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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로 인한 패배
수 7:10-15
10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11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12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3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에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너희가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
14 너희는 아침에 너희의 지파대로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 뽑히는 그 지파는 그 족속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족속은 그 가족대로 가까이 나아올 것이요 여호와께 뽑히는 그 가족은 그 남자들이 가까이 나아올 것이며
15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의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이라 하셨다 하라
수 7:10-15 / [불순종 때문에 생긴 패배] 그러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셨다. `어서 일어나 행동을 개시하여라. 땅에 엎드려만 있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11) 분명히 말하지만 이스라엘이 내 말을 따르지 않았다. 잘못한 일이 있으니 전쟁에 질 수밖에 더 있겠느냐? 나하고 분명히 지키겠다고 계약을 맺어 놓고서도 그 약속을 지키지 않으니 말이다. 내 명령을 우습게 여긴 까닭이다 내것이므로 반드시 없애 버려야 한다고 이른 것을 없애 버리기는 커녕 도둑질하고 훔치고 심지어 눈속임까지 하려 들다니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짓이냐? 남겨 두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일껏 일러두었건만 욕심부려 제 것으로 삼다니! 12) 싸움에서 지는 것은 기정 사실 아니겠느냐? 그러니 너희가 원수들에게 등 보이고 도망 칠 수밖에 더 있겠느냐? 제 것으로 삼지 말고 반드시 없애 버려야 한다고 내가 말한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없애 버리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희와 함께 하지 않을 작정이다. 절대로 너희 편이 되지 않을 셈이다. 13) 자, 어서 서둘러라.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여라. 남들과는 다르게 처신하도록 하여라.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새롭게 하여라. 내일을 새롭게 맞이하라고 일러라.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이르시는 말씀이라고 하면서 꼭 일러주어라. 너희가 가지고 있는 물건 가운데서 내가 제 것으로 삼지 말고 반드시 없애 버려야 한다고 말한 것을 없애 버리지 않고 남겨 둔 사람이 있다. 어찌되었든 너희가 그 물건을 없애 버리지 않으면 너희는 결코 원수들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14) 아침이 되거든 너희 각 지파별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여라. 그 가운데서 내가 가려 뽑아 낸 지파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지파 사람들을 각 씨족별로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라. 내가 또 그 가운데서 한 씨족을 뽑아 낼 것이다. 그 씨족 사람들을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라. 각 집안별로 말이다. 뽑힌 집안 사람들 가운데서 사내들만 앞으로 나아오게 하여라. 그러면 내가 한 남자를 가려 뽑을 것이다. 15) 그 남자뿐만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어떤 물건이든 모조리 불살라 버려라. 나 여호와와 함께 맺은 계약을 지키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계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말할 수 없이 끔찍한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원망하며 근신하는 여호수아에게 책망에 가까운 명령이 내려집니다.
죄의 대가(10-12) 진노의 대상은 멸망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죄인은 죽여야 하고 물건은 태우든지 또는 여호와의 곳간에 저장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중에 도적질한 자가 있는 만큼 그들은 연대책임을 지고 그들이 바친 것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도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도적질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고 용납하여 둔다면 그들과 함께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할 일이 있음을 가르쳐 주십니다. 탄식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탄식은 회개가 아닙니다. 패배의 원인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결코 타협하시는 분이 아니며 범죄한 자는 대적을 능히 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십니다. 죄의 대가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죄를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동행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지 않으시면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해결 방법(13-15)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해결할 방법으로 바친 것을 멸하라고 명하신 것을 백성들에게 전달합니다.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13) 백성들을 성결하게 하고 여호와의 지시를 기다리도록 합니다. 죄를 범한 자를 밝혀내는 방법과 범죄한 대상을 처벌하는 방법을 말하고, 그 처벌의 이유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 망령된 일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간의 범죄는 단순히 개인적인 탐욕을 넘어서 언약파기의 차원에서 연대책임으로 책망하신다고 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이스라엘 전체 가운데 제비를 뽑게 하시는 것은 교육 효과를 위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대상을 좁혀가면서 색출할 때 죄는 숨길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죄인과 함께 그에게 속한 모든 것도 함께 불사르게 하신 것은 하나님 앞에 망령되게 행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하십니다.
