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아침에 눈을 떠서 12시까지는 기도와 성경읽기, 상담이나 칼럼, 책 쓰기 등을 하다가 정오가 넘으면 비로소 아점을 먹고 아내와 돈벌이를 나간다. 그리고는 오후 6,7시가 넘으면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쉬다가 저녁식사를 하고 10시쯤 되면 기도와 성경읽기를 하다가 자정이 넘으면 잠자리에 든다. 대략 하루에 기도와 성경읽기에 들이는 시간이 너댓시간 이상이 되는 셈이다. 사역에서 나오는 수입이 없으므로 아내와 화장품 방문판매를 한지 10여년이 넘었다. 그러나 생업에 투입하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아 수입은 빈곤층과 별다름 없다. 그렇지만 돈 쓰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으니 그럭저럭 살아갈만하다. 생업과 사역을 병행하면서 경건시간을 많이 할 수 있는 비결은 다른 게 없다. 웬만하면 다른 일을 벌이지 않는 것이다. 친구나 동창모임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목회자 모임도 없다. TV시청이나 컴퓨터 게임 등의 놀이문화도 즐기지 않고 주머니가 비어있으니 쇼핑하거나 외식하는 일도 거의 없다. 다만 주말이나 주일 오후에 시간이 나면 도시근교의 자연을 찾아 풍광을 즐기는 게 유일한 낙이다. 말하자면 생업과 사역, 경건생활과 쉬는 일이 필자의 삶의 전부이다. TV도 보지 않고 친구도 만나지 않으면 심심해서 무슨 재미로 사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도하고 성경 읽는 재미도 들였고 자연풍광을 즐기는 재미도 쏠쏠하다. 돈 버는 일과 돈 쓰는 일을 줄이면 하나님의 일과 경건시간을 얼마든지 낼 수 있다.
하나님이 사용하셨던 성경의 위인들이 살아왔던 방식은 그저 소박하기 짝이 없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 야곱, 그들의 아들들인 12지파의 족장들의 직업은 농사를 짓거나 목축을 하였다. 그래서 해가 뜨기 무섭게 들판에 나가서 해가 지면 집에 들어오는 무료한 생활을 평생 반복하면서 보냈다. 들에 가서도 농작물이나 가축을 돌보는 일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다. 요즘처럼 인터넷이나, TV, 스마트폰이 없어 그저 팍팍하고 심심한 일상의 반복이었을 게 뻔하다. 소박하게 살고 싶지 않아도 소박할 수밖에 없는 삶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삶이 경건한 신앙생활에는 더 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하루 종일 느슨한 삶속에서 무료함이나 허전함을 달래기 좋은 게 바로 말씀을 묵상하거나 기도를 하는 것이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신앙 환경에서 보면 불행한 세대이다. 그렇다고 그 시대로 돌아가겠다고 할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항목이 아니다. 적어도 시대를 거슬러갈 수는 없어도 경건하고 소박한 삶을 위해 삶의 방식은 선택할 수는 있다.
