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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韓中日近現代史 원문보기 글쓴이: 정암
6. 외몽골 독립하다
출처: http://blog.naver.com/atena02/220607415823
일본의 항복을 전후로 중국 역사상 전례없이 온갖 사안에 직면한 장제스 정권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첨예한 쟁점 사항은 '외몽골의 승인'이었다.
몽골 지도(위지도에서 러시아와 중국 사이에 몽골이 있고 몽골은 중앙에 고비사막을 경계로 위쪽은 외몽고가 있고 아래로 내몽고로 구분된다)
* 몽골의 역사
오랫 세월 몽골 사막의 넓은 초원에 흩어져 유목 생활을 하며 살아가다가 12세기 초 테무진(징기스칸)이라는 걸출한 영웅이 등장한 뒤 중국은 물론, 유라시아 전역을 제패하며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몽골족은 욱일승천하던 기세만큼이나 빠르게 쇠락했다. 1368년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은 대원제국의 수도 칸발릭(Qan Baligh, 칸의 도시라는 뜻으로 현재의 베이징)을 점령했다. 대원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토곤테무르(妥懽貼睦爾)는 가족들과 잔존세력을 이끌고 선조들이 살았던 북쪽의 초원으로 도망쳤다.
같은 시기 중앙 아시아에 걸쳐 난립해 있던 여러 몽골 제국들 역시 내분과 권력투쟁, 반란으로 대부분 와해되면서 세계 제국 몽골의 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징기스칸의 후예들은 과거의 영광을 완전히 잃었다. 그들의 시계 바늘은 유목 시대로 되돌아간 채 몽골 초원에서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자신들끼리 피비린내나는 투쟁을 벌였다.
중원을 잃은 채 황랑한 북쪽으로 쫓겨간 몽골 족은 고비사막을 경계로 크게 세 개로 나뉘었다. 고비 사막 이남에는 내몽골이, 이북에는 알타이와 한가이 산맥을 중심으로 할하 몽골이, 알타이 산맥 서쪽에는 오이라트 몽골이 있었다.
수백년 동안 몇 명의 위대한 칸들이 중국의 침공을 저지하면서 몽골 부족의 통합을 시도했지만 너무 광활한 공간에 흩어진 채 원시적인 목축 생활을 이어가던 수많은 부족들을 결집시키는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누구도 몽골 부족을 하나로 뭉쳐서 강력한 중앙 집권 국가를 이루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중국의 가장 변방인 요동 지린성에서 누르하치라고 불리는 한 인물이 등장했다. 그는 건주 여진의 한 부족장에 불과했지만 그야말로 징기스칸에 비견될 만한 영웅이었다. 강력한 리더쉽으로 여진족을 빠르게 통합한 다음, 1616년 "후금"의 건국을 선언하고 스스로 칸의 자리에 올랐다. 1625년에는 무크텐(현재의 선양)을 점령하고 후금의 수도로 삼았다. 그는 만주에서 명군을 연이어 격파하고 만리장성 이남까지 위협하는 한편, 동몽골을 침략하여 많은 몽골 부족들을 복속시켰다.
몽골의 마지막 칸으로 차하르 일대의 몽골족들을 지배하고 있던 릭덴 칸(Ligden Khan)은 반격에 나섰지만 대참패를 당했다. 1632년 4월, 만주족의 2대 칸이자 청 태종 홍타이지는 대군을 지휘하여 릭덴 칸의 정복에 나섰다. 사전에 이 사실을 안 릭덴 칸은 감히 맞서 싸우지 못한 채 징기스칸의 위패를 가지고 서쪽으로 도주했지만 천연두에 걸려 죽고 말았다. 1636년 내몽골의 16개 아이막(Aimag, 대칸 아래에 있는 몽골 부족 단위, 오늘날에도 몽골 공화국은 아이막을 가장 큰 행정단위로 사용하고 있다.)의 귀족들은 후금의 수도 무크텐에 모여 홍타이지를 몽골의 대칸으로 인정하였다. 내몽골의 모든 부족들이 만주족에게 무릎 꿇은 것이다. 이들은 만주 팔기의 하나가 되어 청 태종의 중원 정복의 선봉에 섰다.
