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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BUDO)마을>
하나님이 작은 압박으로 우리를 안전지대에서 끌어내 ‘믿음지대’로 이끄실 때, 우리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성장한다
2008년 3월 26일
금, 토, 일, 월 며칠 사이에 어떤 일들이 일어난거지? 사실 우간다에 가기로 결정하고 모든 출국 준비는 눈 깜짝할 며칠 사이에 일어났다. 한국이 아닌 캐나다에서 바로 우간다로 가는 것을 준비하는게 쉬운일은 아니었다. 물어볼 사람도 도움을 받을만한 사람을 찾는 것도 어려웠다.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준비하는 일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었다. FYO(Foundation for Young Orphans)는 고아와 과부를 돕는 NGO 단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아프리카 우간다에 있는 작은 단체라는 것도 알게되었다. 실제로 우간다에 가기까지 놀라운 은혜들과 결단들이 필요했다. 주님을 신뢰하는 일, 결단력, 판단력, 믿음, 마음에 주시는 소원에 민감히 귀 기울이기, 내 상황, 환경이 아닌 하나님보기, 모든일이 우연이 아닌 인도하심임을 신뢰하기…
24살 실수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은 매일같이 계속되었다. 우간다에 입국하려면 황열병(Yellow Fever)예방 주사를 필수로 맞아야 한다기에 출국 하루전날 접종을 받고 통장에 마지막 남은 돈을 꺼내 들고, 짐을 싸고, 버릴것은 버렸다. 걱정하시는 부모님께는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까? 다른곳도 아닌 아프리카라니, 걱정하시는게 당연하다. 무모함? 어리석음? 정말 내가 그런 선택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안전한 길, 잘 갖춰진 길, 그런 길을 선택하는 건 쉽다. 보이지 않고 깜깜한 곳에 첫발을 내 딛는 것, 그건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이었다. 아프리카에 아는 사람이 있는것도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 가는것도 아니다. 캐나다나 미국같이 선진국도 아니어서 갖가지 예방접종을 권장한다는 무시무시한 문서들을 받아들고서 두눈 꾹 감고 용기를 내야 하는 걸음이었다. 부모님께 메일을 보냈다. 나 역시 내 모든 판단과 선택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고...
실수도 부족함도 무모함도 감수하고 있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나는 20대 이니까.. 아직 모든걸 배우는 시기니까. 도전을 두려워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 드렸다. 그러나 여전히 나로 인해 걱정하실 부모님을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 우간다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토론토 공항에서 집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하길 잘했다.. 무서웠는데. 속상해 하실까봐.. .. 그래도 다행이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 엄마의 목소리가 좋다. 엄마는 약간 우셨다. 엄마의 눈물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래도 끝까지 씩씩하게 나에게 축복한다고 믿는다고.. 믿고 축복한다고 여러 번에 걸쳐 말씀하셨다. 늘 느끼지만 정말 우리 엄마는 참 강한 분이시다. 아들도 아닌, 딸내미가 그것도 타국에서 갑자기 아프리카에 혼자 간다고 하니 딸 가진 부모의 마음이 오죽 타셨을까.. 엄마는 눈물 속에 몇번에 걸쳐 사랑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하나님이 그 마음에 평안함을 주시기만 간절히 기도하며 우간다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4월7일
우간다엔 찌는 듯한 더위는 없다.
