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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6.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묵상글 ( 10/25 21:10, 06:10.)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전일 21-21시반 *가끔은 이전에도 올릴 수 있음 > : 호명환 신부님. 고인현 신부님.
2차 공유할 묵상글< 06시 이후 *가끔은 이전에도 올릴 수 있음 > :
김찬선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이마르첼리노M 수사님
* 가능하면 위와 같이 할 계획이나 개인 형편으로 그리 알 될 경우가 있습니다..
이 시간대 이외 여러 묵상글을 보시려면 전체공지란 " H. 260707. 카페 운영에 대한 고견을 주세요." 의
2번에 들어 가셔서 안내를 받으세요
** 오늘 묵상글 공유 : 호명환 신부님, 고인현 신부님(10/25 21:10)
김찬선 신부님: 06:10 추가. 호명환 신부님: 06:10 추가. 이마르첼리노M 수사님: 아직.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계속 여부도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11월 대림시기(11/29) 이후 12월 중순 아니면 , 그 이전이라도 실질적으로 운영을 중단할 계획이오며
카페는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킬 계획이기에, 2)의 회원분이나 제가 가끔 묵상글을
올릴 수도 있을 경우를 감안, 묵상글 뜨락은 유지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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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6.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10.25. 18:33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기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만일 우리가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세상은 얼마나 달라질까요?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제국과 그리스도 영성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기
2026년 10월 25일 일요일
율법 학자 한 사람이 이렇게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님께서 대답을 잘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께 다가와,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 마르 12,28-31
다음 강론에서 리처드 로어 신부는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에 대해 성찰합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마음과 영혼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법을 온전히 알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랑하고 싶어 하지만, 어떻게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을 하나로 모아 실제로 살아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깨닫는 데에는 우리의 온 삶이 필요합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과연 우리 중에 그렇게 하는 이가 있을까요? 우리는 정말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 자신에게 쏟는 관심만큼 그들에게도 주고 있습니까? 아마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단 하나의 계명,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충실히 지킨다면 세상은 얼마나 달라질까요? 그것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정치적·사회적 변화일 것입니다. 인간이 정말로 다른 이를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그대로 대한다면 세상은 근본적으로 새로워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단순한 지침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저 사람에게서 받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은 무엇일까?' 바로 거기에 계명이 있습니다. 곧, 우리가 다른 이를 위해 행해야 할 의무입니다.
이 계명이 너무나 단순하기에, 우리는 오히려 온 마음을 십계명이나 문화와 종교가 우리에게 부과하는 수많은 규정들에 쏟아붓곤 합니다. '깨끗함'을 지킨다고 여겨지는 사소한 것들에 집착하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실 큰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이 율법학자가 참으로 좋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모든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로 귀결되며, 이는 곧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만일 제가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면,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중요한 계명을 무시한다고 비난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예수님께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이 사랑에 달려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심판받을 것은 단 하나, '우리가 사랑했는가?'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사랑했는가? 자신을 사랑했는가? 하느님을 사랑했는가? 이웃을 사랑했는가? 사랑에 집중하는 데에는 우리의 온 생애가 필요하기에,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하지 않는지 걱정할 여유는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소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단순히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것이라 믿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다면, 그들을 해치거나, 빼앗거나, 외면하거나, 굶주리게 두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요청이지만, 선하고 살가운 세상을 위한 유일한 희망입니다.
— JC E.
Reference
Adapted from Richard Rohr, “613 Commandments Reduced to Two,” homily, November 3, 2012.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amuel Oakes, untitled (detail), 2021, photo, Broadway, UK.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누군가에게 건네는 빵처럼, 우리는 보이지 않는 이웃에게 손을 내밀도록 초대받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축복을 주고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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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6.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2026.10.25 20:39
2026년 10월 26일 월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3,10-17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곳에 한 여인이 있습니다.
열여덟 해 동안 허리가 굽어 몸을 조금도 펼 수 없는 사람입니다.
허리가 굽었다는 것은 늘 땅만 보고 산다는 뜻입니다.
하늘도, 사람의 얼굴도 마주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열여덟 해라면, 바라던 마음마저 이미 접었을 세월입니다.
복음에는 그가 무엇을 청했다는 말이 한마디도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까이 부르십니다.’
사랑은 언제나 이렇게 ‘먼저’ 옵니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사람을 알아보시고,
군중 뒤편의 굽은 등을 눈여겨보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여인아,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이어 ‘손을 얹으십니다.’
말씀과 손길, 곧 진리와 은총이 함께 닿는 순간입니다.
그러자 그 여자는 ‘즉시 똑바로 일어서서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열여덟 해 만에 처음 하늘을 본 것입니다.
여기에 사랑과 기쁨의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사랑이 오고, 그 사랑이 사람을 일으키며,
일어선 사람의 입에서 찬양이 터져 나옵니다.
