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과 자캐오
<연중 제31주일>(2022. 10. 30.)
(루카 19,1-10)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루카 19,1-4).”
성경 말씀은 오늘 나에게 주어지는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자캐오의 이야기’도 옛날에 살았던 어떤 사람의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자캐오는 구원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자캐오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예수님을 보려고 애쓰는 자캐오의 모습은,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려고’ 애쓴 것이 아니라 ‘보려고’ 애썼다는 것은,
자기가 갈망하고 있는 구원을 주실 분이 정말 예수님인지에 대한 확신이
아직 없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안드레아 사도를 비롯한 어부들 경우에도
예수님을 보자마자 믿고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를 거쳤습니다.
그들이 아직 예수님을 모르고 있을 때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듣고서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예수님을 따라가서 하룻밤을 함께 지냈고,
그렇게 예수님의 삶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요한 1,35-42).
어부들이 정식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몇 달 뒤쯤입니다.
자캐오의 경우도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을 갈망하고 있었는데 예수님의 소문을 듣게 되었고,
예수님을 믿고 싶어 했고, 믿기 전에 먼저 예수님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자캐오가 세관장이었고 부자였다는 말은,
그가 권력과 재물로는 인생의 갈증을 해결할 수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이 말을 무턱대고 “자캐오는 죄인이었다.”로 해석하는 것은
너무 단순하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세리들을 죄인 취급했다고 해서
오늘날의 우리마저도 세리들을 죄인 취급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고정관념과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자캐오가 권력과 재물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것으로는 인생의 갈증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진정한 구원을 주실 분을 찾았다는 점에서,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와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권력가가 예수님께, ‘선하신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루카 18,18).”
그 권력가는 예수님께 직접 물었지만,
자캐오는 직접 묻지 못하고 ‘마음으로’ 물었을 것입니다.
(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자캐오는 묻고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을 것입니다.)
그의 작은 키는, 그의 자격지심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자캐오와 예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군중’도 상징으로 생각하면,
그가 극복해야 할 여러 가지 ‘걸림돌’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세속 일에 대한 걱정들, 여러 가지 욕심과 욕망들,
사람들의 편견과 부정적인 시선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루카 19,5-6).”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자캐오 한 사람만 부르신 일로
보이지만, 사실은 ‘모든 사람’을 부르신 일입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38)”
<예수님은 ‘나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부르고 계시는 분입니다.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라는 말씀은,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7-10)”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에 나오는 부자는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
못해서 예수님을 따르지 못하고 슬퍼하면서 떠났습니다(루카 18,23).
그때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루카 18,25).
자캐오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로 결심하면서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렸고, 실제로 재물을 버림으로써 ‘바늘귀를 통과한 낙타’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숙제가 됩니다.
자캐오처럼 행동으로 실천하라는 숙제.
10절의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7절의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이라는
사람들의 말에 대한 답변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의 대상이고 ‘잃은 이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부르셨고, ‘모든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자캐오는 그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자캐오의 직업이 무엇이었는지,
실제로 그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고, 회개했고, 행동으로 회개를 실천했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서 새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할 뿐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자캐오의 믿음과 회개를 인정하신다는 말씀이기도 하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충실하게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만이
참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 송영진 신부님 -
첫댓글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고, 회개했고, 행동으로 회개를 실천했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서 새 인생을 살게 되었다는 점이 중요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