만주족은 내몽골에 이어 1644년에는 베이징을 점령하여 중국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그들의 정복욕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못했다. 다음 목표는 고비 사막 이북의 할하 몽골이었다. 할하 몽골의 귀족들은 오이라트 몽골과 연계하여 청의 공격에 맞서려고 했지만 청의 회유와 거듭된 내분, 강력한 지도자의 부재로 제대로 대항할 수 없었다. 게다가 오이라트 몽골을 통일하고 준가르 칸국을 건설한 갈단 보식트(喝爾丹)는 청에 대항하는 강력한 몽골 제국의 건설을 꿈꾸고 1688년 할하 몽골의 정복에 나섰다.
준가르와 청 사이에서 양면 압박을 받게 된 할하 몽골 귀족들은 회맹을 열어 결국 청나라에 항복하기로 결정하였다. 갈단은 할하 몽골의 태반을 손쉽게 점령했지만 1696년 직접 8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친정에 나선 강희제의 공격을 받았다. 그는 서전에서 청군의 일부 부대를 격파하기도 했지만 결국 청군의 우세한 병력과 화약무기 앞에서 연전연패했다. 궁지에 몰린 그는 독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하지만 갈단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준가르와 청의 전쟁은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 양측은 수십년에 걸쳐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그런데 준가르 칸국에서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자 건륭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1755년 3월 5만명의 병력으로 총공격에 나섰다. 준가르의 유력 왕족들과 귀족들은 청군 앞에서 투항하였다. 준가르의 마지막 칸 다와치(Davaach)는 7천명의 군대로 마지막 싸움을 벌였으나 압도적인 숫적 열세 앞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되면서 준가르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일부 귀족들을 중심으로 반청 저항 운동을 벌이기도 했으나 청군의 초토화 전술 앞에서 1758년까지 완전히 진압당했다. 건륭제는 반란군을 잔혹하게 처형하는 한편, 오이라트 부족들에 대한 철저한 민족 말살 정책을 명령했다. 약 60만명 정도로 추산되었던 오이라트 부족들은 청군의 대학살과 전염병, 기아로 사실상 민족 전체가 소멸하고 말았다. 청은 이 새로운 영토를 신장(新疆)이라고 불렀다. 오이라트 몽골이 소멸하면서 그 동안 이들의 지배를 받았던 위구르 족들이 청을 상대로 기나긴 독립투쟁을 벌이게 된다.
몽골 전체를 정복한 청나라는 고비사막 이남의 내몽골과 이북의 외몽골을 분리하여 통치하였다. 이는 과거 대제국을 건설했던 강력한 유목민족이었던 몽골 부족들이 결집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또한 이들이 서로 경계를 넘지 못하도록 "월계금지(越界禁止)"를 실시하여 몽골족들의 분열을 고착화시켰다. 이로 인해 몽골족들은 20세기 초반까지도 소규모 부족단위, 씨족단위로 분리된 채 청의 변방으로서 가장 낙후되고 미개한 사회로 남게 되었다. 대다수 몽골족들은 오로지 목축업과 원시적인 가내 수공업에 의존하여 생활해야 했고 무거운 공납과 부역에 시달리며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다. 19세기 말 외몽골을 방문했던 외국인 여행자들은 과중한 공납과 막대한 빚으로 외몽골 민족 전체가 절멸지경에 내몰렸다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편전쟁 이래 청나라의 힘이 점차 기울면서 중국은 열강들에게 침탈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러시아가 북만주와 외몽골을 잠식해 나가자 1895년 외몽골 귀족들은 모스크바로 비밀리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외몽골이 독립할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복잡한 국제 정세와 열강들의 속내를 모르는 순진한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었다. 영국과 일본의 견제를 받고 있던 러시아는 외몽골의 요청을 수락할 처지가 아니었기에 "참고 기회를 기다려라"라고 의례적인 대답만 했을 뿐이었다.
