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스포츠에서 어떤 팀이 수 년간 좋은 성적을 올렸지만 선수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느 해에 갑자기 성적이 나빠지면 ‘새로운 피 수혈이 필요하다’와 같은 기사가 나온다. 아무리 성적이 좋더라도 더 좋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말이다. 왜 하필 피에 비교하는 전통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5월 2일자 원고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새로운 피를 수혈하여 오래 살아보겠다는 인간의 욕망은 수혈법이나 혈액형에 대한 지식이 일천했던 15세기에 이미 있었던 일이다.
20세기 시작과 더불어 피에도 종류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혈액형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어 혈액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피의 종류에 따라 사람의 몸에서 일어나는 면역반응이 달라지므로 피에 종류가 있다는 것은 피를 이용한 의학적 시술에 많은 어려움을 낳고 있다. 따라서 인류의 건강과 의학발전을 위해서는 혈액형이 서로 다른 경우를 감안하여 의학적 처치를 해야만 한다.
내가 알고 있던 혈액형과 내가 검사한 혈액형이 다르다?
아기가 태어나면 혈액형을 검사한다. 가장 큰 이유는 아기의 혈액형을 미리 알아놓음으로써 응급 상황시 수혈과 같은 치료법을 사용하기 위해서지만 아빠와 엄마의 혈액형과 비교함으로써 혹시나 신생아실에서 아기가 바뀔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한 것도 한 이유다. 필자의 고등학교 시절, 생물 시간에 각자 자신의 혈액형을 알아보는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이 때 친구 한 명이 십수 년간 자신의 혈액형이 O형으로 알고 살아왔지만 직접 피 한 방울을 뽑아내어 실험한 결과 B형 항원에 대한 응집반응이 일어나 B형으로 판명된 경험이 있다. 아무 조작을 하지 않았는데 혈액형이 바뀌는 경우는 없으니 다른 검사자의 혈액형이 원래 알고 있던 것과 같다면 이런 경우에는 B형이 옳다. 과거의 혈액형 검사시 무슨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혈액형 검사 결과. 좌측이 RhO+형이며, 우측이 RhB-형의 결과이다.
혈액형은 피 속의 세포 표면에서 항원역할을 하는 물질이 무엇인가에 따라 피를 구분하는 방법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혈액형은 A 또는 B 항원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다. 두 가지를 모두 가진 경우는 AB형, 모두 가지지 않은 경우는 O형이고, 한 개만 가진 경우는 A형 또는 B형으로 구분한다. 외부에서 피를 주입했을 때 사람의 면역기능에 의해 응집반응이 일어나면 피 속에 덩어리가 생겨 피가 온몸을 돌아다니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AB형의 경우 아무 피나 받아들일 수 있지만 O형은 O형 외에 다른 피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멘델의 유전법칙에 적용시키면 A형과 B형이 각각 동등한 우성 역할을 하고, O형이 열성인 방식으로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유전되는 것이다.
혈액형을 발견한 란트슈타이너
ABO식 혈액형을 발견한 사람은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 1868~1943)이다. 오스트리아에서 출생하여 빈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그는 20세기 혈액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1900년에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서 채취한 혈액을 혼합하던 중 혈구가 서로 엉켜서 작은 덩어리가 생기는 것을 처음 발견하였다. 이 현상에 집중하기 시작한 그는 1901년에 혈액이 응집되는 성질을 이용하여 사람의 혈액형을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이듬해에 데카스텔로와 스툴리가 하나의 혈액형을 더 제시함으로써 4가지 종류의 사람 혈액형이 확립되었다. 1910년에는 등게론과 히르즈펠트가 혈액형이 유전된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 오늘날 ABO식 혈액형에 대한 기초지식을 완성한 유래가 된다. 이때부터 혈액형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혈액형과 혈액의 특성 규명, 수혈요법의 발전, 친자 확인을 위한 응용 등 여러 분야에 널리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혈액형 발견의 토대를 닦은 란트슈타이너는 1940년에 ABO식 외에 다른 혈액형 관련인자인 Rh 인자를 발견하였고, 혈액에서 발생하는 면역 반응 기전과 면역을 담당하는 인자들의 화학적 연구를 수행하기도 했다. 또한 소아마비를 일으키는 폴리오바이러스를 발견했고, 미생물 연구에 암시야를 이용하여 매독균을 증명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팔방미인이었다.
ABO식 외에도 다양한 혈액형 구분이 있다
혈액형을 구분하는 방법 중 ABO식 다음으로 유명한 것은 Rh식 혈액형이다. 서양인들은 전 인구의 약 15%가 Rh-형 피를 지니지만 동양인들은 약 0.5%만이 Rh-형 피를 지닌다. 문제는 Rh-형인 사람이 피가 부족해질 경우, Rh-형 피를 수혈해야 하는 것이다. 오래 전에는 응급상황에 빠진 한국인이 Rh-형 혈액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주한 외국인이 혈액을 공여하여 응급환자을 구하는 미담이 전해지곤 했다.
