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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0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루카 11,5-13
하느님께서 기도를 빨리 안 들어주시는 이유
오늘 복음도 역시 예수님께서 기도에 관해 알려주시는 내용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 청할 때 꾸준하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무언가를 청할 때 들어줄 때까지 떼를 쓰기도 합니다.
그러면 엄마는 바로 줍니다.
이것이 내가 원하는 것을 빨리 얻어내는 방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밤에 손님을 맞은 친구는 먼저 자는 친구를 깨웁니다.
친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괴롭히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걸고 아이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었네.
그러니 지금 일어나서 건네줄 수가 없네.”그러나 계속 졸라대면 마침내 일어나서 필요한 만큼 다 줍니다.
그 친구는 속으로 ‘이 친구가 이렇게 나를 괴롭히니 들어줘야지.
아니면 또 찾아와서 괴롭힐 거 아니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사실 친구는 빵을 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친구의 친밀감을 시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언가 계속 청해도 된다고 믿는 관계는 깊은 관계입니다.
아내만이 남편에게 계속 청할 수 있고 아이만이 엄마에게 계속 청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청하는 것을 최대한 빨리 받을 수 있습니다.
무언가 청을 거부한다는 말은 함께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관계는 내가 청하고 받고 또 상대의 청을 들어주는 것으로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조앤 롤링의 ‘해피 포터’ 시리즈 출판 여정은 인내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녀의 원고는 최종적으로 승인되기 전에 12개의 출판사로부터 거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책에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녀를 믿고 그 출판을 맡아준 출판사는 엄청난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일단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그 사람의 인격을 믿고 함께 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것이 상대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게 점원이라면 가장 두려워할 것이 무엇일까요?
손님이 떠나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느님도 이것을 가장 두려워하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길을 지나다가 진열장에 꼭 입고 싶은 옷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비쌀까 봐 문을 열고 머리만 집어넣고 점원에게 묻습니다.
“이 옷 얼마예요?”점원은 “100만 원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때 그 사람이 그 옷을 살 확률이 높을까요? 아마 “당신은 저 옷을 살 돈이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자신이 없죠.
가격만 빨리 알고 그냥 가던 길 가세요!”라고 느낄 것입니다.
“뭐? 나를 무시해?”라며 보란 듯이 옷을 살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그 사람에게 옷을 사서 기쁨을 주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정말 훌륭한 직원은 어떻게 말할까요?“아, 예! 잠깐 들어와서 앉으세요.
제가 가격을 알아보는 동안 차 한 잔 드시면서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습니다?”
일단 가게에 들어온 사람은 그 친절함에 점점 보답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점원은 눈썰미로 이미 그 사람의 치수를 알아서 맞는 옷을 가져와 입어보라고 합니다.
입어보니 딱 맞습니다.
아마 이 사람은 150만 원이라고 해도 그 옷을 살 것입니다.
존중받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께서 무언가를 청하는 우리에게 가장 두려워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청을 들어주면 다시 필요한 게 있을 때까지 오지 않을까 봐 그게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잡아놓고 싶어서 지금 청하는 것을 당장은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에사우로부터 도망쳐서 외삼촌 라반의 동네로 피신하였습니다.
라반에게는 두 딸이 있었는데, 레아와 라헬이었습니다.
야곱은 동생 라헬을 더 좋아하였고 라반에게 청하였습니다.
라반은 야곱이 축복의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7년을 일해주면 라헬을 주겠다고 합니다.
야곱이 7년을 일하고 눈을 떠보니 레아가 누워있었습니다.
라반은 라헬과 결혼시켜 주면 금방 자신을 떠날 것을 알고 7년만 더 일하라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야곱은 그래서 7년을 더 일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마음도 라반의 마음과 같으실 것입니다. 무언가를 들어주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떠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평생 죽기까지, 아니 죽은 후에도 청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처럼 이 시대에 그리고 이후에도 이해하기 힘든 구원의 원리를
쉽게 정립하여 놓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별처럼 많아지게 하시겠다고. 그러나 그 약속은 이사악 하나 낳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어서도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빌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관계가 영원히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작은 청은 그냥 들어주십니다.
당신을 떠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10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11,5-13
결국 성령입니다!
기도! 하면 대체로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청원 기도입니다.
우리 모두 스스로가 모르는 사이에 그런 분위기에 익숙해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그리고 습관적으로 ‘기도해주세요.’
그리고 ‘네. 기도해 드릴게요.’ 같은 대화를 자주 나눕니다.
