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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2013년 하반기.
이기형
1917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났다. 12세 때 야학을 통해 독립운동에 눈을 뜨고, 함흥고보를 졸업한 뒤 도쿄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지하협동사건, 학병거부사건 등 지하 항일투쟁 혐의로 피검되어 1년여 동안 복역했고, 1945년부터 1947년까지 『동신일보』『중외신보』의 기자로 일했다. 1947년 『민주조선』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지만, 같은 해 정신적 지도자로 모셔온 몽양 여운형 선생이 서거하자 이후 33년간 공적인 사회 활동을 중단했다. 1980년 시인 김규동, 신경림, 이시영 등을 만나 분단 조국에서는 시를 쓰지 않겠다던 생각을 바꿔 작품 활동을 다시 했다. 1980년부터 재야 민주화 통일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89년 시집 『지리산』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적용되어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판결을 받았다. 시집으로 『망향』 『설제』 『지리산』 『꽃섬』 『삼천리통일공화국』 『별꿈』 『산하단심』 『봄은 왜 오지 않는가』 『해연이 날아온다』『절정의 노래』, 저서로 『몽양 여운형』『도산 안창호』『시인의 고향』, 통일 명시 100선을 엮은 『그날의 아름다운 만남』 등이 있다. 2013년 6월 12일 별세했다.
대표작 10편
단풍
여북해야 저리도
피를 토할까
설악도
내장도
새빨갛구나
백두인들
묘항인들
오죽하리
철들 무렵
고향 만산홍을
바람은 귀띔해주더라
‘나라 찾자는 횃불’이라고
생판 어이없이 갈라져
백발이 된 세월이여
나라 팔자
세상에 이럴 수야
모른 척 뜨고 지는
태양은 능청스러워
차라리 빛을 거두라
봄엔 접동의 피울음
가을엔 온 산이 피를 쏟아
(『설제』, 풀빛, 1985)
지리산
―서시
지리산은 바라보아서는 모른다
관광길 눈요기로는 더욱 모른다
저 큰 가슴팍에 온몸을 파묻고 통곡해 보라
호혼(呼魂)의 바다 속 깊숙이 잠겨보라
― 이젠 총알도 바닥났다
소금물을 마시며 일주일을 굶다가 또 총소리에 쫒긴다 산마루를 기어 넘고 골짝을 빠졌다
끝내 육탄을 쏘고 죽고 말았다
― 동상에 두 다리를 톱으로 잘랐다 몽당 허벅다리와 두 팔 네 다리 기기로 쫓겨, 천왕봉까지 쫓겨 끝내 승천하고만 꽃봉오리들을 생각해보라
― 팔도 턱도 떨어져 나간 총상 자리에서 구더기가 꾀고 40도 재귀열환자가 앓음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 그 환자트에 이방인의 총구가 디밀어졌을 때 그들이 부른 마지막 만세소리가 들리는가
― 그들은 무엇을 위해, 왜, 그 빛나는 삶, 값진 젊음을 끝내 천고의 밀림, 만고의 벼랑에 초개처럼 내던졌던가
진실한 삶이란―
민족의 독립이란―
역사의 부름이란―
자, 명상을 떨치고 가자!
현대사 소용돌이의 한복판, 핏자욱 핏자욱
저기 지리산으로
(『지리산』, 아침, 1988)
나는 간다
역마다 백두산표를 안 팔아
나만 미쳤다고 쑥덕인다
과연 누가 미쳤나
흑발이 백발이 되도록
귀향표를 살려는 놈이 미쳤나
기어이 못 팔게 하는 놈이 미쳤나
그럼, 나는 간다
미풍 같은 요통엔 뻔질나게 병원을 드나들어도
조국의 허리통엔 반백 년 동안 줄곧 칼질만 해대는
저놈을 메다꼰지고
걸어서라도 날아서라도
내 고향이 옛날처럼 날 알아보게시리
하얀 머리는 까맣게 물들이고
얼굴 주름은 펴고
아리고 찢어지는 가슴 쓰다듬으며 나는 간다
걸어서라도 날아서라도
(『별꿈』, 살림터, 1996)
함께 아리랑을 부르며
날 건드리지 마
내 여든여섯 쭈구렁 힘줄도 터질 것만 같아
첫사랑이 깨지던 그날도 이렇진 않았어
못 견딜 그리움 매운 분노 모진 슬픔
끝내는 꿈의 설렘
한 핏줄 형제가 바로 저긴데
쉰여덟 해나 지구촌 밖 헤어진 삶이라니
쓸개 창자 다 썩어 문드러진 놈아, 그래도 네가
부끄럼 없이 신사랍시고 고급양복에 넥타일 매고
점잔스레 싸다닌다냐
정치가 어쩌니 경제가 이러니 예술이 어쩌구 저쩌구냐
혹독 세상의 원흉은, 바로
낯선 안방 불청객이다 생사람 잡는 법망이다
썩들 나가라, 단 한마디라도 소리친 적이 있나
당장 없애라, 단 한마디라도 소리친 적이 있나
오늘 우리 땅에 언론인이 있는가 애국자가 있는가
본시 잘났건만 왜 이렇듯 지지리도 못나게 추락했나
긴 피세월 반천반민(反天反民) 교육 탓이다
하루 바삐 위천위민(爲天爲民)으로
상생하고 홍익인간으로 돌아가야 하느니
가치 척도가 뒤바뀐 이 땅 분통이 터져 어지러워
6․15 큰울림 누가 막아 너 나 하나 되는 위대한 꿈이여
뒷산 앞들 오월의 푸르름 가슴 아득히 안고
함께 아리랑을 부르며 백두산 높이 솟았으면
솟았으면
(『봄은 왜 오지 않는가』, 삶이보이는창, 2003)
해연(海燕)이 날아온다
-을사늑약 백 년, 고리키의 「해연」을 보고
한과 눈물로 살거냐
긴긴 세월을 허탕 치고도 못 말려
달구벌 멋은 잦아들고
만경벌 흥은 사위어가고
퍼지는 영어 열풍 어디로 가나
불야성 저 광란하는 나체춤의 의미는 뭐냐
