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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찾아가는 문화기행 원문보기 글쓴이: 土堂
강화기행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곳 ", " 존재 자체만으로 박물관 " 인 곳 강화도를 찾은 초봄,새초롬한 바람은 옷깃을 여미게 하였고,꽃망울은 따사로운 햇살에 봉굿,바다 물결은 은빛 반사경을 자유자재로 갑곳 돈대를 환히 비치고 있었다. 갑곳돈대는1866년 천주교 박해를 빌미로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던 프랑스 군함이 600명의 병력을 싣고 정박했던 곳이다. 갑곳 돈대는 신미,병인양요, 운양호 사건으로 수 많은 백성들이 총,칼에 의해 처절하게 생과사를 가른 곳이다.
강화도에는 갑곳돈대와 같은 전략적 해안요새로 광성보,용두돈대,손돌목돈대,덕진진과 남장포대,초지진등이 있다. "진'은 오늘로 치면 대대 병력이 주둔하는 곳이고 '보'는 중대 병력,"돈대'는 초소가 있던 곳이다. 인조 때에는 황해,충청,경기의 수군을 모두 통괄하는 삼도동어영이 설치되었고, 방어사가 주둔했으며, 3백 리가 넘는 강화도의 둘레에다 진과 보를 12개, 돈대를 53개 쌓았음은 섬을 국방 요새로 활용했다.
이들 지역 대부분이 병인양요때 프랑스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던 곳이다. 당시 강화성은 2000여명의 수비군이 양헌수의 지휘로 방어하고 있었다. 무혈 입성한 프랑스군에 의해 읍민의 3분의 2가 참화를 당해 궁궐은 물론 민가의 태반이 소실되었다.
강화도는 섬 전체가 역사의 현장이고 문화 유적지로,우리나라에서 첫손 꼽히는 사적지이다. 민족의 시조 단군이 마니산 첨성단에서 제사를 지내며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 왔던 곳으로 우리 민족의 기본 정서가있는 곳이다.우리역사에서 강화도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으로 해전과 육전의 요충지였고,중국과 해상.육로 통로가 없었던 신라가 호시탐탐 이곳을 넘봤던 곳이다. 고려시대에는 몽고군의 침략으로 1232년 천도하여 39년간 줄기차게 저항 하면서 팔만대장경을 주조한 현장이고 조선시대에는 병자호란을 맞아 완전히 점령 당하는 오욕의 역사를 겪었다.
강화 는 선사 시대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 까지 역사가 이어져 가고 있는 산실로 신체에 비유 하자면 신체의 "배꼽" 자리로 생명이 잉태되어 태동하고,태어 난곳 이다,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록된 선사시대의 고인돌,단군왕검께서 하늘에 제를 올리던 마니산의 첨성단은 단군이래 역대 왕들의 제사를 드리던 제단이며 이러한 제천 전통은 근대까지 이어져 전국 체육대회 성화 채화지로 칠선녀에 의해 채화된 횃불을전국으로 봉송한다.
우리나라 개국과 함께 하는 역사의 고장이며 1232년(고종19년) 고려 조정이 몽고의 위압을 피하기 위하여 도읍을 이곳 강화로 옮겨 강도라 칭하고 광주 남경(서울)을 강도의 직활지로 합병 하였다. 고려 조정이 강화 천도와 더불어 여러 궁궐과 백사를 영건하고 내외성, 중성을 축조 하였으며 마니산 남쪽에는 흥왕이궁과 삼랑성,신지동에 가궐을 건조하고 선원사,혈구사등 많은 사찰을 창건 하면서 파란만장한 임시수도의 역사가 시작 되었다.
또한 팔만대장경, 고려청자 제작, 금속활자 주조등 민속문화의 황금기를 꽃피운 산실이다. 그후 39년 간 이나 끈질기게 항쟁을 계속 하다가 몽고와 협상하여 고려 조정의 존속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1270년 (원종11년)에 개경으로 환도 하였다.
