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261024.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묵상글 ( 10/23 21:25, 06:20.)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전일 21시반 이전 > : 호명환 신부님. 고인현 신부님.
2차 공유할 묵상글< 04시 ~ 05시반, 07시 이후 > :
김찬선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이마르첼리노M 수사님
* 가능하면 위와 같이 할 계획이나 개인 형편으로 그리 알 될 경우가 있습니다..
이 시간대 이외 여러 묵상글을 보시려면 전체공지란 " H. 260707. 카페 운영에 대한 고견을 주세요." 의
2번에 들어 가셔서 안내를 받으세요
** 오늘 묵상글 공유 : 호명환 신부님(10/23 21:25), 고인현 신부님(10/23 21:25)
김찬선 신부님: (06:20 추가). 호명환 신부님: (06:20 추가). 이마르첼리노M 수사님: (10/23 21:25).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계속 여부도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11월 대림시기(11/29) 이후 12월 중순 아니면 , 그 이전이라도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할 계획이오며
카페는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킬 계획이기에, 2)의 회원분이나 제가 가끔 묵상글을
올릴 수도 있을 경우를 감안, 묵상글 뜨락은 유지하도록 하겠습니다.
+++++++++++++++++++++++++++++++++++++++++++++++++++
----------------------------------------------------
261024.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10.23. 15:44
새로운 주춧돌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여러분의 영적 세계의 기초를 흔들 용기를 가지십시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제국과 그리스도 영성
새로운 주춧돌들!
2026년 10월 23일 금요일
영적·공적 리더십 연합(Coalition for Spiritual & Public Leadership)의 공동 창립자인 조안나 아렐라노-곤잘레스는 '제국적 사고'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성찰합니다: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은 자신의 저서 『하느님과 제국(God and Empire)』에서 제국의 네 가지 주춧돌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권력이라고 명명합니다. 앞의 세 가지 권력은 주변부의 사람들을 짓누르는 현실로 만들지만, 이데올로기적 권력은 가장 교묘하고 위험합니다. 그것은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마음과 영혼을 형성하고, 지배하며, 왜곡합니다….
우리는 미국 제국(American Empire)을 떠받치는 힘들에 의해 세뇌되어, 사람보다 이윤을, 상호 의존보다 개인주의를 더 가치 있게 여기도록 가르침을 받아왔습니다. 이러한 가치들을 체화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멀리 밀어내는 결과를 낳습니다. 우리의 내적 제국(Inner Empire)은 허물어지고 다시 세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으로서 더욱 분명하고 뜨거운 사랑으로 응답할 수 있습니다.
내적 제국(Inner Empire)의 네 가지 주춧돌은 우월성, 특권, 증오, 그리고 두려움입니다. 이 네 가지 주춧돌은 타인과 자기 자신을 비인간화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우월성(supremacy)은 우리가 다른 이들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믿음을 뜻합니다. 특권(privilege)은 다른 이들의 희생 위에 우리가 지키거나 무시하는, 노력 없이 얻은 이점을 가리킵니다. 증오(hatred)는 타인(혹은 우리 자신 일부)을 향한 적극적인 적대감을 의미합니다. 마지막으로 두려움(fear)은 자기 보호를 부추깁니다. 우리가 통제, 지위, 안전을 잃을까 두려워할 때, 우리는 자신 안에 여리고 성벽과 같은 벽을 쌓습니다. 그것은 위험으로부터는 뚫을 수 없지만, 동시에 참된 사랑에도 뚫을 수 없게 만듭니다.
이러한 주춧돌들이 영혼을 부식시킨다는 것을 안다면, 무엇이 영혼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요?
마태오 복음 21장 4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히브리 전통의 시편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이 모퉁잇돌이 되었네."(시편 118,22). 이에 대해 아렐라노-곤살레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필요로 하는 주춧돌들과 모범을 몸소 드러내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청사진(blueprint)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 책임, 동정심, 그리고 연결이라는 네 가지 주춧돌로 우리의 기초를 다시 세울 수 있습니다. 이 네 가지 실천은 타인과 자신을 향한 인간다움의 감각을 회복하도록 도와줍니다….