나운규는 아리랑고개를 울고 넘었건만
분단고개를 울고 넘는 사람은 없다
국록 먹는 어른들은 말잔치로 밤을 지새우고
청바지들은 할아버지가 울고 넘은 박달재를
촐랑대며 넘는다
가쓰라․태프트와 을사오적의 후예들은
맥아더 동상을 사수하며 분단선에 쇠말뚝을 박는다
망국의 치욕 을사늑약 백 년에도 정신을 못 차려
고구려 넋은 어디로 갔나
백두산 신단수 큰할아버님이 내려다보신다
선열들의 피맺힌 목소리가 들린다
슬픈 사연 하도 많아 누선도 말랐느니
피 마르는 지겨움 가슴이 빠개진다
임 따라 어라연엘 가랴
임 맞으러 삼지연엘 가랴
지는 해야 빨리 져다오
솟는 해야 퍼뜩 솟아주렴
폭풍우 천 길 만파를 뚫고
바다제비 날아온다
(『해연이 날아온다』, 실천문학사, 2007)
조국 시 사랑
약관의 가슴속 깊은 곳
조국과 시의 큰 꿈을 안고
죽음의 고개를 넘고 넘어
일흔이 되어서야
대망의 민족시인이 되었다
분단이 풀리지 않는 한
늙지도 죽지도 않겠다
통일시만 쓴다
쪼개진 산하는 뒤틀려 구렁텅이서 허덕이고
백발이 된 피세월 눈시울이 뜨겁다
조국이여
시여
사랑이여
늙을 수 없는 벅찬 가승
새벽 첫차는 기적을 울렸다
주체 못하는 힘의 발산
짙은 황혼을 걷어찬다
태산을 향회 회춘(回春)을 거듭하며
준마를 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평화촌 삼천이를 달린다
(『해연이 날아온다』, 실천문학사, 2007)
절정(絶頂)의 노래
너 선 굵은, 여말 조선조 전설의 미모
정감이 흐르는 눈빛, 목소리,
찰찰 감겨드는 먼 곳의 손짓
꿈틀대는 원시림 산줄기
사람과 눈물과 꿈의 파도가 영롱해
오늘 네 시집 두 권을 읽어 치우자
허난설헌 황진이의 인품과 시재가 어른거렸다
내 환희와 감격의 엔돌핀 지수가 이리도 높아
항홀의 바다에 빠졌다
연두색 비단 저고리에 청갑사 치마 차림
신채호의 '고조선기'와 헤겔 맑스의 양서를 끼고
허난설헌과 나란히 걷다가도
양저고리 청바리로 갈아 입고
로자 룩렘부르크와 어깨 겯고
떠도는 유령의 목소리를 다시 들으며
21세기 무지개 화두를 풀어낸다
너 서구 지성의 밀림을 헤쳐 온 화폭을 보노라면
이조 선비댁 규수와 현대지성 헬로인의 타임머신에 걸려
래프팅을 타고 동강 벽계수 골짝을 빠져나간다
너의 번득이는 발언과 거침없는 시어는
꿈의 방망이로 나를 난타했다
눈물의 나라에서 나란히 오름 절정을 치달아
백두 한라를 손짓하며
잘린 비단길을 잇느라
꿈에도 진땀을 뺀다
(『절정의 노래』, 들꽃, 2008)
【조시】
전위의 시인
―이기형 선생님께
맹문재
몽양(夢陽)의 서거 후 삼십삼년 간 칩거했다가
전위대로 나섰지요
분단 조국에서는 시를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지만
생이별한 어머니와 처자식을 품기 위해서였지요
아버님의 퉁소 소리와
함흥의 꽃섬을 기억하기 위해서였지요
진리와 신념 앞에서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던 스승을
섬기기 위해서였지요
단심(丹心)의 시인은 거칠 것이 없었지요
함흥에서의 야학으로
일본에서의 고학으로
항일 투쟁으로 쌓은 강단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민주화 운동이며
통일 운동을
아름다운 산하에 펼치려고 했기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지리산을 오르고
바다제비를 바라보고
별 꿈을 꾸었지요
봄은 왜 오지 않느냐고 원망하면서도
독립문에 나아갔고
삼천리 통일 공화국을 노래했지요
통일만이 살 길이라고
꿈속에서도
절정의 노래를 불렀지요
맹문재 / 시인, 안양대 교수
몽양(夢陽)의 거울
―이기형의 『절정의 노래』론
맹문재
1.
그동안 이기형 시인이 간행한 시집들에 실려 있는 약력의 한 부분은 나의 의식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정신적 지도자로 모셔온 몽양 여운형 선생 서거 이후 33년간 일체의 공적인 사회 활동을 중단하고 칩거 생활을” 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아름다움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스승과 제자의 만남 역시 빼놓을 수 없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로부터 본받을 만한 스승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가? 또한 스승으로부터 신뢰받을 만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가? 여운형과 이기형의 관계를 보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야 함을 알 수 있다. 시인이 몽양을 존경하는 것은 「사람은 어느 때 가장 강한가」(『산하단심』)라는 작품에서 “진리와 신념을 위해/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듯이, 진정한 사제관계는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넘어서야 한다. 이기형 시인은 몽양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와 신념을 지킨 인간이었기 때문에 스승으로 섬기고 있는 것이다.
