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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0일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창세기 3,9-15.20 요한 19,25-34
어머니는 아버지 사랑의 징표다
오늘은 성모 마리아께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공식적으로 성모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라고 칭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 헌장’을 통해서이지만, 성모님을 교회의 어머니로 믿어온 것은 교회의 오랜 전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성모 마리아와 요한 사도를 모자 관계로 맺어주십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피로 새로 태어난 교회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니 성모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입니다.
유학 때 마리아론 시험에 이 문제가 나왔었습니다.
교수님이 “성모 마리아가 너의 어머니인 것이 왜 중요하냐?”라고 물으셨을 때, 저는 엉겁결에
“십자가상에서 고통 받으시는 예수님께서 말 한마디 하기도 힘들어하시면서 저희에게 성모님을 어머니로 맡기셨는데, 그것이 어떻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절대로 중요하지 않은 말은 하실 수 없으십니다.” 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납니다.
왜 어머니인 것이 중요한지는 잘 모르겠고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중요하다는 것만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다행히 그래도 좋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이제 그것에 대한 보충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도 정답은 될 수 없겠지만, 지금 만약 그런 문제를 다시 물으면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랑의 징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는 아버지는 어머니께 끊임없이 무언가를 가져다 바치고 어머니는 그것에 만족해하지 못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한 번은 신문지에 3백만 원이나 하는 돈뭉치를 가져오신 적이 있습니다.
땅을 팔아서 어머니에게 돈을 가져오신 것입니다.
그때 어머니가 처음으로 만족해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빚을 갚고 나면 남을 것이 별로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농사일을 접으시고 주유소에서 일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주유소에서 매출에 비례하여 월급을 주었습니다.
한 번은 20여만 원밖에 안 되는 돈 봉투를 어머니에게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이것 가지고 어떻게 한 달을 사느냐며 하소연을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항상 부족한 돈만 가져다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미안해하셨습니다.
그다음에 아버지는 막일하시며 평생 어머니에게 돈을 가져다주셨습니다.
지금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 4년이 넘었습니다.
이제 어머니만 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를 볼 때 어머니만 보일까요? 아닙니다. 아버지도 보입니다.
어머니에게 그렇게 돈을 가져다 바치셨던 아버지가 안 보일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을 위해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가져다 바친 기억이 어머니 속에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것으로 힘겹게 저희를 양육하셨습니다.
만약 두 분 중 한 분만 안 계셨어도 저희는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저는 젊은 부부가 이혼하고 자녀들을 아버지가 양육하게 되었을 때, 그 아버지가 어쩔 수 없이 자녀들을 보육원에 맡겨야 했던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도저히 어린 아이들을 키우며 돈을 벌러 나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어야 하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할 수 없는 일을 자녀들을 위해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에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내어주신 이유는 당신의 피로 자녀들을 돌보아야 하는 어머니가 당신 자녀들을 위해 필요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를 보며 교회의 머리요, 아버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봅니다.
제가 신학교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할 때 제가 다니던 성당 성모님이 진짜 성모님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때는 겨울이었고 시간은 새벽이었고 저는 술을 많이 마신 상태였습니다.
그때 저를 불러주시는 것이면 나타나서 표징을 보여달라고 예수님께 청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모 마리아를 보내주셨습니다.
물론 그때 술을 마신 상태였기 때문에 저의 착각이라고 믿고 내려오기는 했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면
무척 부담스럽고 도망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상이 진짜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겁이 나서 머리를 들 수 없었는데 예수님이 나타났다면 더 무서워서 제가 돌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부드러운 어머니를 보내주시며 그 안에서 당신의 사랑을 발견하라고 그러셨던 것 같습니다.
성모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우리 교회를 위해 성령님을 중개하시는 어머니가 계십니다.
성모 마리아의 청에 예수님은 어쩔 수 없이 기적을 해주셔야 했습니다.
저는 성모님을 보면 어머니를 보는 것 같고 예수님을 보면 아버지를 보는 것 같습니다.