겸손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를 동등하게 바라보게 하며, 모든 이와 피조물, 곧 환경에 대해 깊은 경외와 열린 마음을 갖게 합니다. 겸손은 또한 우리가 무한한 우주 속에서 하느님께서 빚어주신 별가루(stardust)임을 일깨워 줍니다.
책임은 우리에게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가르치며, 서로와 땅을 돌보는 청지기(steward)로 살아가도록 이끕니다.
동정심(compassion)은 공감과 사랑, 선의를 북돋아 주며, 이를 통해 우리는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다정한 온유(tenderness)에 접촉할 수 있게 됩니다.
연결(connection)은 가장 강력한 주춧돌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급진적 연대(radical solidarity), 소속감, 그리고 용기를 가르쳐 줍니다. 연결은 우리를 행동으로 초대합니다. 한 집단에 대한 불의가 발생할 때, 우리의 거룩한 상호 연결성(interconnectedness) 때문에 그것은 곧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의 영적 세계의 기초를 흔들 용기를 가지십시오. 공동체 안에서 자신이 가진 권리, 특권, 권력의 위치를 성찰하고 의식화할 때, 결국 자신과 타인, 하느님, 그리고 지구에 대한 참된 이해를 다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쌓아온 내적 제국(Inner Empires)을 벽돌 하나하나, 믿음 하나하나 허물어야 합니다. 내적 제국은 무너져야 하고, 그래야 연대와 정의, 그리고 사랑이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리처드 로어 신부님과 "활동과 관상 센터(CAC)"를 알게 된 이후, 저는 한때 강하게 붙들고 있던 애국주의적 신념을 내려놓고, 그것을 "온전한 하나됨"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제국을 뒤로 하고, 하느님의 창조가 모든 곳과 모든 사람 안에 드러나는 것을 바라보는 경험은 참으로 큰 은총이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 Bob J.
Reference
Joanna Arellano-Gonzalez, “Dismantling Your Inner Empire,” the Mendicant,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Fall, 2025.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마치 오래된 돌들이 서서히 언덕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제국의 구조물들은 사라져 가지만, 땅에 뿌리내린 예수님의 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
261024.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http://www.ofmkorea.org/ofmhomily/586724
2026.10.23 21:15
2026년 10월 24일 토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3,1-9
사람들이 비극적인 소식을 전합니다.
빌라도가 성전에서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했다는 것,
그리고 실로암의 탑이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사람이 저지른 폭력이고, 하나는 뜻밖의 사고입니다.
그 뒤에는 은근한 물음이 숨어 있습니다.
‘저들이 유난히 큰 죄인이라 저런 벌을 받은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단호히 잘라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불행은 죄의 대가가 아닙니다.
고통받는 이를 두고 ‘무슨 죄를 지어서’ 하고 수군거리는 마음 ―
그 마음이야말로 하느님의 자비를 모르는 마음입니다.
성 암브로시오도 재난을 죄의 심판으로 읽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남을 심판하려는 시선을 돌려 우리 자신을 향하게 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남의 불행을 설명하려 들지 말고, 네 삶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러고는 무화과나무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주인이 삼 년째 열매를 찾았지만 하나도 없습니다.
무화과는 심고 삼 년쯤이면 열매를 맺으니,
삼 년을 기다린 것은 이미 넉넉히 기다린 것입니다.
주인이 말합니다.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그런데 그때 정원사가 나섭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이 짧은 청원 속에 복음 전체가 담겨 있습니다.
정원사는 나무를 변호할 ‘좋은 이유’를 대지 않습니다.
다만 ‘시간’을 청하고, ‘자기 손’을 내어놓습니다.