물론 오늘 주님 가르침에 따라, 간절한 원이 하나 있다면, 정말 절박하다면, 마음과 정신, 목숨과 영혼을 다해 아버지께 청할 필요도 있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루카 11, 9)
사실 내가 건강해야 복음 선포도 자신만만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가 합격해야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몫을 당당히 해낼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평화롭고 가화만사성해야, 그를 바탕으로 이웃 사랑의 실천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기도의 전부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기도는 청하는 것, 훨씬 그 이상의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 현존 안에 지속적으로 머물려는 노력입니다.
기도는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기쁘고 충만하게 살려고 발버둥치는 일입니다.
기도는 나도 힘들지만, 나보다 더 힘든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는 일입니다.
이런 기도는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결국 성령입니다! 성령의 도움이 중요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굳건히 현존하시며 힘차게 활동하실 때, 성령께서 우리 인생 여정을 항상 인도하실 때,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기적을 기꺼이 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13)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강론>
(2024. 10. 10. 목)(루카 11,5-13)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일은 ‘지금’ 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어느 아버지가 아들이 생선을 청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겠느냐?
달걀을 청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루카 11,9-13)”
1)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는, “청하면 주실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주신 것을 청해서 받아라.”입니다.
이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ㄴ).” 라는 산상설교의 말씀입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시는 분이고, 그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이 자동적으로 ‘나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청해서’ 받아야만 ‘나에게’ 옵니다.
만일에 청하지 않는다면, 또는 안 받으려고 하면, 아버지께서 아무리 많은 것을(좋은 것을) 주셔도 받지 못합니다.
내가 안 받아서 못 받는 것입니다.
2)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강도당해서 초주검이 된 그 사람은, 하느님께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을 것이고, 또 누구든지 아무나 지나가다가 도와주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침 지나가는 사제, 레위인, 사마리아인에게 제발 좀 도와달라고 요청했을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이 지나가다가 그를 도와준 것은, 그의 요청에 응답한 일이기도 하고, 또 그의 간절한 기도를 하느님께서 들어주신 일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살기를 포기하고, 그래서 기도하지도 않고, 사마리아인의 도움도 거절한다면? 그러면 죽는 것입니다.
또 만일에, 자기를 도와주려고 하는 사람이 동족 유대인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을 알고서 “나는 사마리아인의 도움은 받지 않겠다.” 라고 도움을 거절하거나,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니 사람이 도와주지 않아도 된다.” 라고 하면서 도움을 거절했다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께서 ‘직접’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가 아닙니다.
물론 도움이 하늘에서 직접 내려오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사람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어떤 방식으로 누구를 통해서 받든지 간에 내가 받기를 간절하게 바라면서 기도했던 그것을 받는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시기와 방법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십니다.>
3)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라는 말씀도 ‘같은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이미 문을 열어 놓으셨으니, 그 문을 찾아서 들어가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스스로, 능동적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으면,
문이 이미 열려 있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됩니다.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문은 닫혀 있는 문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말씀에서, 그리고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을 ‘능동적으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묵시록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시고, ‘내가’ 그 문을 열어 드려야 하는 상황은 복음 말씀과는 반대의 상황인데, 그래도 어떻든 ‘능동적으로’ 문을 열어야 한다는 점은 같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지 못하거나 무시한다면,
그래서 문을 열어 드리지 않는다면,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4) 문을 두드린다는 상황에서 다음 말씀도 연상됩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루카 13,25).”
이 상황은 ‘최후의 심판’이 끝난 뒤의 상황입니다.
안으로 들어갈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이미 들어갔고, 그 자격을 얻지 못한 사람들은 ‘밖에’ 남아 있는데, 그것은 사실상 쫓겨난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는 아무리 문을 두드리면서 열어 달라고 애원해도, 닫힌 문이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심판이 끝나면 모든 상황이 끝나고, 주님의 결정은 번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문을 두드리는 일은, 또는 안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일은,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지금’은 주님께서 문을 열어 놓고서 기다리시는 때이고, 문이 닫히는 ‘그날’은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때입니다.
사실 ‘청하고 찾는’ 일도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나는 ‘지금은’ 특별히 청할 일이 없다.” 라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오만함과 자만심을 버리지 않으면, 정말로 간절하게 청해야 할 일이 갑자기 닥쳤을 때,
청하지도 못하고 허둥대기만 할 것입니다.
기도는 평소에 꾸준히 하는 사람이 잘하게 되는 법입니다.
어떤 아쉬운 상황이 되어야만 기도를 하려고 하고 평소에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기도의 힘’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의 힘’은 ‘믿음의 힘’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