이후 조선시대인 1627년(인조5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 일시 강화로 몽진 하였다가 100일만에 환도 하기도 했다. 강화의 역사에서 빼 놓을수 없는 이야기는 광성보 돈대 건너편에 보이는 손돌목에 관한 이야기 이다. 김포 반도와 강화도 사이의 해협인 염하(鹽河) 중간쯤에 손돌목이라는 곳이 있다, 고려,조선시대 영남과 호남,충청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실은 세곡선은 서해안 뱃길을 따라 올라와 손돌목을 거쳐 개경이나 한양으로 갔다.
고려 23대 고종이 몽골군 칩입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뱃길은 험했다. 배는 급류에 휩쓸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떠내려만 갔다.
급한 물살에 뒤집힐것 같은 배는 임금을 불안하게 했는데 뱃사공 손돌은 태연하게 노를 저어 험한 물살의 한가운데로 배를 몰아갔다. 뱃사공이 자기를 죽일것 같은 공포심에 빠진 임금은 뱃사공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게 아닐까 하는 망상에 빠져 저 자에 목을 베라고 명하는데 뱃사공 순돌은 바가지를 물에 띄우며 바가지가 흘러가는 곳으로 배를 저으라는 말을 마치고 죽임을 당했다. 배가 무사이 섬에 당도 하고서야 뱃사공에 마음을 알았으나 그는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니......
그후 손돌이 죽은 음력 10월20일에는 이곳에 큰 바람이 분다고 한다.사람들은 손돌의 한숨이 들리는듯 하다며 손돌의 "한숨" "손돌바람", "손돌추위"라 하며 이 물길이 손돌의 목를 벤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 부른다 참으로 가슴 아픈 민초의 이야기다. 광성보에서 마주 보이는 덕포진에 손돌의 무덤이 있다.
조선의 봉림대군은 세자인 소헌세자가 죽은후 "효종"으로 등극하여 강화도에 진,보를 설치 하는등 방비를 강화 하였고 숙종 때
도내성,외성의 수축과 5진7보와 53돈대를 설치 하였다. 병인 양요는 1866년(고종 3 )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탄압에 항거하여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하여 1개월 동안 강화성을 점거 했다가 철수 하면서 강녕전등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대량의 서적과 무기,보물, 은금괴 등을 가지고 중국으로 떠났다.
세계정세에 어두운 대원군은 초지진에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 정책을 더욱 굳히고 천주교박해에 박차를 가 하였다. 신미양요는 1871년 (고종 8) 미국이 불란서에 뒤이어 1866년 셔먼호를 빌미로 조선을 개방 시키려 무력으로 침략 하였고 ,1875년 일본군함"운양호가 9월20일 강화도 앞바다를 불법으로 침투하여 해안 경비를 서던 조선 수군의 방어적 공격을 받자 이에 함포로 공격을 가하고 영종진에 상륙하여 조선 수군을 공격하고 인적 물질적 으로 피해를 입혔다.
강화도 조약은 1876년 (고종13) 조선과 일본간에 체결된 수호조약으로 ,"한일수호조약,"병자수호조약" 이라고도 한다. 이 조약이 채결 됨을 시작으로 조선과 일본의 전통적,봉건적인 통문관게가 파괴되고 국제법적인 토대 위에서 외교 관계가 성립 되었다.
이 조약의 일본의 강압 아래서 맺어진 최최의 불평등조약 이라는데 특징이 있다. 국난을 극복한 강인한 민족의 저력과 문화를 이어받은 강화는 한반도 역사문화의 축소판으로 민족문화의 창달과 민족항쟁의 위협을 선양하고 호국정신의 함양을 위하여 1988년 9월 개관한 "강화 역사 박물관"으로 올라갔다.
4개의 전시실 에서는 이곳 강화의 지도를 비롯하여 선사시대의 움집과 돌도구,청동기의 농기구등과 고려때 만든 팔만대장 제작 과정등 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관을 돌아 내려와, 한곳에 모아져 있는 비석들에게 주던 시선을 거두어 연미정에 올랐다.
