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욕망, 호전성의 판타지
삼국지만큼 대중이 원하는 모든 장르의 재미를 안겨줄 수 있으며, 많은 공감대와 참여도를 끌어낼수 있는 작품도 흔치 않다. 거대한 중국 역사에서 기껏 백년 정도밖에 되지않는 전란기의 한 페이지가 현대에서는 살아있는 처세술의 교본이 되고 있으며, 위로는 노인에서 부터 아래로는 고3수험생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필독서로 여겨지고 있고, 게임,만화,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문화적 콘텐츠로 변주되며 대중에게는 상식적인 아이콘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오늘날 출간되는 수많은 판타지와 전쟁 역사 소설들을 꼼꼼이 살펴보면 삼국지의 방식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거나 장면을 인용하고, 배경을 변주하는 방식에서 맴돌고 있는 경우가 많음을 찾을수 있다.
들판을 누비며 정복자의 야심이 호쾌하게 펼쳐지는 남성적 대하드라마에, 사지를 제집처럼 드나드는 영웅들의 모습은 전쟁액션의 모습을 띄고, 음모와 반전이 교차하는 난세의 지략싸움은 정교한 스릴러를 연상시킨다. 그런가 하면, 여포와 초선의 사랑같은 이루어지지 못할 비극적 로맨스를 포함하고, 전장에서도 사람과 사람간의 의리와 인정, 충성과 초개같은 죽음 등 휴머니즘적 요소가 눈물을 자극한다. 유비,조조, 손권, 제갈량, 관우 등 지금껏어느 대하드라마에서도 삼국지만큼 수많은 등장인물들에 살아숨쉬는 개성을 부과하고 캐릭터의 매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한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있어서, 난세의 히어로를 통하여 규격화된 틀을 벗어나고 싶은 대리만족의 표현이며 억눌린 개인과 남성들에게 잠재된 호전성과 낭만적 야심을 자극하는 촉매제이다. 그것은 상상속에서만 존재하는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실존했던 역사로서의 리얼리티를 포함하고 있기에 더 강렬한 매력으로 사람을 잡아끄는 환타지인 것이다.
2. 나관중과 이환경- 이야기꾼과 역사가의 차이
삼국지를 이야기할 때, 정사를 쓴 진수를 빼놓고 이야기할수 있어도 연의의 저자인 나관중은 빼놓을수 없다. 명분론에 치우쳐 보수반동세력(유비)을 옹호하고 개혁세력(조조)를 깎아내렸다는 측면에서 역사해석의 논란의 여지가 많음에도 역사의 틀을 벗어나 단순히 소설가로서의 재능을 살펴볼 때, 나관중은 역대 최고의 대하소설작가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원명 교체기에 한족의 문화적 정통성을 확보하는 작업을 주도해야했던 문사의 한 사람으로서 연의에서 촉한정통론을 내세우는 것은 어쩔수없었던 시대적 배경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작가의 글에 나타난 시대만이 아니라 작가가 그 글을 집필했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까지 이해해야 한다고들 하지 않는가.
그리고 나관중은 엄밀하게 말하여 소설가이지, 역사가가 아니다. 그는 때로는 명백하게 조조의 실제적 업적까지도 권모술수의 상징으로 깎아내리면서 표리부동한 유비의 모습을 영웅적캐릭터로 지나치게 왜곡시키는 경우도 많다. 외교적 안목의 부재로 중대한 전략적 패배를 자초한 실패한 장수 관우를 고금에 다시없는 명장 캐릭터로 그려낸 것이나, 행정가이자 외교전문가였던 제갈량을 신비주의적인 술사, 군사전략가의 이미지로 재창조해낸 것은 바로 나관중의 필력에 의한 것이다.
대하드라마에서 나관중의 영향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이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이환경이다. 실제로 이환경의 작품 중 가장 난세를 배경으로 한 '태조 왕건'은 곳곳에서 나관중의 삼국지에 대한 경배의 오마주를 넘어서 장면 자체를 그대로 패러디하거나, 캐릭터의 성격을 그대로 빌려다가 후삼국 시대의 인물들로 재창조해내기도 한다.
삼국지에서 인용된 동남풍과, 하후돈의 눈알 씹어먹기같은 장면의 재현은 애교수준이다.