현지에서 연락을 위해 핸드폰을 샀지만 고장이 났다. 핸드폰을 고치러 혼자 시내에 나왔다. 나로써는 크게 용기를 내서 캄팔라 Kampala (우간다 수도) 시내로 향한 걸음이었다. 아프리카 한가운데 동양인은 나 혼자였다. 그 넓은 거리에 서양인 한명 찾아볼 수 없었다. 두려움 가득한 시선을 숨기고, 원숭이보듯, 신기한 물건 보듯 말을 걸고, 쳐다보고, 나를 툭툭 쳐보는 사람들의 틈을 정신없이 비집고 다녔다. 사실 길을 아는 것도 아니었다. 좁은 골목길들과, 차들을 비집고 걷는데 누군가 가방을 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설마 했다. 좁아서 사람이 부딪치는 틈에 느껴지는 느낌일거라 여겼다. 그러나 상점에 도착해서 가방을 살펴보니 가방이 열려 있었고 핸드폰은 사라졌다. 노트북은 며칠 전에 망가지고 핸드폰은 사라졌다. 이제 어떻게 해야할까. 리서치 작업도, 다른 스탭들과의 연락도 어려워졌다. 이제.. 무엇부터 시작해야하나 도무지 막막하다. 피할길을 찾아 나섰지만 도리어 뱀에 물린 기분이다 우간다 한복판에서 두 방울의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4월 8월
시내에서 3시간을 넘게 차를 타고, 또 차가 들어가지 않는 곳은 오토바이를 타고서 깊은 시골마을에 들어갔다. 포장된 도로는 없다. 진 흙길과 울퉁불퉁한 흙길이 이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통로다. 지구고(Kigugo)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마을이었다. 마을엔 전기도 수도시설도 없다. 아이들은 그저 내가 동양인인거 만으로, 피부가 희다는거 만으로 좋아한다.
나는 이제이곳에서 크게 두가지 일들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지구고 마을에 대한전반적인 리서치를 하는 것 이고 또한 이곳에 있는 학교일을 돕는 것이다. 아이들은 나를 보자 그저 내 손을 잡는거 만으로 너무너무 신나한다. 전기가 없는 밤에는 호롱을 켜놓고 일기를 썼다. 선생님 3명 120명이 넘는 아이들이 있는 학교가 마을에 하나있다. 학교는 벽돌로 쌓아 올려서 지붕만 막았다. 지붕도 한쪽은 다 뜯어져서 비가오면 비가 그대로 들어온다. 게다가 요즘은 우기라서 비도 많은 오는데 바닥이 늘 흥건하게 젖어있곤 했다. 커다란 창문이 형광등 불빛을 대신한다. 이제 이 마을에는 나 혼자다 다른 스텝들은 다 돌아갔고 이제 마을에 혼자남은 나는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이들과 함께 살고 먹고 잠자야 한다. 달빛에 의지해서 저녁을 먹었다
아이들은 그냥 흙바닥에 앉아있다. 우간다 현지 목사님이신, 찰스 목사님은 몇몇의 고아를 데려다가 자식같이 키우고 계셨다. 손자와 친 자녀까지 합치면 20명 가까이 되는 대 가족이다. 고단한 몸을 잠자리에 눕히는데,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고아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누가 이들의 이름을 부르고 안아주고 쓰다듬고 예뻐해 주고 사랑을 해줄까.. 누가 이들을 돌보고 감싸고 입히고 씻길까.. 시큰거리는 마음을 붙들고 잠들었다.
<미라클-지구고마을>
4월10일
밤새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마치 하늘에서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내려서 천장이 무너지진 않을까 걱정까지 들었다. 덕분에 늦잠을 잤다. 주섬주섬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오니 누군가 내가 씻을 물을 떠다 놓았다. 마치 엄청난 사랑을 해줄 것처럼 큰 맘먹고 온 내가 무색해지게 이 마을 사람들은 도무지 내가 갚을 수 없는 사랑을 내게 부어준다. 시간마다 정성 다해 음식을 해주고 온갖 열대과일을 가져다 준다. 무릎을 꿇고 음식을 주는 것이 관례인 이곳에서 이런 황송한 대접에 그저 몸둘바를 모르겠다. 오늘은 내 빨래를 해주었고 내 신발까지 손수 닦아 주었다. 이 천사 같은 사람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건 무엇일까?
