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대는 그대의 상처를 현실로 받아들였고, 가해자와 (적어도 마음속으로나마) 정면으로 마주했으며, 상처를 받은 것이 그대의 탓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대는 부당하게 상처를 받은 것이다. 그대가 다음으로 마주할 ‘필연적’ 단계는 피해 상황이다. 그대는 상처를 받았지 상처를 준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저지른 일이다. 그것은 그대의 제어력을 넘어선 일이다. 그대는 무력했고 희생당했다. 누구나 그대를 가엾게 여겨야 마땅하다.
그리고 그대는 지금 그대 자신을 비참하게 여기며 몸부림치고 있다. 희생당한 표지들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대는 의기소침하고 무심해지고 신음하고 단절되고 이해받지 못하고 아파한다. 그대는 이런저런 마취상태에서-처방약·알코올·폭식·텔레비전·초콜릿과 연이은 강연회와 도박에서-위안을 찾으려 한다. 그대가 불행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동안 자신의 방종이나 피동적·공격적 태도를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또 희생자는 자신이나 자신이 입은 상처가 아닌 주변 사람들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일이 종종 있다. 혹독한 비난, 이런저런 형태의 인종주의, 심하면 아동학대와 배우자를 구타하거나 호된 질책 등이 이 희생 단계에서 표출될 수 있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상처들로 변한다. 그들은 자신의 상처와 혼연일체가 되기 위해 개성과 인격을 내던져 버린다. 그들은 스스로 아픔과 상처를 결부시켜 바라본다. 그들은 대개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알코올 중독자를 부모로 둔 딸이자, 학대받은 어린아이다.”
내 탓 단계를 넘어서 이미 상처받은 자존심은 점점 더 수렁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거름더미 위에 올라앉아 세상을 향해 자신의 고통을 한탄하며 (자신의) 상처를 소금으로 문지르는 욥처럼 되어버린다. 그는 자신의 불행을 도저히 손쓸 수 없는 것으로 굳게 믿어 버리는 까닭에, 도움이 될 만한 충고나 격려조차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의 고통을 이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 ‘내가 겪은 괴로움은 아무도 몰라. 누구도 나의 슬픔을 몰라’가 그들의 주제곡이 되어버린다.
이런 식으로 상처와 고통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대단히 위험할 수 있다. 슬픔과 혼연일체가 될 때, 자신이 고통 그 자체가 되어버릴 때 그 고통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바로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희생 단계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그저 하나의 단계일 뿐 항구적 생활양식으로 굳어지지만 않는다면, 특정한 목적에 보탬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한탄하는 단계와 다르지 않다. 그것은 과거의 상처에 마땅히 치러야 할 어떤 것을 치르게 한다. 하지만 이 단계는 그 자체가 새로운 종류의 고통으로-한탕의 고통, 후회의 고통으로-변하면서 항구적으로 영속될 수 있다. 어린아이에게 상처가 가해졌을 때, 그 어린아이가 자신을 가엾게 여기는 기분을 탐닉하는 나머지 이 일에 푹 빠지거나 오직 이 일만을 위해 살아갈 때도 있다. 이 같은 자기 연민은 어느 정도는 필요하지만 사라져야 한다.
희생 단계는 도움을 구하는 외침이다. 괴상하게 위장된 형태로 표출되기는 해도 동정과 위로와 위안을 호소하는 애원 그것이다. 자기 방종에 빠지거나 죄 없는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것으로 위안을 찾는 희생자는 순수한 위로나 동정 어린 충고를 받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결국 그런 희생자를 포기하며 그가 괴로움에 매달리면서까지 얻고자 했던 위로를 베풀지 않게 된다.
우리가 상처를 입었을 때 표현하고 싶어 했던 반대와 회한, 슬픔을 우리는 희생 단계에서 표현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맨 처음 상처를 입었을 때 마땅히 받았어야 할 동정에 관심을 이제 와서 얻고자 하는 수단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과 함께 우리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희생 단계에 정당화될 수 있는 이 같은 구실이 일시적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이 희생 단계가 생활양식으로 굳어지면서 여러 해 계속되거나 심지어 평생 이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매달림을, 우리가 생각 속에서 만들어 내는 자신의 모습으로 변모해 버리는 그런 일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단계에서 빠져나와 우리의 삶과 온전함에 이르는 과정을 진척시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확실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지원모임에 가입하는 것이다. 일간지를 잘 살펴보면 상처만큼이나 다양한 지원모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상처받은 사람이 그대만이 아니라는 사실, 그대가 겪었던 일을 이해하고 그대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유익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또한 그대와 비슷한 불행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아는 것도 유익하다. 그대의 고통을 건설적이고 교육적으로 이야기하는 (그리하여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그대가 자기 연민과 괴로움으로 허우적거리는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데 필요하다. 그대의 좋은 점과 아름다운 점, 그대가 부여받은 축복을 인정하라. 그리고 목록으로 만들어 편안한 곳에 붙여두고 날마다 새롭게 일어난 일이나 지난날의 축복을 생각나는 대로 기록하라. 슬픔이 그대의 전부가 아니므로 그대는 비관적 마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
희생 단계에서 나타나는 역행 현상 가운데 하나는 무기력이다.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해보라. 천천히 작은 일부터 시작하라. 그대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다른 누군가를 도움으로써 충만함을 체험해 보라.