인의의 군주 왕건은 유비의 모습과 닮아있고, 초기의 궁예가 보여준 카리스마와 개혁적 성향은 조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적진에 잡혀와서 상대의 왕을 비웃으며 불길속으로 걸어가는 수달이나, 주군을 살리고 난군속에서 장렬히 전사한 신숭겸의 모습에서는 관우의 캐릭터가 스쳐지나가곤 한다. 극중의 책사들로 나오는 최응, 최승우, 태평 등의 캐릭터는 역사에서는 그들이 군사전문가였는지에 대한 분명한 기록이 없음에도 삼국지에서 흔히 접해왔던 제갈량과 사마의 등 모사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저자가 나관중과 삼국지에 대단히 매료된 인물임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들이다.
이환경은 역사를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역사'라는 부담보다 드라마라는 배경과 작가로서의 해석이라는 가치관을 중요시 한다. 오히려 사료와 문헌에 의존한 '역사가적 사고'는 오히려 해석의 경직성을 불려올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이점은 크게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인물들과 사건들에 있어서 역사학계는 사실 상당히 보수적이다. 전문가로서의 깊이는 과거러부터 익숙한 패턴과 공식을 불변의 가치로 인식하게 하고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사고에 제동을 거는 독소가 되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이런 외부적인(혹은 아마추어적인) 시각이 대중에게 열린 사고를 제시하기도 한다. 승자의 기록으로만 왜곡되기 쉬운 역사에서 패자라고 할수 있는 촉한, 후백제의 모습을 부각시켰던 것, 유비,궁예, 견훤 등이 가지고 있는 시대적 의미를 재조명해내는 작업은 역사를 보다 다양한 시각에서 읽어낼수 있는 안목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그러나 단순히 이런 재해석을 옳다 나쁘다 하는 가치평가를 떠나 이런 재해석은 높은 대중적 인지도에 따라 역사적 진실마저도 변형시킬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대표적인 예중의 하나가 오늘까지도 중국 역사상 보기드문 개혁적 군주였던 조조의 모습이 일반 대중에서 간웅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절대다수의 대중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오류를 진실이라고 주장하면, 그것은 그대로 새로운 진실이 되어버린다. 하나의 소설에 잠복되어있는 적지않은 이런 오류들이 공론화된 사료보다 더 진실처럼 일반대중에게 각인되어있다는 것들은 단순한 역사적 재해석의 차원을 넘어 '문학과 문인(역사가,작가)들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버리고 마는' 심각한 현실왜곡을 만들어낼수도 있다는 점에서 책임감을 가져야할 부분이다.
3. 국가 운영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 역할 모델의 수정
삼국지의 리더쉽과 국가별 정책노선은 집단마다 판이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대다수는 전쟁이면의 참상보다는 전쟁의 호쾌함과 전략의 화려함에 압도당하여 정복주의자들을 영웅으로 인식하기에 바쁘다.
난세를 살아가는 방법에 있어서 정복과 확장못지않게 중요한 가치는 수성과 내정에 있다. 강대국에 둘러싼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과 현대사회의 국제관계를 고려할 때, 고대 사회의 외교 전술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런 전제하에서 주목받아야할 집단은 오히려 조조나 유비보다는 손권 집단의 오나라이다.
손권과 오나라 집단은 흔히 수성에만 집착하고 연의의 주인공인 조조,유비집단사이에서 잔머리나 굴리는 얍삽한 자들로 평가되기 일쑤다. 그러나 현실주의를 토대로 손권집단의 활약상을 살펴보면, 이들이 얼마나 당시 합리적인 정책노선을 보여주고 있었는지 알수 있다.
손권 집단은 강남의 토착 호족 세력의 연합 정권으로서 그 지역에서 오랜기간 기반을 다져왔다. 이들이 손가의 무력 제패와 외교 연대로 하나로 묶인 이래, 전란기에서 백년가까운 기간 평화롭게 유지될수 있었던 것은 이 정권의 뛰어남을 반증하는 것이다.