* 외몽골의 독립 선포
1911년 8월 외몽골의 라마교 수장인 제8대 복드 젭준담바 호탁트(Bogd Jibzundamba Khutugtu)을 중심으로 독립투쟁을 주도하던 정치 지도자들이 이흐 후레(Ikh Khuree, 지금의 울란바토르)에서 비밀 회합을 가졌다. 이들은 자력으로 당장 청조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독립 전쟁을 시작하기에는 역부족이므로 다시 대표단을 러시아로 보내어 자금과 무기 지원을 받은 후 외몽골의 여러 부족들에게 독립을 선언하기로 결정하였다.
러시아는 중국과의 관계와 극동에서의 현상 유지를 위해 당장 외몽골이 독립하기보다는 명목상 중국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자치국이 되는 방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중국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 청조가 무너지자 외몽골의 독립 지도자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1911년 11월 30일 독립을 선언하였다. 또한 이흐 후레를 니스렐 후레(Niislel Khuree)라고 이름을 바꾸고 수도로 삼았다. 외몽골은 복드 젭준담바 호탁트를 몽골의 황제로 추대하여 신정 일치의 국가가 되었다.
몽골의 새로운 국가 원수인 복드 황제는 티벳의 달라이 라마와 유사한 몽골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였다. 외몽골이 독립하자 내몽골 역시 도처에서 독립 투쟁이 일어났다. 내몽골의 49개 호쇼(부족 단위) 중에서 35개 호쇼가 외몽골에 귀속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징기스칸 이래 600년만에 모든 몽골족을 아우르는 거대한 나라가 탄생할 것처럼 보였다.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위안스카이가 내몽골로 군대를 보내어 독립운동을 탄압하자 외몽골은 1만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차하르성을 점령하고 만리장성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몽골인들의 열망은 1912년 4월 25일 러시아와 일본이 비밀리에 중국에서의 세력 분할에 대해 합의를 하면서 무산되었다. 러시아는 외몽골을, 일본은 내몽골을 각각 자신의 세력권으로 인정키로 하였다. 또한 신생 중국 역시 몽골의 독립은 결코 승인할 수 없음을 고수하였다. 니스렐 후레에서 몽골과 러시아 양측 대표단이 회담을 열어 몽골을 완전한 주권국으로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러시아는 "독립보다는 자치권을 얻는데 노력해야 한다"라면서 거부하였다. 몽골 정부는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 구미 열강 9개 국가에 승인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묵살당했다. 결국 몽골 정부는 300만 루블의 원조와 외몽골에 대해서만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 조건으로 내몽골에 주둔한 모든 몽골군을 철수시키기로 합의하였다.
그런데 러시아는 외몽골을 제외한 채 위안스카이 정부와 교섭하여 외몽골의 독립을 취소하고 자치국으로 격하시키기로 결정하였다. 러시아의 목적은 몽골의 독립이 아니라 외몽골에서 자국의 정치적, 경제적 지위를 유지하는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5년 5월 25일 러시아와 외몽골의 국경 마을인 캬흐타에서 체결된 러시아-중국-몽골 삼국 조약에서 몽골은 러시아의 압박에 못 이겨 이를 받아들여야 했다. 대신 몽골은 실질적인 중국의 내정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것과, 자체 정부와 군대를 보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은 돤치루이(段棋瑞) 북양 정부는 몽골의 후견국인 러시아가 제1차 세계대전과 혁명으로 몰락하여 적백 내전의 혼란에 빠지자 캬흐타 조약을 무시하기로 했다. 그는 1919년 11월 자신의 측근인 쉬수정(徐樹淨)을 서북주비사(西北籌備使)로 임명하고 600명의 군대를 니스렐 후레로 파견하였다. 당시 복잡한 중국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돤치루이는 몽골 문제를 한방에 해결하여 반대파들로부터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일 생각이었다. 일본 육사 출신으로 책략가에다 야심이 넘치던 쉬수정은 몽골 정부에 대해 자치권을 포기하고 투항하던가, 그렇지 않으면 복드 황제와 각료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베이징으로 압송하겠다고 협박하였다. 또한 중국군을 동원하여 복드 황제의 사원을 포위하고 당장이라도 공격할 준비를 하였다.
