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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멸망 최후의 광경
백제멸망의 원흉 예식진 형제
(역사와 경계93(2014.12), 1~29쪽)1)
권 덕 영
부산외국어대학교 역사관광학과 교수/ dykwon@bufs.ac.kr
목차
Ⅰ. 머리말
Ⅱ. 사비성 전투
1.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
2. 사비성의 함락
Ⅲ. 반역과 투항
1. 예씨 일족과 웅진
2. 웅진성의 반란
Ⅳ. 죽은 자와 산 자
1. 망산의 유혼
2. 예씨의 영달
Ⅴ. 예씨 형제의 변명-맺음말을 대신하여
국문초록
최근 중국 산시성 시안시에서 백제 유민 예씨 일족 묘지4점이 연이어 발굴이었다. 이들 묘지에는 예씨의 유래와 선조들의 활동을 비롯한 다양하고 흥미로운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백제가 멸망할 당시 예씨 일족의 역할을 소상하게 소개함으로써, 백제 멸망 최후의 광경을 보다 생생하게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서기660년7월에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공격하자, 백제 의자왕은 사비성을 버리고 웅진으로 달아났다. 당시 北方의 治所로서 ‘군사도시’였던 웅진은 예씨 일족의 세력 근거지였다. 의자왕을 맞은 예군과 그의 아우 예식진은18만 명 에 이르는 나당연합군에 대적할 수 없다고 여기고, 웅진방령으로 추정되는 예군이 주동이 되어 반란을 일으켜 의자왕을 붙잡아 연합군에 넘기고 투항하였다.
역사와 경계
신라와 당 연합군을 이끌고 백제를 멸망시킨 소정방은 의자왕과 왕자들을 비롯한1만2천여 명의 백제 포로를 데리고 당으로 돌아갔다. 당에 도착한 의자왕은 당고종 앞에 포로로 끌려가 치욕을 당하고 얼마 후 그곳에서 죽어 낙양 북쪽의 邙山에 묻혔다. 반면 의자왕을 사로잡아 당에 바친 예군과 예식진 형제는 당으로부터 높은 관직을 받고 당 왕조를 위해 봉사하며 영화를 누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자손들도 부귀영화를 누리며 天壽를 다하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에는 약탈과 파괴 그리고 대량의 인명살상이 수반된다. 특히 고대의 전쟁은 약탈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사비성을 함락한 나당연합군이 웅진을 공격하면 웅진성은 중과부적으로 방어가 불가능하다. 전쟁에서 패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간다. 게다가 당시 의자왕은 이미 민심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씨 형제는 투항하는 길밖에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백제 멸망에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는 점에서 후대의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Ⅰ. 머리말
지난2006년에 중국 허난성 洛陽市의 한 골동품 가게에서 백제 유민 禰寔進의 묘지가 수습되었다. 董延壽와 趙振華가 처음 학계에 소개한 「예식진묘지명」은1) 사료부족에 허덕이던 백제사 연구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거니와, 백제에 여덟 가문의 큰 성씨 곧 大姓八族외에도 대대로 좌평을 역임한 예씨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 자료를 통해660년7월에 의자왕을 이끌고 당에 항복했다는 禰植이 바로 묘지의 주인공 예식진과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2) 「예식진묘지명」이몇가지 새로운 사실을 전해주기는 하나, 묘지의 전체 글자가288자에 불과해 백제 멸망을 전후한 시기 예식진을 비롯한 예씨 일족의 존재양태에 대한 또 다른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던 중2010년 봄에 산시성 西安市文物保護考古硏究所는 시안시 長安區 郭杜鎭에서 당나라 무덤3기를 발굴했는데, 그 가운데 두 무덤에서 예식진의 아들 禰素士와 손자 禰仁秀의 묘지가 각각 출토되었다.3) 그리고2011년7월에 王連龍이 산시성 시안시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이는 예식진의 친형 禰軍의 묘지를 소개하였다.4) 최근 몇 년 동안에 백제 유민 묘지가4점, 그것도 예씨 일족3대의 유물이 연이어 발견된 것은 유례가 없던 일이다. 이들 묘지에는 예씨의 유래와 선조들의 활동을 비롯한 다양하고 흥미로운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백제 멸망 당시 예씨 일족의 역할을 소상하게 소개했다는 점이다.
