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세계광포 50주년.
아직 미국 점령하에 있던 오키나와에서 그 위대한 발걸음이 시작되었다.
이 출발은 <입정안국론>을 상정한 지 700년 후.
이케다 회장의 본격적인 '입정안국'의 투쟁이었다.
'전쟁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광선유포를 달성해야 한다.'
이것이 평화를 지향하는 위대한 불법의 달관(達觀)이었다.
<선시초>에서는 이렇게 설했다. "올바른 불법(佛法)을 비방하므로 전대미문의
대투쟁(전쟁)이 일염부제에 일어난다. 그때는 모두 일동으로 남묘호렌게쿄
(南無妙法蓮華經)라고 부를 것이니라." (취의, 어서 259쪽)
니치렌대성인은 인류의 역사를 '전쟁의 역사'에서 '평화의 역사'로 크게
전환하고자 도모하셨다. 이케다 SGI 회장은 말했다.
"이 대성인의 예견을 우리는 거듭 깊이 배견해야 한다."
불법자(佛法者)의 사명은 바로 평화사회를 건설하는 일이다.
20세기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사상 유례없는 전란의 시대였다.
"니치렌 등의 동류(同類)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고 봉창하는 자는
일체중생의 부(父)이니, 무간지옥의 고(苦)를 구제하는 까닭이니라." (어서 758쪽)
세계대전 후에 발전한 학회는 이 성훈에 나온 대로 불의불칙의 단체다.
학회는 제1차 세계대전 후에 탄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부정부와 대결한
마키구치 초대 회장, 도다 제2대 회장이 불경죄와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혐의로
투옥되어, 초대 회장은 감옥에서 순교했다. 학회가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원류가
여기에 있다. 더욱이 도다 제2대 회장이 출옥한 1945년 7월에는 사상 최초의
원폭실험이 있었다(7월 16일). 핵실험은 단순한 실험으로 그치지 않았다.
다음 달에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대참극으로 번지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핵억지력이라는 핵우산 아래, 핵무기 확산 경쟁이 심해졌다. '원수폭금지선언'이
상징하듯이 도다 제2대 회장의 생애는,두번 다시 비참한 전쟁을 일으키면 안 된다는
투쟁이었다. 학회의 역사는 인류의 고뇌에 호응한 '자비의 전진'이자 '평화의 확대'였다.
전쟁의 고통과 광선유포의 '때'.
이 관계에 대해 창가의 사제는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눴다. 《젊은 날의 일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도다 선생님이) 타국침핍난(他國侵逼難)이 있으면 반드시 불법이
흥륭한다고 말씀하셨다. 말법, 대성인의 때에는 몽고군의 침략이 있었다.
말법, 화의의 광포시대에는 저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불법의 커다란 사명은 고뇌하는 민중을 구하는 일이다."
태평양전쟁에서 가장 고초를 겪은 땅은 어디일까?
그곳은 바로 본토 결전의 '사석(捨石)'이 된 '오키나와'였다.
처참한 지상전이 되풀이되었던 오키나와. 주민 세명 중 한명 꼴이라고 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오키나와의 평화' 은사 도다 세2대 회장과 제자인
이케다 제3대 회장이 여러 차례 대화한 명제였다. 은사는 애제자에게 오키나와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애제자는 은사에게 오키나와의 묘법광포에 대해 질문했다.
은사는 "반드시 한 사람의 지용보살이 일어선다."고 대답했다.
은사는 오키나와 땅을 밟아보지 못했다. 은사 대신 오키나와에 첫 걸음을 새긴 사람은
애제자였다. 그것도 제3대 회장에 취임하고 두달 후였다.
제3대 회장에 취임한 1960년 5월 3일. 영광스러운 취임식에는 오키나와에서도
아직 미국 국적인 동지 75명이 여권을 발급받아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말한다.
"이케다 선생님의 사자후를 듣고 오키나와에서 흔들리는 배를 타고 5일 밤낮으로 달려온
여행의 피로도 싹 가셨습니다."
도쿄 다치카와에서 주둔하던 군대를 상대로 기념품가게를 운영하던 남편(야스미
후쿠지 씨)과 함께 1954년에 입회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오키나와로 이사했습니다.
