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홍콩배우 장국영 투신자살
영웅본색’ 시리즈로 국내에도 수많은 팬을 갖고 있는 홍콩의 영화배우 장국영이 숨졌
다고 홍콩 방송들이 1일 보도했다. 향년 47세.
홍콩 경찰은 이날 오후6시45분께 장국영
이 홍콩섬 센트럴에 위치한 만다린 특급
호텔 24층 방에서 떨어져 인근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고 밝혔다‘
우리 곁에 살아있는 '영원한 청춘' 장국영 전상서
[고 장국영 10주기]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장국영'. 발 없는 새를 위한 기억의 습작
2003년 4월 1일, 홍콩 전역에 사스가 창궐하던 잔인한 봄날. 마음이 피곤하여 더 이상 세상을 사랑할 수 없어, 발 없는 새 아비처럼 하늘 위에서 뛰어 내린 장국영과의 이별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만우절의 거짓말처럼 받아들이기 어렵다.
장국영은 1980~90년대를 살았던 이들의 추억 한편에 자리 잡는 당대 최고의 아이콘이었다. 주윤발, 장국영 주연의 <영웅본색>을 보고 두 손에 모형 권총을 장전하며 액션키드를 꿈꾸던 아이들은 어느덧 총 대신 가족이 생계를 양 어깨에 짊어진 중년이 되었고, <천녀유혼>의 장국영과 왕조현을 이상형으로 꼽던 소년 소녀들은 홍콩 배우 대신 K팝 아이돌에 열광하는 아이들의 부모로 나이 들어가는 자신들을 발견한다.
영화 <해피투게더> 한 장면
장국영과 함께한 슬프고도 아름다웠던 시절 더듬기
장국영이 세상을 떠난 지, 1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금 장국영을 새록새록 추억할 수 있는 의미 있는 평전이 출간되었다. 이름 하여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장국영>. 작년 국내에 개봉한 대만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소녀>에서 빌려온 듯한 제목은 영화 <영웅본색>에서부터 <아비정전> <패왕별희> <해피투게더>까지 한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스타 장국영의 모든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홍콩, 액션 영화에 대한 조예가 남다른 책의 저자 씨네 21 주성철 기자는 그간 자신이 수집해온 장국영 관련 자료를 정성껏 추슬러 배우 장국영을 그리는 소중한 책 한권을 세상에 내놓았다.
주윤발 주연 <첩혈쌍웅> <영웅본색>을 보고 액션 영화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는 주성철 기자답게, 그 시절 최절정 인기를 누린 홍콩 영화 중심의 한복판에 있었던 장국영에 대한 애정 어린 손길은 장국영의 연기만큼이나 섬세하면서도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영화 <해피투게더> 한 장면
이 책에는 그리 알려지지 않는 장국영의 신인시절부터, 생전 장국영이 즐겨 찾던 홍콩 모처의 레스토랑까지 소개되어있다. 한 번도 장국영과 인터뷰한 적이 없다는 주성철 기자의 장국영 사랑에 고개가 저절로 숙연해진다.
책의 첫 대목에서 여전히 장국영이 없는 홍콩을 마주하기 힘들다고 토로할 정도로 장국영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저자는, 그와 마찬가지로 장국영을 사랑했던 우리들을 위해 장국영과 함께한 슬프고도 아름다웠던 시절을 꼼꼼히 더듬어간다.
장국영이 떠난 이후 홍콩 영화계가 네모에서 세모가 되었다는 오우삼 감독의 비탄처럼, 홍콩 영화에서 그의 빈자리는 너무나도 크게 다가온다. 장국영이 활동했던 1980~90년대와 다르게 한국 대중들은 그때처럼 홍콩 영화를 즐겨 보지도, 홍콩 스타들에 열광하지 않는다.
굳이 장국영 부재를 이유로 삼지 않아도, 오우삼·서극·왕가위 등을 잇는 스타 감독의 부재돠 이소룡·성룡·이연걸·주윤발·장국영·유덕화·양조위·주성치·왕조현·임청하·장만옥으로 맥이 끊겨 버린 톱 배우 라인업은 과거 화려했던 홍콩 영화의 씁쓸한 추억만 곱씹게 할 뿐이다.
이제 장국영은 세상을 하직하고, 그가 없는 홍콩 영화계는 여전히 <동사서독>의 구양봉처럼 황량하게 방황 중이다. 그를 사랑했던 우리들은 점점 나이를 먹어간다. 하지만 우리 기억 속에 46세 장국영은 여자보다 더 곱고 아름다운 남자로 살아 숨 쉬고 있다.