이외에도 혈액에서 일어나는 응집반응을 기준으로 혈액형을 구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혈액 내 세포나 내용물 중에는 항원 역할을 하여 면역반응을 일으키는 물질이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ABO식만큼 흔히 쓰이는 것은 아니지만 MN식 또는 MNSs식 혈액형, P식 혈액형, 루테란식, 켈식, 더피식, 키드식, 디에고식 등 다양한 혈액형 구분방법이 알려져 있다.
의학 발전에 따라 인체 내 장기 중 하나가 못쓰게 되어 죽음을 눈앞에 둔 경우에 장기이식수술을 통해 사용 가능한 장기를 받으면 생존 가능한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장기이식시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인자는 거부반응이다. 공여해도 별 문제가 없는 혈액형을 보유한 공여자로부터 이식수술을 해도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것은 조직적합성 항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항원(Human Leucocyte Antigen, HLA)은 백혈구, 혈소판, 림프구에 공통으로 존재한다. 이것이 ABO식이나 Rh식처럼 적혈구 표면에 존재하는 항원이 혈액형을 결정하는 것과 대비되는 내용이다.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 1868~1943) ABO식과 Rh식 혈액형을 발견했다. 1930년 노벨의학상을 받았다.
혈액형에 대한 진실과 거짓
“프로야구 선수들을 조사해 보니 혈액형이 A형인 경우가 가장 많으니 프로야구 선수가 되려면 A형이 유리하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실제로 매스컴에 보도된 바 있다. 이 말에 신빙성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해서 통계학의 기본을 모르는 전혀 얼토당토 않은 말이다. 한국인에게서 가장 많은 혈액형은 A형으로 전체의 34~38%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A형이 야구선수가 되기에 유리한 게 아니라 A형인 사람이 많아서 야구선수 중에도 A형이 많을 뿐이다. 이 말이 옳다면 다른 운동 종목에서도 이런 예가 얼마든지 있을 것이고, 공부 잘하는 사람 중에도 A형이 많으니 한국인들에 대한 거의 모든 일은 A형이 유리하다고 해야 한다. 서양인의 경우 O형이 40~45%로 가장 많으니 서양 야구선수 중에 A형이 더 많다면 기사거리가 되겠지만 한국인에게서 ‘A형 야구선수가 많으니 A형이 유리하다’는 이야기는 ‘남자로 태어나면 (여자보다) 장가가기에 유리하다’는 말과 전혀 차이가 없다. 한때 혈액형이 성격을 결정한다는 내용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별다른 과학적 근거는 없으니 재미 이상의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혈액형도 바뀔 수 있다
수 년 전만 해도 혈액형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혈액형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연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피 속에 들어 있으면서 혈액형을 결정하는 항원을 제거할 경우 아무 피나 수혈할 수 있으므로 결과적으로 혈액형이 바뀐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뜻이다.
온몸을 돌아다니는 피 속에는 항원이 어느 곳에든 존재할 텐데 이를 모두 제거하는 일이 가능할까? 항원 제거에 의해 혈액형이 바뀐다는 이론은 1982년에 처음 제시되었지만 실행이 어려워 실제로 혈액형이 뒤바뀌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7년에 프랑스와 덴마크의 학자들과 미국의 생명과학업제 자임퀘스트(ZymeQuest)가 공동연구를 통해 세균과 진균에서 발견되는 효소중에 A형과 B형 혈액으로부터 항원 제거 기능을 지닌 효소를 찾아냈다고 발표를 했다. 이 연구진은 ‘Elizathethkingia meningosepticum’이라는 세균에서 A항원을 제거하는 효소를, ‘Bacteroides fragilis’라는 세균에서 B항원을 제거하는 효소를 발견함으로써 이를 이용하면 혈액형을 O형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얻은 것이다. 즉, 혈액형을 바꾸는 기술이 개발된 셈이다. 아무리 과학적으로 검증되었다 하더라도 ‘진리’란 그 시대의 진리일 뿐이며, 세상이 바뀌면 진리가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는 것이라는 점을 되새겨 준다.
글 예병일 /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교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는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에서 교육과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저서로는 [내 몸 안의 과학] [의학사의 숨은 이야기] [현대 의학, 그 위대한 도전의 역사] [의사를 꿈꾸는 어린이를 위한 놀라운 의학사] 등이 있다.[내 몸 안의 과학]은 교과부에서 2008년 상반기 우수과학도서로 선정되었다.