쉬수정의 군대는 소수에 불과했지만, 그렇다고 러시아의 도움 없이 중국과 전면 전쟁을 할 수는 없었다. 복드 황제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약 2천여명 정도였던 외몽골의 군대는 무장해제된 채 해산당했다. 1919년 11월 22일 외몽골 정부는 공식적으로 해산되어 중국에 다시 복속되었다. 쉬수정은 거창한 해산식을 거행했다. 몽골 관료들의 관인은 모조리 회수당했고 복드 황제는 중화민국 대총통의 사진에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몽골인들에게는 그야말로 굴욕이었지만 덕분에 쉬수정은 중국인들로부터 "서북왕"이라는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지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20년 7월 베이징을 놓고 베이양 군벌 간의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7월 14일부터 18일까지 진행된 짧은 전쟁에서 돤치루이의 안후이파 군대는 우페이푸가 지휘하는 즈리파 군대와 펑톈군벌 장쭤린의 협공을 받아 나흘만에 완패하고 말았다. 몰락한 돤치루이는 톈진의 일본 조계로 도망쳤고 쉬수쟁 역시 외국 공사관에서 숨어지내다 일본으로 망명했다. 쉬수쟁은 이후 쑨원과 손을 잡고 재기를 꿈꾸려고 했지만 5년 뒤인 1925년 12월 즈리파 군벌 펑위샹(馮玉祥)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했다. 돤치루이를 대신해 즈리파와 펑톈파가 중국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들 역시 금새 권력을 놓고 분열되어 내전을 벌이는 등, 중국은 혼전의 연속이었다. 그 와중에 몽골에 대한 중국의 관심 또한 멀어졌다. 중국의 정치적 상황을 지켜보면서 몽골 독립파들은 다시 봉기할 준비를 하였다.
* 소련의 지배 아래 들어가다
1920년 10월 2일 로만 폰 운게른 슈테른베르크(Roman von Ungern-Sternberg) 남작이라는 백군 출신 지휘관이 이끄는 800여명의 군대가 몽골 국경을 침입했다. 적백내전에서 패배한 채 패잔병들과 함께 몽골로 들어온 그는 몽골의 독립을 지원하겠다는 명목으로 몽골인들을 규합했다. 약 2천여명 이상으로 늘어난 그의 군대는 1921년 2월 4일 중국군을 니스렐 후레에서 쫓아내고 점령하였다.
운게른은 복드를 다시 황제로 추대하고 몽골 정부를 부활시켰다. 복드 황제와 몽골인들은 그를 "영웅"으로 추앙했지만 금새 본색을 드러내어 마치 점령군처럼 행세하면서 온갖 노략질과 학살을 일삼는 강도떼로 변했고 얼마 뒤에는 복드를 강제로 폐위시켰다. 정신분열증에다 광기 어린 그에게 살해된 몽골인은 전체 인구의 10%가 넘는 무려 8만명에 달했고 그야말로 "미친 남작(Mad Baron)"이라고 불리며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운게른이 니스렐 후레를 점령한 채 몽골의 지배자 행세를 하는 동안, 이전에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수립된 몽골 최초의 사관학교인 호지르볼란(Hkujirbulan) 군사학교 출신 담딘 수흐바타르(D. Sukhbaatar) 장군은 몽골 독립군인 인민의용군을 창설했다. 이들은 1921년 3월 18일 새벽 카흐타에 주둔하고 있던 2천여명의 중국군을 기습하였다. 숫적으로는 월등히 우세했지만 사기도 낮은 오합지졸에 불과한 중국군은 변변히 싸우지도 않고 무기를 버린 채 도주했다.
