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창
캠퍼스 별곡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43호(2023.06.15)
김학천
치의학71-78
재미 치과의사·수필가
미라보 다리·마로니에의 낭만 지나
관악 정문 ‘ㄱ, ㅅ, ㄷ’로 놀던 재미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우리의 사랑도 흘러내린다/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 그 다리를 건너 마로니에 향취를 느끼며 캠퍼스로 들어가던 학창시절, 50년도 더 된 이야기. 프랑스 유학이야기? 아니, 서울 문리대 시절 얘기다.
관악캠퍼스 이전의 서울대는 단과대별로 서울 각 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그 중 동숭동에 문리대와 법대, 미대 그리고 길 건너 연건동에 의대와 치대, 약대가 있었다. 대학본부가 있던 문리대와 대학로 사이에 흐르는 폭 2m가량의 개울을 ‘세느강’이라 불렀고, 그 위 문리대로 들어가는 ‘미라보 다리’ 그리고 주변엔 마로니에 나무들이 있었다.
당시 신입생 교양과정부는 공릉동 공대에 있었지만 의대와 치대는 예과 2년을 문리대에서 보내고 길 건너 본과로 진급했다. 이 덕분에 그런 이국적 기분을 내는 호사를 누렸다고나 할까?
마로니에에는 아름다운 백설의 꽃만이 아니라 가시 또한 있듯 배움의 갈증과 사랑의 불시착으로 기울이던 술잔들, 저항의 대가로 최루탄 가스와 눈물로 범벅이 된 젊은 시절도 이제는 희미한 그림자처럼 아른거리는 추억이 된 채 박건의 노래만 귓가에 맴돌 뿐.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임자 잃은 술잔에 어리는 그 얼굴/아, 청춘도 사랑도 다 마셔버렸네.’ 기욤의 시나 박건
의 노래 모두가 ‘미라보 다리’ 운명이어서였을까? 그나마도 관악산 기슭으로 옮겨간 지금 모든 것은 사라지고 마로니에 공원의 ‘서울대학교 기념비’만이 ‘캠퍼스의 아름다운 낭만과 역사가 잔잔히 흘렀다’고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불현듯 관악캠퍼스의 낭만과 지성을 상징하는 마로니에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샤로수 길’이 있다는 말에 샤로수? 어떤 나무일까 궁금했는데 그런 나무는 없고 서울대 정문 모양 ‘샤’와 가로수의 합성어란다.
‘샤로수!’ ‘시크(Chic)’ 하다고 해야 하나? 요새 젊은이들은 축약어나 초성 자음으로 소통한다는데 이는 저들만의 전용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 우리도 사용했던 바다. ‘ㄱ ㅅ ㄷ!’ 아마도 우리가 선구자이지 않을까 싶다. 당시 남자들은 이를 자조적으로 ‘공산당’ 등으로 패러디했는가 하면 ‘계집’, ‘술’, ‘담배’라며 낭만을 빙자한 치기어린 방종의 시간으로 한림별곡! (퇴계의 호통이 지금도 들리는 듯). 그러자 ‘계집’이란 말에 기분 상한 듯 여성분들 ‘개xx들’, ‘사내’, ‘도둑놈들’이라고 반발했다지 아마.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 4학년) 재학생
그러고 보면 남자들이 ‘권력’, ‘사랑’, ‘돈’에 집착할 때 여자들은 그 ‘출세하신 돈 많은 사내놈들’을 지배하는 것이라 한다니 이 세 자음은 남녀 모두에게 공통분모란 얘기인데 삼원색이 모이면 검정이 되고, 삼원광을 합하면 하양이 되듯 ‘권력, 사랑, 돈’을 다 얻으면 혹자는 ‘성공’이라고 하지만 오히려 공든 탑이 무너진 경우도 본다.
헌데 ‘ㄱㅅㄷ’을 건드리는 자도 허물어지는 것일런가. 유신 시절 서울대를 관악으로 옮기려 하자 역술가들 왈, 관악은 불(火)이라 건드리면 화를 입을 수도 있다 우려했다. 그럼에도 기어코 서울대는 관악산 품으로 위리안치되었고 우연인지 마침 운명을 달리한 대통령의 이름을 파자해 이 때문에 화를 당했다고 풀이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것을 항간의 ‘썰’로 일축할 수도 있겠지만 요는 꿈보다 해몽이요 언어유희랄까.
내친김에 보면 한글 자음 이름 중 규칙에서 벗어나는 3개, ‘ㄱ’은 기윽이 아니라 기역이고, ‘ㄷ’은 디귿이며 ‘ㅅ’은 시옷인 예외… 이러한 ‘예외’란 특별함이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그만큼의 여유를 말함일러니. 해서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라는 것 또한 엄중한 법에서조차도 유연성이나 융통성을 허(許)하는 게 아닐는지.
어찌됐든 이 세 자음은 젊은 시절 우리의 자존심이었고, 우리를 키워낸 희망이었으며 동시에 우리를 서로 이어주는 마음의 다리였다. 그러니 그것을 어떻게 풀어내든 우리는 서울대의 아들딸들이고, 예외의 특별함을 누릴 자격이 있을진저. 그렇다고 선별되었다는 자만심보다는 너그럽게 수용하고 베푸는 성숙함도 잊지 말아야 할 터.
하여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통섭하는 그런 ‘기개’와 ‘사랑’과 ‘도량’을 지닌 장한 동문들과 마로니에 뒤를 이은 샤로수길에 ‘강렬한 희망이여(기욤)’ Shine oN U!
*김 동문은 모교 졸업 후 도미해 USC(서던캘리포니아대) 치과대학과 링컨대 법대를 졸업했다. 미주 한인치과의사협회장을 지냈다. 한맥 문학지에 수필로 등단했으며, 미주 중앙일보, 코리아타운 데일리 등에 칼럼을 연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