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을 설교하는 중입니다.
이번 주는 서머나 교회를 연구했습니다.
책망이 없는 교회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고발과 위증으로 인해
체포/사형의 위기에 직면하였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처럼 10일의 시험을 이겨내고,
세 친구들처럼 “죽을 때까지 충성”하라고 합니다.
물론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그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 길을 따라간 서머나 교회에게
둘째 사망의 화를 입지 않도록 하십니다.
일곱 교회 중 가장 짧지만
강렬하고 그래서 분명합니다.
문제는 이 교회의 현대적 적용입니다.
황제숭배는 오늘날 자본숭배와 같습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고발은 무엇일까요?
조금만 더 생각해보세요.
자본숭배 시대에 고발은 실제로 어떻게 일어납니까?
어려울 것 없습니다.
<사회적 경제>를 내세우는 순간
부유한 자들로부터 신호가 올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과 궁핍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거꾸로 축복이 주어집니다.
진짜배기로 부유한 자들은 “바로 너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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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영화들 중에는
유독 심판에 대한 것들이 많습니다.
처음엔 일방적으로 당합니다.
하지만 반전이 시작됩니다.
알고 보니 주인공은 대단한 실력자입니다.
심판이 끝나면 그는 사라지거나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요즘은 법정 드라마도 자주 소개됩니다.
제사장처럼 법복을 입은 정의로운 주인공이
결국은 악인을 코너로 몰아 정체를 드러내게 만듭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갈 신세였던 착한 사람은
그에게 무죄 선고를 내릴 때 눈물을 흘립니다.
놀랍게도 이것은 청교도 문화 덕분입니다.
특히 뉴잉글랜드 청교도 문화입니다.
그런데 그 청교도 문화는
눈치채셨듯이 계시록에서 나온 것입니다.
재림교회 역시 그 문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심판에 대해 무시하려는 자들은
그러니까 은혜만 강조하려는 자들은
절대로 악에 대해 저항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들은 첫째 사망과 함께 영원히 분리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당연한 논리가
역사 속에서는 혁명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계시 덕분에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은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 혁명에서 증명됩니다.
물론 재림교인들에게는
프랑스 혁명이 부정적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심판이란 측면에서는 똑같습니다.
신대륙에서 미국의 독립 운동가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실현하려고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프랑스 혁명도
그런 세상을 꿈꾸며 피를 흘렸습니다.
따라서 민주주의란 심판이 낳은 최고의 정치제도입니다.
물론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순수함을 잃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심판 대신에 욕망으로 치우쳤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성전에 우상을 세운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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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하나님 나라> 운동이 한창입니다.
정치적으로 기독당을 만들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타락한 바벨론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반성에 기초합니다.
욕망의 소비자본주의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화가 자연스럽게 강조됩니다.
계시록을 설교하다보니
개신교 목회자들의 설교도 참고하는데...
목동 지구촌교회 조봉희 목사도 계시록을 설교하더군요.
그는 계시록에 17번 나오는 <승리>를 강조하면서
신발 브랜드 <나이키>와 같은 단어라고 말합니다.
즉,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이
세상과의 싸움에서도 이기고
결국은 마귀와 싸워도 이긴다고 말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지구촌교회 이동원 목사의 복음주의와 완전 다릅니다.
네. 한국 개신교는 급속히 복음주의와 결별하고 있습니다.
이런 반전이 등장한 이유는
현대인들의 의식이 <미성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런 부모들에 의해 태어나고 자라나는
아이들 또한 온전할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교회에서 아이들을 보세요?
조금만 불편해도 참아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부모는 더 가관입니다.
훈계는커녕 상대편이나 시설에 대해 비난합니다.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게 조금도 없습니다.
과연 한국사회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그러니 교회조차도 점점 시설에 투자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투자는 욕망의 소비일 뿐입니다.
고난(환난)을 참지 못하는 신자들은
대쟁투의 삶에서 이미 멀어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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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 재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이처럼 자본주의에서 민주주의로...
욕망에서 투쟁으로...
이기심에서 이타심으로...
그래서 성전회복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인이 기도하는 장소로서...
한국의 국가부채가 5,000조를 넘었습니다.
GDP 1,500조보다 4배 가까이 됩니다.
결국 증세가 답입니다.
물론 서민증세냐, 부자증세냐?
결국 종교계도 예외 없이 세금이 부과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형교회 목회자도 중과세되고...
종교가 가진 부동산에도 과세가 시작될 것입니다.
물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처럼 기득권은 뭉칠 것입니다.
종교계도 마찬가지로 저항할 것입니다.
하지만 보세요... 그 모습이 어떤지?
역사공부하면서 느끼신 감정들을 떠올려보세요.
진정한 종교는 사람을 위합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를 비우셨습니다.
이 땅에서 가난한 자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래서 고발당해 죽으셨습니다.
당연히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이제 하늘로 올라가셔서
심판을 준비하십니다.
이게 1840년대 재림교회 정체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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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 목욜에 이루어질
2차 서중한 목회자 아카데미는
오후에 이국헌 교수님과 함께
19세기 초반의 미국 초월주의 또는 초절주의에 대해
2015년에 발표하신 학술논문을 기초로 세미나를 엽니다.
여기에 그 논문의 초록을 소개합니다.
본 연구는
미국의 기독교 사회개혁운동을
초절주의 운동의 영향 아래서 분석한 것이다.
19세기 미국사회에서는
이상사회 실현을 위한
사회개혁운동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이 개혁 운동에 가장 앞장선 것은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다.
특별히 기독교 사회개혁가들은
초절주의 사상가들로부터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개혁운동을 이끌었다.
초절주의자들은 계몽주의적 자연주의와
유럽의 낭만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아
진보적 이상사회 건설에 대한 꿈을 가지고 사회개혁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직접적인 사회구조 개혁보다는
개인의 도덕개혁에 초점을 맞춘 사회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비해 기독교 사회개혁운동은 사회지향적 성격이 강했다.
기독교 사회개혁운동은
남북전쟁 이전에는 건강한 생활습관 정착을 위한 생활개혁운동,
노예제도 폐지와 인종평등과 같은 구조개혁 운동,
도덕적 자기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남북전쟁 이후에는 노예제도가 폐지됨에 따라서
금주운동과 여권신장운동으로 방향이 전환되었다.
이 운동에 영향을 끼친 사상으로는
사회진화론, 사회복음주의, 전천년주의 등이 있었다.
특별히 초절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도덕적 자기개혁을 강조한 것 또한
19세기 후반의 기독교 사회개혁운동의 방향으로 볼 수 있다.
이 연구를 통해 19세기 미국에서의
기독교 사회개혁운동의 성격과 방향을
초절주의와 연계하여 분석 평가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