기쁨은 억지로 지어내는 표정이 아니라,
풀려난 몸이 저절로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회당장이 분개합니다.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으니, 그때 와서 치료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
규정으로 보면 옳은 말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눈앞에서 열여덟 해 만에 허리를 편 사람보다,
‘날짜’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반박은 통렬합니다.
“너희는 안식일에도 소나 나귀를 풀어 물을 먹이러 가지 않느냐?
그렇다면 사탄이 열여덟 해나 묶어 놓은
‘아브라함의 딸’인 이 여자를 풀어 주어야 하지 않느냐?”
짐승도 매일 풀어 주면서, 사람은 하루도 못 풀어 주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 부르십니다.
병자도, 짐도 아닌 ‘하느님 백성의 딸’이라는 존엄의 회복입니다.
오리게네스와 교부들이 즐겨 읽었듯,
안식일의 참뜻은 ‘쉼과 해방’입니다.
그러니 안식일이야말로 사람을 풀어 주기에 가장 알맞은 날입니다.
한 사제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이 미사 중에 아이가 넘어지자,
그는 미사를 잠시 멈추고 손수 약을 발라 주었습니다.
그 아이의 마음에는 ‘미사보다 내가 소중하구나’ 하는
사랑의 기억이 남았습니다.
형식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형식을 위해 있지 않습니다.
사랑·기쁨 주간의 눈으로 보면
오늘 복음의 마지막 문장이 눈부십니다.
“군중은 모두 그분께서 하시는 그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두고 기뻐하였다.”
사랑이 규정을 넘어 한 사람을 일으켰을 때,
그 기쁨은 한 사람에게 그치지 않고 온 공동체로 번집니다.
반대로 사랑 없는 규정은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굳게 만듭니다.
오늘 제1독서의 권고 그대로입니다.
“사랑받는 자녀답게…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군중 뒤편의 ‘굽은 등’을 알아보는가?
나는 청하기도 전에 ‘먼저’ 다가가는 사랑을 지녔는가?
나는 사람보다 규정과 형식을 앞세우지 않는가?
나의 사랑은 누군가를 일으켜 찬양하게 하는가?
주님,
굽은 등의 이웃을 먼저 알아보게 하소서.
형식보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게 하시고,
당신 사랑으로 일으켜진 저희가 기쁨으로 찬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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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6.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26 04:54
- 답게 살고 처럼 사는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도 그리스도처럼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
오늘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뜯어보면 그 짧은 권고안에
‘답게’라는 말이 반복해 나오고 ‘처럼’도 두 번 나옵니다.
그러므로 오늘 에페소의 권고는 ‘답게’ ‘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언젠가 클라라 수녀원에 갔더니 ‘수녀님처럼’이라는 소주를 내주시는 거였습니다.
깜짝 놀랐고 수녀님들이 재미있으라고 만드신 줄 알았는데
‘처음처럼’이라는 소주를 만든 회사에서 수녀님들 선물용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회사 선전용이지만 제게는 예사롭게 넘어가지 않고 한 생각 하게 하는 거였습니다.
수녀님들처럼 술을 마시면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을 것이고,
미사 때 주님의 피를 마시듯 거룩하게 마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의식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마시면 다른 소주와 마찬가지겠지만 그 술을 마실 때
수녀님처럼 마시는 것을 생각하며 마시면 음주도 성사가 될 것입니다.
‘답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와 ‘빛의 자녀답게’를 의식하며 살면
우리는 성사를 넘어 성인이 될 것입니다.
제가 대학교를 들어갈 때는 ‘의식화 교육’이 대단했습니다.
특히 독재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 서클에 새내기가 입학하면
선배들이 그들을 투사로 키우려고 의식화 교육을 세게 했지요.
그래서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 의식 없이
오직 대학 들어가는 것만을 목적으로 살던 젊은이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지 심각하게 고민하며 점차 투사가 되어갔지요.
이때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의식화 교육에 더 크게 영향받았었고,
예수님도 해방자 예수님 곧 로마나 기득권의 압제에 항거하신 분으로 믿었지요.
그런 그들이 50년이 지난 지금 처음처럼 살아갈까 궁금합니다.
그리고 신앙인인 우리는 이들과 비교하여 얼마나 신앙에 의식화되었고,
하느님을 의식하고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인지 의식하며 사는지 궁금합니다.
어쨌거나 오늘 에페소서는 하느님의 자녀라면 자녀답게
또 예수님처럼 자비와 사랑과 용서의 삶을 살라고 합니다.
그 사랑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 똑같이 비와 햇빛을 주는 사랑이요,
그 자비는 자기 몫을 챙겨 떠났다가 돌아온 탕자를 가엾이 여기는 사랑이며,
그 용서는 자기를 죽인 원수들을 십자가 위에서 용서하시는 용서입니다.