우리는 뜻밖에 오키나와 광포의 씨앗 한톨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생활이나 활동도
사방이 다 꽉 막혀 무심코 푸념을 했습니다. 그럴 때 대백련화에 나온 이케다 선생님
지도를 보았습니다. "푸념을 늘어놓고 공덕받은 사람은 없다. 제목을 불러 공덕을 쌓기
바란다." 마치 제게 주신 지도같았습니다. 그 지도를 가슴에 품고 분발했습니다.
그리고 1959년에는 오키나와 최초로 '오키나와지구'가 탄생했습니다.
본부간부회에 참석하고자 상경했을 때, 남편은 이케다 선생님에게 부탁드렸습니다.
"이케다 선생님, 한시라도 빨리 오키나와를 방문해주십시오. 오키나와 동지를 격려하고
지도해주십시오." 선생님은 우리 노고를 충분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엄하고
자상하게 지도하셨습니다. "다른 데 기대면 진정한 신심은 성장하지 못합니다.
지역에서 학회를 깊게 이해할 수 있도록 광포 확대에 온 힘을 기울여주십시오."
우리는 응석을 부리고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이 오시도록 전국 제일의
홍교성과를 내자.'고 결심했습니다. 이미 총무로 학회의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지휘하시는 선생님 덕분에 1960년에는 오키나와가 전국에서 최고 수준의 절복성과를
냈습니다.
이케다 회장이 비공식이었지만 오키나와 방문을 오키나와 동지에게 밝힌 날은 회장에
취임한 '5월 3일'이었다. 회장에 취임하는 날에 세계광포를 여는 구체적인 계획이
이미 세워져 있었다. 이케다 회장의 오키나와 방문을 공식적으로 발표한 날은
그 다음 달에 열린 제2회 본부간부회(6월 27일)때였다. 한 이사가 발표했다.
"오는 7월 16일부터 사흘 동안 이케다 선생님이 오키나와에 가십니다."
회합이 열리던 행사장에 커다란 환성이 터졌다. 그리고 오키나와 방문에 이어서
더욱 극적인 예정이 발표되었다. "선생님은 10월에는 약20일간의 예정으로 북미와
남미로 가십니다. 또 내년 1월에는 인도를 방문하실 예정입니다."
노도와 같은 커다란 박수가 일었다. 참석자는 모두 이렇게 확신했다.
'오키나와 방문을 첫 걸음으로 마침내 북남미, 아시아로 세계광포의 대투쟁이 시작된다'
이케다 선생님은 오키나와에서 세계광포의 여행을 시작하셨습니다. 갖은 고초를
겪은 우리 오키나와 멤버에게는 그 일이 무엇보다 큰 긍지입니다. 일찍이 선생님은
"오키나와 사람들 마음에는 '열린 해양국'의 기상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오키나와의 기풍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오키나와 사람은 쾌활하고 진취적인
기질이 풍부해서 사람을 좋아하고 교류를 좋아해서 우호를 넓히는 인생을 즐깁니다.
이케다 회장의 오키나와 방문이 발표되었을 무렵은 국내외적으로 격동의 시대였다.
국내에서는 강행 채결(採決)된 '신 안보조약'을 둘러싸고 국론이 둘로 나뉘었다.
안보투쟁에서 학생운동 사상 첫 희생자를 낸(6월 15일) 어려운 시기였다.
많은 국민이 미국과 소련의 '냉전 소용돌이'에 휩쓸렸다고 실감했다. 기지가 된 섬
오키나와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또 칠레 지진으로 일어난 해일이 태평양해안에 엄습해
많은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냈다.(5월 24일) 냉전과 자연재해 그리고 소아마비 유행
등의 병고와 생활고로 민중은 불안의 한복판에 있었다. 이러한 격동 속에서 이케다
회장은 오키나와와 남북 아메리카를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오키나와를 처음 방문하는 날은 7월 16일이었다. 7월 16일은 니치렌대성인이 당시
최고권력자인 호조 도키요리에게 <입정안국론>을 상정해서 국주간효를 한 날(1260년)이다.
이케다 회장이 오키나와를 방문하는 1960년 7월 16일은 <입정안국론> 상정부터 정확히
700년에 해당했다. 불가사의한 때의 부합이었다. 또 7월 16일은 인류사상 최초의
원폭실험이 미국에서 있던 날이기도 했다. 제3대 회장에 취임한 이케다 회장은
오키나와 방문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입정안국'의 대투쟁을 개시했다.