몽양이 지향한 사상은 조국의 자주적 통일로 집약할 수 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안에 따라 과도 정부의 수립 절차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을 때 소련은 신탁통치에 찬성한 좌익만을 협의의 대상으로 삼았고, 미국은 신탁통치에 반대한 우익을 배제할 수 없어 무기한 연기되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좌우합작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승만은 남쪽만이라도 단독 정권을 수립해야 한다며 좌우합작 운동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를 무효화하고 미국에 단독 행동을 하도록 호소하며 미국을 반대하는 세력을 적으로 간주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반탁은 애국자, 찬탁은 매국노라는 등식이 형성된 여론을 이용한 전략이었다. 그에 반해 김구는 좌우합작 운동의 목적이 조국통일에 있다고 여운형과 김규식의 운동에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여운형과 김규식을 중심으로 시국대책협의회도 열렸는데 우익은 소련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를, 좌익은 미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를 정했다. 그리고 미국이 점령하는 남쪽을 대표하는 좌우합작위원회와 소련이 점령하는 북쪽을 대표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가 협의하길 전망했다. 그렇지만 1947년 7월 19일 몽양이 정적에 의해 암살당함으로 인해 좌우합작위원회는 힘을 잃고 해산되고 만다. 더욱이 1949년 6월 26일 김구마저 암살됨으로 인해 분단국가는 고착화되고 말았다.
이기형 시인은 몽양이 이루지 못한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위해 적극성을 띠고 있다. 시인은 함흥고보를 졸업한 1938년 가을 처음으로 몽양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몸소 사람들 선두에 서서 살길을 찾아 내달리는 지도자”가 참다운 지도자라는 말을 듣고 지금까지 추구하고 있다. 시인이 1980년대 이후 각종 집회에 어김없이 참석해 전위대로 나서는 것이나 작품에 투사의 정신을 넣고 있는 것이 그 여실한 모습이다. 전위대에서 사용될 수 있는 언어로 무장되어 있는 시인의 시 바탕에는 몽양이 거울로 놓여 있는 것이다.
2.
그 누가 있어
우리나라에서 이십세기를 뎅강 들었다 놓을 만한 대인물이 있었는가?
있었다면 그는 누구인가라고 물어온다면
저는 내 나이값과 지식의 총체를 짜내
여운형이라고
서슴없이 대답하겠습니다
좀 지루하드라도 그 걸출한 경력을 더듬어볼까 합니다
그는 태어난 순간부터 왕재(王材)라는 감탄을 받을 만큼
용모가 비범 수려했습니다
약관 나이에 교회와 학교를 세웠습니다
민영환 절명사를 외우고 다녔고 일본 빚 이천만원을 갚는데 도움이 된다고 담배를 끊었습니다.
스물세 살 때 종 문서를 불살라 버리고 종을 해방시켰습니다
중국 북부 만주 해삼위를 뛰어다니며 독립운동을 벌여 불멸의 3·1독립만세운동의 기본 동력을 이룩했습니다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큰 몫을 담당했습니다
능력과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당원 예우를 받았습니다
공산당선언과 공산주의ABC 노동조합론 등을 번역했습니다
적지 일본 동경에서 독립운동을 벌여 일본 좌우인사로부터 ‘여운형만세!’ 소리를 들을 정도였습니다
독립항쟁의 예술이었지요.
동경제대 吉野교수의 인물평을 들어봅시다
‘여씨의 주장 가운데에는 확실히 하나의 침범하기 어려운 정의의 섬광이 보인다. (중략) 그는 한낱 젊은 신사로서 그 견식에 있어서, 그 품격에 있어서 나는 드물게 보는 존경할 만한 인격을 그에게서 발견했다. 지나 조선 대만 등지의 많은 사람들과 회담했지만 하나의 교양 있는 존경할 인격자로서 여운형 씨와 같은 분은 그중 가장 뛰어난 한 분이라는 것을 단언한다.’
1922년 모스크바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
레닌을 만나 조선해방을 논의했습니다
중국의 대선각자요 대지도자인 손문과는 중국 정세 조선 문제에 대해 많은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조선중앙일보 사장으로서 신문을 통해 독립운동을 열렬히 펼쳤습니다. 인기가 역사상 전무후무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일제의 조선 민족과 문화의 야만적 말살정책이 극치점에 달했던 1944년 몽양 여운형 선생은
지하 비밀 결사인 건국동맹과 농민동맹을 조직했습니다.
8·15해방이 되자 현대사 순도 높은 금맥이라고 지칭되는 ‘건국준비위원회’를 창건했습니다.
임시독립정부를 수립하려고 찬탁했고 이념 대립을 해소하려고 좌우합작에 전념했습니다
여운형 선생은 우이동 태봉에 누워계시는 게 아니고
이 순간에도 저희들과 함께 호흡하고 계십니다.
역사양심이 가시밭길을 헤쳐
여운형 선생은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거니
그 출중 수려한 용모 풍채 인격 학식 이론 정치감각 국제감각 그리고 말솜씨 웅변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21세기 초반 오늘까지도
우리가 자신만만 국제무대에 내놓아 아무런 손색이 없는 인물
실로 이순신 이후 유일한 대인물입니다.
몽양은 현대의 위인입니다.
현하 우리나라 정치계에는 몽양 같은 유능한 대정치가가 없습니다. 몽양을 따라 배워야 합니다
몽양 여운형의 길은 바로 통일을 향한 굳건한 길입니다
여운형 만세!
자주통일 만세!