연미정은 개인 소유의 정자로 조강,그러니까 한강과 임진강 그리고 또 하나 의 강인 예성강이 염화( 바다 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정자로 서해에서 서울로 가는 배는 이 정자 아래 에서 만조를 기다렸다가 한강으로 올라 갔다고 한다.
썰물 때는 물이 빠져 나가는 흐름이 눈에 보일 정도로 물살이 세다고 하며,정자 앞에는 시커먼 갯벌이 펼쳐져 있는데 강화의 갯벌은 자연 그대로 남아있는 유일한 갯벌중 하나로 주변에 작은섬이 많고 한강, 임진강, 한탄강,예성강 등의 민물에 의해 흘러온 흙과 모래가 쌓여 대규모의 갯벌이 되었으며, 서쪽 해안을 따라 크게 발달 되었고 초지리를 시작으로 동막리,여차리를 거쳐 너비가90km로 지형적인 형태가 복잡하고 조석간만의 차가 9m 이상 높고 변화도 심해 생물들에게 다양한 서식지를 제공하고 있어 갯벌 체험을 하기 좋은 곳이며 칠게,공게등 다양한 게류가 많고,철새도 만날수 있다.
또한 미국 동부 조지아 해안, 남아메리카의 아마존 하구, 영국, 독일, 네델란드를 포함한 북해연안, 캐나다 동부 연안과 함께 세계 5대 갯벌의 하나로 꼽힌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여 한줄기는 서해로 또 한줄기는 강화 해협으로 흐르는데 흐르는 모양이 제비꼬리 같다 하여 연미정이라 하였다 한다.
연미정 뒤쪽으로는 군 초소와 철조망이 해안을 따라 이어져 분단 된 조국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름하여 군사 분계선,바다 건너편의 아름다운 곳이 북한 땅 이라 갈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연미정 양 옆에 아주 오래된 느티나무 두 구루가 연미정을 감싸듯 서 있는데 정묘호란때 이곳에서 원 나라와 강화조약을 체결하였으며,연미정 에서 바라보는 달맞이는 강화 8경의 하나 라고 한다. 이태백은 강에 떠있는 달을 잡으려다 강물에 빠져 죽었는데 바다에 부서지는 달빛에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 궁금하다.
다음 찿은 곳은 강화 고려궁지로 12년(고려 고종19) 몽골군에 칩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왕도를 강화로 옮긴후 1270년 (원종11) 화의를 맺고 개성으로 환도 할때 까지 39년 의 왕궁터 로 그 시대의 건물 모습이 전체적으로 남아 있지 않고 건물 기단과 3단으로 된 돌계단이 남아있어 후에 강화 유수부 건물을 세우고 1976년 3문의 출입문을 세우고 돌담을 돌려 국방유적으로 정화 하였다.
강화유수부 동헌은1627년(인조5)에 인조가 강화로 피신 했다가 돌아온뒤 설치 한 것으로 종 2품 관청으로 삼았고 1638년(인조16)에 유수 김신국이 개수 하였고,1769년(영조45)에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 이라 명명 하였고 현재는 명위헌과 이관당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당호 는 당시 명필이며 송나라 미남궁체를 잘쓰는 당시의 명필 이자 학자였던 윤순(1680ㅡ1741)의 필적이 오늘에 남아 있고 여러차례 개조하여 원형은 남아 있지 않다.
외규장각은 782년 2월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도서관으로,왕랍 도서관의 규장각 부속 도서관 역활을 하였고 설치 이후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를 비롯한 1000여권의 서적을 보관 하였으나 1866년(고종3)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습격하면서 왕실의 기록보존소였던 규장외각의 일부 서적을 약탈하고 나머지는 불에 타 없어졌다.
"한불관계자료"에 실린 당시 프랑스함대 지휘관인 로즈제독이 프랑스 해군성 장관에게 보낸 보고서를 보자. "겉으로 보기에 쾌 가난해 보이는 강화읍에는 각하께 보내들릴 만한 책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조선 국왕이 간혹 거처하는 저택(행궁을 말함)에는 아주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수많은 서적들로 가득차있습니다. 위원회는 공들여 포장한 340권을 수집했는데 기회가 닿는대로 프랑스로 발송 하겠습니다. 무게가 대단하여 왕립우선회사로 보내 드릴수 없음이 유감스럽습니다.