둘레를 파 뿌리에 숨을 넣고, 거름을 지어 나르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고 계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평화·인내 주간의 마지막 날에, 이 비유는 한 주간을 매듭짓습니다.
우리가 인내할 수 있는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올해만 더’ 하는 인내를 입고 살기 때문입니다.
열매 없는 나 때문에 그분께서는 삼 년을 기다리셨고,
또 한 해를 청하시며 거름을 지고 오십니다.
그 인내를 입은 사람은 남을 쉽게 잘라 내지 못합니다.
성급히 판단하고 관계를 끊어 내는 대신,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는’ 사람이 됩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평화가 자랍니다.
다만 잊지 맙시다. 정원사도 “올해만”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느님의 인내는 무한하지만, 우리의 시간은 무한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오늘,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내일부터 시작될 ‘사랑과 기쁨’의 열매도
바로 이 거름 위에서 자라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남의 불행을 ‘죄의 대가’로 판단하지 않는가?
나는 열매 없는 사람을 쉽게 잘라 내려 하지 않는가?
나는 누군가의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는’ 사람인가?
나는 그분의 인내에 오늘 응답하고 있는가?
주님,
남을 심판하는 눈을 거두어 주소서.
잘라 내기 전에 거름을 주는 정원사가 되게 하시고,
저에게 베푸신 그 인내로 오늘 회개하게 하소서.
아멘.
----------------------------------------------------
261024.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24 04:11
- 영적 성장이란?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당시 급살맞아 죽은 사람들처럼 죽는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분명히 경고이지 엄포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엄포쯤으로 생각하고 묵살하면 안 되겠고,
경고를 중히 받아들여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겠지요.
그렇다면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이란 어떤 것입니까?
제 생각에 회개의 열매란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런데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가르침이 옳다고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며
이것을 오늘 에페소서에 적용하면 은총을 받기만 하지 않고
은총을 받아 나도 성장하고 공동체도 성장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선 내가 먼저 그리스도의 경지로 성장하고,
공동체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은혜의 양에 따라 우리는 저마다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성장과 관련하여 제가 이해한 것은 이렇습니다.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구성원인
각자가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라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또 각자에게 주어진 은총을 잘 받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은총은 욕심을 채우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를 정도로 성장하라고 주어지는 겁니다.
이것은 엄마가 자녀에게 밥을 주는 것이 그저 돼지처럼 음식을 탐하여
뒤룩뒤룩 살이나 찌라고 주지 않고 여러모로 성장하라고 주는 것과 같지요.
지혜로운 동물 애호가는 너무 살이 쪄 걷지 못할 정도로 먹이를 주고는
유모차에 반려견을 태우고 다니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은총도 이런 지혜로운 동물 애호가의 사랑과 같습니다.
욕심을 채우라고 은총을 주지 않으시고,
자기 배만 불리라고 달란트를 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과 달리
은총을 받되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받을 것이고
받은 은총은 자신과 공동체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데 씁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은총을 잘 받아 영적 성장을 이룬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여간해서는 상처를 잘 받지 않는 마음이 건강한 사람,
어린애처럼 단것만 좋아하고 입에 쓴 약은 싫어하지 않는 사람,
웬만해서는 고통에 굴하지 않고 끝내 목표한 것을 이루는 사람,
어떤 고통이 있어도 사랑을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강인한 사람,
이런 사람을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봤듯이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른 사람이라고 하는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란 아버지의 사랑으로 충만한 경지,
그래서 어떤 고통에도 사랑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닐까 묵상하는 오늘 저입니다.
----------------------------------------------------
261024.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10.24. 04:58
하느님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기 위해 은총으로 주어진 지금!
이 세상 사람들 중에서 자신의 공덕이나 선업으로 구원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요? 아마 아무도 없지 않지 않을까요?...