소에게 물을 주러 뛰어 나가는 아이들, 바닐라 꽃을 다루는 10살 미라클, 빨래를 하는 12살 소녀 수잔, 고구마를 캐서 껍질을 깎는 7살 소녀 나바세루까, 소를 모는 9살 꼬마 .. 무거운 물을 들고 다니는 5, 6살 꼬마녀석, 손을 휙 저어 잠자리를 잡는 후드티를 눌러쓴 귀여운 꼬마, 비오는 오전 창틀에 매달려 책 잃는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꼬마녀석들.. 창밖엔 숲이 울창하고 흙으로 지어진 진흙집 사이사이로 오리가 돌아다닌다. 때때로 돼지가 와서 풀을 휘젓기도 한다…
오늘은 달빛 아래가 아닌 흙과 짚으로 만든 부엌 안에서 밥을 먹었다. 나무로 불을 피우는 아낙네의 모습 그 손길을 돕는 분주히 움직이는 아이들의 손들이 아름답다. 함께 웃고 노래하고 돕는 이들이 너무 예쁘다. 내 지나가는 길에 나무 가지들이 있으면 꺽어주고, 내 의자를 손수 닦아 주는 아이들, 아침에 우물에 물을 뜨러 갈때면 내 옷이 더러워진다며 더러운 물통은 자기가 드는 천사 같은 아이들, 나와 눈이 마주치는 것 만으로 펄쩍 뛰며 신나하는 이 아이들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 발에 진흙이 묻었다며 자신들이 빨던 빨래로 손수 닦아 주려하고, 물을 떠내 내 손을 씻도록 도와주고, 내 곁에 와서 내가 가르쳐준 노래와 춤을 흥얼거리며 따라하는 이 천사들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4월 12일
아침산책 겸 호수가에 갔다. Kigugo 마을에는 커다란 빅토리아 호수가 있다. 고기배들과 분주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나를 맞이한다. 어느것 하나 새롭지 않은게 없다. 이들에게는 무중구(백인 이라는 의미로 이들이 동양인이냐 서양인을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가 새롭고 나에게는 아침 호숫가의 고기배들이 새롭다. 고기배들은 나무로 만들어서 노를 저어 움직이도록 되어있다.
모터가 달린 배는 한 척 뿐이었고 이들이 사용하는 그물은 찢겨지고 너덜해져 있었다. 고기잡던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호수 저편 어딘가에서 정신없이 달려오는 베드로가 생각났고,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쫓는,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는 그들의 이야기를 눈으로 보고있는 듯 했다. 어부들이 있고 목동이 있는 이 마을에서는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참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으실 때, 대학가나 학교, 시내(캄팔라 같은)가 아닌 이 지구고 같이 작은 마을에서 찾으신 이유는 무엇일까? 배운것 없고 아는건 고기잡는 일뿐인 이 순진한 사람들을 찾으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변변한 학교도 없고 아이들은 원시인이나 동물처럼 온몸에 진흙을 묻힌 채 나무를 타고 물을 긷는 이런 마을에 오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우리삶의 가장자리, 빛도, 전기도, 화려함도, 세상의 지혜도 미치지 않은 이곳에 오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물을 손질하는 지구고 청년들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노를 저으며 호수로 나가는 이들의 검고 곱슬거리는 뒤통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나는 주님의 마음을 더 알고 싶어 졌다.