세계 기록유산에 등록되어 있는 직지심체요절은 상하 두권으로 상권은 없어지고 하권은 프랑스 파리 대학 도서관에 있다. 현재 조선왕조실록은 서울대 규장각에 있다.
성공회 강화성당은 "성베드로와 바울 성당' 이라고도 한다. 1896년(고종33)강화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이 세레를 받은것을 계기로 1900년 11월15일 강화에 한국 최초의 성당을 세우게 된다. 건립자는 한국 성공회 초대 주교인 존 코르페 (한국명 고요한) 이다.
건양1년(1896년)에 강화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이 세레를 받은 연유로 이곳에 성당을 세웠다.
이후 왕신부는 본국으로 돌아가고 1896년 조마가(Mark N, Trollpe)신부가 부임하여 강화읍에서 김마가(희준)을 전도 하였다.
1897년에는 영화원이라는 보육원을 개설하고 서양 의술로 많은 환자를 돌보았으며 1900년 이곳에 현재의 한식중층건물을 완공하였다. 정면 4칸,측면 10칸 규모의 2층 건물로 목골조를 사용하고 벽돌을 쌓아올린 기와집이며 2층은 바닥이 없는 통풍구조로 내부는 로마의 바실리카 양식을 본떠 지은 것으로 외부는 불교 사찰 분위기를 풍긴다.
한국에 서양건축이 도입되던 시기의 초기 건축으로 한국 그리스도교 역사의 한 단면을 볼수 있다. 특히 서양식 장식이 거의 없는 순수한 한식 목조건물 이면서 지붕과 내부를 교회 기능에 맞게 꾸몄으며 교리와 예배의식, 신앙의 상징물 등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문화를 살리려고 노력한 흔적을 엿볼수 있는 건축물이다.
1910년대 까지 강화 지역 선교의 중심이 되었으며 성공회 신학교인 성미가엘신학교가 이곳에 설립된후 성공회 한국선교의 중심 역활을 하였다. 한국인 으로서 첫 성공회 사제가 된 김희준 신부를 배출 하였다. 단청을 한 성당안 으로 들어가는 대문은 정가운데 검정색의 십자가가 있고 붉은색과 푸른색의 태극무늬가 그려져 있어 토착화로 지었다는 성당에 역사를 알수 있었다. 성당 마당엔에는 종각에 종이 걸려 있었고,알마수녀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건물은 궁궐의 대목수가 지었으며 나무는 백두산 나무를 사용 했으며 건물의 모양은 노아의 방주처럼 배 모양 으로 추녀의 무늬가 아름다웠다.
성공회 강화 성당 이웃에는 조선의 25대 임금 이 된 강화도령 이원범이 철종이란 이름으로 왕위에 오르기전에 살던 잠저가 있었다.이름하여 용흥궁의 주인 이원범범은 사도세자의 증손자, 그러니까 정조의 아우 은언군 인의 손자로 안동 김씨들은 헌종이 사망하자 19세의 강화도령을 왕위에 앉혔는데 철종은 자신을 데리러 궁에서 사람이 나올때까지 자신이 왕족인걸 몰랐다 한다.
조부 인 은언군 일가가 천주교를 믿는 바람에 순조 원년 (1801) 에 일어난 신유사옥 당시 삼백여 명의 신도들이 처형을 당 할때 왕족인 관계로 처형하지 않고 사약을 내렸다. 조부모가 다 죽고 일가는 몰락하여 강화도로 들어가서 가난한 농부가 되고 만것이다
헌종은 후사 없이 돌아가고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한창때 인지라 임금은 똑똑하면 곤란하고 배후세력이 없는 인물로, 그러나 왕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순종의 인물이었던지라 안동김씨들의 저울질로는 이 이상 가는 적격자가 없었던 것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원범이 왕이 되던 그해 1849년 봄부터 한 줄기 빛이 원범이 살던 초가집쪽으로 비추어서 용이 일어날 조짐이라 하였다. 그해 6월 봉영단 일행이 강화도에 도착하기 하루전에 그 빛이 사라졌다고 해서 용이 일어난 집 " 용흥궁"이라 불렀다 한다.
