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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 깡패 두목 의심되는 감형 내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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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2 흑룡강신문 |
초심에 20년 판결, 종심에는 겨우 5년 판결 그나마 복역후 3년만에 출옥 6년전 ‘료원에서 깡패를 타격하는 가장 큰 사건’의 주인공인 ‘깡패두목’ 류문의가 초심에서 20년 판결을 받았는데 판결불복 기소에 따라 사법기관에서 두세번 오가던 결과 최종 5년 종심으로 아퀴를 지었지만 감옥 재소시 ‘기술혁신’이란 명목으로 감형시켜 3년만에 출옥했다. 금년 7월 중앙규률검사위원회, 길림성규률검사위원회의 통일적인 재조사를 거쳐 류문의가 재차 구속되였다. 그리고 이 사건에 관련된 변호사, 감옥관리인원은 회뢰소개죄와 수뢰죄로 구속되였다. 그 주체는 길림성 고등인민법원의 4명 법관인데 이로서 길림 사법계의 강렬한 진동을 불러일으키였다. 길림성매하구시 신합진 승리촌은 매하감옥 소재지다. 3년전 12월 큰 눈이 내린 다음 한밤중 기온이 갑자기 떨어졌다. 한기가 가득한 밤하늘을 깨우며 폭죽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였다. 마을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해서 동정을 살펴보았다. 감옥 탄광 야근숙직을 선 촌민 장모가 전에 보지도 못했던 광경을 직접 현장에서 목격했다. 벤츠, BMW등 30여대의 고급 승용차가 감옥대문앞에 줄을 지여 섰다. 차대렬은 촌입구까지 이어졌다. 처음 장모는 어느 큰 인물이 왔는가 짐작했다. 후에야 큰 인물이 온것이 아니라 ‘류로오우(劉老五)’란 범인이 출옥하는것을 대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였다. 류문의의 별명은 ‘류로오우’라 부른다. 그는 길림성 료원시 깡패조직의 두목이라는 죄명으로 공소되였다. 2001년 9월 길림성에서 조직한 깡패조직을 타격하는 활동가운데서 이 조직을 처단했고 류문의를 체포했다. 이상한것은 이 사건을 재심하고 상소, 신소후의 심리중에 류문의의 형사처벌기한은 자꾸 감형되여 20년이 15년, 10년, 최종에는 5년까지 내려갔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리해가 가지 않는것은 2004년 말 류문의가 료원거리바닥에 나타난 사실이다. 그는 감옥에서 이른바 ‘기술혁신’을 통해 감형을 받아 3년이 되자 사전에 자유를 획득했다. 류문의가 의심스럽게 감형된 사실은 다시 신고되여 고층의 중시를 받게되였다. 중앙규률검사위원회와 길림성규률검사위원회에서 통일적으로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하였다. 길림성 검찰원내 내막을 아는 사람이 피로한데 의하면 류문의의 감형사건배후에는 법에 위반되는 길림성 사법계비리가 존재한다는것이다. ‘료원 깡패타격 제1사건’ 11월 5일 료원시 공안국 국장 임검파가 증명한데 의하면 이 사건은 길림성규률검사위원회에서 통일적으로 조사처리했다는것이다. 이번에 이 사건에 대한 조사가 재발된것은 6년전의 옛 사건의 연장으로서 당시에도 이 사건은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키였다. 이른바 ‘료원 깡패타격 제1사건’이라는 사회평가를 받았다. 류문의는 금년에 40세이며 료원시룡산구복가진 사람이다. 기자가 당지에서 취재할때 이웃집들에서는 그의 이름만 듣고도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소개에 따르면 류가네는 형제가 다섯이 있는데 류문의는 그중 막내이다. 중학교때부터 자꾸 사달을 부리여 당지에서 악명이 높은 사람이다. 사법기록이 증명한데 의하면 류문의는 류망죄로 1985년 18살 되는 해에 료원시 중급인민법원에서 유기도형 10년이란 판결을 내렸고 1990년에 사전 석방된 후에도 재차 류망죄로 1994년에 료원시로동교양위원회에서 로동교양 3년을 결정했다. 