적용: 당신 한 사람의 죄로 내가 속한 공동체가 연대책임으로 징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할 때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대가를 지불할지라도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 설 교 >
뼈아픈 실패가 주는 교훈
수 7:1-26 / 정도열 목사
이스라엘은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습니다. 6장 22-25절에 보면 라합과 그 가족들이 구원을 받고, 나머지 모든 여리고 사람들은 진멸을 당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저주하며 맹세하였습니다.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을 것이라“(6:26) 누구든지 무너진 여리고성을 다시 건축을 시작할 때 장자가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고, 건축을 마치고 문을 달 때에는 막내가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저주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 성을 다시는 쌓지 못하도록 하신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 우상숭배에 빠진 가나안을 하나님께서 이와같이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보이신 것입니다. 둘째, 견고한 성이 이렇게 처참하게 파괴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이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증거를 삼으셨습니다. 아무튼 이스라엘은 난공불락의 여리고 성을 정복하고 사기가 충천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여리고성보다 훨씬 작은 아이성을 공격하다가 뼈아픈 패배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었습니다(5). 이는 이스라엘 백성 중 하나가 탐욕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께 온전히 바친 물건을 도적질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뼈아픈 실패를 통해서 세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I.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한다(1-5)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1절에 “온전히 바친 물건”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7장에 온전히 바친 물건이라는 말이 8번 나옵니다.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했다, 온전히 바친 물을 가져갔다, 또 11절에도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였다고 했습니다. 6장 16절에 보면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라고 했고, 18절에 보면 그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면 취한 사람도 온전히 바치게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금은동철은 하나님의 곳간에 들이고 나머지 모든 것은 온전히 진멸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마치 첫 열매를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여리고성은 가나안 정복전쟁의 첫 승리였습니다. 이 승리의 영광을 온전히 하나님께만 돌려드리도록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을 가로채는 사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경고였습니다. 그런데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도적질해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본인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아주 은밀하게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시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여호수아가 아이성에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그 사람들이 올라가서 아이를 정탐하고 돌아왔습니다. 여호수아에게 어떻게 보고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백성을 다 올라가게 하지 말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그들은 소수이니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마소서” 이 정탐꾼들은 아이성을 얕잡아보았습니다. 여리고 성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니 이삼천 명만 보내도 충분히 정복할 수 있다고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또 모든 백성을 그리로 보내어 수고롭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이 무엇을 말해 줍니까? 이삼천 명만 올라가도 능이 정복할 텐데 뭣하더 모든 백성이 가서 수고롭게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여리고 정복 후에 마음이 높아졌습니다. 자신감에 넘쳤습니다. 자만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동시에 안일한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수고를 적게 하고자 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삼천 명의 군사력을 의지하였습니다. 원수들을 얕잡아 보았습니다. 여호수아장군조차도 그들의 말에 설득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백성 중 삼천 명쯤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이성 공격에 실패하였습니다. 도망 나오는데 아이 성 군대가 뛰따라 와서 36명을 쳐 죽였습니다.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었습니다. 아이 성 사람들을 얕잡아보았다가 혼쭐이 났습니다. 서른 여섯 명의 동료들을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아이성에는 약 12000명 정도가 살고 있었습니다(수 8:25). 그중에 군대는 35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방어하고 있는 적을 공격하려면 3배가 더 많아야 한다고 합니다. 최소한도 3만명은 보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3000명의 군대를 보냈으니 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리고를 공격할 때에는 온 백성이 한 마음으로 참여했습니다. 법궤를 앞세우고 하루에 한 바퀴씩 엿새를 돌고, 마지막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돌았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순종하여 한마디도 불평하지 않고 성을 돌았습니다. 여호수아의 명령에 따라 큰 함성을 질렀을 때에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아이 성은 달랐습니다. 3000명만 전쟁에 보내고 나머지는 쉬었습니다. 다 수고할 필요가 없다고 안일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 정도의 군사만 해도 충분하다는 근거없는 자만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은 여리고성을 정복한 것이 자기들의 군사력 때문인 줄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잠언 16장 18절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다. 또 잠언 15장 25절에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그 집을 허물어 버리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약 4:6). 다윗 왕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승리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주변나라들을 정복하고 평정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들을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에 살게 하셨습니다(삼하 7:1). 그때에 다윗의 마음에 교만함과 안일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모든 장군들이 전쟁에 나갔는데 자기는 하루 종일 침상에서 딩굴었습니다(삼하 11:2). 그러다가 저녁때쯤 일어나 옥상을 거닐다가 밧세바가 목욕을 하는 모습을 보고 큰 죄에 빠졌습니다. 사단이 잠시 방심하는 틈을 타고 다윗을 미혹하였습니다. 다윗은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왕권을 이용하여 신하의 아내를 범하고, 신하까지 죽게 하는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다윗 가문에 엄청난 화를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죄는 사함 받았지마는 그 가정에 어두운 죄의 악영향이 급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아들들 간에 살인사건이 끊이지 않고, 압살롬의 반역으로 왕권을 빼앗기기도 하였습니다. 다윗은 은밀히 죄를 지었지만 아들은 백주에 아비의 첩들과 동침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한 순간의 교만이 패망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싸움에서 이기고 나면 자만해지기 쉽습니다. 자만해지면 매사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방심하게 됩니다. 싸워야 할 대상을 과소평가하게 됩니다. 안일해집니다. 슬슬 해도 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실패의 원인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어떻게 하면 실패한다고요?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항상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무슨 일이든지 잘 될 때 더욱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힘이 생겼을 때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힘으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느껴질 때 더욱 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거기에 승리가 있고 은혜와 축복이 있습니다.
