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홍 완상
어제 인터넷으로 뉴스를 검색하다 국립공원 덕유산 자생 철쭉꽃이 만개해 연분홍색으로 물들은 소식을 사진과 함께 접했다. 향적봉에서 중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라는데 예년보다 좀 이르게 피었단다. 청년기 대학시절 지리산 장터목 일대에서 본 철쭉꽃이 아슴푸레하다. 훗날 교직 동료들과 황매산 모산재에 올라 철쭉꽃을 완상한 적 있다. 그때가 현충일 전후 초여름으로 기억된다.
내가 산을 즐겨 간다만 이제 해발 천 미터 넘는 산은 언감생심이다. 지난날 지리산이나 한라산이나 소백산까지는 올랐으나 설악산 공룡능선은 예기로만 들었다. 이제는 이런 산들을 오르기는 아예 마음을 비웠다. 요새는 체력과 여건을 고려해 내가 사는 생활권에서 가까운 산들만 찾고 있다. 그런 산들도 수직코스는 피해 둘레 길 정도 걷는 실정이다. 이만도 감사하게 여길 따름이다.
내가 감히 마음뿐이고 가 볼 수 없는 백두산이고 소백산이다. 천지 주변이나 소백산 탐방로에는 초여름이면 피어난다는 아름다운 야생화들이야 나한테는 식물도감이나 인터넷 검색으로 만족하련다. 대신 나는 내가 사는 동네에서 가까운 산으로 올라 철따라 피는 야생화들은 얼마든지 감상하고 있다. 이제 어느 계절 어느 산자락 어느 산모롱이를 돌아가면 무슨 꽃들이 피는지 훤하다.
주로 봄에 피는 야생화가 많기 하지만 여름이나 늦가을에도 철 따라 야생화는 피고 지길 거듭한다. 야생화를 보기가 어려운 겨울에는 들녘이나 강둑을 걷거나 바닷가를 산책한다. 이른 봄 야생화 탐방을 마치면 산기슭 자생하는 산나물을 뜯느라 주말 이틀이 짧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동안 채집하던 산나물이 끝나면 초여름부터 다시 여름 산 야생화 탐방을 시작해 늦가을까지 계속한다.
봄철 들꽃은 저물고 산나물도 철이 지난 오월 말이다. 늦은 봄이라기보다 초여름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듯하다. 한낮엔 뙤약볕이 뜨거워 차라리 구름이 끼거나 비라도 내렸으면 싶기도 하다. 기대대로 어제는 구름 낀 하늘에 비가 부슬부슬 내려주어 더위를 식혀주었다. 오월 마지막 주 화요일 아침이었다. 옅은 구름이 끼긴 해도 출근길 현관을 나서면서 머리에 여름 중절모를 썼다.
1교시 수업을 끝내고 2교시가 빈 아침나절이었다. 나는 으레 내 책상의 컴퓨터 모니터만 살피지 않고 교정으로 내려가 가볍게 거님이 일상이 되었다. 먼저 퇴직한 지인과 안부 전화를 나누면서 도심에서 접하지 못하는 전원생활의 실상을 얘기만으로도 듣게 된다. 지인은 요새 텃밭 닭장에 족제비가 다녀간 현장을 실시간으로 전하면서 어찌 더 살생의 피해를 막아보려고 궁리한단다.
지인과 통화를 끝내고 녹음이 우거진 분수대 주변 뒤뜰을 거닐었다. 초봄에 향기를 뿜으며 피어난 매화가 진 매실나무에는 동글동글한 매실이 달려 고물이 차고 있었다. 푸른 열매를 보기만 해도 시큼한 맛이 떠올랐다. 매실나무와 멀지 않은 곳에는 더 높은 자란 살구나무가 보였다. 살구나무에서는 매실보다 굵은 살구가 조랑조랑 달렸다. 풋살구 역시 매실처럼 신맛이 연상되었다.
뒤뜰에서 별탑원과 경계를 이룬 낮은 언덕은 영산홍이 무더기로 심겨져 자랐다. 영산홍 나이가 오래고 면적이 제법 넓었다. 우리 학교 교화인 영산홍은 그곳 말고도 교정 곳곳에 많이 심겨져 자란다. 교정의 봄꽃이 거의 저물던 사월 말 영산홍에서 붉은 꽃이 피어났다. 그때 꽃이 피질 않았던 영산홍 그루에서 뒤늦게 꽃이 피기 시작했다. 예년과 다르게 영산홍 개화에 시차가 생겼다.
나는 영산홍 꽃을 사진으로 남겨 지인에게 날려 보냈다. “덕유산 철쭉이 예년 유월 초보다 이르게 피었다는 소식이 들린다만, 난 새장 속의 새처럼 갇혀 교정 뒤뜰 영산홍이나 완상하고 있소이다. 지난겨울 추위에 점지 받는 꽃눈이 고생을 해서인지 예년보다 늦게 핍니다.”라는 토까지 달았다. 봄꽃은 저물었고 여름 꽃은 조금 이른 때, 영산홍으로라도 내가 서 있는 현 위치를 알렸다. 18.05.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