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리끼리
유기섭
비행기 이륙시간이 가까워 오는데 기내가 어수선하다. 자리바꿈이 시작되고 기내방송은 연신 탑승객들에게 좌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맬 것을 촉구한다.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진 것이다. 비행기 기내에는 질서와 안정이 육지의 교통수단보다 훨씬 강조되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다. 일행 중 한 여성과 그 남편의 좌석이 떨어지게 되고 그 여성의 옆 좌석에는 흑인 남자 승객 한 명이 앉아 있었다. 그 여성은 옆 승객에게 정중히 양해를 구했어야함에도 흑인을 비하하는 듯한 우격다짐으로 거의 강제적으로 양보해달라며 억지를 부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 흑인 남성은 꿈적도 아니하였다. 언어소통이 원활하지 못해서도 그러했겠지만 그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일, 거의 횡포와 같은 일에 당황해하는 눈빛이었다. 그렇지만 그 남성은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관습의 차이가 엄정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남성은 탑승권을 자신의 고유권한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니 자기에게 부여된 권리를 부당하게 남으로부터 침해당하지 않으려는 심정을 읽을 수 있다. 그에게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얇은 정이 많은 우리끼리는 가능한 일일지 몰라도 외국인들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같이 느껴진다. 우리 국내에서나 통할지 모를 일을 외국인에게까지 요구하며 떼를 쓰는 그 여성이 한국인의 자존심을 멍들게 하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흉한 모습을 본 동료 중 한 여성이 개입하여 억지 부리는 여성을 눌러 앉히고 그 남성에게 정중히 사과함으로써 사건은 무마되고 기내는 조용해졌다. 끼리끼리 노는 것도 자리와 주변상황을 살피고 나서 생각해볼 일이라 여겨진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행 중 한 사람이 그들을 향해서 엄중히 꾸짖는다. ‘나라망신 시키지 말라고...’ . 단체여행객 중에는 비행기 좌석이 흩어져있으니 일행들끼리 모여서 가겠다는 뜻은 이해를 할 수 있지만, 그것도 한국 사람들끼리는 양해가 된다고 하더라도 외국인에게는 강요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들은 우리의 그런 관습을 잘 모를뿐더러 이해하지도 않으려는 고집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싫다고 하는 외국인 남성에게 채근하는 듯한 여성의 모습이 애교에서 추한 모습으로 비춰지지나 않았을는지. 그것만이 아니다. 일상의 많은 부분에서 그와 유사한 현상들을 볼 수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작은 일이지만 세계가 열려있는 오늘날 우리의 잘못된 습관은 버리고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보편타당한 잣대를 맞아들여야 할 것 같다. 끼리끼리 어울리는 것에서 범위를 넓혀가며 여러 사람을 아우를 수 있는 폭넓은 관계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어느새 우리의 전통이 되어 내려오는 끼리끼리 현상이 언제나 나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때로는 무한한 힘을 발휘하며 엄청난 에너지로 발현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드넓은 세상과 교류하며 살아야하는 오늘의 우리에게는 좀 더 트인 가슴이 필요하리라고 본다. 수년 전까지 만하더라도 끼리끼리 어우러져 어떤 일을 하며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나라 안에서나 바깥에서나 무리지어 가며 살아가는 것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외국인들의 개인적인 사고나 생활방식이 생소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모든 일을 함에 무리지어 하는 데에는 문제가 있다.
끼리끼리를 앞세우는 집단에서는 그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조직 내에서 소외되고 결국은 외톨이신세나 왕따를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틀린 것을 가지고 여럿이 우겨서 진실을 왜곡할 수 있는 위험을 초래할 정도라면 한사람의 올바르고 치우치지 않는 생각이 더 값어치 있게 맞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잘못된 것임에도 여러 사람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어리석음이 더 이상 통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끼리끼리 모이고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풍조에 익숙해진 우리에게는 그것이 당연시될지 몰라도, 우리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기에 우리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지 않을까.
-경북문단 2024년 제 44호 게재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