백수의 왕 사자를 보십시오. 토끼 한 마리를 잡을 때에도 최선을 다합니다. 온 몸을 숨기고 엎드려 소리 없이 다가갑니다. 기회가 오면 온 힘을 다하여 공격합니다. 동물세계를 보면 정말로 잠시도 방심하지 않습니다. 잠지라도 방심하면 위에 있는 먹이사슬에게 먹히게 됩니다. 이처럼 한번 성공했다고 자만심에 사로잡히거나 하나님보다 경험을 의지하게 되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우리가 넘어지기 가장 쉬운 때는 힘들고 어려울 때가 아니라 성공을 경험하였을 때입니다. 성공은 실패의 어머니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합니다.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생활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100% 사용해야 합니다. 온 힘과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재능을 사용하여 100% 이익을 남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땅속에 파묻어 두는 것은 하나님에게 큰 손해를 끼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악하고 게으른 자가 받는 율에 처하게 됩니다. 우리가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매사에 최선을 다할 때에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II. 실패에는 반드시 영적인 이유가 있다(6-13)
전쟁에 패하고 백성의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린 것을 본 여호수아의 자세가 어떠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여호와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옷을 찢었습니다. 이는 슬픔의 표현입니다. 백성의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의 궤 앞에서 땅에 엎드렸습니다. 날이 저물도록 티끌을 무릅쓰며 하나님께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 여호수아는 차라리 요단 저쪽에 만족하며 거기에 거주하는 것이 더 좋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찌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무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장 염려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8,9절을 보십시오. “주여 이스라엘이 그의 원수들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가나안 사람과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 이스라엘이 아이 사람들에게 패전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온 가나안 사람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이스라엘을 멸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주의 크신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될 텐데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정복의 책임을 맡은 자로서 큰 충격에 사로잡혀서 하나님께 하소연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어덯게 응답하셨습니까?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10,1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임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어겼고, 온전히 바친 물건을 도둑질하여 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여리고성을 온전히 바치도록 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어겼다는 것이었습니다. 15절에도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의 원인은 자만심과 안일함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패했습니다. 전쟁의 성패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군대의 숫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기드온의 삼백 용사로도 모래처럼 많은 군대를 멸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아무리 군사력이 강해도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은 영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실패에는 반드시 영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모든 실패에는 반드시 무엇이 있다고요? 예, 반드시 영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제거하지 않은 한 계속해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결심을 하고, 힘을 모으고, 최선을 다해도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또 다시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신자들은 일이 잘 안 되면 운이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실패에는 반드시 영적인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실패의 날에 여호수아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무엇이 잘못되어 있었는지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티끌을 무릅쓰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와 함께 하시지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지는 않았는지,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지는 않았는지,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도적질하지는 않았는지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면 신호를 주십니다. 어떤 경우는 건강을 통해서, 어떤 경우는 자녀를 통해서, 어떤 경우는 사업의 실패를 통해서, 어떤 경우는 이웃 사람들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도록 신호를 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면 더 큰 징계와 심판이 따릅니다. 실패의 날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자신을 살피고 회개의 기회를 삼아야 합니다. 그것이 실패를 만회하고 극복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저는 2004년, 5년 뼈아픈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저의 교만과 불신앙을 깊이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우고자 하지 않고 사람들 위에 세우고자 했습니다. 나의 인격과 내가 쌓아놓은 33년 동안의 업적 위에 교회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허물어뜨리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셨습니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철저히 훼파하셨습니다. 나의 명예와 나의 영적 권위와 나의 지식과 나의 경험,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몸으로만 주님 안에 살았지 마음이 주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잃은 후에야 영적으로 너무나 미성숙한 나 자신을 발견하고 주님께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로 사는 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모든 실패에는 반드시 영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뼈아픈 회개를 할 때에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에게 풀리지 않은 인생 문제가 있습니까? 가정 문제가 있습니까? 건강문제가 있습니까? 구직시험에 실패했습니까? 결혼문제가 풀리지 않습니까? 대인관계로 힘듭니까? 직장생활에 실패했습니까? 물론 여러 가지 인간적인 요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문제들은 보강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영적인 요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 기도하며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보실 때 무엇이 문제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입으로만 주님이라고 하고 과거에 가졌던 죄의 습성과 죄악의 요소들을 그대로 끌어안고 살아간다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삶에 변화도 없습니다. 평생 그 자리에서 뱅뱅 돕니다. 우리 안에 뿌리박고 있는 죄악을 깨닫고 그 문제를 하나님 앞에 해결 받을 때 모든 문제가 풀립니다.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많은 일 속에서 패배를 경험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영적인 이유를 발견하고 더욱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I. 죄에는 반드시 형벌이 따른다(14-26)
14-18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는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각 지파별로 가까이 나아오게 하여 제비를 뽑았는데 유다지파가 뽑혔습니다. 유다 족속들을 가까이 나아오게 하였는데 세라 족속이 뽑혔습니다. 세라족속을 가까이 나오게 했는데 삽디가 뽑혔습니다. 삽디의 가족을 가까이 나오게 했는데 아간이 뽑혔습니다.
여호수아는 아간에게 죄를 문책했습니다. “내 아들아, 청하노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게 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19). 그러자 아간이 더 이상 자기의 죄를 숨길 수 없을 깨닫고, 모든 것을 자복하였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 무게가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보소서 이제 그 물건들을 내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는데 은은 그 밑에 있나이다.”
