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을 야생화와 함께 살아 온 임인숙씨(51)는 이 중국 속담처럼 꽃을 가꾸는 일로 새롭게 인생을 시작했다. 집에 미니정원을 만들고 곳곳에 화분을 놓아둬 식물의 향기에 푹 취해 살고 싶어한 소녀의 꿈을 실제로 이루고 있는 동화같은 삶이다. 30대 초반 야생화에 눈을 뜨기 시작한 그는 이혼의 아픔을 안고 세 아이와 함께 7년 전인 지난 95년 봄 고향인 전북 정읍시 산내면 매죽리 절안마을로 내려왔다.
우리 산야에서 피고 지는 야생화 300여종을 한데 모은 자연학습원을 조성하는, 힘들지만 즐거운 작업이 시작됐다. 서울에 살면서 훗날에 대비해 값싼 산비탈의 임야 4,000여평을 사두었던 것이 그처럼 일찍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터전이 될 줄은 그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운명이었으리라.
‘식물이 스스로 자라는 곳에 직접 가서 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그것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없다’. 이렇게 배운 그는 온갖 곳을 마다하지 않고 야생화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처음 4~5년은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며 산과 들을 헤맸다. 그렇게 발로 뛰어 답사하고 연구한 끝에 지금은 앉아서도 제 손바닥 들여다 보듯 어느 곳, 어느 구석에 무슨 꽃이 있는지 훤히 안다. 그 꽃들을 번식시켜 학습원에서 키우고 있다.
일을 처음 시작할 무렵에는 꽃에 미쳤을 뿐, 쌀을 달라거나 돈을 달라고 손을 벌린 일이 없건만 친지들은 지레 임씨를 피했다. 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철저히 냉대했다. 산에 빠지고 꽃에 미친 그는 점점 더 외롭고 고독해졌다. 사람 대신 자신을 알아주는 야생화들을 더 많이 찾은 건 이때부터였다. 그들은 따스하게
임씨를 맞아 꽃잎을 열어 내밀한 제 속까지 보여주었다. 꽃으로 위안받고 그래서 행복했던 시련의 세월이었다.
야생화 하나 하나를 ‘아이’ ‘자식’ ‘애’라 부르며 극진한 애정으로 기른 학습원이 완성됐다. 100여평의 야생화 작품실과 씨앗 파종장, 육묘장, 600여평의 수생식물원을 갖춘 제법 큰 규모다. 여자 몸으로 어떻게 이런 꽃동산을 만들었는지 보는 이들마다 감탄한다. 겨울꽃인 복수초와 가시연, 수련, 왜개연, 노랑 어리연을 포함한 각종 야생화 및 수생식물이 일년 내내 꽃을 피운다. 설악산에서만 자생하는 에델바이스와 등대시호, 내장산 특산인 분홍 개상사화, 갯까치수염 같은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야생 풀꽃들이 널려 있다.
돌 위에 야생화를 재배하는 석부작품을 제작하기도 하는 임씨는 지난해 익산 마한문화제와 고창 수산물축제, 전주 풍남제에서 ‘야생화 작품 전시’ 코너를 열어 인기를 끌었다. 이번 달에는 정읍 천변 청소년축제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색과 향기가 너무 노골적인 외래종과는 달리 은은하고 기품있는 우리 꽃에 반했다는 그는 그윽하고 애잔하면서도 억센 생명력을 가진 야생화를 들여다 볼 때마다 고난의 역사를
살아온 우리 민족이 떠올라 동질감을 느낀다고 했다.
“야생화학습원이지요? 뭘 좀 알아보고 싶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아이들이 무슨 꽃이냐는데 알 수가 있어야지요. 실례인 줄 알면서도 전화드렸어요”
그의 학습원에는 이런 전화가 자주 걸려온다. 내 집 마당, 학교 앞 빈터에 무심히 핀 풀꽃들에 갖는 관심, 이름모를 잡초의 이름을 기어이 알아내려고 하는 애정, 잎은 작고 못났건만 어찌 이리도 예쁜 꽃을 피우나 하고 신비스럽게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대부분 아이들을 가르치는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대부분이다.
‘이게 무슨 꽃이에요?’ 하는 순진한 아이들의 질문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어 답답했다는 한 여선생님은 직접 학습원으로 찾아와선 스크랩해 둔 여러가지 야생화 사진들을 내보이며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자라는 아이들에게 자연을 가르치고 느끼게 해주려는 열성적인 어머니나 아버지도 이곳을 찾아오는 주요 손님들이다. 우연히 야외에 나갔다가 아름다운 야생화를 발견해 아이들과 함께 씨를 받았는데 다음 해 심어보니 발아가 안되더라, 어떻게 하면 꽃을 피울 수 있느냐고 그들은 참으로 진지하게 묻는다.
이처럼 순수한 우리 꽃을 정원이나 아파트에서 키우고 싶어서 전화를 해오는 도시 주부들도 가끔 있다. 그러나 야생화는 그들이 원래 자라는 곳이 아니면 잘 자라주지 않는다. 집 안에서 키울 수 있는 품종이 있고 또 집안 환경에 적응될 때까지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야생화에 미친 어미를 둔 덕에 자녀들(2남1녀)도 식물에 해박하고 관심도 많다. 임씨는 이 아이들을 그렇게 가르쳤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민들레, 질경이를 확실히 구별할 수 있도록 하고 식물은 무엇이며 어찌 이용하고 보존하여야 하는가를 지금도 일러주고 잇다.
“자연 속에서 자연을 배운 아이들이 이 다음에 훌륭한 식물학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꼭 그렇게 되길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혹시 그런 뜻밖의 ‘수확’이 있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는 뜻으로 그는 화사하게 웃었다. 오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에서 한 소녀가 비바람을 이겨낸 담쟁이덩굴 잎을 보고 삶의 희망을 되찾듯이, 무의탁 노인 수용시설과 산책로를 만들어 어려운 사람을 돌보며 꽃과 함께 여생을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야생화 여인’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