프로스포츠에서 어떤 팀이 수 년간 좋은 성적을 올렸지만 선수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느 해에 갑자기 성적이 나빠지면 ‘새로운 피 수혈이 필요하다’와 같은 기사가 나온다. 아무리 성적이 좋더라도 더 좋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말이다. 왜 하필 피에 비교하는 전통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으나, 5월 2일자 원고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새로운 피를 수혈하여 오래 살아보겠다는 인간의 욕망은 수혈법이나 혈액형에 대한 지식이 일천했던 15세기에 이미 있었던 일이다.
20세기 시작과 더불어 피에도 종류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혈액형에 대한 개념이 정립되어 혈액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피의 종류에 따라 사람의 몸에서 일어나는 면역반응이 달라지므로 피에 종류가 있다는 것은 피를 이용한 의학적 시술에 많은 어려움을 낳고 있다. 따라서 인류의 건강과 의학발전을 위해서는 혈액형이 서로 다른 경우를 감안하여 의학적 처치를 해야만 한다.
내가 알고 있던 혈액형과 내가 검사한 혈액형이 다르다?
아기가 태어나면 혈액형을 검사한다. 가장 큰 이유는 아기의 혈액형을 미리 알아놓음으로써 응급 상황시 수혈과 같은 치료법을 사용하기 위해서지만 아빠와 엄마의 혈액형과 비교함으로써 혹시나 신생아실에서 아기가 바뀔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한 것도 한 이유다. 필자의 고등학교 시절, 생물 시간에 각자 자신의 혈액형을 알아보는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이 때 친구 한 명이 십수 년간 자신의 혈액형이 O형으로 알고 살아왔지만 직접 피 한 방울을 뽑아내어 실험한 결과 B형 항원에 대한 응집반응이 일어나 B형으로 판명된 경험이 있다. 아무 조작을 하지 않았는데 혈액형이 바뀌는 경우는 없으니 다른 검사자의 혈액형이 원래 알고 있던 것과 같다면 이런 경우에는 B형이 옳다. 과거의 혈액형 검사시 무슨 착오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혈액형 검사 결과. 좌측이 RhO+형이며, 우측이 RhB-형의 결과이다.
혈액형은 피 속의 세포 표면에서 항원역할을 하는 물질이 무엇인가에 따라 피를 구분하는 방법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혈액형은 A 또는 B 항원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구분하는 것이다. 두 가지를 모두 가진 경우는 AB형, 모두 가지지 않은 경우는 O형이고, 한 개만 가진 경우는 A형 또는 B형으로 구분한다. 외부에서 피를 주입했을 때 사람의 면역기능에 의해 응집반응이 일어나면 피 속에 덩어리가 생겨 피가 온몸을 돌아다니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AB형의 경우 아무 피나 받아들일 수 있지만 O형은 O형 외에 다른 피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멘델의 유전법칙에 적용시키면 A형과 B형이 각각 동등한 우성 역할을 하고, O형이 열성인 방식으로 부모로부터 자식에게 유전되는 것이다.
혈액형을 발견한 란트슈타이너
ABO식 혈액형을 발견한 사람은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 1868~1943)이다. 오스트리아에서 출생하여 빈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그는 20세기 혈액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1900년에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서 채취한 혈액을 혼합하던 중 혈구가 서로 엉켜서 작은 덩어리가 생기는 것을 처음 발견하였다. 이 현상에 집중하기 시작한 그는 1901년에 혈액이 응집되는 성질을 이용하여 사람의 혈액형을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이듬해에 데카스텔로와 스툴리가 하나의 혈액형을 더 제시함으로써 4가지 종류의 사람 혈액형이 확립되었다. 1910년에는 등게론과 히르즈펠트가 혈액형이 유전된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이 오늘날 ABO식 혈액형에 대한 기초지식을 완성한 유래가 된다. 이때부터 혈액형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혈액형과 혈액의 특성 규명, 수혈요법의 발전, 친자 확인을 위한 응용 등 여러 분야에 널리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혈액형 발견의 토대를 닦은 란트슈타이너는 1940년에 ABO식 외에 다른 혈액형 관련인자인 Rh 인자를 발견하였고, 혈액에서 발생하는 면역 반응 기전과 면역을 담당하는 인자들의 화학적 연구를 수행하기도 했다. 또한 소아마비를 일으키는 폴리오바이러스를 발견했고, 미생물 연구에 암시야를 이용하여 매독균을 증명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팔방미인이었다.
ABO식 외에도 다양한 혈액형 구분이 있다
혈액형을 구분하는 방법 중 ABO식 다음으로 유명한 것은 Rh식 혈액형이다. 서양인들은 전 인구의 약 15%가 Rh-형 피를 지니지만 동양인들은 약 0.5%만이 Rh-형 피를 지닌다. 문제는 Rh-형인 사람이 피가 부족해질 경우, Rh-형 피를 수혈해야 하는 것이다. 오래 전에는 응급상황에 빠진 한국인이 Rh-형 혈액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주한 외국인이 혈액을 공여하여 응급환자을 구하는 미담이 전해지곤 했다.
