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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5. 연중 제30주일. 묵상글 ( 10/24 21:35, 06:30.)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전일 21-21시반 * 가끔은 이전에도 올릴 수 있음 > : 호명환 신부님. 고인현 신부님.
2차 공유할 묵상글< 06시 이후 * 가끔은 이전에도 올릴 수 있음.> :
김찬선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이마르첼리노M 수사님
* 가능하면 위와 같이 할 계획이나 개인 형편으로 그리 알 될 경우가 있습니다..
이 시간대 이외 여러 묵상글을 보시려면 전체공지란 " H. 260707. 카페 운영에 대한 고견을 주세요." 의
2번에 들어 가셔서 안내를 받으세요
** 오늘 묵상글 공유 : 호명환 신부님, 고인현 신부님(10/24 21:35)
김찬선 신부님: 06:30 추가. 호명환 신부님: 06:30 추가. 이마르첼리노M 수사님: 아직.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계속 여부도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11월 대림시기(11/29) 이후 12월 중순 아니면 , 그 이전이라도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할 계획이오며
카페는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킬 계획이기에, 2)의 회원분이나 제가 가끔 묵상글을
올릴 수도 있을 경우를 감안, 묵상글 뜨락은 유지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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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5. 연중 제30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10.24. 16:43
우리는 세속 권세의 굴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만일 우리 종교가 결국 사랑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빚어내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제국과 그리스도 영성
우리는 세속 권세의 굴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2026년 10월 24일 토요일
리처드 신부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이 곧 낮아짐과 상처받음의 길임을 강조하며, 이는 제국의 종교와는 철저히 다른 길임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올바른 신경(信經)을 외우고, 올바른 깃발에 경례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고, 열려 있으며, 자유롭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이 결국 사랑하는 사람들을 길러내지 못한다면, 그 신앙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예수님께서도, 세상도 그런 신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세상은 이제 더 이상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합니다.
우리가 신앙 안으로 들어서게 된 것은 우리가 더 낫기 때문이 아니라, 상처 입은 존재이기 때문임을 우리는 분명히 해야 합니다. 만일 제가 그리스도교를 새롭게 이름 붙일 수 있다면, 저는 그것을 "상처의 종교"라 부를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뒤에도 상처를 지니고 계시며 그것을 드러내 보이시는 상처 입은 분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은 모든 것을 올바르게 해내는 데 있지 않고, 상처 입은 존재로서 나아가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제국이 가르치는 길이 아닙니다.
제국은 세상 끝날까지 승자와 패자로 나누려는 시도를 계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이미 그 굴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더 이상 우리의 삶을 누가 위에 있고 누가 아래에 있는지,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인지를 따지는 데 허비하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는 패자라 불리던 이들을 참된 승자로 만드셨고, 그것은 종교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집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와 국가로부터 수치와 배척을 당한 "궁극의 패자"이셨지만, 하느님께서 그분을 들어 올리셨습니다. 이 사건은 역사를 관통하며 모든 시대를 위한 변모의 이콘이요 표징이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갈 때, 우리 안의 그림자를 부인하거나 두려움을 다른 인종이나 종교, 계급, 성별에 투사함으로써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자신의 그림자와 상처를 가장 큰 영예와 영광으로 받아들이면서, 치유와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이라 불릴 만한 유일한 것이며, 여전히 세상을 구원할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Reference
Adapted from Richard Rohr, “Christianity and Empire,” Conspire 2018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18). Youtube.com.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Richard Bell, untitled (detail), 2022,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마치 오래된 돌들이 서서히 언덕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제국의 구조물들은 사라져 가지만, 땅에 뿌리내린 예수님의 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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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5. 연중 제30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http://www.ofmkorea.org/ofmhomily/586751
2026.10.24 21:30
2026년 10월 25일 일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22,34-40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묻습니다.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당시 유다교에는 지켜야 할 계명이 육백열세 가지나 있었고,
무엇이 으뜸인가는 학자들 사이의 오랜 논쟁거리였습니다.
어느 하나를 고르면 다른 쪽에서 반박당할 함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논쟁에 말려들지 않으시고,
성경의 두 구절을 꺼내 하나로 묶으십니다.
먼저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외우던 신앙 고백입니다.
‘일부가 아니라 전부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레위기의 말씀을 붙이십니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여기서 ‘이와 같다’는 말이 놀랍습니다.
둘째 계명이 첫째와 ‘같은 무게’를 지닌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입니다.
요한 사도가 이 진실을 못 박습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검증은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다.’
그러니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시험지’입니다.
그런데 그 ‘이웃’은 누구입니까?
오늘 제1독서가 대답합니다.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탈출 22장).
가장 약하고 가장 밀려난 이들 ―
바로 그들이 하느님 사랑의 초점입니다.
성 예로니모가 말씀을 옮기며 평생 확인했듯,
성경 전체가 결국 이 사랑 하나를 향해 흘러갑니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영적 열매 성월의 눈으로 보면
오늘 사랑 주간이 시작되는 것은 마땅합니다.