이어서 수흐바타르의 인민의용군은 소련의 지원을 받아 니스렐 후레로 진격했다. 소련군 1600명을 포함해 공격군은 약 1만명에 달했고 대포 12문과 기관총 156정으로 무장했다. 또한 약간의 장갑차와 항공기도 지원받았다. 운게른의 오합지졸 군대는 약 4천여명에 대포 10문을 가지고 있었지만 1921년 6월부터 7월 초까지 니스렐 후레 북쪽에서 벌어진 여러번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7월 6일 니스렐 후레는 해방되었고 울란바토르(몽골어로 붉은 영웅)라고 바꾸었다. 운게른은 도망쳤지만 결국 포로가 되어 9월 15일 시베리아로 끌려가 군사재판을 받은 후 총살당했다.
1921년 7월 9일 복드 황제는 다시 군주로 추대되어 사회주의 입헌 군주제라는 독특한 형태로 몽골 인민정부가 수립되었다. 이후에도 약 1년에 걸쳐 외몽골 여기저기에서 할거하고 있던 백군 잔당들을 토벌하여 이들을 모두 소탕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자력이 아닌 소련의 원조에 의존해야 했기에 상전이 중국에서 소련으로 바뀌었을 뿐, 외몽골은 완전한 자주 독립국이 아닌 실제로는 소련의 위성국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소련의 간섭으로 민족주의 계열의 혁명가들은 쫓겨나고 코민테른 출신의 친소파들이 주도권을 쥐면서 소련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심화되었다. 1924년 5월 20일 몽골의 정신적 지주였던 복드 황제가 승하하였다. 몽골 인민정부는 새로운 황제를 세우는 대신 군주제를 폐지하고 완전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였다.
외몽골은 소련식의 전체주의 국가가 되어 몽골의 모든 전통적인 문화와 사유재산을 폐지시켰고 왕실과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이로 인해 몽골 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기아에 허덕였다. 게다가 1930년대 말 소련 전체를 광기로 몰아넣은 스탈린의 대숙청은 외몽골에도 고스란히 여파가 미쳤다. 부총리이자 몽골 인민혁명당의 실권자인 초이발산(Khorloogiin Choibalsan)은 소련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숙청을 실시하였다. 정부 고위 각료들부터 일반 민중까지 수많은 이들이 일본군의 첩자, 반혁명분자, 인민의 적으로 몰렸다.
1937년부터 1940년까지 당과 정부, 군에서 약 2만명이 처형당했으며 6천여명이 감옥에 갇혔다. 내무총리 겸 외무장관인 펠지딘 겐딘을 비롯해 일부 고위 각료들은 소련까지 끌려가 총살당했다. 몽골군 장군의 80%이상이 체포되었고 이들의 대부분은 처형당했다. 또한 1만 7천여명의 승려가 체포되어 1만4천여명이 처형당했다.