4월 17일
우간다에서의 삶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 벌레가 무슨 시기를 맞이 했는지 요 녀석들이 밤새 날 괴롭게 했다. 처음 자려고 하는데 몇몇의 날파리가 얼굴에 날라들었다. 무언가 몸에 기어다닌다는 생각에 뒤쳑였다. 손에 먼가 잡히고 계속 돌아다녀서 처음엔 벼룩, 이 같은건가 싶었다. 앉았다가 뒤척이다가 쭈그려 자다가.. 도무지 확인조차 할 수도 없었다. 전기가 없어 불을 킬 수 없었던게 지금 생각해보면 더 다행이다. 억지로 ‘개미’라고 생각해 버리고 잠들었다. 아침 햇살에 밝혀진 침대는 벌레로 가득 차고 온방은 말할것도 없고 가방 구석구석까지 수백, 수천 마리의 벌레들이 침범했다. 이불을 터는데 벌레가 우두두두 떨어진다. 어떻게 그 침대에서 잠을 잤는지 스스로에게 대견할 뿐이었다. 한차례 벌레와의 전쟁을 치루고 나니, 파리, 이, 메뚜기 재앙이 얼마나 끔찍했을까 상상해 보았다. 으악! 사실 남들보다 유난히도 비위강한 나였지만, 더~! 강해져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5월8일 어버이날
어버이날이다. 집에 연락을 드려야 하지 않을까? 집에 연락하는 것 조차도 참 어렵다. 물을뜨러 우물가에 나갔다. 물을 뜨러 다녀 오면서 깨달은건 이게 ‘현실’이구나 라는 거다. 우간다에 오기 전까지 FYO는 잘 갖춰진 단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지에 와서 이건 현지인 우간다 청년이 만든 NGO인데다가 지금까지 외국에서 온 발런티어는 1명, 바로 나 혼자이고, 스텝은 두명의 형제와 한명의 자매3명이 전부라는걸 알게되었다. 열악한 프로그램은 내게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조언하는 일 조차 서툴렀다. 나는 울창한 숲과함께 지구고라는 마을에 갇혀 버렸다. 전화기도 잃어버리고 연락을 할 수 있는 여건도 어렵고 캄팔라에 있는 오피스와는 3시간 가까이 떨어진 이곳에서 대체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하나 깜깜할 따름이었다. 그러다 오늘 깨달았다
. 이게 바로 필드의 ‘현실’이라는 것. 잘 갖춰진 펀드도 없고 커뮤니티나, 다른 스텝도 없고 NGO에서 진행중인 프로그램도, 프로그램을 운영할 자금도 없는게 이곳의 현실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맨 바닥에서 출발하는게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캐나다에 있을 때 보낸 프로그램비는 한달이 넘도록 우간다 계좌로 도착하지 않는 답답한 상황은 계속 연출되고, 모든 연락이 어려워서 가족(아버지)의 병환도 살필 수 없는 상황이 바로 필드의 현실이었다.
대학에서 머리속에 그려보던 field (필드). 천막, 사막 사이에서 때양빛 피하며 현지인들과 먹고 자고 뒹굴며 하나되는 거라고 생각한 사역자의 삶은 그것보다 훨씬더 복잡하고 혹독하다는 것을 몸소 느낀다.
조셉선생님과 함께 가정방문을 가졌다. 35살 젊은 과부와 5명의 아이들이 사는 집을 찾았다. 이들은 집이 부서져서 사실은 집도 없었다. 부엌만 형체가 있었고 밤에 잠을 잘때만 근처에 있는 친적집에서 잠을 잔다. 이들의 집에는 시멘트 바닥도, 그렇다고 장판이 깔린 방도 없다. 흙 바닥에서 잔다. 다 찟겨지고 너덜해진 스폰지 매트.. 그게 3명의 자녀가 자는 바닦이다. 매트라고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든 그 스폰지 조각들이 그들이 매일 고단한 몸을 눕히는 바닥이다. 내가 얼마나 좋은 집에서 지내고 있는지 새삼 느꼈다. 여튼 그 여인은 홀로 밭을 일구면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고 집을 짓기 위해 벽돌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들.. 이 아이들이 정말 천하보다 귀한 아이들인가요.? 그런 대접을 받고 있는 건가요? 이들이 입고 있는 이 너덜해진 옷이 정말 들에 핀 백합화보다 아름다운 것인가요? 눈앞에 그려진 현실 앞에 말이 막힌다. 매일 물을 긷고 맨발로 진흙바닥을 돌아다니고, 공책도, 책도, 연필도 없이 휜 칠판을 의지한채 공부하는 아이들이..게다가 우리나라 돈으로 천원이 없어서 학교를 못가는 아이들이 대반수다. 이들이 정말 권리를 가진 아이들일까?
수십억 짜리 집을 짓고, 리모델링을 하고 값 비싼 장신구로 몸을 감싸고, 얼굴과 몸을 고치려 수천 만원을 들이고, 값비싼 차에 상상조차 못하는 풍족한 삶을 누리는 사람이 이 지구상에 같은 시대 같은 시간에 존재한다.. 같은 지구상에 전혀다른 세상이 공존하다. 그것이정말… 현 실. 이었다. 우간다에 온 비행기 값을 물어보길래.. 대답을 했더니 눈이 휘둥그래 진다. 상상조차 못할 만큼 비싼 돈을 들여 이곳에 온 사람이 된다. 그저 중소계층인, 한국의 시골, 강원도 산촌에 살던 소녀가 갑부집 딸, 엄청난 사람이 된다. 내 인생에 받아본적 없는 황송한 대접을 받는다.
