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이 걸렸는가
얼이 중천에 초승달 걸렸는데 쏟아질 듯
반짝이는 별 무더기에 마음이 시리네.
명절에 맏이네는 큰놈 중간고사라고
차례상 앞에 궁둥이 두어 번 조아린 뒤
그 길로 내빼더니 전교 1등은 따놓은 당상이렷다.
둘째네는 보리와 콩도 분간 못 하는 코흘리개를
데리고 명절에 구라파로 역사여행 간다더니
이순신보다 나폴레옹 생애를 줄줄 외는 신동이 나겠구나.
막내 며눌애는 당직이라고
우는 시늉을 하더니 혹 몸져누운 것이냐.
요즘처럼 황망한 세상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삼 형제가 약속이나 한 듯 감감하니 아비 어미 죽어
달포가 지나도 부고 낼 자식이 없을까 두렵도다.
내 오늘 단톡을 소집한 것은 중대차한 전할 말이 있어서다.
너희 어머니, 즉 내 아내가 쓰러졌다.
당나라 군대에 쫓기듯 차례상 걷기 무섭게
달아난 자식들이 남긴 설거지와 빨래, 먼지 더미를
사흘 내내 쓸고 닦더니 새벽녘 밭일 간다고 나서다
고꾸라져 응급실로 실려 갔다.
의사 왈, 고혈압, 당뇨, 갑상선 약을 달고 사는 노인네가
끼니는 거르고 중노동만 하니 몸이 배겨내겠소.
그 와중에도 자식들 심란하게 전화 걸지 말라는
너희 어미를 보며 내 가슴을 쳤노라.
저 여자는 무슨 죄 있어 평생 구두쇠 서방 잔소리에
망나니 사내자식들 키우면서 쓰다 달다 말이 없는가.
제사도 1회, 명절도 1회로 줄였거늘 그도 못마땅해
입이 댓 발 나온 며눌애들 눈치 보느라 전전긍긍하는
저 여인은 바보인가 천치인가!
두 늙은이 굽은 등으로 다리 절며, 고추며 열무를
수확해 앞앞이 택배를 올려보내도 고맙다 전화 한 통 없는
자식들은 원수인가 애물단지인가 하여 결단했느니,
앞으로 우리 집안에 명절은 없다.
제사도 없다.
칠순이고 팔순이고 생일잔치도 막살할 것이며,
어버이날이니 크리스마스니 하여 요란 떨 일은 더더욱 없다.
고로 상속도 없다.
우리 부부 가진 거라곤 벼룩 콧등만한 집 한 채뿐이니
무덤에 지고 갈지언정 너희한테 물려주지 않겠다.
군청 말단으로 취직해 봉급은 쥐꼬리만 하니
손끝 맵고 짜게 살림하는 여인 만나 아끼고
쟁여온 덕에 옴팡간 장만한 재산이다.
이를 남김없이 갖다 팔아서 바다 건너라고는
울릉도 밖에 못 가 본 저 늙은 아내와 세계 곳곳을
주유천하 하며 몽땅 써 버리고 죽으련다.
나의 아내에게도 면세점이란 곳에서 외제 화장품,
외제 손가방도 사줘 보고,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연애했다던
불란서 카페에 가서 쓰디쓴 커피도 한 잔씩 마셔볼 것이며.
천국과 한 뼘 거리라는 융프라우에 올라 온 세상 발 밑에 두고
사진 한 방 멋지게 남겨보련다.
우리가 돈을 쓸 줄 몰라 허리띠 줄라맨 줄 아느냐.
영어를 몰라 해외여행 마다한 줄 아느냐.
한 치 앞 안 보이는 세상, 앞길 구만리인 자식들에게
한 푼이라도 보탬이 될까 봐 이 악물고 살아온 죄 밖에 없느니,
그런 우리한테 꼰대니 틀딱이니 손가락질하는
인심이 기가 차기만 한데, 내 자식도 별수 없다,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진다.
내 비록 날 샌 올삐미 신세이나 가장(家長)의 이름으로
남기는 마지막 부탁은 부디 덕과 예로써 세상을 살거라.
의로운 것이 아니면 머리카락 한 올도 취하지 말고
자식들은 재주보다 덕이 앞서는 사람으로 키워라.
사람 잡아 가두느라 온 나라가 시끄럽고
권세가들 헛된 꿈과 아전들 잔꾀에
백성들 곳간엔 해 넘길 양식이 없나니.
밤낮 궁둥이에서 비파 소리 나게 놀러만 다니다간
쌀독이 바닥날 터.
사방에 승냥이 떼들 덤빈다고 분기탱전하지도 말거라.
적을 두려워하며 대처하는 자는 이길 것이니,
세상에 나만 한 사람 없다고 믿는 자는 망하리라.
아닌 밤 홍두깨 유언에 요강 뚜껑으로 물 떠먹는 낯빛일 것 없다.
바람처럼 와서 구름처럼 머물다 가는 것이 인생.
천지간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창공을 훨훨 나는
두 마리 학처럼 세상을 떠돌 것이니.
어느 날 우리 내외 부고가 들려와도 슬퍼하지 말거라.
오뉴월 물 오이처럼 쑥쑥 자랄 내 손주들
못 보는 것이 다만 애통할진저.
※ P.S: 여행 갈 때 등산복 좀 입지 말라고 눈 흘긴 게 둘째더냐.
너희가 멀쩡한 바지를 찢어 입든 꿰매 입든
내 일절 참견하지 않았느니,
우리가 빤스만 입고 비행기를 타든
머리에 태극기를 두르든 괘념치 말라.
- 행복편지 열다섯 번째 이야기 / 박시호 발행 중에서
첫댓글 이런 넋두리를 해대는 늙은이는 같은 늙은이라도 듣기 싫지만, 이렇게 풍자적으로 늘어놓으니 시원하고 웃음이 나네요. 한 번 재미삼아 읽어보시길....ㅎㅎㅎ
말이 풍년이네요. 누구에게나 닥쳐올 일들.
비닐하우스에 살아도 부부간에 서로위하고 자식며느리 서로고맙고 나누어 줄것이 무엇이 있나 생각하고
형제간에 서로 위하며 손주들 아직도 품안에 있으니 마음 편한 두 늙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