―「역사를 창조한 거성(巨星)- 여운형, 그 이름을 부르며」 전문
몽양의 일대기를 역사적인 차원으로 조명하고 있는 작품인데, 다소 호흡이 길어 21세기의 젊은 시인들에게는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일제 강점기의 카프계열의 시와 같은 호흡을 느낄 수 있어 새롭게 읽히기도 한다. 임화를 위시한 단편서사시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긴 호흡을 갖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몽양 여운형 선생 영전에」(『별꿈』)라는 작품에서도, 「역사의 기억」「건국동맹」「건국준비위원회」등에서도 몽양을 노래하고 있다. 그만큼 시인은 몽양을 삶의 거울로 섬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우리나라에서 이십세기를 뎅강 들었다 놓을 만한 대인물이 있었는가?/있었다면 그는 누구인가 라고 물어온다면/저는 내 나이값과 지식의 총체를 짜내/여운형이라고/서슴없이 대답하겠습니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몽양은 한국 현대사를 이끈 큰 인물이다. 몽양은 1886년 4월 22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꼴에서 태어났다. 몽양(夢陽)이란 호는 이기형의 『여운형 평전』에 따르면 임신한 며느리가 꿈속에서 해를 보았다는 말을 들은 할아버지가 지어준 것이다. 몽양은 14세 때 처음으로 서양의 문물을 접한다.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배재학당에 입학한 후 흥화학교, 우무학당(우체학교) 등으로 전학해서 공부한 것이다. 그렇지만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우무학당이 일본의 수중에 들자 몽양은 졸업을 한 달 앞두고 학교를 자퇴하고 반대운동을 펼쳤다. 뿐만 아니라 을사조약에 항거해 민영환이 자결하자 충격을 받고 구국을 위한 노방연설을 했다.
일제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조선에 을사조약을 강요하며 식민지의 정책을 본격화했다. 이에 조선은 일제의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세계에 호소하려고 헤이그 밀사를 보냈지만 실패하고 만다. 일제는 이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조선의 국권을 빼앗는 내용의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을 맺는다. 이 조약에는 군대 해산 및 일본인의 조선 관리로 임명되는 차관정치가 비밀각서로 첨부되어 있어 조선은 사실상 국권을 상실했다. 그에 대항하는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는데, 몽양은 부모의 상중이어서 고향에 머무르면서 청소년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쳤다. “약관 나이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웠고, 서양의 문물을 수용하기 위해 서울 승동교회에 입교했다.
부친의 상을 치른 몽양은 일대 혁신을 감행했다. 자신의 상투를 잘랐고, 집안의 역대 신주를 땅 속에 묻었으며, “종 문서를 불살라 버리고 종을 해방시켰”다. 신분차별이 엄연히 존재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몽양의 결단은 실로 큰일이었다. 몽양은 담배도 끊었다. 당시 조선은 일본에 2천만 원의 국채를 안고 있었는데,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몽양은 양평에서 단연국채보상기성회(斷煙國債報償期成會)를 조직한 뒤 장터를 돌아다니며 금연의 필요성을 연설했고 자신도 “담배를 끊었”다.
또한 몽양은 광동학교를 지인에게 맡기고 강릉으로 내려가 초당의숙(草堂義塾)에서 청년들을 가르쳤다. 일제는 경술국치(庚戌國恥) 다음날부터 조선의 모든 기관에 자국의 명치(明治) 연호를 쓰도록 명령했다. 몽양은 따르지 않고 서력까지 쓰면서 대항했지만, 끝내 초당의숙은 폐쇄당했고, 몽양은 강릉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몽양은 가혹한 탄압이 자행되고 있는 국내에서는 더 이상 독립운동을 하기가 어렵겠다고 판단하고 해외로 갈 것을 결심했다. 전 세계의 식민지 민족들과 연대해서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1914년 남경의 금릉대학 영문과에 입학했고, 교민단장이 되어 조선 청년들의 구미 유학을 알선했다.
1918년 연합군에 의해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파리에서 열릴 평화 회의와 윌슨 대통령이 발표한 14개의 조문을 설명하기 위해 특사 크레인이 상해에 왔다. 여운형은 크레인을 만나 일제의 만행을 알리고 조선의 독립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크레인이 약속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이름으로 진정서를 써서 윌슨 대통령에게 보내었다. 이와 같은 활동이 국내에 알려져 “불멸의 3·1독립만세운동의 기본 동력”이 되었다. 몽양은 또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큰 몫을 담당했”다. 3․1운동 후 국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보다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1919년 11월 몽양은 일제의 초청을 받고 동경을 방문했다. 3․1운동을 겪은 일제는 자신들의 억압적인 식민지 정책이 세계에 알려진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몽양을 회유하려는 것이었다. 몽양은 테이코쿠 호텔에서 세계 각국의 특파원 및 기자, 일본 고위층 들에게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주장해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사회주의를 연구하는 ‘신인회(新人會)’는 “여운형 만세!”를 부르면서까지 지지했다. 일제의 심장부에서 일으킨 여운형 사건은 몽양다운 담력과 용기, 지식, 판단력 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실로 “독립항쟁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채택되지 않음으로 인해 약소국가들의 실망은 매우 컸는데, 소련은 ‘근동근로자대회’를 열었다. 몽양은 대회 기간 중 “레닌을 만나 조선해방을 논의했”다. 트로츠키 등 볼셰비키 지도자들도 만나 조선의 해방을 원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중국의 대선각자요 대지도자인 손문과는 중국 정세 조선 문제에 대해 많은 의견을 나누었”고, 중국의 혁명이 이루어지면 조선의 독립도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1929년 7월 몽양은 상해 요동운동장에서 야구 구경을 하다가 일본 형사에 의해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되어 치안유지법 등으로 3년간 옥고생활을 했다. 그 후 주위의 추대를 받아들여 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몽양은 신문사의 일이 독립운동을 하는데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조선중앙일보”로 바꾸었다. 그렇지만 1936년 8월 11일자 소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살 사건으로 인해 신문은 자진 휴간한 후 폐간되었다.
1944년 8월 몽양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비밀 결사조직을 만들었다. 비밀이 탄로 나도 희생을 최소한 줄이고자 서로 이름이나 거처를 말하지 않고 문서를 남기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10월에는 양평군 용문산에서 “농민동맹”이라는 비밀 결사도 만들었다.