19세 된 어느날 대궐에서 봉영사 정원용 일행이 휘황찬란한 모습으로 그를 데리러 가니 놀란 이 강화도령 이원범은 뒷간으로 숨었다. 뒷간에서 끌려 나온 그에게 정원용이 대왕대비 순조비 김씨의 교서를 바치니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어려운 글자가 많아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궁색한 형편에 천자문도 제대로 배웠는지 모를 일이다.
이리하여 농사군 원범은 19살 하루 아침에 임금이 되어 조선의 25대 임금으로 왕위에 오른 철종은 창덕궁에 14년간 기거 하면
서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고자 했으나 안동김씨의 세도에 밀려 포기한후 술과 여자로 세월을 보내다 1863년 12월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일설에는 안동김씨들이 임금이 정치에 관여하면 곤란 하니까 밤낮 없이 주색에 빠지게 하여 일찍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지는데 비빈만 8명 있었으나 궁인 범씨 소생의 영혜옹주가 하나있어 금릉위 박영효에게 출가 하였으나 후사가 없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용흥궁 마루에 앉은신 이덕완 교수님,이동숙.구경숙 두 동우들이 한컷 잡으려는 찰라"나도,"하며 교수님 곁에 끼어 앉으니 구경숙 왈 , "후궁" 이 어딜 ....
원비를 두고 무슨 무엄한 말인고?. 마당에 서 있던 동우들, 와-아 !
선유라 작사,이서구 작곡.박재란이 부른 강화도령이라 한번 불러볼까
강화도령
두메산골 갈대밭에 등짐지던 /강화 도련님,강화 도련님
도련님 어쩌다가 이고생을 하시나요 /음~ 말도마라 사람팔자
두고봐야 아느리라 두고봐야 아느니라
음지에도 해가 뜨고 때가 오면/ 꽃도 피듯이 꽃도 피듯이
도련님 운수좋아 나랏님이 되셨구나 / 음 ~ 얼싸 좋다 좋구 좋구 말구
상감마마 되셨구나,상감마마 되셨구나.
구중 궁월 삼천 궁녀 넋을 잃은? 강화 도련님,강화 도련님
산골에서 뛰고 놀든 그 시절이 좋았대두/음 상궁 내시 귀찮구나
내맘 대로 놀아보자,내맘 대로 놀아보자
TV가 없던 시절 라듸오 연속극에 주제가로 불렸졌던 강화 도령의 노래다.
강화산성 서문 건너편 큰길 옆에 있는 연무당으로 이동했다. 연무당은 1876년 강화조약이 최종 조인된 장소이었다.체결괸 된 강화도 조약에 의해 우리나라는 부산,인천, 원산을 일본에 개항 하였다. 고종 7년에 창건된 연무당이 비좁아 동소문 밖으로 옮겼다. 내성서문 남쪽에 당을 세우고 그 전면에 군사 훈련장 인 조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조련장 위쪽으로는 아치형의 석수문이 보인다.
강화 석수문은 강화산성의 내성에 연결되어 강화읍을 통하여 흐르는 동락천을 가로 지르는 3개의 월단 수문으로 되어 있는데 각 수문은 화강암을 다듬은 선단석을 4ㅡ5 단으로 쌓아 이를 교각으로 삼고,그 위에 아치 사이에도 다듬은 무사석으로 메워 올려서 아치석 윗돌과 평평하게 한다음 그 위에 흙을 깔았다. 1910년 갑곳리 선착장을 신설하고 그 옆 동락천 하구의 교량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옮겨 시설 하였다가 1977년에 다시 지금 위치에 복원 하였다.
