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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9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루카 11,1-4
세일즈 하듯 기도하라
한 수도자가 산에 올랐다가 그만 길을 잃었는데, 사람이 살지 않을 듯한 깊은 산중에서 다행히
인가를 찾아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그런데 그 집의 주인이 하는 기도를 듣고, 수도승은 그만 어처구니가 없어졌습니다.
“신이시여, 어제도 저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사람이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혹시 등이 가렵거나 허리가 아프시진 않은가요.
그럼 제가 등도 긁어드리고 허리도 만져드릴 수 있을 텐데.
혼자 하기는 힘든 일이잖아요.
혹은 발을 씻겨드리면 참 좋을 테고요….”
수도승은 그만 더 참지 못하고 기도를 멈추게 했습니다.
“이봐요, 잠깐. 날 살려준 건 감사하지만, 하느님께서 등이 가렵거나 허리가 아프다고요?
대체 어떻게 그런 무례한 언사를 한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기도서를 주며 기도하는 자세와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이튿날 수도승은 그 집을 떠나왔습니다.
다행히 길을 찾아든 수도승이 산을 거의 내려온 찰나, 그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대는 이제, 내게서 가장 가까운 이마저도 멀어지게 만들었구나!”
기도는 하느님께 무언가 청하고 얻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주님께서 주시려던 은총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기도는 마치 세일즈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넥타이를 사려고 넥타이 판매대로 갔는데 점원이 와서는 “무얼 찾으세요?”라고
물으면 어떨까요? 당연히 넥타이에 관심이 있으니 그리로 오지 않았겠습니까?
벌써 그 사람은 ‘이 가게는 손님에겐 관심이 없구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여러 넥타이를 들었다 놓았는데 파란색 넥타이를 가장 오래 집고 있었다면 뭐라 해야 할까요? “파란색의 다른 상품들을 제가 찾아볼까요?”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노란색 넥타이를 손에 감으며 예쁘죠?”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파란색을 원해요.”라고 할 때 “우리는 그런 재고가 없고, 요즘 누가 파란색 넥타이를 합니까? 그건 유행이 지났어요!”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상품을 사러 온 사람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냥 나가려고 할 때 관심도 없는데
쓸데없이 멜빵을 보여주며 “이건 관심 없으세요?”라고 한다면 어떨까요?
그 가게는 절대 오지 않을 것입니다.
손님은 가게 점원이 무엇을 원하는지 압니다. 바로 판매로 돈을 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만 주장하면 사려고 하는 사람은 기분이 나쁩니다.
사려는 사람도 무언가 얻는 게 있어야 합니다. 바로 영광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되기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당신이 아버지라 불리고 당신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당신 나라가 임하고 당신 뜻이 이루어지며 당신이 매일 양식을 주시는 분이시고 당신 때문에 이웃을 용서할 수 있으며 당신 때문에 죄를 짓지 않게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얼마 전에는 반려견을 계속 데려오며 병이 낫게 안수해 달라고 청하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사람에게 안수하고 있는데 개에게 또 안수하려니 좀 그랬습니다. 물론 반려견에 너무 의지하고
있기에 강아지가 나으면 좋은 일이라 몇 번은 해 드렸습니다.
그러나 매일 그러는 건 좀 그래서 이제 마지막이라고 했더니, “개가 나으면 50만 원 드리려고 했는데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저는 개에게 안수하여 돈 버는 사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어떻게 은총을 얻어낼 수 있을까요? 주님의 기도를 의미를 음미하며 정성껏 바치면
우리의 자세가 주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게 되어서 많은 은총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미국 시카코에서 태어난 ‘워너 솔맨’(Warner Sallman: 1892–1968)은 미국이 자랑하는 화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얼굴”이라는 유명한 예수님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이 담긴 그의 그림책은 1940년도에 500만 부 이상이 인쇄되었고,
오늘날까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가 있었는데 1917년 결혼하고 얼마 안 된 젊은 나이에 중병에 걸렸습니다.
의사가 “당신은 임파선 결핵입니다.”라고 진단하고 “당신은 길어야 석 달 살 것입니다.”라고 통지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솔맨의 마음은 절망적으로 되었습니다.
