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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9월29일 화요일 말씀묵상 ♣
성경:사도행전21:17-26(신225P)
제목: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17.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9.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20.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21.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
22.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23.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5.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26.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할렐루야!오늘 추석 연휴 마지막날을 멋지게 마무리 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제목}***“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여러분!고난의 길을 즐겨 가려는 사람은 없습니다.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는 고난의 길일지라도 감수해야 합니다.
고난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믿음의각오가 필요합니다.
본문은 가치 있는 인생을 위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1.고난의 길을 만류하는 사람들(1-7절)
2.믿음으로 죽을 각오를 하는 바울(8-14절).
3.전적으로 맡기는 인생(15-16절).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다른 사람들이 좌우하게 해서는 안됩니다.인생길을 하나님께 맡기시고,그분의 뜻을 묻는 가운데 고난의 길일지라도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자를 하나님은 귀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귀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죽을 것도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삶이 되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죽을 수 있다는 확고한 결심이 서 있으면 주님께서 여러분의 생애를 축복하시고 귀하게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이런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행21:17-26)
드디어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자기 생애에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야고보가 중심 지도자였습니다. 감독이었다고 했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친동생으로 온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로부터, 특별히 유대인 성도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1. 바울의 선교 보고(17-19).
17.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18.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19.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선교 보고를 합니다. 바울의 선교보고는 내용이나 양에 있어서 대단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험한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선교 내용은 한 절에 딱 두 가지 관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1).하나님이 하신 일이라 했습니다.
바울의 선교 보고 내용의 주어는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갖은 고초와 죽음의 위협을 견뎌내고 이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졌으면서도 바울은 자신의 희생과 노력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 증거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다니면서 교회를 세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다니면서 수많은 이방인을 구원해냈다고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다니면서 어떻게 복음은 전파했는가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에게는 이 생각, 이 믿음이 분명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렇게도 끝까지 하나님의 위대한 쓰임받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만약 중간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생각이 변질되었다면 스스로 무너져 버렸을 것입니다. 바울은 스스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며 내가 모든 사도 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내가 나 된 것은 누구의 은혜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로라”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 이 믿음 중요합니다.
신앙 생활 할 때 중요한 것이 있는데 신앙은 언제나 주어가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신앙에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들어가는 순간 신앙은 변질되는 것입니다. 사람 냄새가 나면 위기가 오는 것입니다.
교회 봉사도, 헌금도, 전도도, 하나님께서 전면에 드러나셔야지 내가 드러나면 벌써 신앙의 길에서 많이 벗어난 것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신앙생활에서 하나님이 증거되고 있는지 내가 드러나고 있는지 항상 살펴보아야 합니다.
2).하나님이 자기를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선교 보고의 두 번째 관점은 하나님이 자기를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의 존재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요. 인간적으로 볼 때, 바울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최고의 학문을 수련했으며, 종교적 열심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였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선교보고에서 자신은 오직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했다는 말입니다.
도구에 불과한데 뭐 자랑할 것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아름다운 도자기라도 스스로 아름다움을 뽑낼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만든 사람이 대단하지 도자기가 대단합니까? 토기장이 손에 들려진 진흙이 무엇을 자랑할 것이 있겠습니까?
바울의 선교 보고는 이방인 구원 사역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내가 한 것 같고, 그 때에는 내가 수고한 것 같지만 지난 후에 돌아보면 모두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우리 자녀손들 우리가 다 키웠습니까? 저의 애들보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키우셨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바울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보고를 하는 바울이나 보고를 듣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은 과장하지도 않고 가볍게 업신 여기지도 않고 그저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교회 일 해 본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 압니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도 힘이 들고 남이 하는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도 힘듭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돌립시다. 내 자신은 자랑하지도 말고, 남을 비난하지도 말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합시다. 바울은 고백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2. 변질되는 신앙(20하-21).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네가 이방에 있는 모든 유대인을 가르치되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 한다 함을 그들이 들었도다”(20하-21절)
바울이 예루살렘 교회에 선교보고를 하긴 했는데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개종한 유대인들의 바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복음을 듣고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은 비록 개종을 하긴 했지만 여전히 율법과 할례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미 이방선교-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를 널리 전했다는 사실을 모두 다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특별히 이방인에게는 믿음의 차원에서 율법과 할례를 구원에 있어서 절대적인 수단이 아님을 강조해 왔습니다.
율법은 몽학선생 정도일 뿐이지 율법은 다 지킬 수도 없고 지킨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개종한 유대인들은 바로 이러한 바울의 사상에 우려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과격한 유대인들은 바울을 해하려는 계획까지 있었습니다.
물론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을 향한 복음 전함으로 그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매우 의미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율법에 대한 마음을 어느 정도 허용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과 같은 경우 학자들은 마태복음 안에 크게 다섯 묶음의 설교가 편집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에 세력을 얻고 있던 개종한 유대인들을 향한 마태복음 저자의 신학적인 노력이었습니다.