스탈린에게 외몽골은 중국과 일본에 대한 자국의 안보를 위한 전략적 완충국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경제적 원조는 거부하면서 외몽골군을 소련군의 괴뢰군으로 취급하고 국가 재정의 절반 이상을 국방비로 지출토록 하였다. 그에게 고분고분 복종하지 않는 몽골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소련으로 끌려 와 소련인의 재판을 받고 처형되거나 강제 수용소에 갇혔다. 외몽골은 소련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한편, 중국은 외몽골에 대한 주권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북양 정부의 군벌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광저우에서 망명 정부를 이끌고 있던 쑨원 역시 소련 코민테른 극동지국과의 면담에서 "외몽골은 중국의 영토이며 몽골의 독립은 거론 대상이 아니다"라고 못을 박은 채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다. 당시 레닌의 특사로서 국공합작의 결성을 주도하던 요페(Joffe)는 결국 쑨원에게 외몽골을 중국에서 독립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어차피 내전의 혼란에 빠져 있는 중국이 당장 이 문제로 소련을 귀찮게 할 일은 없기에 고집센 쑨원과 굳이 갈등을 빚기보다는 천천히 시간을 두고 해결하면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또한 우페이푸가 장악하고 있던 베이징 군벌 정부 역시 1924년 5월 소련과의 협상에서 외몽골에 대한 주권을 인정받았다. 물론 외몽골은 소련이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기에 중국이 소련군의 철수를 요구하거나 실질적인 주권을 행사할 방법은 없었다. 겉으로는 중국의 주권에 간섭하지 않는 것처럼 하면서 실리를 취하겠다는 것이 바로 소련의 방식이었다.
북벌전쟁에서 승리하여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뒤 장제스 정권은 외몽골과 티베트는 중국의 고유한 영토이며 중앙 정부의 승인 없이 외국과 국교를 맺는 등의 행위는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1931년 5월 12일 중화민국 임시약법 제1조에도 "중화민국의 영토에는 몽골과 티베트를 포함한다"라고 명시되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외몽골 문제를 해결하려면 외몽골의 실질적인 지배자인 소련과 교섭해야 하는데 그럴 겨를이 없었다. 1931년 9월 16일 만주사변이 폭발한 것이다. 게다가 중일전쟁의 발발로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중국은 소련의 원조에 점점 의존해야 했고 자연스레 외몽골에 대한 거론은 뒤로 밀려났다.
더욱이 중국은 외몽골을 소련으로부터 회복하기는 커녕, 내몽골마저 허잉친-우메즈 조약 등으로 일본에게 야금야금 먹히는 실정이었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중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 관동군은 내몽골 전체를 점령한 뒤 뎀치그돈로프(德穆楚克棟魯普, 일명 덕왕)을 비롯해 일부 몽골 귀족들을 규합해 1937년 11월 22일 "몽강연합자치정부(蒙疆聯合自治政府)"를 수립하였다. 덕왕과 내몽골의 민족 지도자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몽골인들이 독립할 수 있도록 일본이 도와주기를 원했지만, 일본에게 그들은 침략의 이용물에 불과했다. 따라서 몽강국은 만주국과 다를 바 없는 친일괴뢰정권이었고 주요 권력은 일본인 고문들이 장악하였다.
옌안의 중국 공산당 역시 이중적이었다. 중공은 창설 당시부터 민족 자결의 원칙에 따라 소수 민족들의 독립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7년 10월 류사오치는 "항일을 위해서는 소수 민족들의 자결권과 독립을 도와주어야만 비로소 여러 소수 민족들이 힘을 모을 수 있다"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다음해인 1938년 6월 제6차 공산당 중앙대회에서 마오쩌둥은 "소수민족들은 한족과 연합하여 통일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라고 말을 바꾸었다. 이 때부터 중공은 더 이상 공식적으로는 "자결"이니 "독립"이니 하는 말을 거론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들의 혁명 전쟁에 필요할 때에만 애매모호한 말로 선동하면서 이용하는 식이었으며, 국공내전에 승리한 후에는 오히려 소수 민족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고 "하나의 중국" 원칙을 내세워 신해혁명 이래 반독립국이었던 티베트에 군대를 보내어 도로 합병하였다.
* 내몽골은 왜 독립하지 못했나
일본과의 전쟁으로 뒷전으로 밀려났던 외몽골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으면서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양국의 쟁점 사항으로 떠올랐다. 외몽골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면서도 그동안 국제 사회의 눈치 때문에 드러내고 속내를 나타내지 않았던 스탈린은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이 되자 더 이상 본색을 숨길 필요가 없게 되었다.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은 소련군의 대일전쟁 참전을 요청하는 루즈벨트를 상대로 그 대가로 외몽골과 만주에 대한 막대한 이권을 보장받았다. 4개월이나 지난 뒤에야 이 사실을 통보받은 장제스는 격분하여 외무부장 쑹쯔원을 급히 모스크바로 보냈다.