당시 중학생이던 저는 미야코지마 기상대 소장을 지낸 아버지와 오키나와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중학생이었지만 저 나름대로 제 장래와 오키나와의
미래 등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케다 선생님이 오키나와를 방문하신 1960년은,
오키나와를 둘러싼 정치상황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오키나와에 미사일 기지 건설이 승인되어,
기지의 섬으로 체제가 착착 정비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의 오키나와 방문과
미일 신 안보조약 발효, 또 당시 내각의 총사퇴 등, 어수선한 상황이었습니다.
오키나와는 본래 세계와 우호를 맺으며 독자적인 정신풍토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일본 본토의 지배가 시작되어 일본제국과 그뒤 미국 점령 등,
불행한 역사에 유린당했습니다. 그 결과 '우(右)냐 좌(左)냐.' 하는 논의가 항상 지배적이었고
상당히 극단적인 정치풍토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선생님이 오셨습니다.
게다가 <입정안국론>이 상정된 지 700년 후인 7월 16일입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결심하셨습니다. '권력의 마성이 미쳐 날뛰고, 권력에 농락당한 오키나와를
숙명전환하려면 입정안국의 정신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훗날 이케다 선생님은
오키나와를 방문한 의의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정치풍토가 강한 오키나와이므로 더욱
영원한 평화의 초석을 구축해야 합니다. 금세 '우냐 좌냐'하는 논쟁이 벌어져 좀처럼 중도
(中道)정신이 뿌리내리기 어렵습니다. 그런한 풍토가 있기에 불법에서 설한 중도정신을
뿌리내리는 일은, 세계평화를 실현할 선구가 되고 상징이 됩니다. 독자적인 정신풍토를 지닌
오키나와에는 그러한 위대한 사명이 있습니다."
7월 16일 정오, 이케다 회장은 오키나와로 출발하기 위해 하네다공항에 있었다.
출발에 앞서 배웅나온 멤버에게 회장은 인사했다. "오늘 바쁘신데 더운 날씨에도 이렇게
일부러 배웅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2시 조금 지나서 출발하지만 안으로 들어갈 테니
이만 헤어지도록 합시다." 그후 회장은 힘을 준 어조로 예정을 말했다.
"오키나와에 지부를 결성하겠습니다. 지난 달은 400세대의 절복성과를 냈습니다.
내일 지부를 결성합니다. 오키나와지부가 결성되면 일본의 지부가 오키나와지부보다
절복수가 적을 경우에는 오키나와에 가서 배워오십시오(웃음). 내년에는 남미지부를 만듭니다.
앞으로 세계광포가 시작됩니다. 아무쪼록 자기 행복을 위해 앞으로 더 분투하십시오.
학회가 전진할수록 삼장사마가 더욱 날뛰리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인과이법(因果理法)입니다.
은사 도다 선생님이 '난을 극복하는 신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떠한 난이라도 유유하게
극복합시다. 단결하여 전진합시다." 처음 듣는 세계광포의 전망에 모두 깜짝 놀랐다.
세계광포가 이미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멤버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의 굉장한 구상에 경탄한 나머지 몸이 오싹하고 소름이 끼쳤습니다."
7월 16일 오후 2시 11분, 이케다 회장 일행을 태운 비행기는 하네다공항을 날아올랐다.
일행 중 한 사람이 동행기록을 썼다. "출발에 앞서 이케다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앞으로 사흘 동안 3년분의 일을 한다. 그리고 오키나와에 지부를 결성하자.'
'은사 도다 선생님의 7주기까지 1년은 10년에 해당한다.'는 말은 늘 들었지만,
광포달성에 대한 선생님이 품은 일념은 도쿄를 시작으로 일본 전국을 한 차례 돌아,
회장 취임 두달 반이라는 짧은 시일이 지난 오늘, 해외지부 결성을 바라보기에 이르렀다.
…맑게 갠 하늘로 최적의 비행을 했다. 일행을 태운 비행기는 오키나와를 향해 곧장
남쪽으로 내려갔다. 오키나와! 오키나와라고 하면 그 역사는 과거의 비참한 숙명이
수없이 전해진다. 특히 우리의 이목을 새롭게 끈 사건은 태평양전쟁이다.