성령의 열매 목록도 ‘사랑’으로 시작합니다.
성실·온유·절제, 친절·선행, 평화·인내 ―
이 모든 열매는 사랑이라는 한 뿌리에서 자란 가지입니다.
사랑 없는 성실은 딱딱하고,
사랑 없는 친절은 계산이며,
사랑 없는 인내는 체념일 뿐입니다.
그리고 사랑이 있는 곳에 ‘기쁨’이 따라옵니다.
오늘 제2독서는 초대 교회 신자들을 이렇게 전합니다 ―
그들은 ‘큰 환난 속에서도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1테살 1장).
사랑하는 사람은 힘든 중에도 기쁩니다.
기쁨은 즐거운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사랑받는 데서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하느님을 ‘일부가 아니라 전부로’ 사랑하는가?
나의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참됨을 증명하는가?
나는 가장 약한 이(이방인·과부·고아)를 이웃으로 보는가?
나의 신앙에는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이 있는가?
주님,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
이웃을 저 자신처럼 사랑하게 하시고,
그 사랑에서 참된 기쁨이 솟아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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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5. 연중 제30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25 05:45
- 사랑하는 나도 좋지만 자비로운 내가 되는.
“너희가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그 부르짖음을 들어줄 것이다. 나는 자비하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연중 제30주일 주제는 자비와 사랑입니다.
그런데 자비와 사랑이 같은 것 같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제 생각에 사랑이 넓고 일반적인 의미의 사랑이라면
자비는 사랑 중에서 가엾은 이들에 관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복음에서는 사랑을 일반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에 비해
탈출기의 하느님께서는 이방인이나 가난한 이나
억눌린 이처럼 가엾은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가엾은 이들에게 자비롭게 대하라고 우리에게 하시면서
가엾은 이에게 무자비한 자에겐 당신도 무자비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면서도 무자비하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모순적이십니까?
주님이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주시고 햇빛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과도 다른 것이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모순적인 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순적이지 않으십니다.
자비하시기에 무자비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가엾은 이들에게 무자비한 자들에게 자비하시면
가엾은 이들에 대한 무자비를 수수방관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첫째로 정의로운 자비와 사랑입니다.
불의한 자들의 불의를 괜찮다고 하지 않으시는 자비와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은 둘째로 상선벌악의 자비와 사랑입니다.
상선벌악(賞善罰惡), 선에 대해서는 상을 주고 악에 대해서는 벌을 준다는 뜻인데
선한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이 자비와 사랑이라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것이 자비와 사랑이라는 것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렇습니다.
참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자비하시기에
악한 사람에게 벌을 내리실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간처럼 미워서 벌을 내리시고 화가 나서 벌을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돌아서는 것이 정의요 사랑이기에 회개하도록 벌을 내리시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마약을 계속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자비가 아니라 마약을 끊을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 자비이고,
마약을 끊도록 무자비하게 조처를 취하는 것이 자비이겠지요.
하느님도 이와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어제 복음에서 봤듯이
하느님께서는 이 무자비한 벌을 내리시기 전에 유보의 기간을 주십니다.
어제 복음에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자르라는 주인에게 재배인이
1년간의 유예 기간을 달라고 청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유보의 기간을 벌어주시며 우리 스스로 회개의 열매를 맺도록 하십니다.
아무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실천해야 할 자비는 두 가지인 것 같습니다.
우선 자신이 가엾은 이에게 무자비한 사람이 되지 않는 것이 하나이고,
무자비한 사람이 악에서 돌아서도록 뭔가 하는 것이 다른 하나인데
벌은 하느님께 맡기고 우리는 기도해주면서 눈물로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제가 생각한 것은
사랑하는 나도 좋지만 자비로운 내가 되어야겠다는 것인데 여러분도 그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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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5. 연중 제30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10.25. 05:56
우리는 홀로가 아니라 더불어 삶의 여정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토라(성경의 첫 다섯 권)에 대한 주석가들은 그것을 수많은 규정으로 확대했지만, 동시에 그 본질을 하나로 단순화하려는 열망도 있었습니다. 바리사이의 질문은 바로 그 의미를 담고 있었고, 이는 랍비들에게 자주 던지던 물음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이스라엘아, 들어라!"로 시작하는 쉐마 이스라엘을 인용하셨습니다. 이는 유다교의 신경과도 같은 것으로서, 유다인들은 안식일 저녁 기도 때 이를 외우며 자기들의 믿음으로 고백했으며, 작은 양피지에 적어 성구갑에 넣어 두었던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기에 또 하나를 덧붙이셨습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말씀입니다.