아간은 아무 것도 취하여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알면서도 순종치 않았습니다. 들키는 날에는 그 물건들과 함께 진멸 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탐내어 가졌다고 했습니다. 탐욕이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날산 아름다운 외투는 바벨론에서 만든 외투로 매우 값비산 것이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명품 중의 명품 외투였습니다. 수억 원하는 밍크 코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은 이백 세겔과 금 오십 세겔되는 금덩이를 탐내어 가졌습니다. 은 2.3kg, 금 0.575kg입니다. 수천 만원되는 돈입니다. 그는 이것만 숨기면 앞으로 가나안 정복하고 정착하게 되면 큰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완벽하게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을 몰랐습니까? 죄는 반드시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서도 안 들키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죄는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습니다. 사람들의 눈은 속일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꼭꼭 숨어 있는 아간을 마침내 찾아내셨습니다. 열두 지파 중에 설마 유다지파가 뽑히겠느냐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유다지파가 뽑혔고, 그 중에 세라, 그 중에 삽디, 그 중에 아간이 뽑혔습니다. 한 단계씩 범위가 좁혀 올 때 아간이 얼마나 떨었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정확하게 범죄한 자를 찾아내십니다.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인 후에 자기가 안 죽인 것처럼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문책하셨습니다. 그랬을 때 가인이 “내가 내 아우를 지치는 자입니까?”하고 회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4:10)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숨겨진 죄를 반드시 찾아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온 세상을 두루 감찰하십니다. 어두운 가운데 있는 은밀한 것까지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욥 12:22). 아무리 숨겨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납니다(히 4:13). 그러므로 사람들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시는 그날에는 사람들의 은밀한 것까지 다 찾아내어 심판하십니다(롬 2:16).
중국 [열자(列子)]라는 책의 설부(說符)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잇습니다. 제나라 사람 중에 금을 탐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 옷을 입고 시장에 가서 금을 파는 곳을 찾아가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금을 훔쳐 갔습니다. 관리가 그를 체포한 다음 그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있었는데 그대가 남의 금을 훔쳐간 것은 어째서인가?" 그 사람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금을 들고 올 적에는 사람은 보이지 않고 금만이 보였습니다." 여기에서 확금자불견인(攫金者 不見人)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돈을 움켜쥐려고 하는 사람은 돈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어떤 것에 대한 탐심에 사로잡히며 그것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이만큼 탐심을 다스리기 어렵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탐심은 곧 우상 숭배니라”(골3:15) 모든 죄의 뿌리는 탐욕입니다. 탐욕에서 모든 죄가 출발합니다. 그렇습니다. 지나치게 더 가지고자 하는 욕심은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게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고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파멸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여호수아는 즉시 사자를 보내어 아간의 장막에 숨겨놓은 물건들을 찾아냈습니다(22). 백성들과 함께 아간을 체포하고 그가 숨긴 물건들과 아들들과 딸들과 가축들과 장막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골짜기로 갔습니다(24).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그를 여호와께서 괴롭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자, 온 이스라엘이 돌로 치고 불살랐습니다(25). 그 위에 저주의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습니다. 그제야 여호와의 극렬한 분노가 그쳤습니다. 그곳을 아골(괴로움) 골짜기라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아간을 엄벌하신 것은 앞으로 있을 수많은 정복전쟁 중에 아간 같이 탐욕에 눈이 어두워 범죄하는 자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경계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앙공동체가 물질주의와 인본주의에 물들지 않도록 아간을 징벌하셨습니다. 죄는 전염성이 강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앞으로 수많은 아간들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병들어 버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엄히 징계하셨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와 삽리바 사건이 나옵니다. 이분들은 비교적 믿음이 좋은 분들이었습니다. 영향력도 있었습니다. 바나바와 경쟁할 정도로 열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밭을 팔아서 얼마만큼 숨기고 다 헌금한 것처럼 속였습니다. 그랬을 때에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해서 그 성령을 속인 죄를 책망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돌같이 굳어서 죽었습니다. 그 아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예루살렘 교회에게 물질주의와 인본주의의 죄악이 퍼지지 않도록 막으셨습니다. 신앙공동체의 순순성을 지키도록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더럽히는 어떤 죄악도 용납지 아니 하십니다.
우리가 욕심에 사로잡히면 아간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 줍니다. 아간이 지은 죄는 이스라엘 전체에 영향을 미쳐서 아이성에서 실패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탐심을 품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게 되면 그것은 나 자신이 범죄한 문제로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엄청난 악영향을 끼치게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나 한 사람쯤이야,” “아무도 안 보는데 어때?”라고 생각합니다. 나 한 사람이 불순종의 삶을 살고 탐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범죄하게 되면 그 악영향이 온 교회에 미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는 유기체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는 그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입니다. 한 지체가 범죄하게 되면 다른 모든 지체가 영향을 받습니다. 영적으로 침체되고 무기력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살아야 내 가정이 살고, 내가 살아야 내 교회가 산다는 신념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아간이 특별히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도 아간이 될 수 있고, 여러분도 아간이 될 수 있습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지면 누구나 아간처럼 범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 떼먹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어기고 욕심대로 행할 수도 있습니다.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신앙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로 인해 가정에 재앙이 닥치고, 공동체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랬을 때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간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아간처럼 처형당할 수밖에 없는 그 자리에 우리 주님께서 대신 처형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우리가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우리 죄를 자백하고 주님의 용서의 사랑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백성이 누리는 가장 큰 특권입니다. 우리는 아간처럼 처형을 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든 죄를 사함 받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아이성 전투의 실패를 통해서 우리는 세 가지 진리를 배웠습니다. 첫째로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한다. 둘째로 실패에는 반드시 영적인 이유가 있다. 셋째로 죄에는 반드시 심판이 따른다. 이 진리를 심령깊이 영접하고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까지 무릎으로
수 7:6-13
여리고 성을 함락시킨 여호수아는 곧바로 가나안 내륙으로 진격했습니다. 여리고 성에 이어 두 번째 정복 목표점은 아이(Ai) 성이었습니다. 아이 성은 여리고에서 벧엘로 올라가는 길에 있는 작은 성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몇 명의 정찰병을 보냈습니다.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정찰병들은 여호수아에게 아이 성을 우습게 여기는 보고를 했습니다. 당시에 아이 성 안에는 12,000명이 있었습니다. (수 8:25) 그러나 정찰병들은 이스라엘에서 단 2-3천명만 보내도 충분히 아이 성을 진멸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그들의 말대로 3천명의 군인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처참한 패잔병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이 아이 성 전투를 놓고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잘못 되었던 것입니까?