중국과 한국의 여러 사서에 의하면, 서기660년7월18일에 백제 의자왕이 왕자와 대신들을 거느리고 나당연합군에게 투항했다고 했다. 그러나 모두 매우 간략하게 묘사하였으므로 그 내막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침 중국 시안에서 발견된 예씨 일족 묘지가 의자왕의 투항과정을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어, 백제 멸망 최후의 광경을 보다 생생하게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각종 문헌자료와 최근에 발견된 예씨 일족 묘지를 통하여 백제 멸망을 전후한 시기의 긴박했던 상황을 재현해보고, 멸망 후 의자왕과 예씨 일족의 행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사비성 전투
1.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
서기642년8월에 백제 의자왕이 군사를 보내 大耶城(지금의 경남 합천군 합천읍)3)을 함락하고 대야주 도독 품석과 부인 고타소랑를 살해하였다. 이 사건은 신라 조정을 긴장과 울분으로 몰아넣었다. 특히 김춘추는 딸과 사위가 몰살당한 대야성 전투의 패배를 가문의 치욕과 국가적 위기로 생각하고, 고구려에 들어가 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김춘추의 요청을 거절했음은 물론 그를 감금하고 투옥하였다. 김춘추는 임기응변으로 겨우 고구려를 탈출하여 신라로 돌아와 다시 일본을 방문하였으나, 일본 방문 효과 역시 여의치 않았다. 이에 그는 비담과 염종의 난이 마무리되고 진덕왕이 즉위한647년에 아들 文王등을 데리고 당에 들어갔다.5) 당에 들어간 김춘추는 태종에게 대야성 전투의 참패에서 비롯된 신라의 위급한 상황을 설명하고 군사를 요청하여 허락받았다. 이른바 나당군사동맹을 체결한 것이다.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은 신라와 당이 힘을 합쳐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 땅은 신라가 갖고 고구려 땅은 당이 차지하기로 약속하였다.6) 당과 군사동맹을 맺은 김춘추는 수개월간 당에 머물며 국학에서 釋奠儀式과 강론을 참관하고 당의 각종 문물을 견문하였다. 아울러 그는 신라의 章服을 바꾸어 중국제도에 따르기를 청하자 당태종이 김춘추에게 진귀한 의복을 내려주었다. 이에 김춘추는 문왕을 숙위로 남겨두고 신라로 돌아왔다. 김춘추가 귀국한 이후 신라는 곧바로 당의 연호와 衣冠制를 채용하고 빈번히 사절을 파견하는 등 당과 맺은 군사동맹을 유지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다. 649년5월에 당 태종이 죽고 고종이 즉위하자 신라는 金法敏을 당에 보내 道薩城(지금의 충북 괴산군 도안면)에서 백제군을 격파한 사실을 당에 알렸고, 고종 즉위에 대한 축하와 당 제국의 위대함을 노래한 「五言太平頌」을지어 바쳤다. 그리고 신라 왕족 자제들을 교대로 김춘추와 당 태종의 밀약 내용은 당시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권28) 의자왕20년조 뒤에 이어진 龍朔원년(661) 3월조에,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을 이끌던 道琛과 福信이 “듣건대 당이 신라와 서약하기를 백제인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죽인 후에 우리나라[백제]를 신라에 넘겨주기로 하였다” 운운 한 점에서 알 수 있다.5) 김춘추와 당태종 사이에 맺은 군사동맹에서는 먼저 고구려를 토벌한 다음 백제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당의 고구려 토벌이 번번이 실
패하자, 당은 고구려의 동맹국이자 후방 지원자인 백제를 먼저 없앤 후에 고구려를 토벌하기로 전략을 바꾸었다. 그 사이 신라에서는 진덕왕이 죽고 무열왕 김춘추가 즉위하였다. 신라는 일찍이 당과 군사동맹을 체결하였으나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이 여전하였으므로 무열왕은 당의 한반도 출병을 학수고대하였다. 당에 출병을 요청했으나 회신이 없어 무열왕이 애태우자, 이미 죽은 長春과 罷郞이 나타나 출병 사실을 미리 알려주었으므로 그 자손들에게 후한 상을 내리고 절을 세워 명복을 빌어주었다는 이야기는7) 무열왕의 초조한 심정의 일단을 보여준다. 그런데 마침660년3월에 당 고종이 백제 토벌을 명하여13만 명의 당나라 군사가1,900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백제로 향하였다.
사실 당은659년 하반기에 이미 백제로 출병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당이 백제 공격의 정보노출을 막기 위해659년 윤10월에 長安(지금의 산시성 시안시西安市)에 들어간 일본 견당사 津守吉祥일행을 그곳에 유폐시켰다가 정벌이 끝난660년9월에 돌려보냈고,8) 659년11월에 형국공 蘇定方을 신구도총관으로 삼았다는 기록을9) 통해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이 이때 백제 정벌을 단행한 것은 신라가 제공한 백제의 국내사정에 대한 정보와 무관하지 않다. 백제 의자왕은 즉위15년(655) 이후 정치를 전횡하고 사치와 환락에 빠져, 지배층이 분열되고 민심이 흉흉하였다. 백제의 혼란한 정세를 간파한 무열왕은 이때를 백제 정벌의 좋은 기회로 여기고659년4월에 김인문을 당에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다. 신라로부터 백제의 불안한 정치상황을 전해들은 당 고종은 비로소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고 김인문을 신구도부대총관으로 삼아 백제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660년3월에 백제 정벌의 명을 받은 소정방은 대군을 이끌고 산둥반도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成山을 출발하여 황해를 가로질러6월에 德物島(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도)에 도착하였다. 당군은 덕물도에서 김법민의 영접을 받고 두 나라 군사가 합류할 지점과 사비성 공략 기일을 협의한 후, 황해연안을 따라 내려가7월9일 백강 하구의 伎伐浦 부근에 상륙하였다.