모르는 일이긴 합니다만, 우리가 이 믿음의 여정을 해가면서 어떻게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근원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그분의 사랑과 선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근본적인 희망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
물론 우리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저지르는 오만가지 악을 생각한다면 사랑과 선에 의한 죄의 용서와 구원이라는 것은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가 지은 죄에 상당하는 보속을 해야만이 용서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한 보속을 정말로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그럴 수 없다고 봅니다. 사실 하느님의 선과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보속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생각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보면 죄에 대한 보속을 하는 행위 자체도 하느님의 은총이 아닐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묘한 논리인 것 같지만, 바로 이것이 복음의 핵심인 것입니다!
요한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그러고 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숨, 즉 당신의 영을 불어넣어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다."(요한 21,23).
여기에 바로 복음의 핵심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하느님 사랑의 영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용서받고 구원된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라는 시간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여전히 변모할 자그만 시간! 그러나 깊고 큰 시간이라는 지금이 은총으로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단지 하느님의 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시간이 바로 지금인 것입니다!
…
욥의 '위로자들'(친구들)은 사실상 위로를 주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욥의 불행이 그의 죄 때문이라고 계속 주장했습니다. 당시에는 악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욥기(사실은 저자의) 힘은 바로 이 해석을 단호히 거부하는 데 있습니다. 욥은 이 문제와 씨름하다가 거의 복음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계심을. 그분께서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욥 19,25). 그러나 약 500년이 지난 뒤에도, 그의 깊은 통찰은 아직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동시대인들은 여전히 빌라도의 희생자들이나 실로암 탑에 깔려 죽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을 받았다고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악의 문제에는 손쉬운 '답변'이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응답'이 있을 뿐입니다. 곧 구속자가 실제로 오셔서 땅 위에 서셨습니다. '답변'과 '응답'은 언뜻 같은 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다릅니다. 답변은 오직 이성적 차원에서 오고 가는 것이지만, 응답은 인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악의 문제에 주신 응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함께 살고 죽으시고 부활하 사건입니다.
복음의 두 번째 부분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합리적인 해결책은 세 해 동안 열매를 맺지 못한 그 나무를 베어 버리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밭지기는 여전히 희망을 품었습니다. 적절한 돌봄을 받으면 열매를 맺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최종 심판은 아직 아닙니다. 변화를 향한 희망이 남아 있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단순히 무화과나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관한 것입니다. 언제나 변화의 희망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떻게 변화되는가? 이성은 극단에서 극단으로 쉽게 뛰어가지만, 참된 변화는 주어진 현실 안에 머물며 인내를 배우는 과정에서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배우는 때는 바로 지금, 하느님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기 위해 은총으로 주어진 지금인 것입니다!
----------------------------------------------------
261024.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6720
2026.10.23 19:26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시는 하느님
“하느님도 한 분이시고 만물의 아버지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며 만물 안에 계십니다.” (에페 4,6) 이 말씀은 하느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그리고 그분의 사랑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우리의 존재와 삶을 하나로 연결해 줍니다.
1.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 — 모든 존재의 근원이신 사랑
하느님께서 만물 위에 계신다는 것은 단순히 높은 곳에서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시며, 그 어떤 존재에도 종속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아 존재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어떤 것에도 갇히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초월성은 세상과의 거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건이나 한계에도 매이지 않고 모든 것을 사랑하실 수 있는 무한한 자유를 드러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공로나 자격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사랑받을 만하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는 불안과 다른 사람보다 높아지려는 욕망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집니다.
2.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느님 — 관계 안에 흐르는 사랑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추상적인 관념으로 남겨두지 않으십니다. 피조물을 통하여 당신의 선과 아름다움을 드러내시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통하여 그 사랑이 전달되게 하십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친절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를 경험하고, 누군가의 용서를 통하여 그분의 무상적인 사랑을 깨닫습니다. 나에게 건네진 작은 배려와 말없는 돌봄, 나의 부족함을 품어 주는 형제의 인내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자리는 특별한 종교적 체험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날마다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과 관계의 현장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일 뿐 아니라, 그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도록 자신을 내어주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통하여 누군가에게 다가가실 수 있습니다. 나의 눈으로 누군가의 아픔을 바라보고, 나의 손으로 그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며, 나의 침묵과 인내를 통하여 그 곁에 머무르게 하십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칸 삶에서 말하는 도구적 존재의 의미이며, 관계 안에서 실현되는 선교의 본질입니다.