6월 30일부터 8월 10일까지 진행된 중-소 회담에서 스탈린은 고압적인 태도로 쑹쯔원을 얄타회담의 밀약을 수락하라고 몰아붙였다. "우리가 일본과 전쟁을 하려면 동맹국이 필요하다. 외몽골도 그 중의 하나이다. 또한 다롄과 뤼순은 훗날 일본이 부활할 때를 대비해 우리가 반드시 확보하지 않으면 안된다. 기간은 30년이다. 중국 역시 우리의 개입을 원할 것이다." 쑹쯔원은 스탈린에게 일본이 패망한 뒤에 극동에서 소련의 안보를 위협할 국가는 없다는 점에서 말이 되지 않는다고 반박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양측의 입장이 워낙 완강했기에 협상은 여러 차례 결렬되었다. 쑹쯔원은 장제스에게 보고하는 한편, 트루먼에게도 얄타 밀약이 중국의 주권을 침해한다며 밀약을 철회해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트루먼은 "소련의 참전은 이미 기정 사실이며, 미국으로서는 어쨌든 얄타 회담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대답했다.
트루먼이 소련의 손을 들어주는 이상 스탈린에게 중국의 동의 따위는 명목에 불과했다. 중국이 어떻게 나오건 얼마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소련군의 참전이 임박하자 중국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없었다. 스탈린은 "중국이 협약 체결을 서두르지 않으면 결국에는 동북도 내몽골도 중공의 손에 넘어갈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결국 쑹쯔원은 소련과 끝까지 대립하여 그들에게 무한대의 자유를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하되, 다른 대가를 얻어내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다.
쑹쯔원이 모스크바에서 협상 중이던 8월 9일 새벽 0시, 소련의 대군이 만주국의 국경을 넘어 파죽지세로 남하하였다. 10일에는 몽골인민공화국(외몽골)도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하과수렌(J. Lhagwasuren) 중장이 지휘하는 약 2만명 정도의 몽골군은 말리노프스키(Rodion Malinovsky) 원수가 지휘하는 자바이칼 전선군 산하 소-몽 기병기계화집단(Soviet Mongolian Cavalry Mechanized Group)에 소속되어 프리예프(Issa Pliyev) 중장의 지휘를 받았다. 이들은 자바이칼 전선군의 우익을 맡아 일본군과 친일 괴뢰군을 격파하고 950km를 행군하여 몽강국의 수도인 장자커우를 비롯해 내몽골의 대부분을 장악했다.
중소 우호동맹조약은 8월 14일 조인되었다. 중국이 외몽골을 포기하는 대가로 스탈린은 만주와 내몽골, 신장성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보장했다. 쑹쯔원은 외몽골을 즉시 승인하는 대신, 일본이 항복한 뒤 외몽골 전체 국민들을 대상으로 국민 투표를 실시하여 그들의 뜻이 독립에 있다면 중국 역시 따르겠다고 하였다. 또한 외몽골과 중국의 경계는 기존의 국경선을 존중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물론 소련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서 국민 투표의 결과야 해봤자 어차피 뻔했다. 그럼에도 중국으로서는 다만 겉으로나마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의미였다. 또한 중국 입장에서는 오랫동안 소련과의 분쟁 지역이었던 신장성에 대해서는 중국령임을 인정받았고 외몽골이 아예 소련령으로 편입되지 않도록 막았다는 것이 그나마 성과인 셈이었다.