오나라 정권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대상인과 지주들이 적지 않았고, 이들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뛰어난 경제전문가들이었다. 강남 지역은 당시의 문화중심권이던 중원에 비하면, 모든 면에서 한참 열세인 입장이었다. 이것이 한말에 오나라 정권이 들어서면서 강남의 독자적인 경제력이 점차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후에 중국 역사에서 강남의 경제력이 화북의 경제력을 압도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오나라 정권에서 그 시초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손권 정권은 강남 일대를 통합한 이후에 전란의 와중에서도 무리한 대외전쟁을 자제하고, 내정와 외교에 기초한 국정 운영을 펼쳤다. 삼국지연의의 전쟁놀이에 익숙한 분들께는 극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짓일지 몰라도, 당시, 난세를 살던 민중들에게 지도층이 전란의 참상을 안겨주는 것을 최소화하였다는 점만으로도 높이 평가받을 가치가 있다. 오히려, 제갈량과 강유가 정치적인 명분론으로 무리한 북벌을 감행한 것이 궁극적으로 민중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국가까지 망하게 한 근본 원인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손권 정권은 전쟁에서도 전면전보다 첩보와 외교를 바탕으로 한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손권 정권시대에 벌어졌던 대다수의 전투는 이릉 전투나 적벽 전투같이 수비적인 입장이 대부분이다. 거의 유일한 기업확장이라할수 있는 형주 공략도 위와 촉의 전투가운데서 무혈점령한,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략의 극치라고 평가할수 있을 것이다.
손권 정권은 시종일관 위와 촉이라는 두 강국 사이에서 신중한 중립외교를 펼쳤다. 철저하게 국익과 현실을 우선가치로 하여 어제의 적과도 손을 잡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으나, 피하지 못할 경우에는 과감하게 응전했다. 약소국가로서 채찍과 당근을 적절하게 사용한 바람직한 예라고 할 것이다. 유럽의 역사로 치면, 영국의 노선과 비슷하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외교 노선을 잘못 정해서 낭패를 본 대표적인 예는 바로 정묘.병자 두 호란이다. 당시에 우리나라는 국제정세에 어두웠고, 우리의 역량을 명확하게 파악하지도 못했다. 그 결과 명나라에 대한 명분론에 집착하다가 청의 기습공격을 받았고, 임금은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수치를 당했다. 왜란때 지원해준 명나라에 대한 의리? 뜻은 물론 좋다. 그러나 힘이 없는 상황에서 자존심만 내세우는 것처럼 미련한 것은 없다. 더구나 무슨 깡패 집단같은 개인적 의리의 차원도 아니고 수많은 백성과 국가의 흥망이 달린 문제였다. 현실을 살피지도 않고 무모한 원정으로 참패한 유비가 바람직한 반례가 되지 않는가?
오나라가 붕괴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단결력의 쇠퇴였기 때문이라는 점을 기억해야한다. 국력의 차이? 물론 그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촉이 멸망한 이후에도 오나라 정권이 20년가량이나 유지될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오나라는 멸망 당시 군주 손호의 실정과 지도층의 내분이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분열이 없었다면 진의 정권이 무력만으로는 결코 오나라를 통합할수 없었을 것이다.
4. 삼국지 인물들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
삼국지에서 흔히 '배신의 전형'이라면 누구를 떠올리는가? 상식선으로 알고있는 사람이라면 여포의 이름이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살펴보면, 물리적인 횟수로나 그 질적인 면에서나 가장 지조가 없었던 인물은 바로 유비다. 인의의 군주로 포장되어 있고, 수많은 실패들도 나관중에 의하여 끊임없이 면죄부를 받지만, 결코 회복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배신의 연속이다.
여포가 배신한 사람은 기껏해야 정원, 동탁, 그리고 유비(서주 탈취)등 겨우(?) 3명 뿐이다.원술(결혼약속 취소)도 있지만 그는 사소하니 빼놓자. 그러나 유비를 보라. 그가 거쳐간 인물들은 공손찬-도겸-여포-조조-원소-유표-손권-유장 등 무려 확실한 것만 8명이다. 연의에서는 그를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놓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고, 그의 배신은 그가 결코 '남의 휘하에 들 정도로 작은' 인물이 아님을 강조함으로 미화된다.
