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드는 개는 어떻게 해보겠으나 …
해 빠지고 덜 더울 때쯤 개천가 산책로에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때쯤, 제법 세차게 흐르는 맑은 물에서 살짝살짝 올라오는 선들선들한 냉기는 에어컨 바람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개천가에는 주인 따라 나온 개도 많습니다. 주인에게 끌려가는 놈, 주인 끌고 가는 놈, 수레를 타고 가는 놈, 포대기에 싸여 주인 가슴에 매달려 있는 놈, 서로 냄새 맡는 놈, 한 다리 들고 찔끔거리는 놈 …, 참 많은 개들이 저녁의 산책을 즐깁니다.
그런데, 개 키우는 것도 유행이 있는지 큰 개가 많아진 것 같더라고요. 여전히 몰티즈 푸들 포메라니안 요크셔테리어 등등 커봤자 내 종아리께에도 못 미치는 앙증맞고 귀여운 것들이 많지만 요즘엔 내 무릎을 지나 허리까지 올라오는 큰 개들도 눈에 자주 띕니다. 몇 종류는 이름을 알기도 하는데 골든 리트리버, 래브라도 리트리버, 시베리안 허스키, 콜리, 로트와일러 그리고 진돗개입니다.
대부분 늠름하고 점잖고 미끈하니 잘 생겼지만 나는 이런 큰 개들은 항상 주의하며 지나갑니다. 혹시 갑자기 저놈이 달려들면 어떡하나를 걱정하는 거지요. 작은 놈들이야 한 번 걷어차면 깨갱하고 물러나겠지만 큰 놈은 다르지요. 영화에서처럼 흰 이빨이 희번덕이는 아가리를 왕창 벌린 채 주변 사람 목을 노리고 뛰어오르는 장면을 상상하면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실제로 그런 사건이 자주 일어났지요. 뉴스에 났던 그런 사건 중 동네 나들이하던 할머니가 큰 개 세 마리에게 쫓기다 물려서 숨진 것과, 엄마 품에 안겨 있던 젖먹이가 방 안에서 키우던 큰 개에 물려 엄마 눈앞에서 세상을 떠난 끔찍한 사고는 여러 해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기억에 생생합니다.
산 바로 아래 있는 우리 아파트에서 산에 오르다 보면 산 중턱 약수터에서 흘러 내려온 물로 가득해지는 작은 연못이 있습니다. 산에 오르는 사람들 보기 좋으라고 누가 오리 몇 마리를 넣어뒀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모두 목을 뜯긴 채 죽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듣기로는 산 뒤편 사람 발길 안 닿는 곳에 모여 사는 들개(사실은 주인들이 내다 버린 개)들 짓이 분명하다는군요.
나는 체구 작은 여성분들이 데리고 나온 큰 개들을 더 조심합니다. 무슨 일로 개가 날뛰게 되면 그분들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지요. 개를 끌고 다니는 게 아니라 개에게 끌려가는 것 같은 분도 여러 번 봤습니다. 개 성격을 고쳐주는 TV 프로그램에서 몸집이 결코 작지는 않은 편인 어떤 아주머니가 커다란 개를 끈에 묶어 산책시키다가 이 개가 무엇 때문인지 갑자기 뛰쳐나가는 바람에 넘어져 크게 다쳐 누운 모습을 본 후에는 여자분들이 끌고 나온 큰 개를 더 조심하고 있습니다.
웬만큼 큰 개는 종류 불문 입마개를 씌우고 데리고 나오면 좋겠는데, “우리 개는 안 물어요”라고 믿는 건지, “나쁜 개는 없다”라는 말을 믿는 건지, 큰 개에게 입마개를 씌워 끌고 나온 사람은 딱 한 번 봤습니다. 입마개 없이 주인을 끌고 다니는 개들이 만에 하나 나에게 덤벼들 때 나름 세워둔 대책이 있긴 합니다. 국민학교 4~5학년 때 만화에서 본 건데 매우 그럴듯합니다. 그러니 60년이 지났는데도 그 장면을 기억하고 있지 않겠어요.