하느님 자녀답게 예수님처럼 자비롭게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는 우리가 되기로 다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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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6.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10.26. 04:11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하느님 마음의 밭과 뜰로 초대해 주십니다. 하느님 마음을 배우라고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회당에서 가르치고 계셨다."
오늘 복음의 장면은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회당에 나타나신 마지막 장면입니다.
예수님과 권위자들 사이의 갈등은 점점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앞세웠고, 예수님은 자비를 앞세우셨습니다.
그 차이는 18년 동안 굽어 있던 한 여인의 모습 속에 극명히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치유하셨을 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해석에 따르면 이는 안식일을 어기는 행위였습니다.
그들은 규칙 위반만을 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자비가 인간의 고통을 만나는 순간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그들의 입지를 위협하는 강력한 도전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안식일에도 짐승을 돌보는 것을 허용하면서, 인간을 돕는 것은 금하는 그들의 모순을 지적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허위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했고, 이는 그분을 향한 완강한 증오를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다른 길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길을 무너뜨리신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은 마음이 없는 협소한 율법주의였고, 기쁨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등이 굽어 고생하는 여인의 치유를 기뻐할 줄 몰랐습니다. 기쁨 없는 종교는 공허하며, 결국 그것은 에고의 산물임을 드러냅니다.
에고는 자기만족은 알지만 기쁨은 모릅니다.
기쁨은 사람으로 마음을 넓혀가 더 높이서 더 멀리서 삶이라는 큰 그림 전체를 볼 줄 알게 해 줍니다.
사실 진정한 기쁨을 체험한다는 것은 자신을 잃고 궁극적으로 하느님 안으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 저자는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기쁨으로 충만하셨다고 기록합니다(루카 10,21). 제자들도 성령 안에서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사도 13,52). 바오로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사랑 다음으로 기쁨을 언급합니다(갈라 5,22).
에고의 종교와 예수님의 종교 사이에는 커다란 골이 있으며, 그것은 오직 한 번의 큰 도약으로만 건널 수 있습니다.
그 도약은 성령 안에서의 기쁨의 도약입니다.
이런 도약을 위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서 살펴볼 것이 있습니다.
"나는 과연 사람들 안에 깊이 들어 있는 하느님의 모상과 그분의 선을 볼 줄 아는 영의 눈을 지니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들의 잘못들이나 문제들만을 보려는 육의 눈을 지니고 있는가?"
우리가 일상 안에서 어떤 눈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성찰해 보게 하는 질문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회당장이 한 말, 즉 "일하는 날이 엿새나 있습니다. 그러니 그 엿새 동안 와서 치료를 받으십시오. 안식일에는 안 됩니다."라는 말은 이성적인 논리로는 타당하게 들리기까지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다른 날이 있는데 굳이 안식일에 치유를 해야 합니까?
그러나 이는 연민과 동정심을 잃은 굳은 마음이 가질 수 있는 논리입니다. 겉보기에는 일리가 있는 논리이지만 인정미가 전혀 없는 우리 에고의 정신을 드러내 주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안식일 법을 지켜야 한다고 해서 안식일에 고통받는 사람에게 사랑과 연민과 동정(同情)의 마음을 가지는 것조차 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 본다면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우리가 다른 엿새 동안은 정말로 사랑의 마음을 지니려는 수양을 하고는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또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그렇게 생명이 없는 규칙과 규정에 초점을 맞추는 굳어진 마음이라면 다른 엿새 동안도 그런 넓고 깊은 마음, 즉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선을 보려는 마음을 갖고자 하는 마음을 지니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동정심과 연민과 인정미를 가꾸는 하느님 마음의 밭과 뜰로 초대해 주십니다. 거기서 서로의 문제나 잘못을 먼저 보는 대신 서로를 신뢰하고 믿어 주는 삶의 예술을 배우라고요.
거기서 서로의 약함과 한계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하느님의 마음을 보라고요.
만일 우리가 이 하느님 마음의 밭과 뜰에 하루에 단 1분이라도 머물 수 있다면 우리는 생명이 지닌 아름다움과 그 기쁨을 충분히 배워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밭과 뜰을 일구시는 분은 바로 하해 같은 사랑의 하느님 당신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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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26. 연중 제30주간 월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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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의 우정 1 관계 안에서 그리스도를 낳는 삶 (260924. 01:38)
http://www.ofmkorea.org/ofmkfb/585549
그리스도와의 우정 2 말씀에 굴복하는 자유 (260929. 05:37)
http://www.ofmkorea.org/ofmkfb/585739
그리스도와의 우정 3 그리스도가 다시 태어나는 자리 (261008. 05:18)
http://www.ofmkorea.org/ofmkfb/586084
그리스도와의 우정 4 기도와 삶의 경계가 사라지다. (261011. 02:12)
http://www.ofmkorea.org/ofmkfb/586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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