1945년 8월 15일 아침, 엔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은 자국의 패배를 알고 몽양에게 치안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몽양은 승낙하고, 저녁에는 “현대사 순도 높은 금맥이라고 지칭되는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건국준비위원회는 조선인민공화국의 등장으로 해체되지만, 해방 후 혼란한 시기의 치안 유지와 민심의 안정을 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 미군 점령군 인천 상륙, 이승만 귀국, 미국 소련 영국 중국에 의한 신탁통치가 결정된 모스크바에서 3상회의, 김구 및 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들 귀국 등 정세는 대단히 혼란스러웠다. 몽양은 좌우합작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다가 열 번도 넘는 테러를 당한 끝에 암살당하고 말았다.
3.
이정식이 쓴 『대한민국의 기원』(일조각, 2006)을 참조한 위키백과에 따르면 1945년 10월 10일부터 11월 19일까지 ‘선구회(先毆會)라는 단체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를 뽑는 설문조사를 한 결과 33%가 여운형을 지목했다. 그 뒤 11월에 최고의 혁명가를 뽑는 설문조사를 한 결과 978명 중 195표가 여운형을 지목해 1위였다. 그만큼 동시대의 여론은 몽양에게 큰 지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렇지만 몽양은 타계 이후 ‘빨갱이’라는 왜곡으로 역사적 평가는 물론 독립운동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2002년부터 몽양을 기리는 추모사업회가 조직되었고, 2005년에는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는데, 2008년에는 1급으로 상향 조정되었다.
몽양은 파리에서 열린 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해 조선 독립의 필요성을 세계에 알렸고, 장덕수를 동경과 국내에 보내 해외 소식을 전함으로써 3․1운동을 일으키는데 기여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데 산파 역할을 했다. 동경을 방문해 일제의 요원들과 세계의 기자들 앞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당당하게 주장했고, 레닌을 만났으며, 중국 혁명의 일선에서도 활약했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인민공화국, 좌우합작위원회 등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대동단결을 부르짖던 몽양은 좌익과 우익으로부터 동시에 공격을 받아 결국 희생되었다. 그렇지만 역사는 결코 성공한 사람들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님을 몽양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기형 시인은 「역사를 창조한 거성(巨星)- 여운형, 그 이름을 부르며」에서 “여운형 선생은 우이동 태봉에 누워계시는 게 아니고/이 순간에도 저희들과 함께 호흡하고 계십니다.”라고 평가를 내리고 있다. “21세기 초반 오늘까지도/우리가 자신만만 국제무대에 내놓아 아무런 손색이 없는 인물/실로 이순신 이후 유일한 대인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민족의 자주 통일이 요원한 오늘날, 몽양의 사상은 큰 거울이다. 아흔이 넘어서까지 몽양을 따르는 이기형 시인 또한 우리들의 거울이다. 따라서 우리도 “해방! 그날아/다시 와 주렴/남북형제야/얼싸안고/수려강산 천년대계 무지개꿈/살길을 꾸리자”(「무지개꿈」)라고 함께 불러야 할 것이다.
(『창작21』, 2009년 봄호)
□ 맹문재(孟文在)
고려대 국문과 및 같은 대학원 졸업. 시론 및 비평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패스카드 시대의 휴머니즘 시』『지식인 시의 대상애』『현대시의 성숙과 지향』『시학의 변주』『만인보의 시학』『여성시의 대문자』, 편저로 『박인환 전집』『김명순 전집』 등. 안양대 국문과 교수.
이기형 선생님의 삶과 시세계(대담)
이기형․맹문재
맹문재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렇게 댁에서 건강하신 모습으로 뵈니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안고 살아오셨기 때문에 후학들에게 해주실 말씀이 많으실 것입니다. 선생님의 삶과 시세계를 직접 들을 수 있으니 설렙니다. 선생님께서는 1917년 함경남도 함주에서 태어나셨는데, 우선 가족 소개를 들어볼까요?
이기형 아버님께서 제가 두 살 되던 해에 열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님이 외아들인 저를 키우느라고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제가 참 불효자이죠. 저의 현재 위치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어머님 덕입니다. 그런데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사력을 다해 퉁소를 불었답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큰 힘이 되었어요.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사력을 다해 퉁소를 불었다는 사실은 위대한 예술이고 음악이라고 지금도 생각해요. 그 퉁소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 저는 그저 평범하게 살았을지도 몰라요. 아버님의 퉁소 소리는 제 통일시의 원동력이에요.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 서당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4학년에 들어갔지요. 농사를 2년 정도 짓다가 다시 5학년에 편입해 졸업하고 함흥고보에 들어갔지요. 함흥고보에 들어갈 때 제가 1등을 했어요. 외삼촌이 어머니께 적극적으로 저의 진학을 권유했지요.
맹문재 12살 때부터 야학을 통해 독립운동에 눈을 뜨셨다고 하셨는데 그 상황을 듣고 싶네요.
이기형 야학이 저에게 반일독립 사상을 주었어요. 저를 오라고 해서 간 것이 아니라 제가 직접 찾아갔지요. 다른 사람들은 책이 있었지만 저는 없어 어깨 너머로 들었어요. 환희사(歡喜寺)라는 절에 천렵을 가장해 많은 사람들이 가기도 했는데, 실제는 독립운동을 한 거지요. 그 절에 가서 자면서 연극하고 노래하고 웅변하고 그랬어요. 열세 살 때인데 야학 선생님이 원고를 써주더라구요. 농사를 지어서 알곡을 일본 놈들에게 빼앗기고 우리는 쭉정이만 먹고 산다는 내용이었어요. 제가 그 원고를 외워 웅변을 해서 2등을 했지요. 모두들 어른이었는데 아이는 저밖에 없었어요. 지금도 그 환희사의 밤을 잊을 수가 없어요.