료원시 공안국부문의 한 공개자료는 1993년 류문의가 타인과 손잡고 여러번 일을 저절렀다. 그리하여 당지에서 소문이 자자하게 펴졌다. 그는 ‘깡패’ 두목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20여명 졸개를 휘동하여 당지에서 변만국을 위수로 하는 다른 한 세력과 총기사건을 발동했다. 변만국은 당시 체포를 거절하는 가운데 공안경찰에 의해 격사되였다. 공안기관은 이 조직내부에서 류문의가 ‘두목’이라 자처하고 조직, 령도, 기획을 책임졌으며 그 조직 성원으로는 둘째형 류문재, 셋째형 류문무, 넷째형 류문장과 이른바 ‘료원제1킬러’라 불리운 설극화 등인이 있다고 피로했다. 당지에서 내막을 아는 사람이 소개한데 의하면 류로오우는 자기 세력을 믿고 료원상업계를 공제하였다는것이다. 셋째형 류문무는 경제두뇌가 제법 빨라 류씨 형제들은 서로 받들고 밀어주었다. 일부 정상적인 도경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사건들이 있어 류씨 형제를 찾아 그들이 나서기만 하면 아주 쉽게 해결되였다. 일을 해결해주면 그에 해당한 사례비를 받는것은 정상이다. 2001년 9월 전후 전국에서 깡패집중단속이란 대 형세하에서 료원경찰당국은 깡패성질이 있는 류문의와 그 조직성원 23명을 체포했다. 경찰당국은 이 조직은 횡령죄, 강박수금죄, 고의상해죄, 강박교역죄, 강간죄 등 범죄행위가 있다고 소개하면서 이들은 선후 35차나 되는 사건을 저질렀으며 10명이 상해를 입게 하였다. 3심 3차 감형 20년에서 5년으로 최종판결 2007년 7월 료원시검찰원에서는 류문의와 그 주요 조직성원 도합 11명을 공소했다. 당시 류문의의 변호사는 길림국륭변호사 사무소 주임 정서달이였다. 기소서는 류문의는 깡패를 조직하고 령도한 죄와 강박적으로 교역한 죄, 고의적으로 상해한 죄 등 여려 죄명을 지적했다. 그해 8월 7일 료원시중급인민법원에서 1심판결을 내렸다. 류문의는 깡패를 조직하고 령도한 죄 등 7개 죄명으로 총 형기 34년에서 유기도형 20년을 집행하기로 판결하고 기타 골간 성원들에게도 유기도형 1년에서 20년으로 판결했다. 류문의는 이에 불복하고 상소서를 올렸다. 2003년4월 25일 길림성고급인민법원에서 원판결을 기각하고 료원중급인민법원에 되돌려 다시 심판하도록 결재했다. 2003년 9월 료원시중급인민법원에서 재심하여 15년으로 감행했다. 여기서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세절이 있다. 재심한후 류문의에 관한 1심 판결서의 7개 죄명을 이번에는 5개 죄명으로 변동했다는 사실이다. 변동량이 가장 큰것은 깡패를 조직, 령도하였고 활동에 참가했다는 죄명을 삭제한것이다. 장기간 이 사건을 관심한 료원 사법계의 한 인사는 1심판결을 개변한후에는 가장 중요한 죄명을 삭제했기 때문에 법관이 판결을 정할때 자유공간이 크다고 설명했다. 상기변동은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지만 아직 그 원인을 상세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 류문의가 금년에 다시 체포된 다음 길림성검찰원 계통에서 내막을 아는 사람이 소개한데 의하면 료원시 중급인민법원의 한 책임자는 규률검사부문의 요구에 따라 조사를 협조했으며 협조조사를 마친 다음에야 본 직장에서 정상적으로 출근했다. 그리고 이 사건의 대리검찰원, 료원룡산구검찰원기소과 부과장 채립엄은 이미 관련부문에 의해 구속되였다. 상기 내막을 아는 사람은 재심 판결이 내리자 류문의는 또 불복하여 재차 상소서를 올렸다. 2003년 년말 길림성고급인민법원에서 심리한 결과 2심판결에서 형기를 15년에서 10년으로 감형했다. 당시 이 사건을 심리한 형사정은 형사1정이며 당시 송상이 정장을 담임했다. 변호사 정서달의 건의하에 류문의는 또 신소서를 올렸다. 사건은 심판감독정으로 전이되여 재심하게 되였다. 이른바 심판감독정이란 재판이 부당한 사건을 재심한것을 다시 심사 규정하는 부문으로 류문의는 이 심리에서 유기도형 5년으로 또 감형되였다. 여기서 주의를 돌릴것은 목전 이사건을 처리한 4명 길림성고급인민법원의 법관 중 어승령이 당시 심판감독정의 성원이였다는 사실이다. ‘기술혁신’이란 명의로 감옥내에서 또 감형 2003년 년말 류문의가 길림성 매하고감옥에서 복역하게 되였다. 5년 유기도형이란 판결에 따르면 그는 구속된 2001년 9월 13일부터 계산한다면 응당 2006년 9월 12일에 만기출옥하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또 발생되였다. 