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야 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의 나이가 있나요/ 마음은 하나요/ 느낌도 하나요/ 그대만이 정말 내 사랑인데/ 눈물이 나네요/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지금 대한민국은 ‘내 나이가 어때서’ 열풍이다. 2015년 2월 한국갤럽 조사에서 우리나라 사람 애창곡 1위는 오승근이 부른 ‘내 나이가 어때서’였다. 어느 보험회사는 TV 광고에 이 노래를 가져다 썼다. 80대 노인부터 10대 소년까지 모두 “내 나이가 어때서”를 흥얼거린다. 송해가 진행하는 ‘전국노래자랑’의 예심에서 출연자들이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가 바로 ‘내 나이가 어때서’라고 하니 바로 이 조사가 확실함을 입증하는 셈이다 젊은층도 이 노래를 부르지만 아무래도 주소비층은 중장년층과 노년층이다. 가수 오씨는 '40대 이후의 인구비가 30대 이하보다 커진 현실에서 장년층 이상이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나이’ 문제를 건드린 게 주효했다.' 고 말한다. 정말 예전과는 다른 세상풍경이다.지금 60대가 60대로 보이는가? 예전보다 최소 10년은 젊어 보인다. 50대지만 40대처럼, 40대지만 30대처럼 보이는 ‘몸짱’도 주변에 크게 늘고 있다.젊다보니 노인층이 많기도 한 현실. 자연 떠오르는 말이 속된 표현이지만 나잇값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니 나잇값은 반대로 추락한다. 이 참에 나이 든 분들, 나잇값을 과감히 버리면 어떨까. 나이 먹은 것도 서러운데 저런 고얀... 그래도 우리 어른들은 동양에 태어난 것을 감사해야 한다. 서양에서는 어림도 없다.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 이 말은 우리 어른들이 노상하는 말이지만 사실 이말은 우리만 하는 소리가 아니다. 이 말은 인류역사와 거의 같이 존재한다. 이집트 피라미드 건설 현장의 낙서에서 그 말이 발견되기도 했고 4천년전의 바빌로니아 점토판에도 적혀 있는 말이다.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도 '젊은이들이 아무데서나 먹을 것을 씹고 다니며 버릇이 없다.' 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니까 인류 역사상 젊은이들은 늘 버릇이 없다고 보는 게 맞다. 그나마 동양은 경로효친의 가르침을 전파한 공자님이 계셔서 서양과는 어른에 대한 공경이 남다른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군주도 민심이 천심이라든지 덕으로 다스려야 한다든지 글로 훈계로 꼬드기는 바람에 군주도 해먹기가 쉽지 않았던 동양사가 아닌가. 더욱이 우리는 동방예의지국이란 명예로운 간판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산다. 이 말은 아주 오래 전 중국인들이 우리네 사는 모습을 보고 예의가 밝다하여 군자국으로 불렀던데서 유래된 말이다. 그 덕분인지 우리나라에서는 그간 그런대로 노인 공경, 어른 대접은 소홀하지는 않았던 편이다.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을 곁눈질해봐도 우리만 못하다. 한국에서는 나이 한 살 차이도 엄청난 무게감이 있다. 아무리 용을 쓰고 돈을 들여도 별 수없이 1년 차로 한 번 형님은 영원한 형님이다. 우위를 점할 때 '너 몇살이나 먹었어' 가 큰 관건인 나라는 아마 이 세상 우리나라 밖에는 없을 것이다. 고무줄 나이가 성행하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다. 내 경우 실 나이보다 호적 상 나이가 한 살이 적다. 사회적으로는 58년생인데 나는 부드득 우겨대며 정유생 57년생이라고 내 출판 글에 꼬박 적어 올린다. 당연 1년 차이 나잇값이 어떤지를 잘 아는 처지로서 선택한 무게감이다. 목소리 크고 나이든 게 유리한 우리 사회. 그런데 이제는 공자님 가르침이 시효를 다한 것인지 씨알도 안먹히고 오히려 나이 든 서러움은 곳곳에 만개해 사자성어 '노마지지'의 현명함을 도외시 한 지 꽤 오래다. 겨우 받는 대접이 지공대사(지하철 공짜 대접)나 푼 돈 얼마 챙겨주는 제도 뿐 권위와 체통으로 우러러 지켜지기엔 너무도 먼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어르신들은 우리세대보다는 낫다. 자유시장 영화 주인공처럼 평생 고생을 안고 살았다지만 그간 나잇값 대접 다 받고 이 시대 삶의 주역으로 살지 않았는가. 낀 세대라고 하는 베이비부머(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부터 가족계획정책이 시행된 1963년까지 태어난 세대) ,이른바 노부모 부양 부담과 자녀에 대한 지출의 부담까지도 지고 사는 사람들. 나는 그 한복판에 선 사람이다. 어릴 적 한 학년 학급수는 20반이 넘었었다. 그 베이비부머중 유독 유명세를 타고 티가 나는 게 58년 개띠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58년 개띠는 여러가지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전 이후 아기들이 많이 태어나는 데 이 절정기가 바로 58년이었다.그래서 이 해에 태어난 사람들은 많은 경쟁을 하며 여태까지 살아왔다. 우리 사회의 중요한 사항들이 그 나이에 걸쳐서 모두 바뀌었다. 