1945년 3월에 시작된 오키나와전쟁은 비참하게도 오키나와를 수라의 구렁텅이로 바꾸어
많은 희생자를 냈다……. 비행기로 3시간 반, 거리로 보면 그렇게 멀지 않은 오키나와지만
왜 먼 나라처럼 느껴질까? … 이번 이케다 선생님의 오키나와 방문으로 먼 타국이라는
감각이 일시에 날아가버릴 것이다."
저는 1957년 4월에 입회했습니다. 도쿄에서 양복 만드는 학교에 다니던 때였습니다.
아직 10대였지만 비참한 전쟁의 체험과 아버지의 실명, 친구의 자살 등 숱한 고난을 당하고
올바른 종교를 찾고 있었습니다. 입회해서 학회의 따스함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신문에서 보는 이케다 선생님의 지도를 근간으로 투쟁했습니다. 원수폭금지선언을 하신
미쓰자와경기장에도 참석하고 1958년 4월에 오키나와로 돌아왔습니다. 전쟁과 실명 등,
온갖 고초를 다 겪은 아버지에게 신심을 이야기했습니다. 아버지는 한 줄기 빛을 발견한
듯이 이해했고 그렇게 가족 모두 신심을 시작했습니다.
"제3대 회장에 취임한 직후인 7월에는 오키나와로 갔다. 폭염을 걱정해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나의(이케다 선생님) 결의는 흔들리지 않았다. 우리 동지의 노고는,
가장 힘든 때에 현지로 가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도자의 첫번째 조건이다."
(<수필 신 인간혁명>)
이케다 회장 일행은 시내에 있는 숙소로 향했다. 아열대 가로수에 꽃이 피어 있었다.
선명한 원색의 꽃들이 도시 전체를 밝게 비추었다. 숙소에 도착한 회장은 한숨 돌릴
겨를도 없이 가장 먼저 야스미 후쿠지 지구부장 등, 현지 간부들과 간담했다.
미군기지의 상황, 본토 복귀에 대한 문제 등도 들었다. 오키나와의 양상을 상세하게
파악하고 오키나와 광포의 길을 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오키나와는 1954년에 광포의
씨앗 한톨이 탄생하여 이후 5년 반 동안 약 7천 세대로 발전했다.
자동차업계에서 일하던 저는 이케다 선생님을 숙소까지 차로 모셨습니다.
이케다 선생님은 "신세지겠습니다."하고 말하고 공항 정면에 있는 현관에서 대기하던
차에 올라타셨습니다. 시내로 향하자 뒷자리에 계시던 선생님이 말을 거셨습니다.
도로 옆에 핀 부겐빌레아와 하이비스커스를 발견하고 "예쁜 꽃이군요.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으셨습니다. 당시 먹고 사는 데 여념이 없어 꽃이름 등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했습니다. 또 가로수로 심어져 있던, 소나무를 많이 닮은
목마황이라는 나무를 발견하고 "저 나무 이름은 무엇인가요?"라고 물으셨지만 묵묵부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키나와를 진심으로 알고 싶다.'는 선생님의 마음이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케다 회장은 철저하게 노고한 오키나와 벗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내일 열리는 대회에서 발표할 생각인데, 오늘 모인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가마타지부나 마쓰시마지부, 그 밖의 지부에 소속된 지부원을 하나로 결집해서
오키나와지부를 만들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갑작스러운 제안에 모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윽고 폭풍 같은 찬동의 박수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이케다 선생님이 모든 멤버에게 지부결성을 제안하셨습니다.
속기 흉내만 낼 정도던 저는 '역사적인 선생님 말씀을 빠뜨리지 말자.'는 생각에 열심히
펜을 날렸습니다. "인사(人事)는 전면적으로 우리에게 일임해주십시오. 괜찮겠습니까?"
모두 기쁨과 놀라움으로 손뼉을 쳤습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지도하셨습니다.