장국영이 있었기에 잠시나마 행복할 수 있었던 그 시절. 영원한 젊음, 장국영과의 새로운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2015년기네스 등재 최고령 일본 117세 할머니 별세
▶2015년‘헤이 주드’의 주드 엄마… 존 레논 첫 부인, 암으로 별세
▶2009년학술원회원 윤능민 박사 별세
[2009년] 베이비파우더에서 석면 검출
보령메디앙스, 베비라 등 유명 유아용품업체에서 제조한 베이비파우더에서 발암물질인 석면이 검출됐다.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시중 유통되는 베이비파우더 등 탈크 성분이 함유된 파우더제품과 원료 30종(14개 업체)을 수거검사한 결과 원료 1건과 제품 11건(총 8개 업체)에서 석면이 검출됐다고 2009년 4월 1일 밝혔다.
석면은 단열성과 절연성 등이 뛰어나 건축자재로 널리 이용됐으나 발암성이 확인된 후 점차 퇴출되고 있다. 국제암연구소(IARC)의 발암성 등급에 따르면 석면은 ’인간에게 발암성이 확실한’ 그룹1(1등급)에 해당한다.
식약청은 화장품,의약품 원료인 탈크에 석면이 혼재할 우려가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뒤늦게 파악한 것으로 드러났다. 유럽과 미국은 각각 2005년과 2006년부터 탈크 속 석면을 규제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 석면이 검출된 제품은 ’보령누크 베이비파우다’, ’보령누크 베이비칼라콤팩트파우다’, ’보령누크 베이비콤팩트파우다 화이트’, ’보령누크 크리닉베이비파우다 분말’(이상 보령메디앙스), ’베비라 베이비콤팩트파우더’, ’베비라 베이비파우더’(이상 유씨엘), ’라꾸베 베이비파우더’(한국콜마), ’큐티마망 베이비파우더’(성광제약), ’락희 베이비파우다’(락희제약), ’알로앤루 베이비콤팩트파우더’(대봉엘에스), ’모니카 베이비파우더’(한국모니카제약) 등 11종과 덕산약품공업이 공급한 원료 ’덕산탈크’ 제품이다.
’라꾸베 베이비파우더’ 제품을 제외한 10개 제품은 모두 중국산인 덕산탈크 원료를 사용한 것으로 확인됐다.
식약청은 이들 제품에 대해 이날 판매중지 및 회수 조치를 내렸다.
이들 제품의 유해성과 관련 식약청은 “베이비파우더를 사용할 때 가루가 분산되기 때문에 흡입량은 미미할 것”이라며 “문제가 된 베이비파우더로 인한 유해성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베이비파우더에서 석면이 검출된 것은 원료성분인 탈크에 자연적으로 석면이 섞여 있기 때문이라고 식약청은 설명했다.
탈크는 땅 속에서 석면을 함유하고 있는 사문암과 함께 존재하는 경우가 많은데 탈크를 채굴할 때 사문암이 혼재돼 석면이 공존하게 된다고 식약청은 설명했다. 탈크 제조공정에서 석면을 제대로 제거하지 않으면 제품에도 석면이 남아 있게 된다.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탈크의 이런 특성을 고려해 석면 검출량을 규제하고 있지만 식약청은 아무런 관리를 하지 않아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탈크 수입단계에서 석면이 관리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이번 검사에서 석면이 검출되지 않은 품목 가운데 제조시기에 따라 석면이 검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실제로 석면이 검출되지 않은 업체의 원료를 쓴 일부 완제품에서는 석면이 검출됐다. 식약청은 문제의 원료를 사용한 다른 제품에 대해서는 판매 제한 조치를 내리지 않아 논란도 예상된다.
