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지적 충격을 받는다. 아, 나도 한번 저렇게 폼 나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그를 흉내 내고 싶어진다. 지식욕도 일종의 허영이다. 사람은 폼나 보이려고 성장한다. 어릴 때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나이 들면서는 대중에게 폼나 보이려고 성장한다. 남자들은 젊을 때나, 늙어서나 여자들에겐 항상 폼나 보이고 싶어 한다. 헤겔의 ‘인정투쟁(Kampf um Anerkennung)’의 핵심은 ‘나도 한번 폼나고 싶다’는 심리학적 동기(motivation)다. 내 지적 성장 과정에선 이어령·김용옥 두 분이 그렇게 폼나 보일 수 없었다. 나도 그렇게 글 쓰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나’를 주어로 쓴 최초의 한국인
1984년 반정부 시위로 제적당한 사람들을 일괄 구제해준다는 군사 정권의 유화 제스처에 나도 1년도 채 못 다니고 쫓겨났던 고려대학교에 다시 들어갈 수 있었다. 해직됐던 사학과의 강만길 교수, 이상신 교수 등도 제적된 학생들과 함께 복직됐다. 학생들에게 그들은 전설이었다. 복교 후 강의실의 그 벅찬 흥분이 지금도 느껴진다.
학생들은 강만길 교수에게 서울대 신용하 교수와의 한국 근대사 논쟁에 관해 집요하게 질문했다. 아, 그땐 교수들 사이에서 그렇게 폼나는 학문적 논쟁도 있었다. 이상신 교수는 ‘스리버튼’의 양복을 항상 단정하게 입고 나타났다. 그의 콧수염도 참 멋졌다. 해직 기간에 썼다는 그의
해직 교수들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아주 특이한 교수의 이름이 학생들 사이에 회자되었다. 철학과 김용옥 교수였다. 지금과는 달리 아주 촌스러운 ‘하이카라’ 헤어스타일이었다. 검은색, 흰색 한복을 번갈아 입고 강의했다. 가끔은 이소룡 영화에 나오는 중국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했다. 수업시간에 욕설이나 성적 표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여성들의 ‘주관적 성적 수치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러나 온통 억압뿐이었던 그 시절, 그의 언행은 ‘통쾌함’ 그 자체였다. 사실 그의 도발적 행동은 3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그의 ‘인정투쟁’은 이제 많이 진부해졌다. 통쾌함이 없다. 아니, 별로 안 재밌다! 그러나 그 당시, 김용옥 교수는 내게 아주 특별했다. 그는 학문적 텍스트에 ‘나’라는 주어를 처음 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인문·사회과학적 텍스트에 ‘나’라는 주어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내 기억으로 김용옥 교수가 처음이었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자연과학’이 학문의 전형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후 인식주체인 ‘나, I, Ich’는 학문적 글쓰기에서 사라졌다. 자연과학적 지식의 핵심은 객관성이기 때문이다.
자연과학의 기초는 실험이다. 실험의 결과가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여지려면 네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누가 실험해도 결론이 같은 객관성(objectivity), 반복해도 같은 결과가 나오는 신뢰성(reliability), 측정하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측정했는가의 타당성(validity), 그 결과를 일반화할 수 있는가의 표준화(standardization) 및 비교가능성(comparability). 이 모든 기준은 누구도 주관적 의견을 제시하면 안 된다는 것을 뜻한다. 주관성은 ‘과학성’의 최대 적이다.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이 자연과학적 ‘과학성’이 어느 순간부터 인문사회과학에도 적용되는 암묵적 기준이 되어 버렸다. 그 후 아무도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주어가 생략돼버린 것이다.