처음에는 공손찬 휘하의 막장이었고 그의 후원으로 성장했으나 끝내 그가 멸망할 때까지 돌아보지 않았고, 서주에는 도겸으로부터 태수의 인수를 물려받았다고 되었지만, 여러 정황상 유비집단이 도겸 사후에 서주를 강제로 탈취하였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그는 도겸을 구원하러 왔다고 했지만, 냉정한 현실지도자로서 아무런 이득도 없이 열세인 도겸을 구원하러올 까닭이 없고, 조조가 물러난 이후에도 유비는 돌아가지 않고 서주에 머무른 것도 명분이 없는 일이다. 그리고 도겸에게는 후계자가 될 아들이 분명히 있었다.
여포와 조조의 경우에는 좀 가혹하다 싶지만, 일단 여포와의 관계는 '이문열 삼국지'에서도 언급하였듯 서로 의와 불의를 주고받은 것이 비슷하였다. 여포가 서주를 탈취한 죄가 있으나, 원술과의 싸움에서 유비를 구원하였고, 전투 중에 유비의 가족과 측근을 잡았을 때도 한 사람도 해하지 않고 무사히 돌봐주었다. 이에 비하여 유비는 서주를 맡고 있을 때 여포를 받아들인 것은 그를 자기 밑에서 이용해보겠다는 전략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조조와 같이 여포를 멸망시키고, 조조가 그 주도권을 잡게되자, 여포가 그의 날개가 될 것이 두려워 참형시키도록 부추기고 만다.
조조는 유비가 여포에 쫓겨 곤궁할 때, 구원해 주었고, 이후에도 파격적인 호의로 유비를 지원했다. 유비가 조조를 배신한 것은 한 왕실의 부흥이라는 정책적인 노선이 조조와 대치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유비의 행보를 살펴보면, 그 역시 조조와 다름없는 정치적 야심으로 맞선 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원소와 유표. 원소의 경우에는 사촌동생인 원술을 멸망시킨 적이자, 조조에 쫓겨온 빈털터리임에도 객장으로 받아들여 예우해줬음에도 조조와의 싸움만을 부추긴 뒤에 결정적인 고비에서 내뺐다. 유표의 경우는 처음에는 객장으로 사냥개노릇을 해주는 듯 하였으나 사후에 유표의 아들 유기를 이용하여 형주를 점령하고 만다. 유기가 죽은 것이 유비가 조조에게서 형주를 탈환한지 얼마안되서라는 것도 음모론을 부추기기 알맞다.
손권은 유비가 절체절명의 코너에 몰려있을 때, 대신 조조와 싸워주었고, 실질적으로 유비는 아무 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유비는 형주를 빼앗고 서천을 점령한 이후에도 반환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오와의 분열과 유,관,장 삼형제의 죽음은 모두 그들 집단의 신용불량이 자초한 일인 것이다. 유장 역시 도겸이나 유표처럼 구원군을 가장하고 쳐들어가서는 유장을 몰아내고 그 땅을 기반으로 촉을 세우고 마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그는 대인관계에서 신용에 문제가 많았고, 도덕률을 내세우면서도 말을 자주 바꾸었다.
유비가 유일하게 의리를 지켰다고 할만한 인물은 바로 관우이다. 평생을 헌신해온 관우의 죽음앞에 유비는 오나라의 동맹을 포기하고, 대규모 원정을 기획한다. 그 바탕에는 물론 순수한 복수전이라기 보다는 서천,한중에서의 잇달은 군사적 성공에 따른 자만감과 오나라를 병합해보겠다는 야욕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관우를 죽게만든 근본적인 원인은 적합하지 않은 지역에 관우를 방치한 자신의 무관심과 제갈량의 방심이 빚어낸 결과였다. 더구나 항상 변화무쌍한 처세와 배신으로 60평생을 유지해왓던 유비가 명분상이나마 의리를 지켰던 유일한 전투에서 패망하고, 자신의 죽음까지 이어졌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한다는 뜻이었을까?
난세에서 생존을 위해서는 선악의 가치판단을 잠시 유보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흔히 라이벌로 그려지는 조조의 처세가 악행이라 할지라도 항상 분명한 원칙과 소신, 그리고 집단을 리드할 만한 뚜렷한 가치관을 보여주고 있는데 반하여, 유비의 처세는 임협적 의리와 사적이익에 따른 이합집산이라는 정치집단의 가장 부정적인 모습이 두드러져보인다.