▶2004년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공식 발효
▶2004년광주대학교 이사장 김인곤 전(前) 의원 투신자살
▶2003년홍콩배우 장국영 투신자살
▶2003년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서울 상암동 축구경기장서 공연
▶2003년서동구 KBS사장, 청와대 “인사 불개입” 주장과 배치 파문… 사의 표명
▶2003년이라크에 잡힌 미국 여군 ‘린치 일병 구하기’ 전격작전
▶2001년미군 해군 정찰기, 중국군 전투기와 충돌해 중국 하이난섬에 비상착륙
▶2001년한국-유럽연합(EU) 기본협력협정 발효
▶2001년밀로셰비치 전 유고연방 대통령 체포
▶1999년시내전화 경쟁체제 돌입
▶1998년대만, 경제부 국제무역국 대표단 서울 도착(1992년 한국과의 외교관계 단절 후 첫 공식대표단)
▶1998년개신교 새문안교회 김동익 목사 별세
▶1996년대전지역 대상으로 초고속 정보화 시범사업 개시
▶1991년강원도 명주군서 2~3세기 원삼국 집단집터 발굴
▶1991년제47차 ESCAP 총회 서울서 개막
▶1988년서울 천호대교서 버스추락(19명 사망, 35명 중경상)
▶1983년1억원 올림픽복권 발행
▶1982년정부 유아교육 진흥계획 확정
▶1982년조치훈 명인 본인방 십단위 차지로 일본 바둑계 3관왕에 오름
▶1982년레이건 미국 대통령 소련의 핵 동결제안 거부
▶1981년한국, 체코-폴란드와 국제전화 개통
▶1981년퐁세 프랑스 외무장관 방한
▶1981년최초의 애국가 가사 발견(1940년 이전 추정)
▶1980년독립문 이전 복원 공사 완료
▶1979년이란 회교공화국 선포
1976년 애플 창립
▶1973년주민세 신설
▶1972년대구경제신문 자진 폐간
▶1971년사병 계급장 전면 변경
▶1970년포항종합제철 공장 착공
▶1969년중국 공산당 제9회 전국대표대회 개막
▶1969년소련 잠수함 북해 출현
▶1968년향토예비군 창설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다. 직장마다 피가 끓어 드높은 사기…” 1968년 오늘, 향토예비군이 창설됐다. 이에 앞서 2월 7일 경전선 개통식에서 박정희대통령은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건설하는 향토방위태세를 갖추기 위해 재향군인의 무장”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향토예비군은 남북대치라는 극한 상황의 산물이었다. 북한은 군사력 증강의 기본방향으로 1962년 이른바 ‘4대 군사노선’을 내걸었다. 겉으로는 국방자위정책이었지만속은무력통일을위한전쟁준비정책이었다. 이중 하나가 ‘전 인민의 무장화’로 현역군 외에 노농적위대 142만명과 붉은 청년근위대 70만 명을 무장시켰다.
북한은 1968년 1월부터 본격적인 도발에 나섰다. 청와대 습격을 위해 무장공비를 침투시켰고 동해에서 미국 첩보함 푸에블로호를 납치했다. 이런 상황에서 1차적으로는 무장공비와 간첩을 지역별로 방어하고, 다음으로는 유사시 향토방위와 후방지역 통제 등을 위해 향토예비군이 만들어졌다.
중년의 나이가 되기까지 화제도 많았지만 ‘말’도 적지 않았다. 예비군 폐지나 복무기간 단축은 예비군 표를 의식한 대통령 후보들의 단골메뉴가 되었다. 이사 후 제때 전입신고를 하지 않아 대거 전과자가 양산되던 시절도 있었다. 예비군 훈련장에서 헌혈과 불임시술은 국민건강과 가족계획에 기여하기도 했다.
남북관계 진전이나 사회여건 변화로 향토예비군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향토 방위의 중추로서 그동안 대침투 작전의 선봉에서, 또한 재해와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앞장선 예비군”(노무현 대통령의 창설 축하 메시지)은 여전히 평화와 안정을지키는용사들이다.
▶1967년구로공단 준공
▶1964년3분폭리사건 전모 판명(총판매 249억881만원, 소득 25억 4436만원 세금부과 8억 8115만원)
▶1963년한국-페루, 국교수립
▶1960년최초의 기상위성 티로스 1호 발사
▶1956년애국복권 판매 시작
▶1955년키프로스섬에 반영국 폭동
▶1953년국립 부산대학교 개설
▶1953년장준하, 사상계 창간
▶1949년호국군사령부 창설
▶1947년그리스의 왕 게오르기오스 2세 사망
▶1946년차량 우측통행제 실시
우리나라는 차량이 우측으로 다닌다. 미국도 그렇고 중국도 그렇고 독일, 프랑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일본이나 영국, 호주에서는 좌측 운행을 한다. 영국의 식민지였거나 영연방 국가 등 60여개 국은 좌측 통행을 한다. 이렇게 나라마다 차량 운행 방향이 다른 것에 대한 학설도 다양하다.
