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장품 정수 추린 'A collection' 김환기·박서보·백남준·이우환… 국내 대표 거장들 작품 공개 - '비밀의 화원' 기획전도 70~80년대생 젊은 작가 참여
언제부턴가 예술 작품 구입이 부(富)의 과시처럼 여겨지면서 작품 소장가가 이름을 밝히는 경우가 드물어졌다. 1970~80년대 도록(圖錄)을 보면 그림 옆에 늘 소장가의 이름이 공개돼 있었지만 요즘은 '개인 소장'이라는 익명 뒤로 몸을 숨기는 게 관례가 됐다.
가을 하늘인가, 푸른 달빛인가, 청자의 푸른빛인가. '서양의 블루와는 다른 한국의 푸른 빛깔'을 담아낸 수화 김환기 화백의 추상화‘26-II-69 #41’(1969년 작, 가로 128㎝·세로 160㎝). 서울미술관 소장전‘A collection’에 전시된 작품 중 하나다. /서울미술관
서울 부암동 자하문 터널 옆, 흥선대원군 별장인 석파정을 끼고 있는 서울미술관은 이런 세태를 거스르는 미술관이다. 이중섭의 '황소' 그림에 빠져 미술에 입문해 국내에서 손꼽히는 주요 컬렉터가 된 안병광(59) 유니온약품 회장이 2012년 설립한 사립 미술관으로, 정기적으로 안 회장이 사 모은 작품들을 일반에 공개한다.
이 미술관이 설립된 지 만 4년을 맞아 중간 결산 차원에서 컬렉션 중 정수로 불릴 만한 주요작을 전시한 소장전 'A collection(A 컬렉션)'과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기획전 '비밀의 화원'을 18일 시작한다.
'A급 소장품', '안병광 컬렉션'이란 중의적 뜻을 지닌 소장전 'A collection'(12월 25일까지)에는 고미술부터 주요 한국 근현대 작품 17점이 전시된다. 안 회장이 1980년대 초반 제약회사 영업 사원 시절 한 달치 봉급이던 20만원을 주고 생애 처음 산 작품인 금추 이남호의 '도석화'를 시작으로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초충도', 현재 국내 작가 중 가장 작품가가 비싼 김환기의 추상화 '26-II-69 #41', 단색화 대표 작가 박서보의 '묘법 no.060121', 백남준의 비디오 조각 'TV is New Heart', 이우환 'With Winds', 김창열 '회귀 SH930001' 등 한국을 대표하는 거장들의 귀한 작품이 공개된다. 대부분 안 회장의 수장고에서 처음 나온 작품이다.
소장전이 대가들의 묵직한 작품들을 모은 전시라면 '비밀의 화원'전(내년 3월 5일까지)은 젊은 작가 발굴전에 가깝다. "컬렉터로서 이미 알려진 유명 작가의 작품을 사는 것만큼이나 젊은 우리 작가를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는 안 회장의 소신을 보여주는 섹션이다. 1970~80년대생 작가 24명이 참여했다. 미술관 개관 이래 가장 큰 규모로 꾸려진 기획전이다.
기획전‘비밀의 화원’에 출품된 젊은 사진작가 안준의 작품. 건물 꼭대기에 걸터앉은 자신의 모습을 직접 찍은 사진이다. /서울미술관
작은 캔버스 작품을 이어 붙여 창밖을 내다보는 듯한 아련한 풍경을 연출한 윤병운의 회화 작품 'Windows', 캔버스에 석회를 바르고 긁어내 식물을 그린 김유정의 '온기', 산을 그린 투명 비닐 여러 장을 겹쳐 입체적으로 산수화를 만든 진현미의 설치작 '겹 The Layer-0103' 등 젊은 감성이 느껴지는 작품들로 채워졌다.
영국 유명 작가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동화 제목에서 따온 전시 제목 '비밀의 화원'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류임상 학예실장은 "주인공 메리가 부모를 여의고 버려진 화원을 가꾸며 행복을 되찾는 동화 내용처럼 미술 작품으로 가득한 전시장이 어수선한 세상에 행복을 가져다줄 화원(花園) 같은 존재가 되기를 기대하는 의미와, 조선시대 그림을 관장하던 도화서(圖畵署)에서 이름 없이 일하던 화원(畵員)처럼 덜 알려진 젊은 작가를 알리자는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동화 내용에 따라 넝쿨과 창을 달아 정원 분위기로 연출한 전시장은 작품과 관람객 사이의 거리를 좁힌다는 의도에서 디자인됐겠지만, 아쉽게도 완성도가 떨어져 그림 감상에 방해가 된다. 그러나 곰삭은 묵은지같이 그윽한 맛의 대가 작품과 갓 따온 산나물처럼 신선한 신진 작가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풍성한 상차림이다. (02)395-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