대체 어떻게 된걸까…… 이게 꿈은 아닐까… 차라리 꿈이 였으면 좋겠다… 이 말도 안되는 현실이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
5월11일
신실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을 향한 대책없는 신뢰 그것이 내가 그곳에서 지낸, 그리고 버틴 유일한 힘이었다. 믿음.. 파도를 뚫고 나온 기분이 든다. 맨몸으로 파도속을 비집고 폭풍을 빠져나온 기분이 든다. 두려움, 막막함, 칠흙 같은 어둠을 뚫고 겨울을 옮겨 빛으로 나아가는 기분이 든다. 지날때는 알 수 없었던 사막의 골짜기, 수풀로 우거져 길이 없던곳… 앞서가신 예수님이 ‘신화, 전설, 소설’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실제임을 알기위해 살아야, 참아야, 견뎌야 하는 순간들을 지난 기분이다.
봄이 오고있다. 겨울이 지나고 햇살이 보인다. 춥고 고단했던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언젠가 나의 설사는 멈출 것이고, 나는 고향에 돌아가겠지. 언젠가 나는 구더기 없는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을 테고, 종이를 꾸기고 비벼서 화장실을 가지 않고 부드러운 화장지를 사용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언젠가 나는 벼룩과 이가 온몸을 물어서 이곳 저곳 퉁퉁 부어오르지 않고 깨끗한 옷을 빨아 입을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언젠가 나는 발가락을 파고들어 살을 파먹고 사는 희고 징그러운 벌레를 발에서 꺼내지 않아도 될테고 온갖 모기가 물어댈 때 마다 말라리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는 날이 오겠지.. 또 언젠가 나는 벌레와 뿌연 재가 들어가지 않은 깨끗한 음식을 먹을테고, 아침마다 물을 기르러 무거운 물통을 옮기지 않아도 될테고, 알아들을 수 없는 이들만의 언어 속에 강아지 마냥 멀뚱하게 쳐다보기만 하는 벙어리, 외톨이 신세를 벗을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사실 나에겐 돌아갈 고향이 있고, 돌아갈 나라가 있고, 쉴 깨끗한 집과 나를 맞이할 좋은 환경들과 전혀다른 세상이 어딘가에 있고 그곳에서 역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에겐 이 모든 것이 삶이고 그 모든 것이 그들의 인생이었다. 그들은 돌아갈 고향도 기다리고 있는 깨끗한 집과 가족들도 없다. …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내가 사는 삶은 추상적이지도, 가난에 대한 막연한 짐작도 아니었다. 나는 그 복판에 서 있어서 이들이 짊어지고 가는 삶에 대해 매일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니퍼와 나>
5월 13일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았었는지….
하나님께 온몸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아름다운 햇살과 아름다운 찬양과 눈부신 바람과 여인의 빨래 너는 소리와 비누냄새, 멀리서 집을 짓고 망치질 하는 소리, 라디오에서 들리는 감사의 말씀들,… 종일 손으로 빨래를 하는 이들, 종일 집안일을 하는 이들, 다른 삶을 부러워할 틈도, 자신의 삶을 한탄할 틈도 없이 바쁘게 하루를 보내는 이들, 푸른 나무와 호수와 붉은 흙 속에서 오늘을 성실히 살며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이들,
찬양하며, 춤추며, 그 찬양이 종일 고단함에 위로가 되는 이들, 북소리, 드럼소리에 박수치고 몸을 흔들며 온몸으로 온맘으로 찬양하는 이들, 예수님을 믿고 그 이름만 바라보는 이들..