◆기사·사무라이 통행 관습설
영국의 기사들은 오른손에 창을 들고 말을 몰았다. 그 결과 전투에서 좌측으로 달리며 우측에서 오는 적을 공격했다. 이 관습에 따라 마차도 좌측 통행을 했고 이것이 자동차로 이어졌다. 일본 사무라이들은 좌측 옆구리에 칼을 차고 다녔다. 그런데 우측 통행을 하게 되면 마주 오는 사무라이의 칼 끼리 맞부닥칠 수 있었다. 사무라이들은 이를 수치로 여겼다. 이를 피하기 위해 좌측 통행을 했다는 것이다. 우측 통행의 기원은 흥미롭다. 정복자 나폴레옹은 영국의 기마법을 역이용했다. 우측 대신에 좌측으로 공격하는 기마법을 개발, 연승해 유럽을 정복했다. 이에 따라 영국과 그 식민지를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프랑스 기마법을 따르게 됐고 이것이 마차와 자동차까지 이어졌다는 설이다.
◆마차 기원설
마차가 대중교통 수단이던 시절 마부는 항상 오른쪽에 앉았다. 마주 오는 마차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는 좌측 통행이 유리했다. 프랑스에서도 처음엔 마차가 좌측 통행을 했으나, 프랑스 혁명 이후 바뀌었다. 귀족 계층이 타는 마차가 도로 좌측에서 빠르게 달렸지만 농민이나 평민은 도로 우측에서 서행을 했기 때문이다. 혁명으로 귀족 계층이 몰락하면서 모든 마차가 우측 통행을 하게 된 것이다. 프랑스에서 마차의 우측 통행에 관한 규정은 1794년 파리에서 처음 도입됐다.
영국의 좌측 통행 기원에 대해서는 다른 설도 있다. 17세기 초 영국 런던과 지방을 잇는 유일한 교통로였던 런던교는 집과 상점, 오가는 사람과 마차로 복잡했다. 당시 런던시장이 “시내로 들어가는 마차는 강 상류 쪽(왼쪽), 나가는 마차는 하류 쪽으로 진행하라”는 런던교 통행 원칙을 선포했다. 이것이 영국 최초의 교통법규로 각국에 퍼졌다는 얘기다.
♠ 왼쪽? 오른쪽?
우리나라에서는 해방 이후 미군의 영향으로 우측 운행을 한다. 건널목 등 보행자가 걷는 방향도 요즘은 오른쪽이다. 그러나 과거에 한국인들은 차량 운행 방향과는 반대로 ‘좌측 통행’이라는 교육을 받았다. 우리나라에 처음 통행법이 만들어진 건 1906년. 이때는 자전거나 인력거는 왼쪽으로 다니고 사람은 오른쪽으로 다니게 돼 있었다. 그러나 1921년, 처음으로 보행자 좌측 통행제가 시작됐다. ‘우측 통행하는 일본 사람에게 방해가 된다며 조선 사람만 좌측으로 다니게 했다’는 것이다.
좌측통행을 우측통행으로 바꿔야 한다는 시민단체도 있다. 우측보행 국민운동본부는 ▷좌측통행이 오른손잡이가 많은 인간의 신체특성에 맞지 않고 ▷차와 마주 보고 걸으면 긴급한 순간 차량을 피하기 쉬워 교통사고 예방 효과도 있다는 점 등을 이유로 우측통행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 건설교통부(현 국토해양부)가 우측보행으로 바꾸는 것이 타당한 지에 대한 연구용역을 한국교통연구원에 의뢰했다. 지난 7월 국토해양부 자문위에서는 ‘매우 타당하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황덕수 본부장은 “우측통행시 교통사고 사망률이 20% 이상 줄고 좌측보행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5% 줄일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며 “늦어도 내년 하반기에 우측통행화 작업이 구체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나라 철도는 좌측 통행이다. 철도를 일제시대에 받아들였기 때문. KTX 또한 현재 좌측으로 운행된다. 서울의 지하철 4호선의 경우 흥미롭다. 남태령 이북에서는 우측 통행을 하던 4호선이 선바위 이남에서는 좌측 통행을 하기 때문. 이는 4호선을 우측 통행으로 만들어버리는 바람에, 나중에 한국철도공사에서 만든 좌측 통행 과천선을 만들기 위해 남태령과 선바위 사이에서 터널을 한번 꼬아 만든 ‘꽈배기 굴’을 만들면서 벌어진 결과이다. 이 공사로 인해 건설 비용이 크게 늘어났다.
