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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고궁(古宮)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 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비켜 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
- <거대한 뿌리>(1965. 11)-
해 설
[개관정리]
◆ 성격 : 현실참여적, 소시민적, 반성적, 비판적
◆ 표현
* 억압적 현실에 대항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무능과 허위를 폭로함.
* 자조적 표현을 통해 독자들에게 교훈적 · 반성적 태도를 유도함.
* 대조적 대상들을 설정하여 시상을 전개함.
1연
2연
3 ~ 5연
6연
본질
권력의 부조리 비판
언론의 자유 촉구
불합리한 현상에 반대
권력에 도전함.
비본질
갈비탕 주인에게 욕함.
야경꾼을 증오함.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기
이발쟁이와 야경꾼에게 반항함.
대상
왕궁
월남파병, 붙잡혀간 소설가
포로 경찰
땅주인
갈비
야경꾼
너어스
이발쟁이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 비본질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정작
대적해야 할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방관하고 있는 화자 자신의 허위의식을
폭로하는 말
* 왕궁, 왕궁의 음탕
→ 과거 전제시대 군주들과 지배자들의 권력의 산실로, 타파되어야 할 부패한 권력을
상징함.
* 저 왕궁 대신에 ~ 옹졸하게 욕을 하고
→ 화자는 사소한 일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왕궁으로 상징되는 역사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임.
*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
→ 이러한 욕설과 비어들은 시인 자신의 속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임.
*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하여
→ 여기서 등장하는 소설가는 남정현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남정현은 1965년 발표한
소설 '분지(糞地)'로 인해 반공법으로 기소된 바 있다.
*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앞에 정서로 / 가로놓여 있다.
→ 본질적인 현상을 도외시하는 삶이 시적 화자에게 체질화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 사소한 일상사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나 고난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화자 자신이
현재 왜소하고 보잘것없고 옹졸한 존재임을 강조한 표현임.
*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 방관자적 자세, 실천하지 못하는 소시민적 모습
* 절정 → 비판과 저항의 한복판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 강하게 저항하지 못하고 옹졸하게 반항하는 시적 화자의 자기 반성이 담겨 있음.
* 땅주인, 구청 직원, 동회직원 → 권력이나 힘을 가진 자
* 모래야 나는 ~ 얼마큼 작으냐…….
→ 물음의 형식이지만 자조적인 독백에 해당함.
'모래, 바람, 먼지, 풀'의 자연과 대조되는 화자의 존재론적 왜소함을 자조함.
여기서의 자조적 태도는 자책의 성격이 강하고 독자에게는 강한 울림이 됨.
◆ 주제 → 불의와 부조리에 저항하지 못하는 소시민적 삶의 자세에 대한 비판과 반성
지식인의 무능과 허위 의식에 대한 고발과 자기 반성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문제적 현실에 저항하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만 분개하는 자신에 대한 반성
◆ 2연 : 자유를 위해 부르짖지도 못하면서 사소한 일에 증오심을 불태우는 옹졸한 자신에
대한 반성
◆ 3연 : 시인 자신의 옹졸한 모습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고 함.(포로수용소 시절부터 체질화된 나의 옹졸한 태도)
◆ 4연 : 신변적인 일에만 예민하게 반응하는 옹졸하고 왜소한 근성에 대한 반성
◆ 5연 : 현실 문제에 정면으로 저항하지 못하고 비켜 서 있는 비겁함의 고백
◆ 6연 : 권력을 지닌 자들에게는 저항하지 못하고 힘없는 자들에게는 반항하는 옹졸함에
대한 반성
◆ 7연 : 보잘것없는 존재로서 느끼는 자괴감(자조적인 자기 반성)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제목 그대로 어느날 고궁에 갔다가 나오면서 우리 역사와 현실을 생각해보고, 자신의 삶과 시를 쓰는 행위가 얼마나 한심한 것인지 되돌아보고 비판하는 내용이다. 김수영에게 있어서 현실은 하나의 벽이다. 5 · 60년대 우리 현실은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세계이다.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 현실의 벽을 넘어 시적 완성을 도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실의 벽이 두터울수록 우리의 삶은 그 안에 갇혀 구속받게 되고 인간의 자유의지는 현실의 벽에 부딪쳐 좌절되게 마련이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는 현실의 벽에 부딪쳐 왜소화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여건과 그것을 넘어서 완전한 사회를 구축하려는 시인의 갈등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시이다. 특히 외부 세계를 비판할 때 그것을 직접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못난 자신을 비판함으로써 김수영은 우리의 도덕적 양심을 일깨우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한다.