중소우호조약이 체결된 직후인 8월 24일 장제스는 공식석상에서 "변방 민족의 독립 열망을 억누르는 것은 우리의 혁명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외몽골은 베이징 정부 시절에 이미 독립을 선언했고 사반세기가 지났다. 급변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혁명 원칙과 정당한 법적 절차를 통해 외몽골의 독립을 승인하고 대등한 형제국으로서 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마치 중국이 외몽골 이외에도 만약 소수 민족들이 원한다면 언제라도 독립을 인정하겠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실속없는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였다. 외몽골은 소련의 협박에 못 이겨 마지못해 포기하는 것일 뿐 중국에게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존재였다.
이로서 외몽골의 독립은 기정 사실이 되었지만, 내몽골은 그대로 중국의 영토로 남아야 했다. 내몽골의 독립세력들은 급히 내몽골인민혁명당을 결성하고 내몽골의 해방을 선언하였다. 또한 대표단을 울란바토르로 보내어 내몽골이 외몽골에 복속되는 형태로 한 나라가 되기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외몽골 정부는 거절했다. 왜냐하면 외몽골의 독립은 스스로의 힘이 아닌, 소련과 중국의 정치적 타협의 결과였기 때문이었다. 소련의 위성국에 불과한 외몽골로서는 내몽골에 관여할 권한도 없을 뿐더러, 자칫 중소우호조약 전체를 무효화시켜 자신들의 독립마저 위협을 받을 수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수백년 동안 분리되었던 외몽골과 내몽골은 이미 같은 "몽골인"이라는 정체성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들은 문자도, 언어도, 생활 양식도 달랐다. 따라서 중국을 자극하면서까지 굳이 내몽골을 같은 동포로서 "해방"시켜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내몽골의 일부 독립세력들이 주축이 되어 9월 9일 내몽골인민공화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선언했지만 소용없었다. 그 사이 국민정부군과 공산군은 내몽골로 진격해 들어왔다. 내몽골은 국공의 치열한 각축장이 되어 더 많은 땅과 요충지를 점령하기 위해 도처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어느 쪽이 이기건 내몽골의 독립은 물 건너간 셈이었다.
1945년 9월 21일 몽골인민공화국 국가소회의 의장단은 중소 우호동맹조약과 몽골-중국 정부의 합의에 의거해 몽골의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 투표를 실시한다는 제76호 결정을 발표하였다. 10월 20일 몽골 전역에서 국민 투표가 실시되었다. 전국 4251개 투표소에서 18세 이상 남녀 유권자 49만5200명 중 98.4%가 참여하여 100% 찬성하였다. 반대는 단 한표도 없었다. 투표는 공개 방식이고 투표지에는 자신의 이름을 적어야 했다. 자기 이름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은 지장을 찍었다. 1945년 11월 10일 몽골 정부는 투표 결과를 중국과 소련에 공식 통보했다. 어차피 정해진 각본에 불과했지만 중국 정부는 1946년 1월 5일 독립을 승인하고 2월 5일에는 국교를 정식으로 수립하였다.
중국은 156만㎢의 거대한 영토를 잃었지만 몽골은 250년 만에 반쪽이나마 나라를 찾은 셈이었다. 뒷날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의 신중국 역시 외몽골의 독립을 인정하고 1949년 10월 16일 수교하였다. 반면, 타이완으로 쫓겨간 장제스 정권은 1950년 2월 14일 모스크바에서 중소 상호 원조 조약이 체결되자 중소우호조약이 폐기된 이상 외몽골의 독립 또한 자동으로 무효가 되었으니 중국의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물론 한낱 고집일 뿐, 현실성은 없는 소리였다.
60여년이 지난 2012년, 타이완 행정원 대륙위원회는 "국민정부가 몽골의 독립을 승인했으며, 현재 몽골이 국제사회에서 주권국가로 인정받고 있다"면서 중국의 영토에서 몽골을 제외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하지만 중국은 오히려 몽골에 대한 경제적인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몽골은 다시 과거처럼 중국에게 복속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