자녀를 위해 청하는 성모님 앞에서 예수님은 항상 미안한 마음으로 당신 피까지 다 부어 주십니다.
그런 어머니를 둔 교회는 얼마나 행복합니까?
성모님 덕분으로 우리는 언제나 죄를 용서받는 고해성사를 할 수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어머니로서 중개하고 계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아버지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품고 있는 우리의 어머니이십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20일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창세기 3,9-15.20
요한 19,25-34
성모님을 신자들의 도움이신 분이라고 부르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십니다!
역대 교황님들 가운데 재임 기간 동안 참으로 혹독한 고통을 겪었던 분이 있었으니, 251대 교황이셨던 비오 7세(1742~1823년, 교황 재위: 1800~1823년)입니다.
침략과 정복의 시절, 비오 7세 교황님께서는 나폴레옹에 맞서 가톨릭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하셨습니다.
1808년 프랑스 군대가 로마를 점령하며, 나폴레옹은 교황령이 프랑스에 병합된다고 선언하게 됩니다.
비오 7세 교황님께서는 물러서지 않고 용감하게 침략자들을 파문했습니다.
그 결과 초유의 대 사건이 발생하지요.
비오 7세 교황님께서는 1809년 체포되어 사보나에 있는 감옥에 구금됩니다.
그는 약 5년간 교황이라는 신분을 지닌 분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고초와 굴욕을 다 겪었습니다.
길고도 긴 암흑의 세월을 지내는 동안 비오 7세 교황님께서는 늘 성모님의 도움을 간청하였습니다.
옥중에서 바깥에 있는 그리스도 신자들에게 보낸 서한에는 이 어려운 시절, 성모님께 기도하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마침내 1814년 5월 24일 교황 비오 7세는 길고 긴 암흑의 세월을 마무리짓고 바티칸으로 귀환합니다.
그는 교회 역사 안에서 가장 어려운 시대, 성모님께서 큰 도움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리스도인의 도움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을 제정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도움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신심은 살레시오회 창립자 돈보스코(1815~1888)에 의해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살레시오회를 비롯한 전 세계 살레시오 가족은 그리스도인의 도움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첫번째 수호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돈보스코는 성모님을 바라볼 때 마다 출중하고 탁월한 능력을 지닌 변호사로서의 모습을 확인했습니다.
하느님 앞에 부족하고 나약한 자신을 변호해주시고 중재해주시는 어머니, 자신이 펼치는 모든 사업에 늘 함께 하시며 자상하게 보살펴주시는 협조자로서의 어머니가 성모님이심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돈보스코는 만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외쳤습니다.
“성모 마리아를 신자들의 도움이신 분이라고 부르십시오.
성모님은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십니다.
모든 것은 다 그분이 하셨습니다.
제가 조금이라도 좋은 일을 했다면 그것은 모두 도움이신 성모님께서 친히 하신 것입니다.
저는 오직 부족한 도구였을 뿐입니다.”
돈보스코는 직접 도움이신 마리아께 드리는 기도를 만들어 전파했습니다.
간단한 기도이지만 합당한 조건을 갖추고 매일 이 기도를 드릴 때 받는 은총은 엄청납니다.
“오 마리아, 굳센 동정녀시여! 당신은 교회의 빛나는 큰 성채이시며 승리하는 군대처럼 위엄을 갖추신, 그리스도인의 든든한 도움이십니다!
오직 당신만이 세상의 모든 거짓을 쳐 이기셨나이다.
원수에게서 저희를 지켜주시어 번민, 싸움, 궁핍을 이기게 하시고 임종 때 저희를 천국으로 인도하소서.”
성모님 사랑하면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베르나르도 성인 역시 성모님께서 큰 도움을 주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언제나 지니고 살았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지극히 자비로운 동정녀에게 도움을 간청한 그 누구도 거절당했다는 말을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위험과 곤란, 의혹에 빠질 때 그리스도인의 도움이시여, 당신께 간구하오니, 당신께 의지하여 저희는 결코 쓰러지지 않으오리다.