유명한 가수였던 그의 아내는 그때 임신 중이었으므로, 솔맨은 아내에게 더욱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고, 곧 태어날 아이를 생각하면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괴로웠습니다.
그가 몹시 괴로워하며 매일같이 절망에 빠져 신음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그를 위로하며 말했습니다.
“여보! 3개월밖에 못 산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3개월을 허락해 주셨다고 생각하고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그리고 아무도 원망하지 맙시다.
3개월이 얼맙니까?
천금 같은 그 기간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 봅시다.
3개월이나 되는 기간을 살게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솔맨은 아내의 말을 곰곰이 생각한 끝에 더 이상 원망과 불평의 말을 하지 않고, 아내의 말대로 남은 3개월 동안 오직 감사하며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아주 작은 일부터 감사를 시작하면서 모든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애에 마지막 작품이라 생각하고, 예수님의 얼굴을 그렸는데 그에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3개월이 지났는데도 몸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몸이 더 건강해져서 병원에 가서 다시 진단해 보았더니, 임파선 결핵이 깨끗하게 사라진 것입니다.
기도는 무언가를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청하는데 나의 것만을 청해서는 안 됩니다.
먼저 나의 청을 들어주면 그분이 무엇이 좋은 건지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청을 들어주되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청을 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강요하듯 물건을 파는 것에만 집중하지 말고 전문 세일즈맨처럼 그 물건을 사면 손님에게 무엇이 좋은지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장사가 저절로 잘 될 것입니다.
은총도 그렇게 끊임없이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9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11,1-4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복음 선포에 매진했던 바오로 사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박해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바오로 사도의 회개 이후의 삶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요즘 미사 중 봉독되고 있는 갈라티아서는 아주 좋은 참고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갈라티아서를 집필할 당시 갈라티아 지방에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유랑 선교사들이 찾아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새 신자들에게 할례와 율법 준수를 너무 강하게 요청하다 보니,
갈등과 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 선조들에게 상투를 자르라고 윽박지르는 것과 비슷한 경우일 것입니다.
당시 어떤 대쪽같은 양반은 상투를 자르기 전 내 목부터 자르라고 외치기도 했었습니다.
당시 갈라티아 공동체 사람들은 코린토 교회 못지 않았습니다.
세례를 받았지만, 윤리 도덕적 타락, 우상 숭배나 미신 행위 등 과거의 악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강조하며, 복음에 충실할 것을 권고하기 위해
갈라티아서를 집필한 것입니다.
이 서한을 통해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꼐서 자신에게 큰 사명을 하나 주셨는데, 그것은 이민족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밝힙니다.
할례 문제로 하도 시끄럽다 보니, 바오로 사도는 이 부분에 대해서 단호하게 선을 긋습니다.
“구원은 모든 사람에게 조건 없이 베풀어지며, 유다인이 아닌 이민족 사람들에게는 할례가 의무가 아닙니다.”
갈라티아서를 통해 우리는 초대 이방인들을 위한 최고 목자로서 자리매김하기까지 바오로 사도가 겪었던 숱한 고초와 갈등을 잘 읽을 수 있습니다.
사실 회심 이전 유다 지도층 인사들이 젊고 똑똑한 청년 유다인 바오로에게 걸었던 기대가 상당했습니다.
유다교 미래를 이끌 든든한 인재로 일찌감치 낙점했었겠죠.
그런 바오로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낙마를 하고, 실명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리스도교로 극적인 회개를 하게 되는데, 그로 인한 유다 지도층 인사들의 실망감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당사자 바오로는? 특별한 방법으로 주님의 사도가 된 것에 감지덕지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유다인들로부터는 이미 배신자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적극적이고 열렬한 환영을 받았는가?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가장 앞장 서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고 구속시키는데 선수였던 그가 하루 아침에 그리스도교인이 되니, 의아한 시선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혹시 저게 일부러 저러는 것 아닐까?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섬멸하기 위한 이중 작전을 쓰고 있는 것을 아닐까?’
그런 결코 만만치 않은 양측 분위기를 감지한 바오로 사도였기에, 더 백방으로, 더 헌신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민폐를끼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자신의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그렇게 십년 이상 이런 저런 박해와 오해 속에 자신이 만나고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던 바오로 사도는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그리스도교 공동체 지도자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간 자신이 해온 일에 대해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교계 지도자들에게 공인을 받습니다.