사실 TV만 보지 않아도 하루에 2시간은 기도할 수 있다. 인터넷게임이나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지 않아도 하루에 서너시간 기도하고 성경을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경건생활을 위해 기꺼이 TV나 인터넷 게임을 그만둘 생각이 없다. 돈을 버는 데 인생을 다 보내는 삶의 방식도 경건한 삶에 지대한 걸림돌이다. 아침 새벽에 일어나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돈을 벌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없다. 자신들의 돈 욕심 때문에 하루 15시간이상 일을 하는 것은 물론 부부가 번갈아가며 24시간 가게 문을 여는 데도 있다. 그렇게 일을 하는 이유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이다. 돈 욕심을 벌리지 않다면 경건한 시간을 낼 수 없다. 쾌락을 즐기는 삶도 경건한 삶의 또 다른 걸림돌이다. 술을 좋아하거나 게임, 혹은 영화라면 밤은 새워서라도 보아야 하는 사람이라면 경건의 삶은 물 건너갔을 것이다. 틈만 나면 등산을 가거나 낚시터를 찾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쾌락과 경건의 삶은 동반할 수 없다. 필자도 한 때는 낚시광이었다. 그렇지만 낚시에 투입하는 많은 시간과 낚시를 하고난 후의 피로감은 기도집중을 방해했다. 특별히 낚시를 끊으려고 노력하지 않았지만 기도에 몰입하는 삶이 되면서 자연스레 낚시에서 멀어졌다. 쾌락에 들이는 돈이나 시간이 경건생활에 걸림돌이 되기도 하지만 정작 문제는 쾌락의 행위들은 엄청난 영향력으로 사람들의 정신과 몸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경건생활을 향한 집중력을 현저하게 떨어뜨린다. 예를 들어 축구나 야구 등의 열혈 팬이라면 틈만 나면 관련 뉴스검색을 하거나 책자를 읽으며 주말이면 경기장을 찾고 동호인들과 유대감을 나눈다. 여기에 몰입하면 할수록 기도나 성경 읽기 등의 경건생활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기도시간을 내도 잡념이 들어와 몰입을 방해하기일쑤이다. 그러다보면 결국 경건생활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경건생활의 기쁨도 적지 않지만 세상의 쾌락이 주는 파괴력에 비하면 강도가 약하다. 결국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한다.
가까이 할 것과 멀리 할 것을 구분하라.
알고 있는 것과 실천에 옮기는 것은 다르다. 뚱뚱한 사람은 언제나 살을 빼야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고 있겠지만 실행에 옮기는 사람은 드물고, 운동이나 독서가 건강한 삶에 좋은 영향력을 미친다고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소수의 사람만이 실천하는 이유이다. 그만큼 좋은 것들을 습관에 들이는 게 힘들다는 반증이다. 의지가 강한 사람은 흔치 않다. 그렇지만 지혜롭게 좋은 환경을 조성하려 애쓰고, 약한 의지를 보완해주는 영적인 사람들과 친교를 나누며 조언을 듣는다면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
먼저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사람들과의 관계를 끊거나 제한해야 한다. 쇼핑을 좋아하거나 자식공부 자랑으로 열을 올리는 친구를 만난다면 자연스레 그 물속으로 휩쓸릴 수 밖에 없다. 재테크 정보나 부동산투자에만 정신이 홀린 종료를 만나면 자연스레 관심이 옮겨 붙을 것이다. 등산이나 사이클 동호회 회원이 된다면 만나면 그 얘기뿐이다. 술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틈만 나면 술자리를 만들고 불러내지 않은가. 이러한 사람들이 주변에 있으면 자연스레 돈을 버는 것과 쾌락을 즐기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필자는 경건생활을 시작하면서 세상친구들을 다 끊었다. 동창이나 친목모임에 나가면 늘 식사에 술자리가 이어지고 노래방으로 가는 것이 정기적인 순례코스이다. 만나서 하는 대화주제들도 세속적일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친구들이 좋아서 나갔지만 이내 삶의 목표와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이들과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경건생활의 습관으로 들이는 것이 힘들다면 당신이 이들 주변에 여전히 서성이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의 만남과 세상을 즐기는 삶의 방식을 없앤 필자는 대신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틈이 나면 자연으로 나가 풍광을 즐기며 산골에서 소박한 노인들을 만나 담소를 하곤 했다. 이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면 오랜 삶의 경륜에서 묻어나는 지혜를 나눠가질 수 있어 좋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들을 보면 인생을 떠나야 하는 때를 깨닫게 해두어 삶을 대한 자세를 숙연하게 해준다. 세속적인 사람들과 행위들을 멀리하는 것이 경건한 삶을 얻는 지름길이다.