당신의 인도로 저희는 인생길에서 지치지 않을 것이며, 당신의 은혜로 천국에 도달하리이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강론>
(2024. 5. 20. 월)(창세 3,9-15.20; 요한 19,25-34)
<신앙생활은 효도하는 생활>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선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5-27).”
“성안에 들어간 그들은 자기들이 묵고 있던 위층 방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모두, 여러 여자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분의 형제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사도 1,13ㄱ.14).”
1) 우리는 성모님이 교회의 어머니시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시라는 것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또는 설명하려고 애를 쓰는 일을, 도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증명을(설명을) 도대체 누구를 향해서 하는가?
우리가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공경하면서 살았던 세월이 이천 년이 넘었는데, 성모님이 교회의 어머니시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시라는 것을 증명(설명)하는 일은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는가?
나 자신이 성모님의 자녀로서 자녀답게 사는 것, 바로 그것이 성모님이 나의 어머니이심을 증명하는 최고의 증거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과연 나는 자녀답게 잘 살고 있는가?”입니다.
2) 예수님께서 성모님을 제자들의(교회의) 어머니로 맺어주신 일은, 어머니가 아닌 분을 어머니로 새롭게 맺어주신 일이 아니라, 성모님은 ‘처음부터’ 신앙인들의(교회의) 어머니이신
분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신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고(1코린 12,27),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시니까 성모님은 ‘처음부터’ 우리의 어머니셨습니다.>
그 일은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겠다.”(요한 14,18) 라는 말씀에 연결되는데, 이 말씀은 원래 당신의 ‘부활’과 ‘부활 후의 현존’을 암시하신 말씀이지만, 신앙인이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가르침으로도 생각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절대로 고아가 아니다.” 라는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주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고,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또 어머니 성모님의 전구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결코 고아가 아닙니다.
하느님도 안 믿고 예수님도 안 믿는 사람들, 또는 종교도 신앙도 없이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은
스스로 고아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신 분이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메시아이신 분이고, 성모님도 ‘모든 사람’의 어머니이신 분이기 때문에, ‘고아인 사람’은 원래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신앙을 거부하고
‘고아로 살고 있는 사람들’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가운데에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알면서도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고, 복음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하느님과 예수님을 아예 모르는 채로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알면서도 믿기를 거부하는 것은 죄이지만, 복음을 전해 주는(알려 주는) 사람이 없어서 모르는 채로
고아처럼 살고 있는 것은 그 자신의 죄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런 경우가 생기지 않도록 복음을 전하는 일을 더욱 열심히 해야 합니다.
3) ‘고아처럼’ 살고 있다는 말은 ‘목자 없는 양처럼’ 살고 있다는 말에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마르 6,34; 마태 9,36).”
‘목자’가 없었던 때는 단 한 순간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살고 있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 때문이기도 하고, 그 자신들 탓이기도 하지만, 어떻든 예수님께서는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을 가엾게 여기셔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고아가 아닌데도 고아처럼 살고 있는 것이나, 목자가 있는데도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살고 있는 것은, 사실상 같은 것입니다.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의지할 곳도 없고, 외롭고 고단한 인생을 살면서 방황하는 상황...
신앙생활은 자신이 고아가 아니고, 목자 없는 양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는 생활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과 주님이신 예수님과 어머니 성모님의 사랑과 보호 속에 안식과 평화를 누리는 생활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4) 그래서 신앙생활은 효도하는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 기쁨을 드리는 것이 효도 중에 가장 큰 효도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모님께서 가장 크게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나의 회개와 구원’입니다.
그분들에게 무엇인가를 많이 바치는 것이 효도가 아니라, 내가 회개해서 구원받는 것이 효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음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모님의 심정을 아주 잘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마태 23,37; 루카 13,34).”
이 말씀은, 예루살렘이라는 특정 도시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고 자꾸만 멸망을 향해서 가고 있는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그 인간들의 어리석음이 가엾고 안타까워서 하신 말씀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나에게’ 하시는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