전국 유명하다는 점쟁이를 수소문 끝에 찾아가 사주 감성을 해보니 수 많은 역술인과 무속인들 중 위의 3명의 사주를 똑바로 짚어내는 역술인(무속인)은 단 6인 뿐이었다고 한다. 10명을 채우려고 했으나 채우지 못하였다고 한다. 2차 테스트는 이영돈 PD 본인의 사주와 한 노숙자의 사주였는데 이 노숙자를 제작진의 카메라맨으로 위장을 시켜 이들 6인에게 감정을 받게 한 결과 이를 통과한 이는 단 2명뿐이었다고 한다. 이 프로를 통해 국민들이 역술인(무속인)들의 실체를 확인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국민들은 실력있는 점술가를 찾아 헤매고 있다. 현재 전국에 간판을 내걸고 영업을 하는 역술인과 무속인은 대략 50만 명 정도가 되고 이 시장의 규모가 4조원 가까이 된다고 한다. 국민의 1%가 역술인인 것이다. 이는 많은 국민들이 이들을 찾아다니며 복채를 내고 점을 보고 있다는 증거다. 첨단과학 문명의 세계가 되어도 점술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역술가에 의하면 사람마다 자신의 힘을 초월하는 천운(길흉화복을 조절하는 힘)이 있다고 한다. 천운은 사람마다 다른데 그 사람이 태어날 때 정해진다고 한다. 천운을 알 수 있는 방법은 그 사람이 태어난 생년, 생월, 생일, 생시, 즉 사주(四柱) 여덟 자(팔자, 八字)를 통해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점술은 아직도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개인적으로는 직업, 취업, 이사, 결혼, 출생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주며, 국가적으로 큰일을 결정할 때 역술인들의 도움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분야의 전문가들은 사주풀이의 신뢰도에 회의를 표시한다. ①사주 자체가 갖는 근원적 한계 때문이다. 사망자를 배제하더라도 지구상에는 최소한 70억 이상이 존재하기에 70억 이상의 운명이 제시되어야 한다. 사주로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는 51만8430가지, 남녀 구분해도 100만개의 사주뿐이다. 명리학 서적들에서 제시된 사주는 1000가지가 안되고, 대부분이 500-10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현대인의 운명을 제대로 알아내지 못한다. ②동일한 사주를 가진 사람이 동일한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전문 역술인들 가운데는 이 사주풀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술인들의 사주풀이를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자신을 사주풀이에 맞추어 산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고 생각하고 사는데, 실상은 잘못된 사주 풀이에 자신의 운명을 맞추어 사는 것이다. 그럼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1. 우리의 내일은 결정되지 않았다.
라합은 매춘부로 인생을 마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인생은 매춘부로 끝나지 않았다. 성경은 우리의 운명은 결정되지 않았고, 그 결정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의 태도에 따라 바뀔 수 있다고 말한다(신30:19-20, 삼상2:30)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렘18:7-10) 우리의 내일은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나의 태도에 달려있지 팔자에 달려있지 않다. 하나님이 정해놓은 인간의 운명은 조화와 풍요와 존귀와 사명의 삶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오만과 불순종으로 깨어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찾아온 부조화와 빈곤과 억압과 멸시와 삶의 무의미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다(눅4:18).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어 하나님이 본래 허락하신 조화와 풍요와 존귀와 사명 있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후5:17). 우리의 오늘과 내일의 운명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갖고 사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내가 태어난 사주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 내 미래를 사주나 운수에 맡기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에 맡기십시다(시127:1, 잠3:5-6).
2. 내 운명을 바꾸는 확실한 길이 있다.
라합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면 계속해서 매춘부로 살았을 것이고, 여리고성이 멸망할 때 함께 멸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 사실을 그대로 믿고(수2:9-12),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보호하고 돕는 하나님의 선한 일에 동참했다. 그 결과 여리고성이 점령될 때 자신과 가족과 친족을 구원하였다(수6:22-25). 라합은 후에 보아스의 어머니가 되어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고(마1:5). 믿음의 위인 중 한 사람이 되었다(히11:31). 이승만 정권 때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백낙준박사의 아버지는 맹인으로 점을 쳐서 가족을 부양했다. 그러나 백낙준박사의 아버지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를 다녀 자신과 자신의 아들의 운명을 바꾸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복음은 개인의 운명만이 아니라 가문의 운명과 민족 운명을 바꾼다. 오늘도 이 능력은 동일하게 역사한다.