맹문재 소설가 한설야도 만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기형 제가 함흥고보 1학년 때 찾아갔지요. 한설야 선생은 소설가로서 많이 알려진 분이었어요. 그래서 친구와 함께 함흥에서 문영각이라는 책방을 하고 있는 설야를 찾아간 것이지요. 그곳에서 3․1운동 등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저의 사상이 싹트는 데 한 원동력이 되었지요.
맹문재 소설가 이기영과도 만나셨지요.
이기형 1940년대 서울에서 만났지요. 임화, 이기영, 오장환, 이원조, 김남천 등도 만났어요. 임화하고 이기영 선생님은 8․15해방 전부터 알았어요. 저는 그 당시 청년 학생들에게 조선 독립운동에 지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함흥고보 1학년 때 일본어로 번역된 러시아의 평론가 벨린스키의 책이며 고리키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지요. 저의 고민을 들은 친구가 보성고보의 교사로 있는 문석준 선생님을 소개해주었어요. 문석준 선생님은 동경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사학자요 독립운동가였습니다. 그분은 그때 우리말로 된 역사를 썼는데 북에서는 교재로 사용했지요. 그래서 문석준 선생님께 찾아갔는데, 여운형 선생님을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대번에 여운형 선생님을 찾아갔지요.
맹문재 그러면 여운형 선생님에 대한 말씀을 들을까요. 선생님께서 만난 인물들 중 아무래도 몽양으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지요. 선생님은 몽양의 서거 이후 33년간 일체의 공적인 사회활동을 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몽양은 어떤 면에서 특별했나요?
이기형 여운형 선생님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는데 대단했어요. 대번에 무서움도 없이 “조선은 독립을 해야지” 하는 것이었어요. 새로운 영웅론을, 다시 말해 신지도자론을 말씀하셨어요. 새 시대의 영웅은 민중의 선도에서 이끌고 나가는 사람이라는 것이었어요. 뒤에서 손가락질로 이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 하는 것이 아니고, 대중의 앞에 서서 이끌고 나가는 사람이 진정한 지도자라고 한 것이지요. 곧 반일 독립운동의 전선에 나서는 사람을 지도자라고 본 것이지요. 그 시기의 조선 청년이 나아갈 길은 반일 독립운동이었는데, 몽양 선생님이 제일선에 서 있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몽양을 찾아왔는데 일일이 조선 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공산당, 인민당 계통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거의 다 영향을 받았지요. 몽양은 인간 그 자체가 아주 웅대했어요. 아는 것도 굉장히 많았어요. 실천에서 우러나오는 지도자적 이야기를 하셨지요.
맹문재 몽양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따르고 싶은 지도자가 없어서 선생님께서는 33년간 공적인 활동을 하지 않으셨나요?
이기형 그 시간에 대해서는 언제 자세하게 말할 것입니다. 죽기 전에 자서전으로 밝힐 생각이에요. 단지 인간으로서 시를 쓸 자격이 있구나 하고 자신할 수 있는 체험을 했다고 말할 수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고, 친미 민족 반역자들의 죄악상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분단 고통이 어디에서부터 출발되었고 어떻게 나아가고 있으며 또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나는 북쪽에서 신문기자 생활을 4년 했고, 남쪽에서도 기자 생활을 2년이나 했으니 남북의 정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정도의 경험을 가지고 있으니 시를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요.
맹문재 임화도 만나셨다고 했는데요.
이기형 함흥고보를 졸업할 무렵 임화의 책을 많이 읽고 있었어요. 제가 서울로 간다고 한설야 선생께 말했더니 임화와 이기영을 만나라고 대번에 얘기하더라구요. 그래서 서울에 와서 만났지요. 임화는 풍기는 인상이 대단했어요. 지금의 문학인 중에 임화 같은 지성미를 풍기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키도 후리후리하게 크고 지성인의 냄새가 아주 진하게 풍겼지요. 한 주에 한 번은 꼭 찾아갔어요. 일요일마다 갔지요. 임화의 부인인 지하련 선생과도 친해졌구요. 임화 선생이 저를 데려가 중국 요리도 사주고 했는데, 그 후 제가 돈벌이를 할 때 사드리려고 몇 번이나 했는데 이루지는 못했어요.
맹문재 임화가 들려주신 말씀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는지요.
이기형 북에서 죽은 저의 아내가 여운형 선생님의 6촌 동생이에요. 결혼식 때 몽양 선생님이 주례를 보고 임화와 이태준 선생님이 축사를 했어요. 정치적 입장에서는 문석준, 여운형 선생님을 찾아갔고, 문학적인 입장에서는 이기영, 임화, 이태준, 한용운 선생님을 찾아간 것이에요. 임화 선생님은 축사에서 “나는 지금 이 결혼식에서 불란서의 어느 평론가가 말한 ‘허위는 복잡하고, 진실은 단순하다’는 말을 생각합니다.”라고 말했어요. 이태준 선생님은 중국의 고사를 인용했는데,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어요. 여운형 선생님이 주례를 보고 임화와 이태준 선생님이 축사를 한 것은 제 일생에서 기록할 만한 일이지요. 임화에 대해서 한마디 더 하지요. 임화가 죽은 것은 참 아까운데, 박헌영과 너무 밀접해서였어요. 한 번은 지하련 선생님이 저에게 임화 선생은 어떤 시를 쓰더라도 박헌영에 보여준다고 말하더라구요. 그만큼 임화는 박헌영과 가깝게 지내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휩쓸리고 말았지요.
맹문재 이기영 선생님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시지요.
이기형 민촌 선생님은 차분했어요. 소설을 쓰든 시를 쓰든 우리의 환경이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라는 사실을 연계시켜야 한다고 말했어요. 구체적으로 사건을 만들고 예술적으로 구성을 만드는 것이 훌륭한 소설 쓰기라고 말했어요.
맹문재 소개할 만한 분이 또 있는지요?