내가 말하는 ‘구더기 신학’을 멀리하라. 이런 부류의 영성 변론은 불행과 자기 연민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함으로써 거기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한다. 성 마르코는 그의 복음(15,34)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께서 시편 22편 첫머리를 인용하고 계시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시편 22편을 읽다 보면 이 시편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고 있음을 성 마르코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시편은 예수님의 수난 사건을 이야기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성 마르코는 이 시편 첫머리를 인용함으로써 이 시편이 예수께서 죽음 직전에 바치신 기도라는 점을 우리가 깨닫기를 바란다. 따라서 이 기도문 6절과 7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 단계에서의 발언을 감지할 수 있는데, 내가 말하는 ‘구더기 신학’은 이 대목에 나오는 말씀에서 따온 것이다.
“나는 사람도 아닌 구더기, 세상에서 천더기, 사람들의 조롱거리, 사람마다 나를 보고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빈정댑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희생자로 인정하셨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예수께서 희생당하는 상태에 주저앉지 않고 완전하게 되어 감사드리는 상태로 전진 하셨다는 점이다. 우리가 이 시편 전체를 십자가에서 바치신 예수님의 기도로 알고 읽노라면 이 점은 분명해진다. 23절 “야훼를 경외하는 사람들아, 찬미하여라”에서부터 끝부분에 이르기까지 그분은 장차 아버지의 선하심이 온 세상에 퍼져 심지어는 미래에까지 알려지면서 일어날 일을 두고 아버지를 찬양한다. “나의 후손은 당신을 섬기며, 미래의 세대주에게 주를 들어 말하오리다.”
예수님께서 시편 22편을 통해 이 같은 고통을 신학적으로 변호하실 수 있었던 것은 이 고통이 결국 아버지의 영광으로 이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또 바라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희생당하신 상황은 항구적 상황의 자기 연민의 표현처럼 빠져들어 허우적거리는 어떤 것이 아니라 더욱 위대한 일들로 넘어가기 위해 통과하는 그 무엇이다.
기도하는 가운데 그대의 과거와 그 고통을 받아들이라. 그렇지 않고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과거는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 줄 뿐이다. 미래에 대한 하느님의 뜻은 과거의 슬픔으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들, 하느님의 사랑과 자애, 하느님의 도움의 손길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지평이다. 이 도움의 손길은 당신의 한계에 이르러 펼쳐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그대의 슬픔이 그대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라.
참조 문헌:용서의 과정 윌리엄A. 메닝거 지음 -바오로딸-
첫댓글 🌿🙂↕️~'용서' ~!!
참으로 어려운 것 이지요.!!
우리의 마음에 상처와 아픔으로 남아있는 것이 있다면...
매번 반복의 연속이라도 포기를 하지 마세요.
성경의 말씀, 그리고 고해소에서 사제께서 그 죄의 근본을 용서를 하시라고 권하심에 굳게 마음을 잡고서 고해소를 나와서 일상의 생활로 돌아가면, 그 용서의 마음이 점점 퇴색 되어짐을 느끼게 되지요.
그렇게 쉽지않은 용서 ~!!
고해소에서 모든 죄와 마음의 불편함을 주님께 말씀을 드리면 고해 사제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의 대리자로서 주님의 이름으로 나의 죄와 알아내지 못한 죄에 대해서, 모든 용서와 위로를
와 받았음에도,,, 돌아서면
그 감사함을 있어버리는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말씀에서 눈이 먼 10명의 소경들의 이야기의 뜻을 묵상하고 주님께 감사의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 마음에 남겨진 그 대상을 용서 할 수 있도록 용기와 사랑의 마음을 주님께 청해 보십시요.
그리고 ~ 혹시 용서의 굴레에 갇혀서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그 용서의 숨막히는 굴레에서 벗어나, 이 결실의 가을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평화의 빛에 물드는 하루가 되어 지시길 기도로 응원을 드립니다.
~(아멘)~🙏
🙏 감사합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