1)라합은 허탄한 것들을 의지하지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자신의 전 존재를 걸었다. 라합이 허탄한 것들을 의지하며 살 때는 매춘부였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자신의 운명을 맡겼더니 자신과 가족을 멸망에서 건지고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다. 신실하신 하나님 말씀에 운명을 맡기는 자는 오늘 이 땅의 운명과 내 생의 운명을 바꾼다. 여러분! 허탄한 것과 곧 썩을 것과 더러워질 것과 쇠할 것들에 내 운명을 맡기지 말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항상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내 운명을 맡기라(벧전1:4,23-25).
2)라합은 믿음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일에 자신과 가족의 운명을 걸었다. 라합은 자신의 민족을 배신하고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주고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일은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라합은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전적으로 동참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목숨을 걸고 적극적으로 동참한 라합과 그의 가족을 구원하였다(수6:25). 하나님은 구원사역에 헌신하는 자를 반드시 기억하시고 복 주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신 가장 큰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선한 일에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동참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망한 이유는 자신의 안일과 부귀를 위해 하나님의 선한 일에 동참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다윗이 복을 받고 존귀함을 입게 된 이유는 하나님의 선한 일에 목숨을 걸고 동참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아브라함과 라합과 다윗과 사도들처럼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해 목숨을 걸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베드로가 복을 받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떠밀려서라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한 일에 참여하기만 해도 이 땅과 내 생의 운명이 달라진다.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선한 일에 자신을 드리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 오늘도 라합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선한 일에 힘써 동참하는 삶을 택하면 멸시받던 삶에서 존귀한 삶으로 바뀐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말씀
여호수아 6장 15- 27절 — 도상원 목사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세 가지 점에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방식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전리품을 취하지 말라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무너진 터 위에 다시 집을 짓지 말라는 의미에 대해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6절 말씀에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일곱째 날에 성을 일곱 번 돌고 나팔을 불 때 사람들로 하여금 외치게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성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외침으로 성벽이 무너지고 백성들이 그 성에 들어가 점령하게 됩니다(20절).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문제를 여리고 성이라고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참 이상한 방법으로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당시 군대들도 쉽게 점령할 수 없었던 여리고 성, 요새와 같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는데 왜 일곱 바퀴를 돌게 하셨을까? 또 일곱 번째 날에 소리를 지르게 해서 성을 무너뜨리셨을까? 아무리 여호수아고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지만 그것에 동의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렇게 단단한 성을 일곱 번 돌게 해서 무너뜨리는 과정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이 전쟁은 이스라엘의 전략이나 군사들의 병력에 의해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말도 안되는 일을 하게 하심으로 이 전쟁은 온전히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가르쳐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일곱’ 이란 하나님의 숫자입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안식일은 일곱 번째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쉬셨던 날입니다. 하나님의 날을 거룩히 지킬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루 더 일하면 일한 것 만큼 수익을 얻게 됩니다.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매일 문을 열고 일을 하면 더 많은 수익을 얻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칠일째 되는 날에는 나도 쉬었으니 너희들도 쉬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드러내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역사하시는데, 그것이 완전 수인 일곱이라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일곱 번째 날, 여리고 성을 일곱 번 돌고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자 성이 무너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여리고 성을 돌아본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제가 이전에 목회했던 곳에 처음 부임했을 때 어렵고 힘든 문제들이 많았는데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도저히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교회를 일곱 번 돌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인들의 마음 속에 있는 강력한 진을 무너뜨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둠에 붙들려 있어. 이 교회는 안되는 교회야. 