구약성서 전통에 의하면 유다인들에게 있어 "이웃"이라 하면 보통 다른 유다인을 뜻했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2세기부터 서기 1세기까지 사해 북서쪽 광야에서 활동했던 유다교 분파인 쿰란 공동체는 메시아 도래와 종말을 기다리며 율법 연구와 공동생활을 실천했던 공동체인데, 이 쿰란 공동체는 전통적인 '이웃'의 개념을 조금 바꾸어 "빛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어둠의 자녀들을 미워하라."는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이웃이란 인종이나 종교를 막론하고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요 그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도움을 주는 이임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이웃은 무한히 확장된 범주이며, 그 새로운 해방의 도덕을 가장 먼저 보여준 이는 바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루카 10,25-37). 사마리아인은 유다인들에게 이단자요 외국인으로 여겨졌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참된 모범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결합을 깊이 새겼습니다. 요한 1서 저자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쟁이다."(4,20)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를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3-45).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말씀을 인용해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당신 자신으로부터 친히 말씀하실 때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고 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황금률을 넘어서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단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하신 데 그치지 않고, 당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그 사랑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정은, 제가 늘 강조하듯이, 홀로 걷는 여정이 아니라 우리를 한없이 사랑해 주시는 우리의 주님과 함께 걷는 여정이며, 또 그렇기에 우리 모두가 하나 되기를 바라시는 주님 안에서 우리가 함께 걷는 여정입니다. 그 길에서 우리는 상처와 고난, 상실, 때로는 견디기 어려운 깊은 고통을 마주합니다. 그렇기에 상처 입은 영혼인 우리도 서로를 위해 있어야 합니다. 서로를 일으켜 세우며, 사랑과 자비의 행동으로 함께해야 합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듯이, 우리 프란치스칸들은 구원을 향해 가는 길도 홀로 걷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걷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구원도 '나' 혼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이신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당신 자신을 수난과 십자가의 죽음에 내맡기신 것이 온 인류를 구원하는 힘이 되는 것도 바로 이 사랑의 이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글에서 읽은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미국의 어느 주에서 좋은 옥수수를 생산해 내는 농부를 고르는 경연대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경연대회에서 몇 년째 계속 우승을 하는 농부가 있었는데, 어느 해 어떤 기자가 그와 인터뷰를 했다고 합니다. 기자는 농부가 실천하는 여러 좋은 방법들을 들으며 놀라워했는데, 그 가운데 특별히 인상 깊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농부는 자기 밭에서 가장 좋은 씨앗을 이웃 농부들과 나누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자는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당신도 대회에 출품하는데, 어떻게 가장 좋은 씨앗을 이웃에게 나눠줄 수 있습니까?"
그러자 농부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아, 기자님. 삶의 중요한 진리를 모르셨군요. 바람은 옥수수의 꽃가루를 이웃 밭으로 옮깁니다. 만약 이웃이 질 낮은 옥수수를 심으면, 제 옥수수도 점점 품질이 떨어지게 됩니다. 제가 좋은 옥수수를 얻으려면, 이웃도 좋은 옥수수를 길러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나눔을 선택한 것입니다."
농부는 삶의 "상호 연결성"을 깊이 깨닫고 있었습니다. 자기 옥수수가 좋아지려면 이웃의 옥수수도 좋아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 진리를 깨닫고 있습니까? 삶에서 가장 좋은 것을 얻으려면, 나의 가장 좋은 것을 이웃에게 내어주어야 합니다.
잘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다른 이도 잘 살도록 도와야 합니다. 행복을 원하는 사람은 다른 이도 행복을 찾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서로 얽혀 있으며, 한 사람의 선익은 모두의 선익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반대의 이치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악과 어둠은 다른 모든 이의 악과 어둠을 자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 홀로 잘 하는 것만이 대수가 아니고, 또 나 혼자서 어둠 속에 있는 것도 그것이 '나' 혼자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아무도 예외 없이 "사랑받는 죄인들"입니다. 일전에 제가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들"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오늘은 이에 덧붙여 "우리는 사랑받는 죄인인들"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이 엄연한 진리를 깊이 의식하고 마음에 깊이 새기며 살아갈 수 있다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해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또 우리 주님께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모두에게 자매와 형제를 낯선 이가 아닌, 함께 광야를 걷는 동행자요 도반(道伴)으로 바라보도록 촉구합니다. 우리 모두는 인생이라는 광야를 함께 걸어가는 영혼들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시인 앙리-프레데리크 아미엘의 말을 마음에 새겨 보도록 합시다.
"인생은 짧습니다. 어두운 길을 함께 걷는 이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 줄 시간이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랑에 서두르고, 친절함에 재빠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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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4. 연중 제30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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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의 우정 1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낳는 삶 (260924. 01:38)
http://www.ofmkorea.org/ofmkfb/585549
그리스도와의 우정 2 말씀에 굴복하는 자유 (260929. 05:37)
http://www.ofmkorea.org/ofmkfb/585739
그리스도와의 우정 3 그리스도가 다시 태어나는 자리 (261008. 05:18)
http://www.ofmkorea.org/ofmkfb/586084
그리스도와의 우정 4 기도와 삶의 경계가 사라지다. (261011. 02:12)
http://www.ofmkorea.org/ofmkfb/586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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