아침이면 밭에나가 고구마, 옥수수, 카사바를 캐어오고, 사탕수수 한 조각에 기뻐하는 이들, 생선의 머리를 두고 다투며, 그릇에 묻은 작은 국물도 손가락으로 빨아가며 싹싹 닦아먹는 아이들, 맨발로 나무를 오르고 아름다운 과실을 잘라내에 내게 건내주는 아이들..
맨손으로 돼지우리를 청소하고, 걸레를 닦으며, 손과 얼굴을 씻는 아이들,. 헹굴 넉넉할 물도 없이 손에 낄 장갑없이 보드라운 맨손으로 돼지의 오물을 치우는 아이들. 무거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옮기는 나보다 키가 한참은 작은 조그마한 소녀들 이들이 짊어지기엔 너무 무거워 보이는 이들의 짐들 이들이 잠드는 얇고 먼지 많은 매트와 더러운 옷을 빨지도 않고 입고자는 아이들이 가득하다. 찢어진 옷을 꿰매지도 못하고 그냥 끈으로 질끈 묻고 겨우 몸을 가리는 천조각 같은 옷, 아파도 울수없고 울어도 멈추지 않는 육체의 아픔, 콧물 나도 닦아주는 이, 열이나도 업어주는 이 없이 강하고 씩씩한척 이겨내야 하는 아이들, 진흙투성이발, 신발없이 다니는 발 때문에 온갖벌레가 피부를 뚫고 온갖 상처가 작은 발을 찌르는 이들,.넘겨볼 책도 없이, 책을 볼 시간도 없고, 글을 읽을 불빛도 없는 이곳, 어떻게 그 모든 것을 다 적어낼 수 있을까..
먼지, 연기 가득한 재투성이 부엌, 바닥과 더러운 벽에 기대에 잠드는 아이들, 나의 이름을 외우고, 나를 알아보고, 나를 존중하고, 소중히 대해주는 이들, ..공이 없어 비닐 봉지를 둥글게 말아 실로 감아서 만든 축구공, 몇번만 차면 다 터지고 찢어지는 이들의 비닐봉지 공., 그래도 넘어져라 옷이 더렵혀져라, 아랑곳없이 맨발로 뛰어다니는 천진한 소년들, 엉덩이를 흔들며 노래하며 춤추는 소녀들, 비가오면 그저 비에 옷을 적시며 학교에 오는 꼬마들, 땅에 떨어져 흙 묻은 음식을 저저분한 손으로 다시 집어 입에 넣는 아이들…… 그 천사 같은 아이들을 보고있으니. 너무 마음이 좋으면서 너무 마음이 아프다..
5월16일
아버지 건강이 걱정이 된다. 현지의 프로그램도 한계가 많았고 리서치 작업도 어느정도 마무리가 다 되었다. 사실은 나의 발런티어 프로그램은 6월 말 까지 였지만 나는 한국에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현지에서 리서치한 것들은 한국에 가서 컴퓨터로 작업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으로 보였다. 지난 일들을 정리하며 지구고 마을과 우간다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사실 여러가지 착오로 내가 처음 우간다에 왔을 때 프로그램비로 보낸 2300달러 가량의 돈이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
실제로 이 NGO는 형편과 이들이 내게 제공한 발런티어 프로그램은 여러가지 문제가 많았다. 내가 지구고 마을에 있을 때 6주가 넘도록 한번도 찾아오지도 않았고 결국은 나 스스로 리더를 만나러 직접 나서야 했다. 길도 모르고 함께가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 그 오지에서 캄팔라 시내까지 물어물어 나와야 했다. FYO는 체계적인 프로그램도 발런티어 활동에 대한 경험도 없는 시작단계의 빈약한 단체였다. 적은 돈이 아니어서 진짜 이 돈을 내야하나 마음이 어렵기도 했다. 그 동안 고생한걸 생각하니 분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내가 왜 돈 들여서 이 고생을 하나, 한편으로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이제 프로그램도 도중에 취소하기 때문에 그 뒤에 일정에 대한 비용은 환불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찰스 목사님과, 지구고 마을에서 만난 수많은 아이들을 생각했다.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은 이 재정을 어떻게 쓰이길 원하실까… 마음이 어려워질 때마다 그냥 기도만 했다.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서서히 바꾸셨고 은혜를 부어주셨다. 지구고 마을에서 고쳐주고 싶은 것 들을 생각나게 하셨다. 학교의 지붕이 다 떨어져서 비가 새는데, 그걸 고쳐주고 싶었고, 아이들이 공도 없이 비닐봉지를 차고 다니는데 축구공을 사주고 싶었다. 