이 문제에서 결코 자유할 수 없을 거야’ 라는 생각들이 강력한 진을 이루어 우리를 얽어매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통과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교회를 얼마나 돌았는지 모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이루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안된다고 생각하고 이것은 끝난 일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께서 하시면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이 생기기 시작하니까 사람들의 얼굴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희망이 생기기 시작하니까 사람들의 삶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하니까 하나님께서 역사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정말로 소망을 가지기 시작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원하십니다. 순종이 필요합니다. 우리 생각에는 말이 안되는 것 같을 때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새벽기도를 드리는 것도 어떻게 생각하면 왜 잠도 못자고 이렇게 와서 기도를 해야 하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낮이나 다른 시간에 기도해도 되지 않는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 하나님께 하루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것을 봅니다. 이제껏 한국교회에 역사를 이루어 오셨고 갈보리교회에도 새벽기도가 살아 있고 기도가 살아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셨습니다. 작전을 짜고 계획을 짜고 인간적으로 해결하려고 했을 때는 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온전히 의지하게 될 때에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역사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두번째 생각해 볼 것 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하나님께서 주신 경고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곳의 물건들에 손을 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물건들을 여호와의 곡식 창고에 모아두라고 하십니다. 특별히 은금과 동철 기구들, 좋은 무기들은 건드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앞으로 더 있을 싸움, 가나안 정복 때 이 무기들을 유용하게 쓸 수 있고 은과 금이 얼마나 귀중한데 왜 그것에 손을 못 대게 하셨을까요? 이 말씀을 묵상하게 되면 깊은 지혜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승리하고 난 다음이 훨씬 더 큰 위험하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뭔가 잘 됐다 싶고 성공했다고 생각될 때, 그 이후가 훨씬 더 어렵습니다. 성을 점령하기는 쉽지만 성을 지키는 것은 훨씬 더 어렵습니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은 쉽지만 그 기도를 통하여 역사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마음을 가난한 채로 유지하며 하나님께서 다 하셨고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고 겸손히 내려놓는 것은 훨씬 어렵습니다. 내가 가진 것들로 충분히 먹고 살만 하고 모든 것이 풀리게 되면 놀랍게도 그 재물들은 우리의 영혼을 갉아 먹습니다. 내 힘으로 다 될 것 같은 거에요. 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면에서 사라지시고 오로지 내 능력만 보이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아마 이것을 교훈으로 주시려고 하신 것 같습니다.
너희가 얻은 전리품들에 손대지 말라. 그것들은 너희 것이 아니다. 너희는 단지 내가 모든 것을 주관하여 이 여리고 성을 점령하는 것이고, 너희는 거기에 참여하는 것뿐이다. 이 모든 것들은 너희 것으로 소유를 삼는 영적인 잘못을 범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전히 순종하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여호와의 곳간에 넣게 됩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게을러질 때가 있어요. 그렇게까지 안해도 될 것 같아요. 신앙생활 좀 쉽게 편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는 게 뻔한 것 같고 더 이상 바라는 게 나오는 것 같지도 않은, 이러한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긴박성과 간절함을 잃어버리게 될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사모함을 잃어버리게 될 때 교회는 가장 큰 영적인 위기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것을 취하지 말고 늘 청지기의 자세로 임해야 될 것입니다.
세번째, 여리고 성을 건축하지 말 것을 명령하십니다.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해서 이후로 수천 년 동안 이 여리고 성은 다시 세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저주를 해서 멸망한 채로 그대로 두게 하시는 것일까요? 이 말씀을 어긴 사람이 한 사람 있는데, 그것은 엘리야 시대 때 아합 왕이었습니다(왕상 16: 34). 아합 왕은 거기에 건물을 지었습니다. 여리고 성은 우상을 섬겼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된 것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역사였습니다.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기념비를 없애고 경제적인 목적이나 다른 우상을 섬기고자 건물을 짓는 것을 금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오랜 시간 동안 지켜져 왔지만 아합 왕은 이세벨 이방 여인과 함께 우상을 섬기기 위해 거기에 건물을 지었고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서의 예언이 이루어져서 그들은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 줄 게 있어요. ‘이건 하면 안된다. 이거 하면 망한다. 하나님께 저주 받으면 끝나는 거다. 네 마음대로 해서 되는 게 아니다’ 확실히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기도 안하고 살게 되면 끝나는 것이다. 인생에 성공하고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영원히 형벌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앙이 바로 서지 않으면 너는 하나님과 상관 없고 나와도 결국 천국 가서 못 만나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그 선을 확실하게 그어 주어야 됩니다. 마음대로 된다고 해서, 능력이 있다고 해서, 필요하다고 해서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마음대로 하려는 마음은 교만한 마음입니다. 내 힘대로 다 하겠다는 마음, 순전히 경제적인 이익으로 하나님의 영역을 마음대로 침범하여 짓지 말아야 될 여리고 성을 짓게 되는 마음에는 큰 저주가 따르게 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성수주일 하는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해야 됩니다. 기도하는 것 훈련시켜야 되고 기도해야 산다고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저는 기도 없이는 아무것도 안되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사람이 만들어지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리고 성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뿐만 아니라 앞으로 있게 될 문제에서도 저희에게 주는 교훈들이 있습니다. 이 교훈들을 삶으로 실천하고 영적인 깊은 통찰을 가지고 사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