현대의 정치가(주로 국회의원들)에게서 찾아볼수 있는 말바꾸기, 가부가 불분명한 애매모호한 언변, 눈물 등 감성적인 액션, 정치결단을 명분으로 수시로 편을 바꾸는 철새근성... 등등. 난세에 잡초처럼 살아온 두 지도자이지만, 조조는 잔인한 짓을 저지르되 신념에 충실했고 비굴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유비에게는 상승욕구와 정치적 야심에 비례하는 분명한 정책 노선이나 지도자로서의 가치관은 찾아보기 힘들다. 사람을 끌어모으는 매력이나, 난세를 극복해낸 처세가 개인적 강점은 될수 있을지 몰라도 국가 지도자로서의 자격으로는 한없이 부족해보인다. 유비가 한국의 현대에 태어났더라면, 아마 3선 국회의원이나 자민련 총재쯤 되었을까..?
반면, 삼국지에는 뛰어난 재능에도 오히려 주변인으로 그려지거나 평가절하된 인물들이 많다. 조조는 최근 어느 정도 복권되고 있는 분위기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다. 대표적인 것이 연의에서 제갈량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무능한 장수의 표본처럼 그려지고 있는 주유다.
그는 손씨 정권의 창업 초기에 강남을 평정하는 전투에서 손책과 앞장 서서 여러 차레 공을 세웠으며, 손책 사후에는 기반이 취약한 손권에게 든든한 군사적 후원자가 되어주어서 오나라가 성립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적벽에서는 대도독으로 조조의 대군을 맞이하여 격파하였다.
주유는 야전사령관의 재능과 대국을 파악할수 있는 전략참모의 재능에서 모두 최고였다
그는 드물게 해군과 육군을 모두 지휘할수 있는 사령관이었으며, 나아가서 정벌함과 물러나서 수비하는 양면에서 모두 업적을 이루었던 명장이었다. 손책 사후에 군사의 최고책임자로서 딴 마음을 품을수도 있었음에도 나이어린 손권을 보좌하고 묵묵히 2인자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나, 유비와의 외교노선을 둘러싸고 자신과 분명한 정치적 견해차이를 보이던 노숙을 탓하지않고 자신의 후계자로까지 지명한 점 등은 그가 신하로서 사심이 없었으며 인재를 보는 눈이 공정하였음을 시사한다.
연의에서 보여지는 제갈량에 대한 편집증적인 경계는 다른 시선으로 보면 외교적 실리를 노리려는 제갈량의 계획을 눈치챈 선견지명이자, 오나라의 최고전략가로서 당연한 책무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제갈량에 의하여 이루어진 한시적 유비.손권 동맹은 조조의 패퇴이후에는 더 이상 존재할 의의가 없었다. 주유의 입장에서는 유비는 오나라의 세력 팽창을 가로막는 어쩌면, 조조보다도 더 근본적인 적이었던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이 주유 사후에 그가 경계하던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그는 전술가이자 야전사령관으로서도 최고의 수준에 있었지만, 더욱 돋보이는 것은 전략가로서 정세의 변화를 대국적으로 파악할줄 알았고, 실천적 행동가였다는 점이다.
실제로 오나라 지도층의 시야는 적벽 전투 이후 형주라는 지역적 이해에 국한되어 있었던데 반하여, 주유는 적벽 전투때부터 조조의 패배 이후 달라질 정세와 전략을 대비하고 있었고, 당시 지식인 사이에서 대두되던 천하삼분지계의 열쇠가 서천에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삼국의 전략가중 가장 먼저 서천정벌에 눈을 돌릴 정도로 높은 전략적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서천의 지역적인 중요성은 북방에 치우쳐있던 조조도 깨닫지 못했고, 유비는 형주에서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연의에서는 주유가 서천정벌을 핑계로 형주를 공략한다는 구상으로 나와있지만, 만일 주유의 서천정벌이 실행이 되었다면, 유비와 형주는 3면에서 고립되는 형국으로서 지역적인 한계와 토착 세력의 반발을 결코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록 실행에 옮겨지지 않아 성패를 가늠할수 없지만, 적어도 오나라 역사상 가장 스케일 큰 계획을 그가 시도하려 했다는 점, 그것이 삼국의 운명을 뒤바꾸어놓을수도 있었다는 점에서도 그가 당대의 전략가들보다 넓은 시야와 실천적인 행동력에서 한수앞선 탁월한 군사전략가였음을 인정하게 만든다.