자연과학이 학문의 모범으로 받아들여지는 데는 주관적 경험을 객관화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객관성의 신화가 구체화되고 제도화된 결과가 ‘심리학’이다. 인간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다는 신념이다. 그래서 심리학과에 들어가면 수학적 통계학과 자연과학적 실험방법론을 필수로 배워야 한다. 프로이트 이야기를 주워듣고 심리학과에 진학한 이들은 죄다 실망한다. 그러나 20세기 말 인문사회과학에 들불처럼 일어난 포스트모던 논쟁을 거치면서 ‘객관성(objectivity)’의 신화는 무너졌다. 자연과학에서조차 그러하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의 핵심은 ‘객관성’의 해체다. 객관성의 개념 대신 이젠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이 사용된다. 주체들이 공유할 수 있어야 유효한 진실이 된다는 이야기다. 여기선 각 주체 간의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 계몽이나 강요로 진실이 받아들여질 수는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서구 객관성의 신화에 억눌린 대부분의 한국 교수들이 자기 이야기를 주저할 때 김용옥 교수는 ‘내 이야기’를 했다. 그가 쓴 글의 주어는 대부분 ‘나’였다. 책의 내용을 떠나 그의 독특한 글쓰기 방식이 내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논어·맹자·주역을 이야기하다 갑자기 가다머나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을 이야기했다. 한국 사회의 문제를 이야기하다가는 뜬금없는 자기 자랑으로 끝맺곤 했다. 요즘 유행하는 표현으로 죄다 ‘깔때기’였다. 모든 결론이 깔때기의 끝처럼 한 군데로 모여지는데, 그게 다 자기 자랑이란 이야기다. 하버드대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자랑하는 것은 좀 웃겼다. 미국 사람이 서울대학교 영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것과 비슷한 까닭이다. 그렇다고 그의 주체적 글쓰기의 탁월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학자가 두려워하는 자기생각 이야기하기, 즉 주체적 글쓰기가 김용옥 교수에게 가능했던 것은 ‘크로스텍스트(cross-text)’적 사유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동양적 텍스트의 근본적 이해와 더불어 서구 해석학적 방법론이라는 그의 무기는 해당 텍스트를 둘러싼 사회문화적·언어적·정치적 콘텍스트에 대한 비판적 이해를 가능케 한다. 이러한 크로스텍스트적 독해는 당연히 주체적 글쓰기로 이어지게 된다. 텍스트의 콘텍스트를 상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한국 학자에게 주체적 사유가 힘겨운 까닭은 자신의 학문적 맥락을 상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교의 대상이 없으면 절대화될 수밖에 없다.
김용옥 교수에겐 동양고전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해석의 근거가 되는 텍스트가 무한하다는 이야기다. 죽을 때까지 한 이야기, 또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개신교의 목사, 천주교의 신부, 불교의 스님들이 평생 한 이야기, 또 할 수 있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텍스트를 둘러싼 콘텍스트가 항상 변하기 때문이다. 같은 이야기도 콘텍스트가 바뀌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다르게 편집된다는 이야기다. 해석학은 편집학, 즉 에디톨로지다.
요즘 동양고전 해석으로 맹활약하는 박재희 교수가 난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할 이야기가 한도 끝도 없기 때문이다. 아침, 저녁으로 이야기해도 매번 새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박 교수는 이야기도 참 구수하게 잘한다. 젠장, 나는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 모두 내 머릿속에서 나와야 한다. 같은 이야기를 몇 번 반복하면 ‘자기표절’이라고 바로 욕먹는다. 억울하다. 아니 인문학적 사유가 그렇게 콩 구워먹듯 ‘땅’ 두드리면 나오는 건가? 다 그놈의 청문회 때문이다. 어설픈 교수들이 정치하겠다고 나서니 ‘자기표절’이라는 말도 안 되는 단어를 만들어 공격하는 거다. 세상에 자기 생각을 표절하지 않으면 도대체 누굴 표절하라는 이야기인가? 그래서 교수는 정치 하면 안 되는 거다.(지금 누구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다.)
난 그래서 앞뒤 꽉 막힌 한글 전용론자들이 몹시 원망스럽다. 한글의 의미론적 배후에는 죄다 한자가 숨어 있다. 더욱이 21세기는 동양이 대세다. 유치원부터 영어를 배워야 하는 시대다. 단순히 실용적으로만 생각해도 당연히 한자를 필수로 배워야 한다. 한반도의 문화사적 이해가 배제된 어설픈 민족주의는 위험하다. 한국 사람이 동양고전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정말 큰 비극이다.