정찰병의 자만 때문이었습니까? 여호수아의 지휘권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은 정찰병의 자만을 꼬집지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의 리더십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진짜 이유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패전한 원인은 “온전히 바친 물건” 때문이었습니다. “온전히 바친 물건”이란 단어가 여호수아 6장과 7장에서 무려 8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먼저 여호수아 7:1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라.”라고 하셨습니다. 패전의 원인이 되었던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이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여리고 성을 점령했을 때 거둔 [전리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전리품들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물건"으로 삼아 다 폐기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리고 성은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전력이나 화력으로는 결코 점령할 수 없는 성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 지시하셨습니다. 6일 동안 여리고 성을 한 바퀴 돌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 7일째 되는 날에는 일곱 번 돌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여섯 바퀴를 돌고, 최후 한 바퀴를 남겨 두었을 때,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지시를 전달했습니다. 그것이 “온전히 바친 물건”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여호수아 6:18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전리품을 절대 갖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 구절을 현대인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전리품을 가질 생각은 아예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이미 여호와께 바쳐진 것이므로 모두 소멸해 버려야 합니다. 여호와께 바쳐진 것이 무엇이든지 여러분이 그것을 가지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 재앙이 내릴 것입니다.” 이 말씀이 선포되고 마지막 일곱 바퀴를 돌 때,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여리고 성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확실해졌습니다. “온전히 바친 물건”은 ‘전리품’을 가리키고, 그 ‘전리품’은 ‘저주 받은 물건’이고, 그 “저주 받은 물건”은 절대로 손대지 말아야 하고, 그 전리품들은 다 없애버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라도 갖으면 재앙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우습게 여긴 자가 있었습니다. ‘아간’이란 자였습니다. 여호수아 7:1절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그것이 아이 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처참하게 패한 이유였던 것입니다. 즉 정탐꾼의 자만 때문이 아니라, 여호수아의 느슨해진 리더십 때문이 아니라, 아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고 금지된 물품 즉 “온전히 바친 물건”을 훔쳐서 숨겼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큰 일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면, 아무 것도 아닌 작은 일 앞에서도 맥없이 무너져 부끄러운 패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간은 그 많은 전리품 가운데서 금 숟가락 몇 개 정도는 괜찮겠지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든 전리품의 리스트를 손에 가지고 계셨고, 그 전리품 중에서 몇 개가 빠졌는지 정확히 아시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누가 훔쳤고, 그가 어디에 숨겨놓은 것까지 아시고 계셨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피해서 숨을 수가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추적하시면 숨을 곳이 없습니다. 아모스 9:1- 3절 말씀입니다. “내가 남은 자를 칼로 죽이리니 그 중에서 한 사람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리라. 그들의 파고 스올로 들어갈지라도 내 손이 거기에서 붙잡아 낼 것이요, 하늘로 올라갈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붙잡아 내릴 것이며, 갈멜산 꼭대기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찾아낼 것이요. 내 눈을 피하여 바다 밑에 숨을지라도 내가 거기에서 뱀을 명령하여 물게 할 것이다.” 이런 하나님을 아간이 우습게 여겼던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읽을 때 숨이 막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의 힘이 되고, 우리의 방패가 되고, 우리의 의가 됩니다. 나에게만 그리하실 뿐만 아니라, 나의 대적에게도 그리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히 바친 물건(영적으로 더러운 것)”에는 관심조차 갖지 말라고 하시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2019년을 황금 돼지해라고 합니다. 믿음의 눈을 닫으면, 그 어느 해보다 황금을 눈에 넣고 살아야 합니다. 크리스천이라는 사람들도 그 황금 대박을 기대하며 살 것입니다. 꿈속에서도 황금 돼지를 끌어안고 자고 싶어 할 것입니다. 아간이 숨긴 금덩어리는 오십 세겔짜리였습니다. (수 7:21) 1세겔은 금 3돈입니다. 그러므로 150돈짜리 황금 덩어리를 훔쳤던 것입니다. 그 황금 덩어리를 품고 아골 골짜기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죽었던 아간의 최후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에게 큰 힘이 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수아가 행한 일입니다. 여호수아는 아이 성에서의 패배 소식을 듣고 곧바로 법궤 앞으로 나아가 얼굴을 땅에 묻고 통곡했습니다. 밤늦게 까지 여호수아는 일어나지 않고 통곡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수 7:10)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일으켜 세우고, “온전히 바친 물건”을 취하여 더러워진 백성을 다시 거룩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나의 언약을 어겼으며 또한 그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져가고 도둑질하며 속이고 그것을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에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들의 원수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이는 그들도 온전히 바친 것이 됨이라.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일을 위하여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희 가운데에 온전히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너희가 그 온전히 바친 물건을 너희 가운데에서 제하기까지는 네 원수들 앞에 능히 맞서지 못하리라.” (수 7:11-13) 우리에게도 여호수아의 이 무릎이 필요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던 여호수아를 닮아야 합니다. 밤새 엎드려 통곡하는 여호수아에게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라고 하신 하나님의 음성이 참으로 큰 위로가 됩니다.