첨하루는 첨(쳐다볼첨,빛날화,다락루) 글자로 연무대 건너편에 있는 강화산성 서문으로 조선 숙종때 만들어 졌다 한다 연무대와 첨화루가 자리해 있는 장소는 많은 차량이 과속으로 달리는 위험한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
강화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부족사회의 지배층의 무덤으로 강화지역에는 수많은 고인들이 산재해 있다. 특히 하점면 부근리의 고려산 인근에 집중 분포하며 대부분이 북방식 고인돌에 속하는 구조로 네 개의 판석을 세워 장방형의 석실을 만들고 그 위에 편평한 돌을 얹었다.
강화의 인물중 빼 놓을수 없는 구한말 어지러운 세상에 불의와 당당히 맞서 시대에 중심을 세우고 살다간 문장가 이건창의 집을 지나치게 되었다. 조선후기의 문인 이건창(1852ㅡ1898)의 집으로 호는 영재,본관은 전주이고 개성에서 아버지 이상학, 어머니는 윤치구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이조 판서를 지낸 이시원(是遠) 이었다.
건승,건면및 종형제인 건방등과 함께 할아버지로 부터 양명학을 전수 받았으며 강위 김택영,황현등과 교우했다. 1866년(고종2) 14 조선조 최영소 급제자로 문과에 급제 하였으나 나이가 너무 어려 조정에서는 너무 일찍 급제 하였다 하여 4년간 학문을 더 익히게 한 뒤 18세가 되던해인 1870년 홍문관직 벼슬을 제수했다.
서장관으로 뽑혀 청나라에 가서 청의 문장가인 황각,장가양,서보등과 교유했으며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23세 때는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가 관찰사 조병식의 비행을 조사하고 임금에게 직접 보고하여 탐학을 탄핵했다가 조병식의 사주에 의한 무고로 벽동군에 유배 되었다가 1년 뒤 풀려나 공사를 철저히 수행 하다가 권세가들의 모함으로 귀양까지 가게되자 벼슬을 멀리했다.
그러나 1882년 왕의 간곡한 부름을 받고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 관리들의 비행을 파헤치고 흉년을 당한 농민들의 구휼에 힘쓰는 한편 세금을 감내해 주기도 했다. 그뒤 부모상을 당하여 6년간의 잡상을 마치고 1891년 한성부조윤이 되었다.
이때 외국인이 한양의 가옥과 토지를 매점하느 일이 있자 이를 금지해야 한다는 상소를 옮겨 청국공사의 항의를 받았으나 나는 내 백성을 사랑하는것이 외국과 맺은 조약과는 무관한 일" 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청의 압력으로 보성으로 유배 되었다가 풀려났다.
대포로 쳐서 큰 선박을 부러트려
양놈의 살갗을 저며 육포로 만들었네
요기(妖氣)가 확 틔어 바다의 기운이 맑아지니
백성들은 편안하고 즐겁게 누에치며 밭을 갈았네
이건창의 문집 "명미당" 송희준 역
1893년 함흥부에 안핵사로 내려가 난민을 다스리고 관찰사의 잘못을 낱낱이 조사하여 파면시켰다.
갑오개혁 이후 새로운 관제에 의한 각부의 협판,특진관등에 제수 되었으나 모두 사퇴 하였으며 1896년 해주관찰사에 제수 되었을때도 사양 하다가 고군산도로 유배 되었다. 특지로 2개월 뒤에 풀려나 향리인 강화에서 은거하다 47세로 죽었다.
이건창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였고, 청렴결백하여 생활은 늘 가난 하였다.조선후기 4대 시인을 말할때 을사늑약시 약먹고 순절한 매천 황현(1855. 12.11 ~1910. 9.10)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청으로 망명한 창강 김택영(1850~1927), 강위 (1820~1927)와 이건창을 꼽는다.
문집으로 "영미당집"과 "당의통략"이 있다. 크지 않은 초가집은 아담함,소박함,정겨움,선비의 꼿꼿 함을 느끼게 하였고, 집앞 오래된 향나무는 드높은 선비의 기상이 어려 있는듯 하였다.
매천의 절명시
매와 짐승 슬피 울고 바다와 산도 찡그린다
무궁화 이 세상이 망하고 말았구나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옛일 생각하니
세상에 글하는 이로 살기 참으로 어렵구나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이 절명시를 써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