그럼 여기서 언제나 주유보다 한수위로 그려지고 있는 제갈량의 모습을 살펴보자.
그는 연의에서 그려지는 신비한 술사, 전술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인물이다. 그를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은 뛰어난 외교감각을 지닌 정치가이자, 행정가라는 평일 것이다.
정사와 각종 문헌들을 살펴보면, 연의에서 보여지는 그의 뛰어난 군사적인 재능은 과장된측면이 많다. 그러나 그는 국제정치에서 대국적인 전략과 외교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천하삼분지계는 당시 지자들에게는 어느 정도 보편화된 이론이었으나, 이를 최초로 주도하고 실천한 지식인의 한사람이었다는 점, 아무런 유대관계가 없던 유비와 손권의 첫 동맹을 이끌어낸 것도 그렇고, 유비의 사후 적대관계로 변질된 촉오동맹을 철저하게 실리외교정책으로 재건한 점등은 그의 높은 외교적 수완과 안목을 보여주는 일이라 할 것이다.
행정가로서 제갈량은 법가의 전통을 이어받아 법치주의에 입각한 국가통치를 주도했고, 야전보다는 후방에서 군량의 조달, 각종 보급과 민심 안정에 주력했다. 유비 집단이 제갈량 영입후 자리를 잡은 것은, 눈앞에 보이는 전술적 가치에 연연하기 보다, 장기적인 계획에 의해 움직이는 전략적인 목표를 수립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군사방면에서의 제갈량은 탁월한 전술가라기 보다는 전략가였다. 야전에서 계책을 꾸미는 전술가로서 유비 집단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제갈량보다는 법정과 방통이었다. 연의를 자세히 살펴보아도, 유비 생전에 중요한 전투에서 제갈량을 앞에 기용한 적은 별로 없다. 적벽전투는 주유가 주도했고, 형주점령전은 야전사령관들의 각개격파였다. 서천 정벌은 방통의 계책에 의하여 주도되었고, 한중 전투의 책사는 법정이었다. 제갈량은 대개 후방을 맡아 병참기지를 관할하고 내정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그가 뛰어난 군사전문가였다면, 다른 것은 몰라도 서천 정벌과 오나라 복수전같이 국가의 명운을 건 전투에서 그를 처음부터 2선에 놓아두었을 리가 없다.
제갈량이 군사지휘자로 전면에 나서는 것은 유비 사후의 북벌전에서부터인데, 이 때 그는 무소불위의 최고권력자였다. 그러나 그의 북벌이 성공되지못한 것은, 국력차이도 있겠지만 이런 국력차이에도 불구하고 전면전과 정공법을 고집한 그의 한계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더구나 그는 국력상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임을 알면서도 무리한 전쟁을 지속하여 국력을 쇠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다만, 오랫동안 전쟁을 계속하면서도 촉이 공세로 일관할수 있었다는 것은 촉의 군사력이 결코 약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반증인데, 이것은 과연 제갈량의 군사적 재능과 이어서 설명할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는 일단 신중한 사람이었기에 무리한 전투를 피했고 덕분에 져도 크게지지는 않는 결과를 가져왔으나 반대로 결정적인 승리도 얻지못하였다. 더구나 그의 군사적 성공이 전반기에는 관우,장비, 후반기에는 위연,강유라는 몇몇 뛰어난 야전사령관의 활약에 의지한 바 컸다는 것은 그의 군사적 재능에 대하여 논란이 되는 대목이다.
그는 정치적인 야심으로 인하여 유비집단 내부에 분열을 일으킨 책임도 있다. 대개 그는 공정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기록을 살펴보면 그가 대단히 독선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거나 정치적으로 이견을 보이는 자들을 용납하지 못하였다.유비집단 가세 초기에 관우와 2인자 자리를 놓고 대립했고, 서천 정벌 이후에도 외교적 능력이 떨어지는 관우를 위,오와 동시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형주에 방치하고 가까이 불러들이지 않은 점, 이유야 어찌됐건 관우가 죽음에 이를때까지 손도 쓰지 못한 점등이다.