경건과 소박한 삶을 유지하려면 영적인 사람들과 가까이해야한다. 영적인 사람들의 특징은 돈이나 세상 욕심대신에 영적인 욕심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나서 얘기하는 주제도 늘 영적인 관심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늘 하나님에 대한 관심과 영적인 삶이 무엇인지는 치열하게 추구한다. 영적인 사람들을 구별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사람의 생각은 곧 말이나 행동으로 튀어나오게 마련이다. 입만 열면 하나님의 말씀이 줄줄 나오게 된다. 교회의 직분이나 신앙경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교회지도자라도 사적인 자리에서 성경말씀이 아니라 교회나 교인에 대한 주제가 주 관심사라면 영적인 사람이 아니다. 그렇지만 아제 갓 교회에 입교한 초신자라도 하나님에 대한 뜻으로 가득 차 있다면 영적인 사람이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영적인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 드물다. 우리네 교회가 영적인 사람들로 가득 차 있어야 하는 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교회에도 세속적인 사람과 종교적인 사람이 적지 않다. 세속적인 사람은 신앙의 목적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되는 것에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교회에 와서도 대화의 주제가 재물이나 가족, 취미, 쾌락 등에 있다. 종교적인 사람도 영적인 사람과는 다르다. 종교적인 사람은 희생적인 신앙의 행위에 몰두하는 사람이다. 말하자면 기도의 목적이 하나님과 깊게 교제하는 것인데도, 기도의 빈도(頻度)나 강도(强度)를 자랑하며 자신의 희생적인 신앙행위를 드러내기를 좋아한다. 종교적인 사람은 목회자나 교인들의 이목이 있는 곳에서는 열심인 척 하지만 아무도 없는 곳에서는 세속적인 사람과 별 다름이 없다. 그래서 종교적인 사람은 희생적인 신앙행위에는 열정적이지만 성령의 열매가 없다. 성품의 변화나 영적 은사도 부족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이들은 종교행위로서 자기과시나 자기위안을 삼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책망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랬다. 영적인 사람들은 신앙의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에 지대한 관심이 있으며 풍성한 영적 은사를 보유하고 있다. 이들은 성경에 약속한 영적 은사로 우리를 놀라게 하지만,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랑거리로 삼지 않아 깊은 관계를 맺지 않으면 그 실체를 알기 어렵다. 어쨌든 영적인 사람들과 친교를 나누게 되면 영적 존재나 영적 능력, 영적 세계에 대해 지식과 경험을 서로 나누며 공유하게 된다. 영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삶에 적용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삶이 소박하고 경건하다. 이들을 만나면 마음이 평안하고 영적인 기쁨이 솟아난다. 그런 사람들을 가까이에 많이 두고 있으면 자신도 영적인 사람으로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자신도 당연히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고 영적인 사람들과 깊고 친밀한 관계를 누리고 있어야 한다. 경건하고 소박한 삶을 실천하려면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영적인 삶은 기도나 성경읽기 등의 경건행위를 삶의 최우선을 두고 살아야한다. 최소한의 생업, 그리고 일상생활에 필요한 시간인 식사나 휴식, 운동 가족관의 대화 등을 제외하고는 오직 기도하거나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인 하나님과 깊게 교제하는 시간으로 채워야 한다. 영적인 삶을 살다보며 자연스레 세속적인 일에 관심이 멀어지고 세상적인 사람들과 관계도 끊어지게 된다. 그리고 주변사람들에게 영적인 영향력을 끼치며 영적 성장을 도모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교회에서 정하는 예배나 기도회, 전도나 교육 프로그램도 성실하게 참여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과 홀로 만나는 시간을 더욱 즐긴다. 사실 주변에는 교회에서 권면하는 신앙행위를 열심히 하지만 정작 하나님과 개인적은 만나는 시간이 별로 없는 이들도 적지 않다. 세상 일로 바쁘다면 세상적인 사람이라고 이해하겠지만,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크리스천들이 교회행사에 바빠 정작 하나님을 만나지 않는다면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실제적으로 우리 주변에는 그런 교인들이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