2019년도가 출발했습니다. 원대한 꿈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도전! 승리!”를 외치며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먹이 아니라 무릎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앞에 그 어떤 상대가 와도 우리는 늘 똑같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패전의 원인을 엉뚱한 곳에서 찾지 말고, 승리를 엉뚱한 방법을 성취하려고 하지 말고, 끝까지 무릎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리고 성 전투는 하나님께서 맡으시고, 아이 성 전투는 내가 할 수 있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담대한 쌈꾼을 찾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자, 엎드릴 줄 아는 자를 찾으십니다. 진정한 승리는 내가 쟁취하는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승리입니다.
숨은 죄를 제거하라
수 7:1-15
살다 보면 실패를 할 수 있습니다. 크든 작든 실패를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실패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원인을 분석해보면 많은 경우 목적이 분명하지 않거나, 열심을 내지 않고 게을렀거나, 확고한 결단이 부족하여 시기를 놓쳤거나, 지나치게 욕심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듯이 실패했을 때 그 원인을 잘 파악하고 극복할 수 있다면 도리어 실패가 성공의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생의 한 시점에서 실패했다고 인생이 끝난 것처럼 좌절할 것이 아니라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실패했을 때 어떻게 하셨나요? 누구의 탓이라고 원망하셨습니까? 믿어보았자 소용없다고 하나님께 불평하셨나요?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정복 과정 중에 범한 대표적인 실패를 보여줍니다. 승승장구하다가 갑자기 제동이 걸렸습니다. 문제의 원인과 그에 따른 처방이 무엇인지 살펴보면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 적용하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 진노하시니라”(7:1)
여리고 성을 정복한 이스라엘 백성은 그 다음 목표인 아이 성을 보았을 때 회심의 미소를 띠었을 것입니다.
큰 성인 여리고를 정복하였는데 작은 성 아이 쯤이야 정복하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을 것입니다. 6장은 어떻게 끝납니까?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6:27) 7장은 어떻게 시작됩니까? 개역성경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원문에서는 상황의 반전을 의미하는 ‘와우’라는 접속사를 사용합니다. ‘여호수아의 소문이 온 땅에 퍼졌다 그러나.’ 무엇인가 불길한 조짐을 보여줍니다.
1절을 요약하면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간의 범죄를 개인이 아닌 이스라엘 공동의 범죄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와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여호와와의 언약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맺어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가 여호와와 맺은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개인의 잘못은 공동체의 잘못으로 전이되며 궁극적으로 여호와와 이스라엘 간의 언약 관계에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이 본문이 말하는 핵심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는 좋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순종할 때, 요단 강이 갈라졌고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불순종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위태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 여리고 성의 물건은 일체 손을 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아간은 탐나는 물건을 감추어서 자기 장막 안에 파묻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온 땅을 감찰하십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죄는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간은 자신의 행동이 이스라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한 사람의 죄가 이스라엘 전체를 오염시킬 수 있기에 하나님은 아간의 죄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하셨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을 주지 않고 침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전쟁에 함께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삼천 명만 올라가서 아이를 치게 하소서 ...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 같이 된지라”(7:2-5)
여호수아는 나름대로 아이 성 공격을 신중하게 준비하였습니다. 여리고 성을 공격하기 전에 하던 대로 아이 성을 정탐하게 했습니다. 이 글을 읽은 우리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이미 알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아간의 범죄와 여호와의 진노에 대해 모르고 있습니다. “올라가서 정탐하라 하매 그들이 올라가서 정탐하고”에서 ‘올라갔고’, ‘정탐했다’의 동일한 단어의 반복은 정탐꾼들이 여호수아의 명령에 순종함을 말해줍니다. 지금까지의 명령체계(여호와-여호수아-백성)와 달리 여호와의 명령 없이 여호수아의 명령에서 출발합니다. 여리고 성은 해수면에서 260m 밑에 위치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아이 성은 해발 518m 높이에 있으니 여리고 성으로부터 700-800m 더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아이 성에 가려면 올라가야 합니다. 정탐한 사람들이 여호수아에게 보고한 내용은 아이 성은 작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다 올라 갈 필요가 없고 이삼천 명만 올라가면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제안은 모든 백성이 하나가 되어 행동하던 지금까지의 패턴을 깨는 것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나누게 합니다. 정탐은 어디까지나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작전 지시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의 총사령관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일이든지 먼저 하나님께 물어야 하고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아직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는데도 여호수아는 군사들을 보냈습니다.