감옥내 류문의는 감형기회를 한번 받게 되였다. 그리하여 그는 2004년 년말에 출옥되였는데 실제 구감시간은 3년밖에 안된다. 길림성 검찰원 인사가 피로한데 의하면 감옥측에서는 류문의가 감형을 받게 된 원인은 감옥의 겨울난방방면에 ‘중대한 기술혁신을 진행하여 감옥에 대한 공헌이 중대하다’는것이다. 그는 “깡패두목이 기술이 있으면 무슨 기술이 있으며 혁신이란 말은 되지도 않는 말이다.”라고 말하며 실제정황을 피로했다. 감옥의 경비가 어려워 겨울난방문제를 계속 해결하지 못하고 있을때 류문의의 셋째형이 30만원을 지원하여 감옥에 난방 보일러를 해결했다는것이다. 감형이 순리롭게 통과되기 위하여 감옥측에서는 인원들을 조직하여 이른바 ‘기술혁신’에 관한 확인작업을 진행했다. 이 일이 발생한후 매하감옥의 몇 몇 관리인원은 규률검사부문의 조사를 받았다. 그중 성규률검사위원회에서 ‘두가지 제한’심사를 받는 기간 이 감옥의 부감옥장 안동신은 류로오우의 감형사건중에 자기도 개인리익을 도모했다고 승인했다. 안동신은 금년에 40세인데 감옥에서 로동개조 등 방면을 관리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수중에 감형이란 대권이 쥐여져 있다. 11월 5일 오전 매하감옥의 감옥장 소협은 현재 관련부문에서 안동신의 수뢰혐의를 조사정찰중에 있다고 피로했다. 감형 일로에서 맺어진 사법계 ‘맹우(盟友)’들 류문의는 감옥에서 나온 다음 근 3년간 자유로운 생활을 향수했다. 금년 8월 그는 재검거에 의하여 재차 수감되였다. 이로서 일련의 변호사와 법관들이 그의 감형일로에서 맺어진 사법계 ‘맹우’들을 사출하게 되였다. 11월 1일 길림국륭변호사사무소의 다른 한 주임인 궁우가 피로한데 의하면 정서달은 이미 형사구속을 받았다는것이다. 장춘시 변호사계 관련인사가 소개한데 의하면 정서달은 장춘시의 저명한 변호사로서 장춘시정협상무위원이며 또한 각계 요인들을 많이 알고 있어 인맥이 아주 넓은 사람이라는것이다. 이번 류문의사건에 련루되여 형사구속을 받게 된것은 ‘회뢰소개죄’혐의라는것이다. 11월 2일 송원시 간수소 전달실, 정서달과 함께 구속된 사람으로는 길림성고급법원 형사1정 정장 송상, 형사3정 부정장 류건위, 심판감독정 법관 어승렬, 형사3정 법관 리영군 및 사평시 중급집행국 부국장 조대위 등이 있다. 이번 사법계 범죄사건은 직무범죄에 속하기 때문에 성검찰국 반탐오국은 송원시 검찰원에서 전문소조를 결성하여 정찰처리하게 했다. 전문소조와 가깝게 접근한 사람이 피로한데 의하면 이번에 류로오우 깡패집단을 단속하는 가운데 셋째형은 피소인이 아니다. 류문의가 심판을 받는 기간 그가 사처에서 활동하여 여러 방면의 성원들에게 로비돈을 주었다. 그리고 인맥이 넓은 정서달이 상하로 소통하였는바 셋째가 그의 소개를 받아 사평시 중급법원 조대위를 통해 고급인민법원의 관련 법관을 알게 되였고 자기 동생의 문제를 의뢰했다. 류문의는 료원일대에서 공개적으로 감형을 위해 돈 400만원을 썼다고 소문을 냈다. 출옥후 그는 폼을 잡고 연희석을 벌여 출옥을 자축했다. 송원검찰측은 초보적으로 정찰한데 따르면 5명 법관은 2만원에서 5만원 부동하게 수뢰했다고 피로했다. 어떤 사람은 몇 십만원을 수뢰한것도 있다는것이다. 변호사와 법원인사들이 서로 짜고 피고인과 길림성고급인민법원이 서로 손을 맞춰 물밑작업을 벌린결과 법원 판결에 영향을 주었으며 각종 사법절차를 밟아 류문의는 마침내 5년이란 경한 형벌을 받았다. 현재 회뢰죄 용의자로 류문의는 재차 장춘시 경창당국에 의해 구속되였다. 료원경찰당국에서 당사자의 증명을 받지 못한 소식에 따르면 감형사건을 재차 심리하는 기간 류문의는 그 소식을 접하자 료원경찰당국의 책임자에게 공갈 전화를 걸어 조사를 제지하려고 했다. 이에 관련된 전화는 경찰당국에서 록음하여 자료로 비치하여 두었다. 지금 규률검사부문의 감독하에 류문의 옛 사건을 길림성 검찰원에서 최고인민법원에 항소하여 최고인민법원의 결재를 기다리고 있다. 다른 별도의 이외사고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 사건은 1심법원에 되돌려 재심하게 되며 길림성고급인민법원의 5년판결을 규정하게 될것이다. /남방주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