▶1942년중앙선(청량리-경주) 개통
▶1941년생활필수물자통제령 공포
▶1940년조선무선통신학교 개교(민간통신사 양성)
▶1938년보통학교를 소학교로 고등보통학교를 중학교로 개칭
일제가 1938년 4월 공포하여 5월부터 시행한 일본의 전시통제법.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전쟁에 전력을 집중하기 위해 인적·물적 자원을 마음대로 동원·통제할 목적으로 만든 법이다. 이 법에 의해 전시에는 노동력·물자·자금·시설·사업·물가·출판 등을 통제하고, 평상시에는 직업능력조사·기능자양성·물자비축 등을 명령했다. 이 법은 식민지 조선에도 적용되어 강제징용·징병·식량공출 등 전시통제체제가 시행되었다. 패전 후 46년에 폐지되었다.
▶1938년일본, 국가총동원법 공포
▶1937년미얀마(버마) 인도서 독립
▶1937년조선일보사 월간 소년 창간
▶1933년나치 유태인 배척운동 시작
▶1929년여의도 비행장 개장
▶1929년소설가 밀란 쿤데라 출생
▶1926년경성제국대학교 개교(의학부-법문학부)
▶1922년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통치자 카를1세 사망
▶1920년동아일보-시사신보 창간
▶1919년경성철도학교 개교
▶1919년유관순,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투옥
가족을 따라 지령리교회를 다니던 유관순이 13세 때 서울 이화학당의 보통과 2학년에 편입한 것은 여성 선교사인 샤프 앨리스(한국명 사애리시·史愛理施)의 추천에 의해서였다. 충청도 지역에서 선교와 교육 사업에 열성을 바치던 사애리시 부인은 총명했던 유관순과 사촌언니 유예도를 이화학당에 보냈다. 3년 만에 보통과를 졸업한 유관순은 1918년 4월 고등과에 진학하였고, 학교 옆 정동제일교회를 다니면서 민족의식을 키워갔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이화학당의 선배들은 1학년생을 배제했지만 유관순은 담장을 넘어서 시위 대열에 참여했다. 유관순은 친구들에게 “공부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고향에 내려가 독립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했고, 헤어지면서 “독립된 뒤에 만나자”고 다짐했다. ‘칙칙폭폭’하는 기차소리도 ‘대한독립’으로 들린다고 말할 정도로 독립 열망을 품었던 유관순은 고향에 돌아와 천안 일대의 만세 시위 준비에 연락 임무를 맡았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 장터의 만세 시위 때 유관순은 일본군의 무차별 발포로 부모님을 현장에서 잃고 본인과 오빠, 작은 아버지가 투옥되었다. 이듬해 3·1운동 1주년 기념 옥중 시위까지 주도했던 그였지만, 3년 형을 견디지 못하고 1920년 9월 28일 고문 후유증으로 방광이 파열되고 이를 일제가 방치하는 바람에 세상을 떠났다.
▶1916년경성 상설소방대 조직
▶1913년컨베이어 시스템 도입한 포드 ‘모델 T’ 생산
▶1912년여객운임, 원거리체감법을 거리비례법으로 개정
1910년 오늘,
일제 침략에 본산 #조선총독부 설치.
1905년 광무 9년 을사조약을 발판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한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통감을 주제시켜 이른바 보호 정치를 시행하다가 1910년에는 그나마 명목만의 대한 제국의 국가체제를 강제로 해체하고 국권피탈을 단행하여 한반도를 일본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일제는 이로부터 대한제국의 영토를 조선이라 개칭하였으며 국가적 통치를 시행함에 따라 종래의 통감부를 폐지하고 이 보다 강력한 통치 기구를 두기 위해 칙령제 319호 조선총독부 설치령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1910년 9월 30일 총독부 및 소속 관서에 관제가 공포되어 10월 1일부터 조선총독부에 기능이 가동 되었으며, 초대총독에는 앞서 통감으로 있던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취임하였다. 조선총독부는 한국의 주권을 그대로 탈취하여 행사하는 권력과 권한을 가지게 되어 우리 민족에게 군림하게 되었다.
바로 무단통치의 바탕 위에서 탄압과 강요로 윽박지르는 강제권이 발동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1909년민적법(현행 호적법의 효시) 시행
▶1908년부산과 신의주간의 급행열차 융희호 운행
▶1908년한국 표준자오선 처음 도입. 127도 30분으로 시작
▶1901년라울의 법칙을 공식화한 프랑스의 화학자 라울 사망
▶1900년`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발행인 벤턴 출생
▶1895년 한말 정치가인 #유길준의 첫 서양견문록인 #서유견문 (西遊見聞)간행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