개종한 유대인들은 이 마태복음안에 있는 다섯 묶음의 설교를 보며 아마도 모세 오경을 연상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복음과 윤리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산에서 하신 설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학자들은 이것 역시 모세가 율법을 받은 곳이 시내산이었던 것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마태복음 저자의 신학적인 의도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마태복음의 신학적 의도가 어찌되었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초대교회에 개종한 유대인들의 세력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고, 예루살렘 교회 역시 이러한 개종한 유대인들이, 예수 믿는다고는 하면서도 율법과 할례, 규례를 여전히 함께 기키고 있는 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용납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것이 문제 아닙니까?
예수께서 물 위로 걸어 오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예수께서 뭐라하셨습니까? “오라” 그랬더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갔습니다.
갔습니다. 그런데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자 갑자기 무서움에 사로잡힙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물에 빠져 버렸습니다. 처음에 주님만 보고 주님 말씀대로 갈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위를 보니 갑자기 무서워졌습니다. 주님 대신 거센 바람에 몰아치는 물결이 보이자 무서움에 사로잡혀 빠졌습니다.
주님만 보면 괜찮습니다. 하나님만 보면 괜찮습니다. 그런데 주위를 봅니다. 상황을 너무 많이 생각합니다. 풍덩 빠졌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습니까?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다가 불같은 성령 받고 시작되었습니다.
분명합니다. 성령강림 사건이 바로 율법이 아니라 복음으로 구원얻는 것이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깨닫도록 확증해준 사건 아닙니까?
성령의 역사 안에서 출신과 족속을 뛰어 넘어 하나가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경험에서 율법을 뛰어 넘는 복음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분명히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다시 율법을 들먹입니까? 어쩌자고 복음보다 율법을 크게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변질입니다. 신앙의 변질입니다.
오늘날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왜 입니까? 초대교회는 모여서 예배드리고, 배우고, 기도하고, 교제하고, 전도하고, 나누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마다, 교단마다 교권에 힘을 쏟습니다. 제도가 우선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영광은 어디로 갔습니까? 자신은 어떻습니까?
예수님 처음 영접했을 때의 감격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까? 뜨거움과 사랑이 아직도 있습니까? 처음에는 순수하게 기도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시간 지나면서 어떻게 됩니까? 나는 이렇게 기도하는데 아무개는 저렇게 신앙생활해? 장로 권사가 새벽기도도 안나와요?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변질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만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에게서 눈을 떼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무엇을 원하실까? 무엇을 기뻐하실까? 이것이 참다운 신앙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3. 타협입니까? 선교 전략입니까?(22-26)
22.그러면 어찌할꼬 그들이 필연 그대가 온 것을 들으리니/
23.우리가 말하는 이대로 하라 서원한 네 사람이 우리에게 있으니/
24.그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을 위하여 비용을 내어 머리를 깎게 하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대에 대하여 들은 것이 사실이 아니고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25.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26.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각 사람을 위하여 제사 드릴 때까지의 결례 기간이 만기된 것을 신고하니라.
유대인들의 바울에 대한 오해와 격한 감정을 알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은 한 가지 바울에게 제안을 합니다.
그것은 사람을 택하여 결례를 행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용을 바울에게 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이 율법을 경멸하는 자나 반대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중히 여기는 자라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제안에 대해 바울은 곧 실천에 옮깁니다. 서원한 네 사람과 함께 이튿날 결례를 행합니다.
(결례란 정결케 하는 예식으로 보통 한달간 하는데 마지막 일주일은 성전에서 지내기도 합니다. 시작할 때와 끝날 때 머리를 깎고 그 기간에는 금욕생활을 합니다. 기간이 차면 제물을 드리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가 않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부담이 되며 부자는 가난한 사람들의 결례 비용 부담하는 것을 신앙의 덕으로 여겼습니다.)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전해서 많은 이방인들을 구원한 바울이 결례를 행했다는 것은 이방선교는 인정하면서도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유대인들의 주장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율법으로 회귀한 것입니까?
예루살렘 교회 유대인 성도들과 타협한 것입니까? 한 마디로 설명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보낸 편지에서 말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고전 9:19-22)
타협이 아니라 선교전략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에게 맞게, 이방인에게는 이방인에게 맞게 전도한다는 것 아닙니까? 왜요?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의 단한가지 목적이 있다면 영혼구원이요 하나님께 영광이었습니다.
***{결론}***
여러분! 바울의 제3차 선교 보고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이었습니까?
1. 바울의 선교보고(17-19).
바울의 선교 내용은 한 절에 딱 두 가지 관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1).하나님이 하신 일이라 했습니다.
2).하나님이 자기를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2. 변질되는 신앙(20하-21).
3. 타협입니까? 전략입니까?(22-26)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오늘 이렇게 사는 것, 이렇게 목회하는 것, 하나님께서 나를 쓰셔서 하시는 것입니다.
저만입니까? 우리 모두의 삶이 하나님께서 하신 것 아닙니까? 자녀교육, 사업, 직장생활, 모두 다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 은혜로 된 것이니 사나 죽으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바울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묵상:사도행전21:17-26절입니다. 오늘도 말씀을 묵상하시고 하나님께서 하셨음을 고백하시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시기를 소원합니다.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르되 형제여 그대도 보는 바에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행21:19-20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