형제가 길을 가는데 귀가 뾰족한 큰 검정 개가 나타나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면서 형제를 위협합니다. 흰 이빨을 드러내며 가까이 오자 동생은 무서워서 자지러지게 웁니다. 개가 겁먹은 동생에게 계속 으르렁대자 형은 교복 윗도리를 벗어 왼팔에 둘둘 감은 채 동생을 가로막고 나섭니다. 그 순간 개가 아가리를 활짝 벌린 채 펄쩍 뛰어 형제를 공격합니다. 형은 교복으로 둘둘 만 왼팔을 앞으로 내뻗습니다. 개가 그 팔을 무는 찰나 형은 오른팔로 개의 목을 감아 조릅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입니다. 결국 개의 숨통이 멎습니다. 형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동생을 이끌고 가던 길을 갑니다. 이 만화 장면은 그 자체로도 멋지지만, 교훈도 꽤 있는 것 같아요. ‘호랑이에게 물려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 혹은 ‘유비무환’, '임기응변' 같은 가르침 말입니다. 그것 때문에 그 장면을 여태 기억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같은 여름에는 옷이 얇잖아? 둘둘 감아봤자 개 이빨 파고드는 거 못 막을 텐데?” 맞습니다. 그래서 여름에는 무대책입니다. 산에 갈 때 쓰는 지팡이를 들고 다닐까 생각해보지만 가늘고 약해서 큰 소용이 안 될 것 같아요. 지팡이 손잡이에 날카로운 것을 숨겼다가 개가 달려들면 삿갓 쓴 방랑검객처럼 휙 뽑아 휘두르는 상상도 해봅니다. 아니면 어깨에 메는 손가방 같은 것에 물병을 넣었다가 개가 덤벼들면 빙빙 돌리면서 방어하는 것도 방법이 될 것 같기는 합니다.
그나저나 개는 대책을 이리저리 세워보겠는데 사람은 어떡하지요? 묻지마 칼부림이 횡행하는데 어떻게 방어하지요? 방호복 입고 방검장갑을 끼고 다니나? 앞에서 덤벼들면 그나마 피할 수 있다고 쳐도 칼을 꼬나들고 뒤에서 달려드는 건 어떻게 피하지? 오만 걱정이 들지만 답이 없습니다. 집에 박혀 지내는 것뿐.
TV를 켰더니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놀기 좋은 곳이 참 많아졌더라고요. 출렁다리, 유리다리, ‘삐까뻔쩍’ 전망대, 케이블카, 집라인, 각종 모험 체험 시설, 이런 전시관, 저런 기념관. 외국 안 나가도 즐길 거리, 볼거리가 너무 많은 나라. 시마다 군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비슷한 거 만들었다가 녹슬고 허물어진 채 방치되고 있는 것도 많습니다. 운영 중인 곳도 찾아오는 사람 없이 불만 훤히 켜져 있을 때가 많다지요.
몇십억, 몇백억짜리 사업이 흉물 덩어리로 남아 있는데 그 돈으로 묻지마 칼부림 예방에 썼더라면, 마음이 아프고 몸이 가난해 울분을 풀고 싶었다는 그들 마음의 병 고치고, 조금이라도 낫게 먹이고 입히면서 “너에게도 기회가 올 거란다. 그 기회 지나가지 않도록 마음으로 몸으로 준비 단단히 하자꾸나”라는 생각으로 그 돈 투자했더라면 칼부림 줄이고 증오범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칼부림이 난무하는 영화, 누가 더 잔인한 미소를 짓고 누가 더 냉혹한 말을 내뱉는가를 자랑하는 영화, 마약을 보여주는 영화. 이런 것들도 이젠 안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많이 봤잖아요. 그쪽 관계자 여러분들, 이젠 다른 걸로 영상 미학을 추구하면 안 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