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현지시간) 93세를 일기로 타계한 미국 배우 제임스 얼 존스는 60년 가까이 이어진 연기 경력을 즐겼는지 모르지만, 그가 기억될 한 가지는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깊이 있으며, 구르는 듯한, 영광스러운 콘트라베이스 톤이라 누군가 한때 "모세가 십계명을 계시받을 때 들었을 법한" 소리라고 묘사했다고 영국 BBC는 지적했다.
그는 스타워즈 원작 3부작에서 다스 베이더 목소리를 연기해 연설 만으로 신비한 '포스'(Force)의 힘을 압축적으로 전달했다. 최근에는 미국 뉴스 채널의 존재감과 긴박성을 전달하며 위엄을 수여하는 목소리로 "디스 이즈 CNN"을 들려줬다.
제임스 얼 존스는 1971년 1월 17일 미시시피주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메리카계 인도인과 아일랜드 혈통을 갖고 태어났다. 부친 로버트 얼 존스는 아들이 태어난 지 얼마 안돼 가족을 방기했다. 13명의 대가족이었는데 존스는 "입이라도 줄여야 한다"는 이유로 멤피스 할머니 집에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할머니 집에까지 데려간 자동차에서 내리지 않겠다고 그는 한사코 버텼다. "가족과 헤어지지 않고 싶다는 뜻을 표현하는 길은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들은 받아들였다."
하지만 당시의 충격이 트라우마가 돼 10대 시절까지 말을 더듬었다. 워낙 심각해 그는 말을 거의 하지 않고 때로는 필답으로만 소통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연기로 이끈 것은 말더듬이여서 그는 평생에 걸쳐 이를 감사하게 여겼다. 고교에서 그를 눈여겨 본 교사가 시작 능력을 발견해 급우들 앞에 나와 낭송하라고 격려했다. 그는 기억을 살려 얘기하면 더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격려에 고무돼 그는 논쟁에 끼어들거나 웅변대회에 나가게 됐다.
미시간 대학에 다니며 연극에 발을 들였고, 군 복무를 마친 뒤 뉴욕에서 배우로 일자리를 찾았다. 그 시절 부친과 함께 지냈는데 화해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월세를 아낄까 싶어 그런 것이었다.
아들은 "그를 아버지로서 알아가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면서 "시작부터 배우지 못한다면 따라잡을 기회가 없는 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본인 역시 연기를 하고 싶어했던 로버트는 아들의 야망을 응원했는데 조건을 하나 달았다. 그는 젊은 제임스에게 "난 이 일로 생계를 삼을 수는 없다. 그러니 네가 이 세계에 들어가길 원하면 , 네가 사랑하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나쁜 조언이 아니었다.
흑인 배우들이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시절이었는데도 존스는 장 제넷의 드라마 '흑인들' 같은 브로드웨이 제작물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이 드라마는 식민지 시절의 스테레오타이프를 뒤집어 흑인 배우들이 분장을 하고 백인 배역을 소화하곤 했다.
그는 운이 좋아 뉴욕 극단들이 다른 이미지로 포장하고 싶었을 때를 잘 만났다. 더 이상 성공하려면 백인이거나 중산층 출신일 필요가 없었다.
그는 셰익스피어 연극에 참여했는데 오델로 뿐만 아니라 리어 왕, 오베론, 클라우디우스 등도 했다. 마침 유진 오닐의 '어둠 속의 황소'(The Iceman Cometh), 존 스타인벡의 '생쥐와 인간'(Of Mice and Men), 흑인 전용 프로덕션인 테네시 윌리엄즈의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등 현대 연극의 초창기 무대에 섰다.
1968년 그는 위대한 흑인 복서 잭 존슨을 그린 연극 '위대한 백인의 희망'에서 인상적인 연기로 토니상을 수상했다. 그는 나중에 같은 제목의 영화 주연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지명됐는데 시드니 포이티어에 이어 두 번째 흑인 배우로 지명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의 첫 영화 배역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어두운 풍자극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의 슬림피켄스 승무원팀 가운데 젊고 깡마른 팀원 역할이었다. 그 뒤 다양한 장르의 영화, 예를 들어 '코난'과 '커밍 투 아메리카', '꿈의 구장', '패트리어트 게임', '긴급명령'(Clear and Present Danger) 등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스스로를 불러주면 뭐든 하고 수표 한 장 받고 떠나는 저니맨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는 영국 일간 가디언 인터뷰를 통해 "덴젤 워싱턴, 시드니 포이티어, 로버트 레드포드, 톰 크루즈 이런 친구들은 잘 계획된 경력을 갖고 있지만 난 그냥 여행 중에 있다. 일자리가 있다면 어디든 달려가 'OK, 내가 할게'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어린이가 세상을 차츰 알아가듯, 그는 오리지널 '스타워즈' 3부작에서 다스 베이더 목소리 연기를 요청받았다. 마스크를 썼던 배우 데이브 프로즈가 서부 액센트가 워낙 강한 것이 문제였다. 어린이 교통 안전 교육(Green Cross Code)에 출연한 프로즈에게 충분히 괜찮은 배역이었지만, 은하계를 쥐락펴락하는 사악한 제다이의 위압 같은 것은 결여돼 있었다.
본인이 원해 크레딧에 존스의 이름은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단지 "특수효과"의 일종이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영화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자 다시 생각해보라는 주위의 설득을 받아들여 이름을 넣어달라고 했다.
존스는 텔레비전 드라마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Roots: The Next Generation) 연기로도 유명했고 미국 드라마 '가브리엘 파이어' 주연으로 두 에미상 가운데 하나를 수상했다.
그의 음산한 목소리 톤은 '심슨 가족'에도 이용됐고, 영화 '라이언 킹'의 무파사 목소리를 들려줬다. '서세미 스트리트'의 초기 작품들에도 등장했는데 제작진은 학령기 아이들에게 동영상을 보여줬는데 그가 움직임 없이 숫자 1부터 10까지 세게 했다. 그러면 아이들은 온 정신을 집중해 쇼가 시작하는 순간, 즐거워했다.
2011년 아카데미상 평생공로상을 수상했는데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와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를 공연했던 런던 극장에서였다.
그의 목소리에 권위가 실리자 제임스 얼 존스는 상업 더빙, 다큐멘터리, 컴퓨터 게임에 불려 다녔다. 그는 플로리다주 시월드와 NBC 올림픽 중계 목소리가 됐다. 누군가는 그에게 신약 성서 27종을 모두 그의 목소리로 녹음하자고 요청하기도 했다.
물론 그는 목소리를 채용하려는 것에 기뻐했다. 하지만 정치에 관해서는 많이 주저했다. 부친 이름이 상원의원 조지프 매카시의 블랙리스트에 올라갔다. 해서 그는 논쟁이 될 만한 일은 피해갔다.
"내 목소리가 고용되는 것이지, 내 지지 의사가 고용되는 것이 아니다. 난 목소리를 입히겠지만, 난 다른 종류의 약속을 하지 않고는 지지할 수가 없다. 내 정치관은 아주 개인적이며 주관적이다.
그는 결코 은퇴한 적이 없으며, 80대에도 일하고 있었다. 말을 많이 더듬던 미시시피 소년은 전설적인 목소리와 함께 강력한 연극 배우로 기억될 것이다. 2016년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에서야 다스 베이더로서의 마지막 연기가 있었다. 그의 말들은 여전히 40년 전 휘둘렀던 잔인한 파워를 갖고 있다. 어린 새 세대에게 다크 사이드의 시간을 잊은 공포를 안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