사정이 좋든 나쁘든, 주변 분위기가 내게 호의적이든 적대적이든 상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온몸으로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복음 선포에 매진했던 바오로 사도의 사목적 열정과 믿음에 큰 감사와 박수를 보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강론>
(2024. 10. 9. 수)(루카 11,1-4)
<기도는 ‘말’이 아니라 ‘마음’과 ‘삶’으로 바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1-4)”
1) ‘주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한 기도’이고, 동시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우리가 실행하겠다고 다짐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주님을 위한 기도’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위한 일’은, 사실은 ‘우리를(나를) 위한 일’입니다.
그 두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나 자신이 구원받으려고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것은 ‘나를 위한 일’인데, 그것은 나를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이기 때문에 ‘주님을 위한 일’이 됩니다.>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라는 말에서 ‘기도하는 것’이라는 말은, ‘기도하는 방법’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기도의 예문’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기도하는 방법에 관한 지침”이기도 하고, “기도문의 모범”이기도 합니다.
2) ‘기도’는 ‘주님의 뜻’을 ‘내 뜻’에 맞추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내 뜻’을 ‘주님의 뜻’에 맞추는 일입니다.
주시지 않을 것을 달라고 떼쓰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뒤의 11절-12절에,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뜻에 따라 풀어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생선을 주려고 하는데 아들이 생선은 싫다고 하면서 뱀을 달라고 하면, 어느 아버지가 마음을 바꿔서 뱀을 주겠느냐?
아버지는 아들에게 달걀을 주려고 하는데, 아들이 달걀은 싫다고 하면서 전갈을 달라고 하면, 어느 아버지가 마음을 바꿔서 전갈을 주겠느냐?”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으로 보여도 실제로는 기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빈말’, 또 ‘생떼’를 부리는 ‘고집’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아버지의 뜻에 합당한 것인지,
또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좋은 것’이 무엇인지, 내가 모를 때가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는 나에게 좋은 것이고, 선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청하는데, 그것이 정말로 좋은 것이고 선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할 일이 바로 ‘아버지의 뜻’을 묻는 ‘기도’입니다.
무엇을 청해야 할지 모르니까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장난 같지만, 말장난이 아니라 진리입니다.>
3) ‘주님의 기도’에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가
들어 있는 것은, 우리에게는 ‘먹고사는 문제’도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가난한 서민들이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힘들어 하고, 고민하는 것을 업신여기거나 ‘폄하’하면 안 됩니다.
아직도 ‘일용할’ 양식 자체가 없는 이들이 많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부귀영화를 청하는 기도가 아니라, ‘오늘’ 생존하기 위한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기도입니다.
<‘내일’이라는 시간은 주님의 시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내일의 양식’까지 청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에 입술로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라고 기도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세속에서의 출세와 성공을 바라고 있다면, 또 남들보다 더 부유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면, 그것은 ‘거짓 기도’이고, ‘빈말’입니다.
4) ‘용서’의 경우, 너무나도 분하고 억울해서, 용서를 하고 싶어도 용서가 안 되는 경우도 있고, 원인과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어떤 사람을 너무 미워해서 그 사람을 용서할 마음이 아예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용서를 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경우에, ‘주님의 기도’는 ‘용서할 힘’을 달라고 청하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안 되니까 주님께 도와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나 용서할 마음이 아예 없는 경우에는,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것은 ‘거짓 기도’를 바치는 것이고, 그런 경우에는 ‘주님의 기도’를 바칠수록 죄만 자꾸 늘어나게 됩니다.
5) ‘기도’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반대로 표현하면, 신앙인이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기도를 잘해야 합니다.
말을 잘한다고 기도를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이, 또 오래 바친다고 기도를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양’이 아니라 ‘정성’입니다.
기도는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바치는 것이고,
‘삶’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입술로는 기도를 정말 잘하는데,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면, 또 ‘삶’이 신앙인답지 않다면, 그것은 다음 경고 말씀에 해당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내 삶이 곧 기도다.” 라고 자기 마음대로 우기면서, 기도를 전혀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경우는 백 퍼센트 위선자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