시대는 변했지만, 여전히 권력을 쥔 자들의 힘의 논리에 따라 국내외적 상황(소설가와 언론에 대한 정치적인 탄압, 월남 파병 등 자유에 대한 전제적 강압 등)이 전개되는 시대적 모순과 부조리를 목도하면서, 부조리의 현실에 맞서지 못하는 비겁성과 일상의 사소한 일에만 분개하는 옹졸함을 지닌 보잘 것 없는 자신에 대해 반성하고 있다. 이 작품은 시인 자신의 소시민적 행동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진지한 자기 반성의 시이다.
[더 읽을거리] : 해설 이희중
자신이 싫어질 때가 있다. 시인은 사라져 버린 왕조의 궁궐을,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둘러 보았고, 그 부근에서 설렁탕을 먹었던 모양이다. 또한 그때 그는 이 일체의 일정에 대해 까닭모를 짜증을 느꼈던 것이다. 그의 짜증 또는 분개는 사라진 왕조의 우울한 유물인 궁궐의 스산함과 설렁탕의 맛없음으로 일차적으로 표출된다. 그러면서 시인은 자신의 분노가 특히 후자에게 더 공격적임을 스스로 분석해 내고, 자신의 옹졸함과 비겁함에 대해 이차적으로 분개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체질적으로 본질을 우회하고 마는, 그리고 비본질적인 것을 단지 편리함과 심리적인 안정 때문에 물고 늘어지는 나약한 지식인의 속성에 대한 짜증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조차도 사실은 비겁함과 옹졸함의 발로일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시인이 진단한 자신의 옹졸함은 뿌리가 깊은 것이다. 자신에 대한 한없는 힐난에 잠겨 들지 않고, 그 뿌리를 짚어가며 사회적, 현실적인 문제로 한 걸음씩 다가서는 비판적 지성의 발길에 이 시의 힘과 재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언론의 자유에 대하여, 월남파병에 대한 태도표명에 대하여,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서 전쟁 때의 수모에 대하여, 이제 시인은 더없이 냉정하게 자신의 태도를 비판한다. 이윽고 그의 자기 비판, 또는 자기 진단은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라는 표현에 귀결되며, 그것이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라는 단정에 이른다. 결구 '모래야 나는 얼만큼 작으냐'는, 일상의 작은 행동을 깊이 파고들어 시인이 이른 자기성찰의 핵심이라 할 만하다.
무서우리만큼 철저하게 수행되는 이 시의 자기비판에서 우리는 시에서 흔히 목도할 수 있는 자기 미화와 과시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이와 같은 작품에서 우리는 시가 진정한 내면의 탐색 과정임을 느낄 수 있다. 이 시를 통해 우리는 시인 김수영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심을 가졌느냐보다는, 얼마나 치열한 정신의 소유자인지를 더 잘 알게 된다. 자신에 대한 냉정한 태도는 바람직한 경우 세상과 삶에 대한 엄정한 태도에 곧바로 이어진다. 이 시가 바로 그렇다.
[작가소개]
김수영(Kim Su-Young) : 시인, 작가
출생 : 1921. 11. 27. 서울특별시
사망 : 1968. 6. 16.
학력 : 연희전문학교 영어영문학 중퇴
데뷔 : 1945년 시 '묘정의 노래'
수상 : 2001년 금관문화훈장,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20세기를 빛낸 한국의예술인
경력 : 평화신문사 문화부 차장, 선린상업고등학교 영어 교사
작품 : 도서 26건
김수영(金洙暎, 1921년 11월 27일 ~ 1968년 6월 16일)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생애>
1921년 11월 27일 서울에서 지주였던 아버지 김태욱(金泰旭)과 어머니 안형순(安亨順)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나, 1968년 6월 16일 사망하였다. 김수영이 태어날 무렵부터 집안이 기울긴 했지만, 유년을 비교적 유복하게 보냈다. 김수영의 백부 김태흥에게 아들이 없었기에 집안의 장손이나 다름없었던지라 김수영은 온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다.