3. 만물 안에 계시는 하느님 — 모든 존재를 품고 계시는 사랑
하느님께서는 만물의 근원이실 뿐 아니라, 모든 존재가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도록 붙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현존은 우리가 기도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을 알아차리지 못할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만물 안에 계신다는 것이 만물 자체가 곧 하느님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은 구별되지만,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창조적 사랑에 의존하여 존재합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태양과 달, 바람과 물, 불과 땅을 형제자매로 부를 수 있었던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피조물을 하느님으로 숭배한 것이 아니라, 피조물 안에 새겨진 창조주의 선과 아름다움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한 시선은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도 바꾸어 놓습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 아무런 보답도 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 역시 하느님의 사랑으로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잘못을 정당화하지 않으면서도, 그 존재의 존엄을 부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보는 관상은 마침내 모든 존재를 존중하고 돌보는 형제성으로 열매 맺습니다.
4.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차리는 기도에서 사랑을 살아가는 선교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멀리 계시는 하느님을 가까이 불러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께 마음을 돌려, 그 사랑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멈추고 머무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오늘 누구를 통하여 사랑받았는지, 어떤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선을 경험했는지, 그리고 그 사랑이 나를 통하여 누구에게 전달되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랑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감사하게 되고, 감사하는 사람은 자기중심적인 소유에서 벗어나며, 자유로워진 사람은 자신을 내어줄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기도는 관상에서 멈추지 않고 관계의 변화로 이어집니다. 에페소서 3장 17절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믿음을 통하여 우리 마음 안에 사시고 우리가 사랑에 뿌리를 내릴 때, 우리의 삶은 그분의 사랑이 드러나는 자리가 됩니다.
5. 만물 위에서 만물 안으로, 그리고 나를 통하여 너에게
이 말씀을 프란치스칸 영성의 중심에서 바라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와 십자가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신성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그 영광을 움켜쥐지 않으시고 인간의 가난한 자리까지 내려오셨습니다. 육화의 겸손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사랑의 방식이며, 십자가의 수난은 그 사랑이 끝까지 자신을 내어주는 방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높아지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필요 앞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물 위에 계신다는 사실은 우리를 경외와 겸손으로 이끌고, 만물을 통하여 일하신다는 사실은 우리를 감사와 봉사로 이끌며, 만물 안에 계신다는 사실은 우리를 관상과 보편적인 형제성으로 이끕니다. 결국 이 세 가지는 분리된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 펼쳐지는 세 차원입니다. 만물 위에 계시는 하느님은 사랑의 근원이시고, 만물을 통하여 일하시는 하느님은 사랑의 흐름이시며, 만물 안에 계시는 하느님은 모든 존재를 살리시는 사랑의 현존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흐름 안에 우리도 초대받았습니다.
내가 너를 통하여 전달된 하느님의 선으로 사랑받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 사랑에 응답하기 위하여 너의 필요를 발견하고 말없이 채워 주는 것. 바로 그곳에서 기도는 삶이 되고, 관상은 형제성이 되며, 사랑받은 존재는 사랑을 전하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찾는 것은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를 품고 계신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며 그 사랑이 나를 통하여 너에게 흘러가도록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 곁에 머무는 기도이며,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우리의 관계 안에서 다시 태어나시는 자리입니다.
----------------------------------------------------
261024.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6722
2026.10.23 19:46
장성호의 가을, 아버지 자비의 품에 안겨
먼저 떠난 이를 그리며
가을바람이 소슬하게 불어옵니다. 눈부시도록 맑은 쪽빛 하늘에는 새하얀 구름 몇 점이 한가로이 떠가고, 가을빛을 가득 머금은 장성호는 드넓은 가슴을 열어 찾아온 이들을 말없이 품어 줍니다.