이외에도 혈액에서 일어나는 응집반응을 기준으로 혈액형을 구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혈액 내 세포나 내용물 중에는 항원 역할을 하여 면역반응을 일으키는 물질이 많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ABO식만큼 흔히 쓰이는 것은 아니지만 MN식 또는 MNSs식 혈액형, P식 혈액형, 루테란식, 켈식, 더피식, 키드식, 디에고식 등 다양한 혈액형 구분방법이 알려져 있다.
의학 발전에 따라 인체 내 장기 중 하나가 못쓰게 되어 죽음을 눈앞에 둔 경우에 장기이식수술을 통해 사용 가능한 장기를 받으면 생존 가능한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장기이식시 성공여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인자는 거부반응이다. 공여해도 별 문제가 없는 혈액형을 보유한 공여자로부터 이식수술을 해도 거부반응이 일어나는 것은 조직적합성 항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항원(Human Leucocyte Antigen, HLA)은 백혈구, 혈소판, 림프구에 공통으로 존재한다. 이것이 ABO식이나 Rh식처럼 적혈구 표면에 존재하는 항원이 혈액형을 결정하는 것과 대비되는 내용이다.
란트슈타이너(Karl Landsteiner, 1868~1943) ABO식과 Rh식 혈액형을 발견했다. 1930년 노벨의학상을 받았다.
혈액형에 대한 진실과 거짓
“프로야구 선수들을 조사해 보니 혈액형이 A형인 경우가 가장 많으니 프로야구 선수가 되려면 A형이 유리하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실제로 매스컴에 보도된 바 있다. 이 말에 신빙성이 있을까? 결론부터 말해서 통계학의 기본을 모르는 전혀 얼토당토 않은 말이다. 한국인에게서 가장 많은 혈액형은 A형으로 전체의 34~38%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A형이 야구선수가 되기에 유리한 게 아니라 A형인 사람이 많아서 야구선수 중에도 A형이 많을 뿐이다. 이 말이 옳다면 다른 운동 종목에서도 이런 예가 얼마든지 있을 것이고, 공부 잘하는 사람 중에도 A형이 많으니 한국인들에 대한 거의 모든 일은 A형이 유리하다고 해야 한다. 서양인의 경우 O형이 40~45%로 가장 많으니 서양 야구선수 중에 A형이 더 많다면 기사거리가 되겠지만 한국인에게서 ‘A형 야구선수가 많으니 A형이 유리하다’는 이야기는 ‘남자로 태어나면 (여자보다) 장가가기에 유리하다’는 말과 전혀 차이가 없다. 한때 혈액형이 성격을 결정한다는 내용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별다른 과학적 근거는 없으니 재미 이상의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혈액형도 바뀔 수 있다
수 년 전만 해도 혈액형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혈액형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연적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피 속에 들어 있으면서 혈액형을 결정하는 항원을 제거할 경우 아무 피나 수혈할 수 있으므로 결과적으로 혈액형이 바뀐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뜻이다.
온몸을 돌아다니는 피 속에는 항원이 어느 곳에든 존재할 텐데 이를 모두 제거하는 일이 가능할까? 항원 제거에 의해 혈액형이 바뀐다는 이론은 1982년에 처음 제시되었지만 실행이 어려워 실제로 혈액형이 뒤바뀌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2007년에 프랑스와 덴마크의 학자들과 미국의 생명과학업제 자임퀘스트(ZymeQuest)가 공동연구를 통해 세균과 진균에서 발견되는 효소중에 A형과 B형 혈액으로부터 항원 제거 기능을 지닌 효소를 찾아냈다고 발표를 했다. 이 연구진은 ‘Elizathethkingia meningosepticum’이라는 세균에서 A항원을 제거하는 효소를, ‘Bacteroides fragilis’라는 세균에서 B항원을 제거하는 효소를 발견함으로써 이를 이용하면 혈액형을 O형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얻은 것이다. 즉, 혈액형을 바꾸는 기술이 개발된 셈이다. 아무리 과학적으로 검증되었다 하더라도 ‘진리’란 그 시대의 진리일 뿐이며, 세상이 바뀌면 진리가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는 것이라는 점을 되새겨 준다.
글 예병일 /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교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는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에서 교육과 연구를 담당하고 있다.저서로는 [내 몸 안의 과학] [의학사의 숨은 이야기] [현대 의학, 그 위대한 도전의 역사] [의사를 꿈꾸는 어린이를 위한 놀라운 의학사] 등이 있다.[내 몸 안의 과학]은 교과부에서 2008년 상반기 우수과학도서로 선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