터무니 없는 말이겠지만 혹자는 박정희 아들 박지만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 역시도 58년 개띠다. 이 사람들이 중학교 입학할때부터 치열했던 입시제도가 바뀌어 중학교 뺑뺑이가 되었고 고등학교 본고사를 막 준비하던 중3에 고등학교도 연합고사제로 바뀌게 된다. 58년 개띠부터 일류 중고등학교와 일명 따라지 학교의 구분이 의미가 없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사람들은 당시 예비고사와 본고사를 역대 가장 높은 경쟁률을 치르고 대학에 들어간 사람들이다. 이사람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할무렵 이들 신혼부부들의 주거지를 위해 분당 일산 신도시가 세워졌다. 이런 이유로 인해 58년개띠들이 사회 여러방면에서 그 전세대와 차별되고 그후 세대와도 차별되어 튀다보니 급기야 58년 개띠 라는 용어까지 생겨났다. 묘하게 내 근무처 퇴직자가 몰려 있는 나이가 또 58년 개띠다. 호적상으로는 나도 그 나이지만 나는 직장에서 그 대열에 끼고 싶지는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아무리 애써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한 살 차이 깍뜻한 대우를 받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태어난 해의 띠로 운명을 점쳐보는 것을 당사주라고 한다. 같은 해에 태어났다고 해서 운명이 같을 리는 없다. 정유생은 당사주의 해에서 우선 천인이 들어 있다. 몸에 상처가 난다는 의미도 되는 데 어찌 같은 해 태어난 모두가 그 운세를 떠안을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나는 인간은 운명적이라는 데는 어느 정도 동의 한다. 출생연도를 기준으로 학교에 가고, 성인이 되고, 퇴직하는 것을 감안하면 동갑내기가 함께 겪어야 할 공동의 운명이란 게 어느 정도는 있다. 시대의 명암을 쫓는 세대는 어차피 유사하거나 동질성을 지닌다. 어쩌면 그보다는 인간은 본성의 근저로 살기 때문 돌이켜보는 역사는 변함없이 거듭되는 것이라 생각하는 운명적 귀환론과도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나이에 아무것도 해 놓은 것이 없네.' 내 주변에서 자주 듣는 이야기다. 상실감이 마음 깊숙이 닿는 요즘이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되돌아보니 무엇 하나 가진 것 없다는.... 나잇값을 못 했다는 자조 섞인 고백이다. 예전에는 여성을 두고 20대는 금값이고 30대에 접어들면 은값으로 떨어진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결혼 연령도 크게 높아졌거니와 도무지 나이를 잠작하기가 어렵다. 다들 한 살이라도 적게 보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여성 유명인은 인터넷상에 아예 나이가 적혀있지도 않다. 나이를 묻는 것은 큰 실례가 된다. 남자들만 꼬박꼬박 제 나이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어 넣는다.
적어도 여직 남자사회에서는 나잇값이 존재한다. 계급성은 여전하다는 의미지만 이는 수컷의 범주로서 갖는 일차원적인 우월성일 뿐 갈수록 나잇값은 가치를 상실하고 있다. 시대가 달라졌다. 젊은 것들이 버릇이 없는 게 아니라 세상이 막무가내, 버릇이 없다. 젊기에 더욱 왕성하게, 참신하게 활동할 수 있다는 의식이나 개성 강조가 돋보이는 시대다. 이 흐름은 어쩌면 넘쳐나는 나잇값 때문 나이의 지엄함을 상실해서인지도 모른다. 갈수록 나이는 알아주지도 않으면서 더욱 족쇄가 돼 가고 있다. 그동안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50대 중·후반이 정년퇴직이었다. 하지만 실제 정년퇴직은 행운일 뿐 한창 일할 40대, 50대 초에도 조직에서 밀려나기 일쑤다.
이를 늦춰 보겠다며 정년을 60세로 연장하니 이번에는 젊은이들의 일자리가 줄어들까 눈치를 봐야 한다. 월급마저 깎자고 한다. 이래저래 나잇값 하기는 더 어렵게 돼 간다. 베이비부머들은 또 운명처럼 많은 자식들이 생겨 났으며 그로 또 넘쳐나는 자식들은 사회적으로 큰 문제꺼리다.퇴직이 눈앞인 나로선 나잇값은커녕 앞날이 캄캄하다. 이 또한 운명적이지 않은가. 나이로 덕보기는 여러 모로 글른 세상, 나잇값 포기하고 힘들어도 젊게 살 도리 밖에는 없다. 똑같은 대열에서 줄 선대로 차례를 지켜야 하는 사회적 동등성, 오늘도 나는 못 먹고 자란 탓에 자그마한 키를 고추세우며 키 큰 놈들과 경쟁하며 겨우 버스 손잡이를 잡았다. 챙겨주지도 인정사정 봐주지를 않는다.
존경과 배려, 위엄있는 지체와 체통은 나잇값이 사회에서 제 값을 다할 때 빛을 발한다. 별 수 없이 명 다할 때까지 각자의 질긴 삶을 위하여 뛰고 또 뛰어야 할까보다. 그래서인지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노래는 '내 나이가 어떻다고 무시하는 거야.' 하는 투의 반어적 어법으로 들린다. 분명 곡조는 흥겨운데 내게는 자조 섞인 눈물 바람으로만 들리는 노릇이다. ' 어느 날 우연히 거울 속에 비춰진 내 모습을 바라보면서 세월아 비켜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인데... '정말 눈물 나는 짠한 세상이다. 내 나이가 어때서....오늘 거울 속에 나 닮은 어느 중늙은이가 나잇값을 하나 둘 지우듯 그렇게 머리를 까맣게 물들이며 세상 길을 걷고자 하고 있다.
(조성원 님의 수필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