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이 살던 그곳... 조금만 걸으면 목포의 역사가 보인다
섬소년 김대중이 가슴 설렘과 부푼 꿈 안고 찾은 목포 만호동... 오래된 거리가 도시의 여백이다
이돈삼
▲ 소년 김대중 공부방. 목포시 복만동 바닷가 마을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관련사진보기
'보통학교 4학년 때 우리 가족은 드디어 목포로 이사했다. …(중략)…
자식들을 뭍에서 공부시키겠다는 어머니의 의욕이 합쳐져 생활 터전을 옮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뭍으로, 큰 곳으로 터전을 옮긴다는 것은 정말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청운의 뜻을 품고 배에 올랐다. 1936년 가을이었다.'
뭍으로 향하는 배 위에 오른 섬소년의 가슴은 터질 듯 설레었다.
더 큰 세상에서 펼쳐질 앞날과 미래 꿈에 대한 기대도 부풀었다.
그렇게 목포항에 발을 디딘 소년은 훗날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이 되는 김대중이다.
소년 김대중의 눈에 비친 목포는 말 그대로 '별천지'였다.
하의도에서의 섬 생활을 정리하고 나온 어머니 장수금은 목포항이 내려다보이는 비탈진 언덕에서 영신여관을 운영했다.
영신여관은 김대중의 새로운 삶의 터전이자, 격동의 세월을 품은 역사의 무대가 됐다.
▲소년 김대중 공부방 창밖 풍경. 창밖으로 목포 앞바다가 내려다보인다. ⓒ 이돈삼관련사진보기
▲목포 앞바다와 삼학도. 소년 김대중 공부방 옆 목포진 역사공원에서 본 풍경이다. ⓒ 이돈삼관련사진보기
김대중이 1945년까지 살았던 옛 영신여관 자리에 '소년 김대중 공부방'이 복원돼 있다.
지난 9일, 이곳을 방문했다.
객주집과 공부방으로 이뤄진 2층 건물을 기념관으로 꾸며졌다.
1층은 김대중의 목포상고 재학시절부터 7대 국회의원 활동까지, 2층은 일본 납치사건에서 미국 망명시절을 사진으로 보여준다.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엿볼 수 있다.
공부방 문을 나서면 조선시대 수군 진영이던 '목포진'이 역사공원으로 단장돼 있다.
목포진(木浦鎭)은 1439년 설치되고, 수군만호가 배치됐다.
1501년엔 높이 2미터, 둘레 400미터의 성벽이 쌓였다.
성안에 객사와 관아, 우물, 감옥 그리고 동서남북 출입문도 있었다.
역사공원에 비석 2기가 서 있다.
만호 방대령, 수군절도사 신광익의 선정비다.
당초 1714년, 1763년에 세운 것이다.
일제강점 때 일본인들이 목포부청 뒤뜰에 묻은 것을 광복 이후 다시 세웠다.
▲목포진 역사공원. 목포의 뿌리이자 태 자리다. ⓒ 이돈삼관련사진보기
▲ 목포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목포진 역사공원. 목포진은 목포의 뿌리이자 태 자리다. ⓒ 이돈삼관련사진보기
1897년 목포가 개항되면서 목포진 일대는 일본제국주의의 예봉에 난도질당하기 시작했다.
감리서와 해관이 들어서고, 외국인 거류지가 조성됐다.
주변 바다는 간척됐다.
바둑판식 시가지에는 일본영사관과 동양척식회사, 일본인 학교와 적산가옥이 우후죽순 들어섰다.
시가지는 일본인들이 다니던 소학교에서 목포역 방향을 기본으로 하고 유달산과 목포진, 선창을 연결하는 구조로 이뤄졌다.
이른바 바둑판식이다.
시가지에는 백화점, 상회 등 크고 작은 상업시설이 모여들었다.
조선인의 삶이 철저히 소외된 이 일대는 식민지 수탈의 아픈 상처였다.
이에 맞선 조선사람의 눈물 어린 항일 현장이었다.
부두 노동자들의 거센 투쟁과 소작쟁의, 의병들의 함성이 골목마다 켜켜이 쌓여 있다.
▲ 목포 만호동 거리. 아직도 옛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 이돈삼관련사진보기
▲ 목포 바닷가 재래시장 풍경. 소년 김대중 공부방 아래에 있다. ⓒ 이돈삼관련사진보기
비극의 역사를 뚫고 광복을 맞이한 만호동은 목포사람들의 생명력 넘치는 삶의 중심지로 거듭났다.
목포의 상업을 이끌며 서울의 명동에 견줬다.
개항 당시 2800명이던 목포의 인구가 5만 명을 넘어 전국 6대 도시로 성장한 것도 이때였다.
바다와 육지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충지도 만호동이었다.
기차와 버스, 여객선을 통해 바다와 육지를 연결했다.
항동시장과 목포종합수산시장, 김과 멸치 등을 파는 건해산물 상가도 호황을 누렸다.
목포의 상업을 넘어 전남 서남부 상권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았다.
개항기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목포의 흥망성쇠가 만호동에 다 녹아 있다.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지금 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 만호동 포토존. 옛 조선식산은행 목포지점 터에 세워져 있다. ⓒ 이돈삼관련사진보기
▲ 만호동 거리. 개발에서 밀려난 원도심답게 한산하기만 하다. ⓒ 이돈삼관련사진보기
세월의 흐름 앞에 장사 없다고 했던가.
1990년대 이후 신도심이 개발되면서 하루가 다르게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화려했던 만호동의 불빛이 하나둘 꺼졌다.
신도심으로 사람과 상권이 옮겨가면서 거리도 활기를 잃었다.
저출산과 고령화에 따른 인구유입 정체까지 겹쳐 만호동은 쇠락의 길로 들어섰다.
죽어가는 거리에 심폐소생술이 시행된 건 몇 년 전, '웰컴 투 만호동' 공공미술 프로젝트였다.
덕분에 낡고 빛바랜 골목이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환생했다.
옛 조선식산은행 목포지점 자리는 예술이 흐르는 '만호ZONE(존)'으로 변모했다.
▲ 고양이 골목. 벽그림 앞에서 말려지고 있는 멸치가 압권이다. ⓒ 이돈삼관련사진보기
▲ 고양이 골목. 건해산물을 훔치려는 고양이 그림이 웃음짓게 한다. ⓒ 이돈삼관련사진보기
프로젝트는 만호동이 목포진 형성과 함께 태어나 근대화 과정에서 발전해 온 목포의 모태였음을 표현했다.
골목과 상점 셔터엔 고양이가 어슬렁거리고 갈매기가 날았다.
바다를 품은 먹갈치와 고양이 벽그림은 목포의 맛과 해양도시의 꿈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만호동은 오래된 거리가 그저 낡은 것이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도시와 함께 숨쉬는 여백이고, 정감이 가득한 보물창고임을 증명하고 있다.
만호동(萬戶洞)은 목포역사의 뿌리이다.
목포의 탄생지이고, 목포 근대역사의 출발지이다.
지명도 만호가 운영하던 수군진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 고양이 골목. 좁은 길에 고양이 벽그림과 함께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 이돈삼관련사진보기
첫댓글 목포가 한 때는 전국 6대 도시였다니 놀랍습니다.
만호동에 꼭 가보고 싶네요.
행동하는 양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