그는 유치원과 서당을 거쳐 8살이 되던 해 어의동공립보통학교(현 서울효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6학년 때 갑자기 급성 장티푸스와 폐렴과 늑막염을 앓아 중학 입시에 실패하고 선린상업학교 전수과에 입학했다.선린상업학교(현 선린인터넷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시인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들을 외워 읽을만큼 영어 실력이 유창했다고 한다.
또한 작품 중 완전히 일본어로만 작성된 글도 있다. 당시 일제 치하에서 성장했던 한국인들은 자의든 타의든 일본어에 유창한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는 친일 행위 같은 것이 아니라, 힘든 삶을 벗어나 살고 싶다는 식의 푸념 같은 글들이므로 오해는 금물. 아울러 김수영이 쓴 일본어 문헌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역사적 가나 표기법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지금은 히라가나로 쓰여야 할 부분에 가타카나가 쓰이는 방식으로 표기되어 있다.
1941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도쿄상과대학에 입학하였다. 몰락해 가는 집안의 기대를 등에 지고 일본 유학을 떠났지만, 대학 입학 자격을 위한 예비학교에 얼마간 적을 두었을 뿐 이내 학업을 포기하고 연극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부터 해방을 맞기까지 그는 연극 활동에 몰입했는데, 그것은 현실 도피에 가까운 것이었다. 해방이 되자 그는 연극에 대한 관심을 접고 비로소 시를 쓰게 된다.
1943년 학병 징집을 피해 귀국하여 가족들과 함께 만주 지린성으로 이주했다가 8.15 광복과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심영 등과 함께 공연을 하다가 1946년부터 본격적으로 시 창작을 시작하였다. 이후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4학년에 편입하여 잠시 수학했으나 중퇴하였으며, 1945년 예술부락에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후 김경린, 박인환과 함께 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표하여 주목을 끌었다.
6.25 전쟁 때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의용군으로 징집되었으나 탈출한다. 갖은 고생 끝에 서울에 다시 내려오는데 성공하였으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하고 패잔병 추적에 나선 경찰에 체포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압송되었다.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는 반공 포로와 공산주의 포로들의 싸움터나 다름 없었다. 포로를 관리해야 할 군은 수용소 내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고, 양 세력 간 자비 없는 패싸움과 유혈 사태는 일상적이었다. 김수영은 공포에 떨며 고초를 겪어야 했으며 3년 만에 민간인억류자로 석방되었다. 이후 통역 일과 잡지사, 신문사를 전전하며 시작과 번역에 전념하였다.
1950년대 문단에서 김수영은 ‘노랭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누구랄 것도 없이 가난하게 살던 당시의 문인들은 원고료를 받으면 집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동료들의 막걸리값으로 풀어야 했다. 그것이 1950년대 한국 문단의 미풍양속이고 관습이었다. 따라서 원고료를 안주머니에 챙겨 꼬박꼬박 집에 갖다 주는 김수영의 행위는 이런 관례를 깨뜨려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어떤 잡지 편집자는 몇 밤을 새워 번역한 원고의 원고료를 받으러 온 김수영에게 대놓고 “당신이 일해 오는 것은 무서운 생각이 든다.”고 모욕적인 말을 내뱉기도 한다.
김수영이 시대와 예술가, 혹은 지식인의 참여라는 문제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고 나름의 활동을 하게 된 것은 4.19 이후의 일이었다. 1960년대로 접어들어서도 김수영은 여전히 양계와 번역료로 생활하면서 버젓한 직장을 가지지 않았으며, 시·시론·시평 등을 통해 우리 사회의 후진성과 허위 의식을 비판하고 진정한 참여를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성격의 글들을 발표하였다. 그의 이러한 성격은 수능 단골이 되는 계기가 된다 .
그토록 왕성한 활동을 벌이던 김수영은 1968년 6월 15일 문우들과 가졌던 술자리에서 귀가하던 중 과속버스에 치였다. 의식을 잃은 채 적십자병원을 실려가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다음날인 6월 16일 유명을 달리 하였다. 신동엽이 「지맥 속의 분수」라는 조사(弔辭)에서 언급했다시피 그렇게 “어두운 시대의 위대한 증인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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