이기형 김남천이 있지요. 8․15 직후 임화가 만든 문화건설중앙협의회 사무실에 가니까 반바지를 입은 건장한 청년이 앉아 있더라구요. 임화 선생님이 김남천 선생이라고 인사를 시켰어요. 사시는 곳이 가회동이어서 제가 사는 집과 가까운 곳이었어요. 그래서 다음날 찾아갔지요. 가니까 책을 말리고 있었어요. 일제시대에 지하실에 넣어두었다가 곰팡이가 슨 책을 꺼내 말리고 있었는데, 다가가 보니 『자본론』이더라구요.
맹문재 이야기의 방향을 돌려보지요. 선생님께서는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에서 2년간 유학하셨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요?
이기형 임화가 일본에 가서 많이 배웠지요. 그래서 저도 진보적 사상을 더 많이 알려면 일본으로 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 것이지요. 또한 한설야가 저에게 현재 세계에서 사회주의 관계 사상을 가장 많이 알 수 있는 곳은 파리나 워싱턴이 아니라 동경이라고 했어요. 사실 일본은 세계의 모든 사상을 받아들여서 일본화하지요. 그래서 일본으로 간 것이지요. 물론 문학도 하고 싶었구요. 일본대학 예술부 창작과에 들어가 신문 배달과 우유 배달을 하면서 공부했어요. 잘 시간도 없었고 피곤했어요. 그런데 연안을 간다고, 연안을 못 가면 중경이라도 간다고 생각하고 조선으로 나왔어요. 몽양 선생님이 “조 동지, 이기형 군을 부탁하오”라고 조소앙 선생한테 명함을 써줬어요. 가방 속에 깊이 넣어가지고 갔는데 일본 경찰이 달라붙었어요. 그래서 여관의 화장실에서 찢어버렸지요. 그리고 연안 가는 길이 막혀 다시 조선으로 나왔다가 해방을 맞았지요.
맹문재 선생님께서는 1943년부터 1945년 해방 전까지 지하협동사건과 합병거부사건과 관계가 있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상황을 들려주시지요.
이기형 협동사건은 염윤구라는 고향 후배와 관계가 있는데, 그 후배가 포천의 산에 가서 합병과 징병을 피한 사람들을 모아서 무장투쟁 활동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제가 배후조정자인 셈이지요. 준비하는 과정에 우리 집에서 자고 가고 했는데, 그 일로 저도 붙잡혔어요. 저는 그들이 자고 가기만 했지 그 이상은 모른다고 딱 잡아떼었어요. 증거가 없어 저는 구속되지는 않았는데, 나름대로 닥칠 상황에 대해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맹문재 협동사건과 합병거부사건이 몽양과 관계가 있나요?
이기형 관계가 많지요. 제가 가서 얘기하니까 몽양 선생이 하라고 했어요. 몽양으로 인해 힘이 생겼지요. 협동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서울의대 학생만도 12명이에요. 책방에서 주로 연락을 주고받았어요. 그만큼 조선 청년들이 독립을 갈망했음을 알 수 있지요. 지금도 만나는 사람이 있어요.
맹문재 그렇게 활동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셨군요. 해방 후에는 신문기자 활동을 하셨지요.
이기영 저는 정치가가 될 생각은 없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문학가의 체질이 맞지 정치가의 체질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문학의 고결성이 정치가에는 없어요. 그래도 문학을 하려면 사회를 많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신문기자 활동을 했어요. 남한의 문인과 북한의 문인을 거의 다 만났어요. 김구, 박헌영 등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한 분들도 만났어요.
맹문재 언제 기회가 되면 해방 직후 독립운동을 한 분들과의 만남에 대해서도 말씀을 듣고 싶네요. 이야기의 방향을 다시 돌려보지요. 선생님께서는 언제 결혼을 하셨는지요?
이기형 1944년 6월에 했어요. 제가 동경에 있을 때 몽양 선생님의 집에 왔다 갔다 했는데, 그 여자가 오빠를 보러 왔던 것이지요. 한번은 제가 갔는데 밥을 차리더라구요. 그리고 집에 와 있는데 편지가 왔어요. 오빠를 만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어요. 그 여자는 신식공부를 하지 않았는데, 시로 편지를 써왔더라구요. 결국 저를 만나지 못하고 북에서 먼저 세상을 떴어요. 남쪽에서는 아들이 한 명 있는데 대학교수에요. 지금 미국에 가 있어요.
맹문재 선생님께서는 시작 활동을 언제부터 하셨나요.
이기형 1947년 평양에서 나온 『민주조선』이었어요. 그런데 작품의 제목을 잊어버렸어요. 선거에 관한 시였는데, 그때 안회남이 문화부 차장으로 있어서 발표했어요. 1946년 11월부터 1947년 2월 사이에 실려 있을 겁니다. 그렇게 보면 신경림이나 고은 시인보다 제가 훨씬 빨리 등단을 한 것이지요.
맹문재 그렇군요. 언제 도서관에 가서 찾아봐야겠네요. 선생님께서는 1980년대에 들어 김규동, 신경림, 백낙청, 이시영 선생님 등을 만나 시를 쓰겠다고 결심하셨지요. 왜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하셨는지요?
이기형 특히 김규동 선생의 지도를 많이 받았어요. 아주 구체적으로 작품의 장점과 단점을 말해줘요. 대단한 분이지요. 우리 문단의 정신적 지주에요. 벨린스키의 평론과 고리키의 소설, 일본에서 나온 『시와 진실』을 읽다보니 문학이란 무엇이냐, 평론이란 무엇이냐, 시는 무엇이냐 등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문학이라는 것이 인간 정신을 높게 끌어올린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소설은 기력이 필요한데 저의 체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생각되어 시 쪽으로 방향을 정했어요.
맹문재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해 1982년에 『망향』(시인사, 1982)이란 시집을 출간하셨습니다. 첫 시집과 관련된 말씀을 듣고 싶네요.