대부분의 한국 학자가 서양은 너무 잘 아는데, 정작 자신의 존재론적 콘텍스트인 동양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김용옥 교수가 큰소리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동서양을 넘나드는 크로스텍스트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고전해석학은 ‘과거의 현재’와 ‘현재의 과거’가 만나는 곳이다. ‘과거라는 콘텍스트’ 속의 ‘현존하는 텍스트’와 ‘현재라는 해석의 콘텍스트’ 속의 ‘과거의 텍스트’가 서로 교차한다는 이야기다. 김용옥 교수의 크로스텍스트는 이 ‘과거의 현재/현재의 과거’라는 해석학적 맥락과 아울러 ‘동양의 서양/서양의 동양’이라는 해석학적 맥락이 이중적으로 교차되는 지점이다. 그러나 김용옥의 크로스텍스트는 반드시 텍스트에 기반을 둬야 하는 한계를 가진다. 해석의 근거가 되는 텍스트를 떠나면 ‘순 구라’가 되는 까닭이다. 개신교 목사나 가톨릭 신부가 ‘성서’라는 텍스트를 떠나면 사이비 종교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죽을 때까지 콘텍스트를 바꿔가며 한 이야기 또 해도 되지만, ‘또 다른 이야기’는 할 수 없다. 크로스텍스트의 숙명이다.
하버마스 “한국에 맞는 텍스트 찾아라”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한국 학자들에겐 누구나 자기 전공이 있다. 흥미롭게도 다 위대한 서구 학자들 전공이다. 헤겔 전공, 마르크스 전공, 하버마스 전공 등등. 그러나 헤겔은 누구 전공인가? 마르크스는, 하버마스는 도대체 누구를 전공했단 말인가? 자기 텍스트를 써야 위대한 학자가 된다. 오늘날, 인문학이 위기를 말하는 이유는 한국의 콘텍스트에 맞는 텍스트 구성의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다 ‘주변부 열등감’ 때문이다. 서양인들의 언어로 서양의 학문을 하니 도무지 상대가 안 되는 거다.
텍스트는 반드시 해당 콘텍스트에서 생성된다. 하버마스의 비판이론도 프랑크푸르트학파, 실증주의 논쟁,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이라는 20세기 유럽 지성사의 콘텍스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언젠가 하버마스가 한국에 와서 강연한 적이 있다. 하버마스를 전공한 학자들이 죄다 모였다. 그러나 정작 하버마스는 뜬금없는 이야기만 하다 갔다. “한국에도 위대한 정신문화적 전통이 있다. 그 콘텍스트에 근거한 이론이 구성되어야 한다.”
위대한 하버마스가 한국 상황에 관한 사회철학적 해석을 거부하고, 기껏 한다는 이야기가 ‘당신들 콘텍스트에 맞는 텍스트를 구성하시오’였다. 그러나 옳은 이야기다. 깜냥도 안 되는 미국 대학의 경영학과 교수들이 수십만 달러를 받고 한국 사회에 대해 어설프게 아는 체하는 것보다 훨씬 정직한 태도다. 외국의 석학이라고 모셔와 참으로 한국적 콘텍스트와는 동떨어진 이야기 듣는데 그 엄청난 돈을 지불하는 신문사나 기업을 보면 속이 터진다. 한국의 지적 콘텍스트를 처절하게 고민하는 내 텍스트의 원고료는 몇 십만원에 불과하다.(그래도 김종혁 국장은 많이 주는 거라고 생색낸다. 환장한다!)
한국의 콘테스트에서 새로운 텍스트가 가능하려면 기존 텍스트를 해체해야 한다. 텍스트의 해체와 재구성은 크로스텍스트로는 불가능하다. 탈텍스트, 즉 하이퍼텍스트가 가능해야 한다. 하이퍼텍스트적 방법론을 통해 자신의 텍스트를 끊임없이 재구성한 이가 있다. 바로 이어령이다. 다음 호에 그 얘기를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