"나중에 신임간부를 험담하거나 원질을 일으키면 방법(謗法)입니다. 파화합승(破和合僧)을
일으키면 안 된다고 정한 이상, 간부를 중심으로 단결해주십시오. 또 간부가 된 사람은
모든 회원을 따뜻하게 보살펴주십시오. 이렇게 모두 아름답게 단결한 모습으로
오키나와지부가 탄생했으면 합니다."
선생님은 또 강한 어조로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오키나와가 일본의 모범이 되었으면
합니다.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을 비춥니다. 그와 같이 이 오키나와를 시작으로
이윽고 대만, 홍콩, 인도 등 동양에서 지부가 속속 결성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오키나와를 전 학회의 추진력으로 삼고 싶습니다. 광선유포의 심부름꾼입니다.
부처의 사자입니다. 열심히 분발하십시오." 장내에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어서 선생님은 오키나와 광포의 '씨앗 한톨'인 야스미 후쿠지 씨의 공적을 치하하며
"지부장은 야스미 씨에게 부탁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시계를 확인했습니다.
시각은 16일 오후 9시 50분이었습니다. '아, 마침내 오키나와에 지부가 생겼다.'
장내에 갈채가 울려 퍼졌다. 야스미 신임지부장의 눈도 촉촉이 젖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계속해서 "여러분이 신임지부장을 잘 지켜주십시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선생님 말씀을 어기지 말고 끝까지 투쟁하자!'
나도 모르게 펜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간부회 마지막에 회장은 지도했다. "내일 열리는 대회에서 정식으로
발표하겠습니다. 부인부장, 남녀 부대장도 임명하겠습니다." 간부회가 끝난 뒤,
신임지부장도 함께 숙소에서 인사를 검토했다. 회의는 한밤중까지 이어졌다.
부인부장, 남녀 부대장을 비롯해 13개 지구의 지구부장과 지구담당원을 내정했다.
간부회가 끝난 후 이케다 선생님이 "지부부인부장을 부탁합니다."라고 자상하게 말씀
하셨습니다. 저는 "네!"라고 대답했지만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잠시 후 세를 살던 오오야 씨가 손님이 왔다고 알려주었습니다. 현관에는 선생님과
동행하던 청년부 간부가 서 있었습니다. 청년부 간부는 남편에게 "(타는)차를 준비했습니다.
사모님과 함께 부디 숙소까지 와주시기 바랍니다."하고 말을 꺼냈습니다. 우리는 즉시
차를 타고 숙소로 향했습니다. 숙소에서는 이케다 선생님이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선생님은 남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오키나와를 두번 다시
전쟁에 희생당하지 않는 섬으로 만들 결심입니다. 그래서 사모님을 오키나와 부인부의
중심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떠십니까?" 남편은 하와이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
오키나와로 돌아왔습니다. 전쟁 중에는 '철혈근황대(鐵血勤皇隊, 젊은 오키나와 주민으로
구성된 부대)'였던 남동생을 잃었습니다. 그들이 최후를 맞은 남부의 단애절벽에는
지금도 '오키나와 사범건아의 탑'이라는 위령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은
누구보다 오키나와 평화에 대한 강한 바람이 있었습니다. 선생님 말씀에 남편은 바로
대답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응원하겠습니다. 지키겠습니다.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저를 향해 "다마에, 열심히 해요."하고 자상하게 말했습니다.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고마워요."라고 말하니 눈물이 쏟아질 듯해 남편 손을 꽉 움켜
쥐었습니다. 동지의 따뜻함을 느꼈습니다. 이와 동시에 자애 넘치는 선생님의 깊은
배려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이튿날인 7월 17일이 오키나와지부 결성식이었다. <입정안국론>제출에서
700년 후인 '7월 16일'에 이어 '7월 17일'도 이케다 회장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오키나와지부 결성은 내가 권력의 마성과 투쟁한 역사를 새기고 또 새긴,
대간사이에서 '상승의 혼'을 불태운 날과 똑같은 7월 17일이었다." (<수필 신 인간혁명>)
민중의 행복을 구축하기 위해 '권력과 벌인 투쟁'.
이것이 바로 이케다 회장이 일으킨 세계광포를 실현하는 '입정안국'의 대투쟁이었다.
인종(忍從)과 통곡의 땅을, 평화와 행복의 꽃이 피는 '경사스러운' 낙토로!
(1960년 7월 16일, 도쿄 하네다공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