이기형 저는 분단된 조건에서는 또 친일적인 정권에서는 고결한 시를 쓰지 않겠다고, 통일된 조국에서만 시를 쓰겠다고 결심했었어요. 그런데 친구들이 자꾸 죽어가는 모습을 보니 나도 죽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세상을 뜨기 전에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시를 쓴 것이지요.
맹문재 두 번째 시집은『설제』(풀빛, 1985)인데 또 말씀을 들을까요.
이기형 그 무렵 시를 많이 썼어요. 채광석 시인이 많은 용기를 주었어요. 채광석이 어려운 일이 있으면 문단의 어른이라고 저에게 와서 상의하곤 했어요. 채광석이 『설제』를 높이 평가했어요.
맹문재 세 번째 시집은 『지리산』(아침, 1988)인데, 필화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요.
이기형 그런 시를 쓰려면 경험이 있어야만 가능하지요. 그런데 그 시집에는 제가 쏙 빠져 있는데, 실제로는 경험이 있지요. 발행인은 정동익인데,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대단한 일꾼이에요. 동아특위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는데 아는 게 많고 아주 적극적으로 활동하지요.
맹문재 필화사건 다음으로 나온 시집이 『꽃섬』(눈, 1990)이지요.
이기형 저의 삼촌 부인의 고향이 꽃섬이에요. 어린 시절부터 많은 이야기 들었는데, 아주 재미있더라구요. 시집 전부가 삼촌의 부인에게서 실제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제가 시인의 상상력을 가미해서 쓴 시집이지요. 지금 청소년들이 읽으면 아주 좋을 거예요.
맹문재 다섯 번째 시집이 분단 극복 의지가 드러난 『삼천리통일공화국』(황토, 1991)이에요.
이기형 그 시집은 이승철 시인이 하던 ‘황토출판사’에서 나왔지요. 이승철 시인이 “선생님 시는 직설적이면서도 힘이 있다”며 용기를 주었어요. 그래서 힘을 얻어 쓰게 된 것이지요.
맹문재 선생님께서는 뒤늦게 창작활동을 하셨는데 아주 활발하게 하셔서 또 여섯 번째 시집인 『별 꿈』(살림터, 1996)을 출간하셨습니다.
이기형 모든 것을 시로 쓰고 싶다는 욕망이 강할 때였어요. 출판사에서 자꾸 시 쓰기를 권유했어요. 그래서 힘을 얻어 쓴 것이지요.
맹문재 일곱 번째 시집이 『산하단심』(삶이 보이는 창, 2001)입니다.
이기형 반일운동과 분단을 끝장내고 통일을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을 아름다운 산하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쓴 것입니다. 송경동 시인이 용기를 많이 주었어요.
맹문재 여덟 번째 시집은 『봄은 왜 오지 않는가』(삶이 보이는 창, 2003)입니다.
이기형 분단을 끝장내고 통일을 하루바삐 쟁취해야 되는데, 그것이 안 되고 있으니 울분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터진 시집이에요.
맹문재 아홉 번째 시집이 『해연이 날아온다』(실천문학사, 2007)입니다.
이기형 고리키가 1901년에 ‘해연’을 썼지요. 소련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기 16년 전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혁명이 빨리 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썼어요.
맹문재 열 번째 시집이 『절정의 노래』(들꽃, 2008)입니다. 이번 시집에서 추구한 점이 있는지요.
이기형 이전의 시집들보다 완성도가 있다고 생각해요.
맹문재 선생님의 시세계는 한마디로 조국 통일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조국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여쭙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려운 질문일 수 있는데, 과연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기형 분단된 상황에서 어떤 작품을 써야 할까를 지금까지 고민하고 있어요. 분단을 끝장내야 한다, 통일을 하루바삐 이뤄야 한다, 는 고민이 필요합니다. 젊은 독자들이 소설을 읽고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결심을 하게끔 작품을 써야 하는 것이지요. 시, 소설을 생각하는 문학자들이여, 어떻게 하면 빨리 분단을 끝장내고 통일을 쟁취해 감격의 날을 맞이하겠는가. 여기에 대한 의욕을 가지고 통일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맹문재 앞으로의 활동 계획을 말씀해주시지요.
이기형 계획이 참 많아요. 그런데 제 나이가 지금 아흔셋이므로 내일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요. 지금 손녀 둘이 미국에 가 있는데 그동안 죽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죽지 않고 아이들을 기다리겠다, 손녀 오는 것을 보겠다고 결심을 하고 있어요. 통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에요. 저는 통일되기 전에는 죽지 않겠다고 강한 의욕을 가지고 있어요. 사천만 민족 모두가 저와 같이 통일을 원하고 있다면 더욱 빨리 이루어지겠지요. 그런데 지금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통일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늦게 되어도 좋고 등 통일에 대한 대명제가 사람들의 마음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 있어요. 언론도 그렇고 작가들도 그런 것 같아요. 그러므로 통일에 대한 시를 쓰되 어떻게 하면 독자들에게 감격을 주고 통일을 결심하도록 쓸까 하는 것이 저의 중심 과제입니다. 젊은이들이 통일을 위해 활동하는 데 힘을 줄 수 있는 뛰어난 시를 써야겠지요. 일상생활이 통일과 연관되어야 합니다. 이 인터뷰 내용도 통일에 대한 절규가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제시대에 이광수나 김용제나 김문집이나 서정주 등이 친일 활동을 해서 오늘날 고통 받고 있는 면을 잘 봐야 합니다. 오늘날 친미 작가들도 50년 뒤에 그와 같은 고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겠어요.
맹문재 선생님께서 통일을 염원하고 있는 면을 여실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해방 후 선생님께서 만난 인물들, 시집에 나온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또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이렇게 건강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내내 건강하세요.
(시에, 2009년 여름호)
첫댓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기다림을 그냥 안고 가셨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