실제 아이 성을 공격한 사건에 대한 묘사는 극히 짧습니다. 삼천 명쯤 되는 백성이 ‘올라갔다가 도망했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3절에서는 올라가서 치자고 하였는데 4절에서는‘올라가다’는 동사만 사용되었고 가장 핵심이 되는 ‘치다’는 빠져 버렸습니다. ‘올라가기’는 했지만 전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도망가기’만 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이 성 전투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하고 패배했습니다. 죽은 숫자는 1% 정도인 36명 정도였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정신적인 충격은 너무나 컸습니다. “백성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된지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엎어진 물처럼 되어 수습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는 가나안 사람들의 마음이 녹아내렸는데(2:11, 5:1),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땅에 엎드려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있다가 ... 어찌하여 ...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7:6-9)
여호수아는 아이 성을 공격할 때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단독적으로 작전을 감행했습니다. 그런데 실패하자 그래서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하루 종일 씩씩거리면서 옷을 찢고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회개의 자세가 아니라 하나님께 무언으로 항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물 때까지 기도는 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은근한 불만을 표시하는 이 사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여호수아 맞습니까? 예. 그에게서 광야 1세대가 종종 보여주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런 것을 볼 때마다 사람은 다 거기에서 거기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도 한 순간에 마음이 완악해질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하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잠깐의 방심이 이런 실수를 하게 합니다. 여호수아가 화난 마음을 삭이는데 온 종일 걸렸습니다.
긴 시간동안 엎드려 있은 후 여호수아가 던진 첫 마디는 탄식이었습니다. ‘슬프도소이다’ 여호수아는 질문의 형식을 통해 불평을 드러냅니다. “어찌하여 ...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7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8절), “어떻게 하시려 하나이까”(9절). “어찌하여”, “무슨”, “어떻게”로 항의하는 여호수아의 태도는 아직까지 여호수아가 아이 성의 참패 원인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간의 범죄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시고 있는데 오히려 여호와께 항의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여 백성을 순종하도록 이끌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게 하는 자신의 사명을 깜박 잊었습니다.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넌 사건은 이스라엘을 복 주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와 능력을 체험케 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단 저편”에 있었더라면 좋았겠다는 말은 요단강 사건과 여리고 성 전쟁에서 보여 준 여호와의 섭리와 호의를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내용은 우리가 이 작은 성에서 패하여 돌아섰으니 다른 아모리 족속들이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모든 가나안 족속들이 자기들을 얕보고 공격할 텐데 그러면 끝장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숨은 죄로 인하여 얼마나 마음 아파하시는지는 생각지 않고 가나안 족속들이 자기들을 우습게 여길 것만 걱정했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 생각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이 알면 어떻게 할까 하는 걱정을 앞세웁니다. 인간은 이렇게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우습게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의 자세입니다.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7:10-15)
하나님은 하루 종일 엎드려 있는 여호수아에게 드디어 말씀하십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모른 채 엎드려서 불평의 기도를 드린 여호수아에게 여호와께서 “어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질문을 던지십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안에서 죄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 숨은 죄가 있는 것과 그것 때문에 전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여호수아는 7절에서 “어찌하여”로 시작하는 의문문으로 여호와께 불평했습니다. 여호와께서도 “어찌하여”로 질문을 던지십니다. 여호수아가 슬퍼하는 이유가 잘못되었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도적하였고, 그들이 속였고, 그들이 그들의 물건들 가운데 두었다고 복수형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언약을 어긴 이스라엘은 가나안 민족들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 적들에게 패했던 이유에 관해 총괄적으로는 그들이 죄를 짓고 언약을 어겼기 때문이며, 구체적으로는 헤렘을 가져가 이스라엘 가운데 둠으로써 언약이 파기된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자체가 가나안 민족들처럼 진멸되어야 할 헤렘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앞으로 전혀 승리할 수 없을 것이며 여호와의 임재 또한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제 바친 물건을 제하면 살 수 있다고 하시면서 그 방법을 말씀해주십니다.
다시 여호수아에게 “일어나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어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를 명하십니다. 그 명령은 “백성을 성결케 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요단강을 건너지 전에 주어졌던 명령으로 이스라엘이 그때의 상태로 추락한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희망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첫 사랑의 처음 자리를 회복하는 길은 회개하고 성결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마음을 물같이 녹게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히실 수 있도록 그에게 가까이 나와야 했습니다. 그전에는 결코 승리를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이 성 정복의 실패 원인:
이스라엘은 아이 성 전투에서 참담한 패배를 경험합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느꼈던 절망감이 이제 이스라엘 백성을 엄습했습니다. 이것은 한 번의 패배일 뿐이지만 앞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가나안 정복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가져올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왜 여리고 성을 손쉽게 함락시켰던 이스라엘이 그보다 훨씬 아이 성 정복은 실패하였을까요?