아이들이 매일 똑 같은 옷을 다 찢어지고 헤어져도 꿰매지도 못하고 입고 오는데 학교 유니폼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교과서는 선생님 한분만 갖고 계시고 아이들은 책도 없이 그냥 선생님 말씀만 귀로듣고 많은 아이들이 넉넉한 공책도 연필도 없이 공부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또 아이들이 사용하는 화장실도 매우 위험하다고 들었다. FYO리더와 만나서 나의 프로그램비용을 전부 내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고 이 다섯가지의 분야에 프로그램비가 쓰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우간다에서 만난 나와 같은 나이의 친구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제니퍼(Jeniffer)이다. 그녀는 나를 볼때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은 꼭 공부를 하고싶다고.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싶고 또 사람들을 돕는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싶어하는 친구였다. 나와 꿈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반가웠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셔서 그녀가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할때도 주위의 도움을 받아서 공부했다. 그러나 대학에 가고 싶어도 그것은 그녀에게 그저 꿈 같은 이야기였다.
그녀는 매일을 기도한다고 했다. 그날 밤 나는 그녀가 다시 떠올랐고 늘 걱정없이 학교에 다니는 나와는 전혀 다른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며 미안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프로그램을 취소해서 환불받을 수 있는 돈은 약 100만원 가량이었다. 사실 대학학비로 치자면 그리 많은 돈은 아니다. 한국의 대학 한학기 등록금이 300만원을 훌쩍 넘기는 시대인데 100만원이 과연 그녀의 4년동안 대학을 다닐 수 있는 장학금이 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프리카 현지 물가와 학비를 고려한다면 분명 도움을 줄 수 있을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FYO 리더에게 남은 비용은 제니퍼의 장학금으로 써달라고 부탁했다. 은혜속에 씨를 뿌릴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제니퍼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나님의 너의 기도를 들어주셨어..”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나는 그저 그녀를 안아주었다… 한국에 돌아오는 날 공항에서 나는 그녀를 안고 말했다.
“제니퍼.. 너는 이제 엄마아빠 있어.. 나 돈 번적 없어, 너 학비 내가 주는거 절대 아니야..하나님이 주셨고.. 이 돈은 한국에 있는 우리 아빠가 버셨거든.. 그러니까 우리 아빠가 이제 네 아빠야.. 네 아빠가 너 학비 내시는 거고, 너 가르치는거야. 너 엄마 아빠는 이제 한국, 도계에 계셔.. 잊지마. 우린 이제 자매야.. 너 엄마 아빠 한국에 있다는거 꼭 기억해…”
나는 제니퍼를 한참을 안고 있었다. 그녀는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한국에 도착하고 며칠전 제니퍼에게 전화가 왔다. 1분도 채 안되어 전화가 끊겼지만.. 나의 여동생이자 언니인… 제니퍼에게 전화가 왔다는게 너무 반가웠다. 곧 제니퍼에게 아빠와 엄마 사진을 보내줄꺼다.. 그녀가 그토록 보고싶어 하는 나의 부모님. 그리고 그녀의 부모님.
하나님… 감사합니다. 정말 너무너무 .. 감사합니다.
/송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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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랑스런 하나님의 딸 은미야! 귀한 체험의 시간들이었구나. 한비야씨 글을 읽는 감동보다 더한 감동의 현장을 주님이 똑똑히 보고 계셨을거야.... 세상에는 착한 사람들이 참 많지?
감사하고 고마워요...
우리 은미 장하다! 은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실거야.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하렴!
은미야 이제 정말 부럽기 까지 하다 마음껏 하나님이 쓰실수있도록 준비하고있구나 장한은미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