그가 대립하는 것은 관우만이 아니다. 유비가 죽고 사실상 최고권력자가 된 이후에는 무리한 북벌전을 감행하여 국력을 소모시켰고, 자신의 말에 충성하지 않는 야전사령관들을 차별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위연, 마속, 강유이다. 군사전문가인 위연의 말을 받아들이지않고 자신의 정공법만을 주장하여 전쟁의 향방을 어렵게 끌고 갔으며, 마속 등 애송이를 잘못 기용하여 돌이킬수 없는 패전을 안았다. 촉 진영의 핵심장수중에서는 가장 나중에 가세한 강유를 편애하여 다른 장수보다 특별 대우를 했다. 그 결과 제갈량 사후 강유는 병권을 장악했지만, 위연은 비참하게 최후를 맞고 말았다. 제갈량이 직접 죽인 것은 아니지만, 그가 제갈량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면, 그렇게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의 사후 권력을 승계했던 이들은 장완, 비위같은 모두 제갈량의 예스맨들이었고, 이엄과 위연같이 제갈량의 노선에 반대입장을 표명한 이들은 대개 개국공신들임에도 모두 숙청되거나 좋은 결말을 맺지 못하였다. 연의에서는 제갈량과 대립하는 모든 이들을 평가절하하고 왜곡하기에 바쁘기에 이런 점들이 분명히 조명되지 못하였다.
종합해보자면, 그는 국가의 재상이자 행정관료, 외교전문가로서 발군의 감각을 지녔으나, 군사전문가로는 과감성과 결단력이 떨어진다고 평가할수 있다. 물론 신중한 군사운용으로 실패를 최소한 점은 평가받을만 하지만, 그것은 공수의 입장에 따라 차이를 두어야한다.
정치가로서의 제갈량은, 법치주의에 입각하여 상벌이 분명하고, 합리적인 원칙주의를 표방하였으나, 인사권의 형평성에 있어서는 허점을 노출했고, 사람을 보는 안목에 문제가 많았다. 자신보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나 고분고분하지 못한 이들을 정략적으로 견제하는 정치가의 그늘진 면도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다. 군주인 유비와 비교하자면, 합리적이고 현실적이나, 반대로 사람을 끌어당기고 같이 어우러지는 매력이나 포용력에 있어서는 결점이 큰 인물이었다. 특히 노년에 이르러서는 젊은날의 합리적이던 모습까지 잃어버리고 독선과 아집으로 무모한 원정을 기획함으로서 자신의 죽음과 국가의 쇠락까지 재촉하는 결과를 낳게되고 만다.
조금 삐딱하게 살펴보자면, 무능한 유선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충성심도 유비에 의한 의리라는 미담으로만 해석할 것은 아닐수도 있다. 제갈량은 이미 황제만 아니었지, 유비 사후에 실권을 완전 장악하고 있었고, 위라는 공적을 상대하는데 있어서 열세였던 자신의 집단이 단합하게 만들 수 있고, 심리적인 우위에 서게 할수 있는 요소는 바로 명분론이었다. 만일 자신이 유씨 왕조를 타도하고, 황제에 오른다면 그것은 곧바로 한실이라는 구질서의 완전 해체와 함께 위를 타도해야할 명분조차 사라져버리고 만다. 지금까지 쌓아온 국가정책의 목표점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촉 집단은 그저 단순한 하나의 지방군벌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더구나 제갈량 사후 직전까지, 촉 집단은 제갈량 일파가 권력을 장악해나감과 동시에 유비를 따르던 개국공신들간에 내연의 힘겨루기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제갈량의 모반은 가뜩이나 국력이 떨어지는 촉 진영에 심각한 내분과 함께 이런 공신 세력의 이탈을 자초할 위험성도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선제인 유비를 따라 고난의 시기를 거쳐온 자신의 인생에 대한 정체성까지 부정하는 결과가 될수도 있었던 것이다.
결국 최고지도자로는 2% 부족하지만 전형적인 2인자, 포용력있는 군주의 아래에서 합리적인 총리 역할을 능히 수행해낼만한 인물이라 할수 있겟다. 이미지로만 따지자면, 이회창같은 사람이라고 할까?(그래도 제갈량의 후손들은 죽어서라도 병역의무는 채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