호숫가 데크길을 걷다가 나무 그늘 아래 놓인 의자에 앉습니다. 햇살은 잔잔한 물결 위에서 부서지고 서늘한 바람은 나뭇잎을 흔들며 가을이 깊어 가는 소리를 들려줍니다. 문득 먼저 떠난 이들이 생각납니다. 세월의 저편으로 멀어진 얼굴들, 이제는 부를 수 없어 더욱 그리워지는 이름들입니다.
그리움을 담아 썼던 시에 작은 선율 하나를 입혔습니다. 곁에 앉은 이와 함께 조용히 노래를 부릅니다. 낙엽은 말없이 기억 위에 내려앉고 눈을 감으면 그리운 얼굴 떠오르네. 아, 기억에서 멀어진 이여……
노랫소리는 가을바람에 실려 호수 저편으로 흘러가고, 떠난 이를 향한 그리움은 어느새 곁에 있는 이와 나누는 따뜻한 사랑이 됩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가을날입니다. 나무 그늘은 지친 몸을 쉬게 하고 탁 트인 호수는 답답했던 마음을 열어 줍니다. 떠가는 구름은 붙들지 않는 자유를, 떨어지는 낙엽은 기꺼이 내어놓는 가난을, 잔잔한 물결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넉넉한 품을 가르쳐 줍니다. 그렇게 한참을 머물다 보니 삶의 뜨거운 열기로 달아올랐던 가슴도 어느덧 알맞게 식어 갑니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마음, 붙들려 하지 않고 밀어내지도 않는 마음, 그리워하면서도 슬픔에 잠기지 않고 떠나보내면서도 사랑을 잃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제야 비로소 가을이 들려주는 고요한 말씀을 듣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이토록 아름다운 피조물들을 통하여 오늘도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나무 그늘로 쉼을 주시고, 바람으로 마음을 어루만지시며, 햇살로 생명의 온기를 전하시고, 드넓은 호수로 당신의 넉넉한 자비를 말없이 보여 주십니다. 그 사랑은 무엇을 요구하지도, 누구를 가려 찾아오지도 않습니다. 그저 모든 것 위에 햇살처럼 내려앉고 바람처럼 스며들며 흐르는 물처럼 아낌없이 베풀어집니다.
아, 얼마나 놀라운 은총입니까. 나는 그저 의자에 앉아 바라보고, 듣고, 느끼고, 그 사랑 안에 머물렀을 뿐인데 온 세상이 아버지의 다정한 손길로 다가옵니다. 먼저 떠난 이를 그리워하는 마음도, 지금 곁에 있는 이와 나누는 노래도, 바람에 흔들리는 잎새 하나까지도 모두 그분의 자비 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 순간 더 이상 무엇을 구할 것도, 무엇을 붙들 것도 없습니다. 그저 살아 있음이 감사하고, 함께할 수 있음이 고마우며, 이 아름다운 세상에 잠시 머물도록 허락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깊은 곳에서 찬미가 흘러나옵니다.
기도는 어쩌면 이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 무엇을 말씀드리는 시간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쏟아지고 있는 사랑을 알아차리고 그 사랑 앞에서 넋을 잃는 시간입니다. 가을바람은 여전히 소슬하고 쪽빛 하늘에는 흰 구름이 흘러갑니다. 장성호의 고요한 물결 앞에서 나는 오늘도 피조물의 아름다움 속에 스며 있는 아버지의 무상한 자비에 그만 넋을 잃고 맙니다.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말없는 찬미 하나가 피어납니다.
아버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당신께서 만드신 세상도,
그 안에 머물게 하신 우리의 삶도,
그리고 사랑했던 모든 이들의 기억까지도.
모든 것이 당신의 자비입니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