1)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의 승리의 공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고 여호수아는 들은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고 백성은 그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요단강 동편과 요단을 건널 때와 여리고 성을 칠 때 보면 하나님께서 가라 하면 가고 움직이라 하면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작전 지시에 따라 철저하게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공식이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이 성에 왔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호수아는 왜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시는지 묻지 않았습니다.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냥 자기들끼리 정탐을 하고 작전을 세우고 올라갔다가 실패했습니다. 우리가 언제 실패합니까? 과거의 경험을 믿고 나아갈 때입니다. 어제의 성공이 오늘의 승리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일이 크든 작든 하나님의 백성들은 왕이 되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가 필요하지 않은 시시한 일은 없습니다.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 기도는 최후의 수단이 아니라 최선의 방책입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2)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니 여호수아의 명성이 그 온 땅에 퍼지니라”(수 6:27).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실 때 이스라엘은 이겼습니다. 그 결과 여호수아의 이름이 그 온 땅에 알려졌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는 곳마다 승리의 깃발이 세워집니다. 그런데 아이 성 전투에서 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니 여호수아의 뛰어난 용기와 지혜는 전쟁의 승부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만 이스라엘은 이깁니다. 이겼다고 영적인 긴장의 끈을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실패한 사람이 교만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언제 실족하였습니까?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가 아닙니다. 블레셋과 치열한 전투를 벌일 때가 아닙니다. 이제는 나라가 강성하여 다윗이 친히 전쟁터에 나가 싸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때였습니다. 부하들은 전쟁터에서 싸우는데 다윗은 낮잠을 자고 일어나 성 위를 거닐다가 밧세바를 보게 되었고 그와 더불어 간음하게 되었습니다.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부흥을 경험할 때 엎드려야 합니다. 큰 은혜를 받을 때 더욱 자세를 낮추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주님만을 의지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3) 불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 하나님께서 하신 명령이 있습니다. 6:18-19,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이스라엘 진으로 바침이 되어 화를 당케 할까 두려워하노라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들일지니라.” 그 말씀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명 있는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다 죽이고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사르고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습니다. 그런데 아간이라는 자가 욕심을 부려 외투 한 벌, 은 2백 세겔, 금 오십 세겔을 훔쳐 자기의 장막에 숨겨 두었습니다. 죄는 결코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가 훔친 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노략한 물건에 비하면 적은 양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큰 죄나 작은 죄나 똑같은 죄이기에 다 심각하게 다루셔서 아간과 공범인 그의 아들들은 온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돌에 맞아 다 돌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아간의 사건은 가나안 정복의 초기에 생긴 것으로 그 정도 훔친 것으로 죽이기까지 한 것은 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으나 우상을 많이 섬기던 가나안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을 경건한 백성으로 구별하여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목적이 있으셨기에 탐욕을 인한 불순종에 대하여 가혹한 벌을 내리셨습니다. 불순종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공동체의 경각심을 높이고자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이번에 메르스를 인하여 한국 사회가 얼마나 공포에 휩싸이고 경기까지 침체가 되는 이중고를 겪었습니까? 메르스에 감염된 사람들이 누구인지 정부에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감염된 사람들도 함부로 움직이다 보니 짧은 시간에 메르스 바이러스가 퍼져나갔습니다. 초기 대응만 제대로 했더라도 이렇게까지 피해를 겪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드러난 죄는 사람들이 알고 주의를 할 수 있지만 드러나지 않는 죄는 한 순간에 누룩처럼 퍼집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삶을 살고 있지만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는 완전하게 거룩할 수는 없는 부족한 인간입니다. 우리 모두 죄성을 가지고 있는지라 한 순간에 실수할 수 있습니다. 작지만 숨은 죄가 부흥의 불길을 꺼뜨리고 하나님의 교회를 절망하게 만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실패할 수 있으며 온 세상에 웃음거리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 해서든지 각자가 죄짓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할 뿐 아니라 죄의 문제를 빨리 수습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공의 비결은?
어제의 승리는 오늘의 승리를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어제의 승리는 어제의 승리일 뿐이고, 오늘의 승리는 오늘 최선을 다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특히 성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그러진 것이 없는지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야말로 우리 승리의 관건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실패했을 때 책임을 전가하거나 누군가를 원망하는 반응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실패의 원인을 발견하고 해결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실패의 원인을 반대로 하면 성공의 비결이 될 수 있습니다
1) 영적으로 깨어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고난의 때에 의지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히스기야가 앗수르가 쳐들어온 국가적인 위기에서, 죽음에 이르는 질병에 걸린 개인적인 위기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한 것처럼 우리도 기도의 능력을 의지하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기도할 때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게 하십니다. 기도할 때 우리가 나아갈 길을 보여주십니다. 기도할 때 우리의 상한 마음을 치유합니다. 시편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을 향해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할 때 우리는 절망과 낙심을 딛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만 우리가 담대함을 얻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2)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은 성도의 성숙을 보여주는 척도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성과 그 죄악을 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으며 살 때 우리의 성품이 변화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모든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부족, 한계, 죄악됨을 깨닫게 됩니다. 그럴 때 예수님처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섬김의 자세를 갖게 됩니다. 우리를 낮출 때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십니다.
3)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사울이 폐위된 것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아말렉의 모든 것들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의 신분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의 음성보다 사람들의 소리를 더 의식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들의 평가를 더 중요시 할 때 하나님은 그를 낮추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시기 바랍니다. 말씀 속에 삶의 지혜가 있고 약속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모든 근심과 걱정과 염려에서 자유케 합니다. 말씀의 능력이 우리를 붙들어 주님의 일을 감당하게 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진정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기도하며 겸손하며 순종하는 가운데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푸시는 주님의 사랑의 손길을 느끼며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여 주님을 높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