기벌포는 지금의 금강 하구의 충남 서천군 장항읍 장암리에 있던 포구로 추정되거니와,10) 의자왕의 실정을 간언하다 옥에 갇힌 成忠과 유배당한 興首가 당나라 군사들이 기벌포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야한다고 역설했듯이, 기벌포는 백제의 왕도인 사비성의 咽喉와 같은 곳이었다. 물론 의자왕은 이들의 말을 새겨듣지 않았으나, 사비성의 관문인 기벌포의 전략적 가치를 잘 알고 있던 백제는 그곳에 상당수의 군사를 배치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상륙을 저지하는 수천명의 백제군을 물리치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사비성 남쪽30리[一舍] 지점에 진을 치고 신라군을 기다렸다.
한편 당이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보냈다는 소식을 들은 신라 무열왕은660년5월26일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왕도를 출발하여6월18일 南川停(지금의 경기도 이천시)에 이르렀다. 남천정에서 태자 김법민이 병선100척을 이끌고 덕물도로 가서 당군과 작전을 협의하고 돌아온 후, 무열왕은 今突城(지금의 경북 상주시모서면 백화산고성)에 머물고 김유신은 신라군을 거느리고 탄현을 지나 황산벌로 향하였다. 당과 신라가 남북에서 협공하는 상황에 직면한 백제는 좌평 忠常, 달솔 常永과 階伯에게 결사대5천 명을 주어 황산에 나아가 신라군을 막도록 하였다. 계백 일행은 미리 황산벌에 도착해 험한 지형을 골라3곳에 진영을 설치하고 신라군을 막아섰다. 신라군은 수적으로 월등히 우세했으나, 결사의 의지를 가지고 대항하는 백제군에 계속 패하였다. 이에 김유신은 신라군의 사기를 올리고 마음을 격동시키기 위하여 盤屈과 官昌을 희생의 제물로 삼아 신라군을 독려하여, 마침내 백제군을 깨뜨린 후 황산벌을 지나 당초 약속한 날짜보다 하루 늦은7월11일 사비성 남쪽에서 당나라 군사와 합세하였다. 이로써 나당연합군의 사비성 진공 준비가 마무리되었다.
2. 사비성의 함락
당초7월10일에 양국 군대가 합세하기로 하였으나 신라군이 황산벌전투의 고전으로 행군이 지체되어 하루 늦게 도착하였다. 나당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소정방은 약속기일을 어긴 죄로 督軍 김문영을 처벌하려하자 김유신이 강하게 반발하였으므로 취소하였다. 황산벌 전투의 고전과 김문영 처벌을 둘러싼 나당간의 신경전을 비롯한 우여곡절 끝에 신라와 당의 군사가 합세하여 사비도성으로 진공하였다.
나당연합군은 당군13만 명과 신라군5만 명이 합한18만 명에 이르는 대규모 군대였다. 660년7월12일에 나당연합군이 네 길로 나누어 일제히 사비성을 공격했다는 삼국사기(권7) 기록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나당연합군은 모두4개 군단으로 나뉘어 편성되었다. 그런데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5만 명이 하나의 전투 단위였을 터이므로, 13만 명의 당나라 군사는 각각4만여 명 규모로 나뉘어3개의 군단으로 편성되었을것이다. 그런데 당고종이 출병 조서를 내릴 때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좌위장군 劉伯英, 우무위장군 馮士貴, 좌효위장군 龐孝泰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도록 하였다.11) 그렇다면 유백영, 풍사귀, 방효태가 각각 당나라 군단 하나씩을 인솔하지 않았을까 한다.12)
7월12일에 김유신을 비롯한 유백영, 풍사귀, 방효태가 이끄는 나당연합군4개 군단이 각 방향에서 일제히 사비 도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사비 도성은 시가지 전체를 에워싸는 羅城과 현재 유적이 확인되지 않지만 궁궐과 주요 관부를 감싸는 宮城, 그리고 비상시에 왕이 피난할 수 있는 배후 산성인 扶蘇山城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연구에 의하면, 부소산성은 공주 公山城과 입지조건이 유사할뿐더러 翰苑에인용된 括地志의백제 왕성에 대한 서술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을 들어 백제 왕궁은 부소산성 안에 있었다고 한다.13) 이것이 사실이라면, 부소산성이 궁성에 해당하므로 사비 도성은 나성과 궁성인 부소산성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나성과 궁성은 백제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었다. 사비 나성은 부소산성을 기점으로 그 동쪽의 靑山城을 경유하여 석목리에 이르는 북나성과 능산리 서쪽 산에서 필서봉을 경유하여 백마강에 이르는 동나성이 확인되고, 서쪽과 남쪽은 백마강이 자연적인 해자 역할을 하였으므로 인위적인 축성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북나성과 동나성은 흙으로 기반부를 다지고 그 위에 돌을 쌓아 성벽을 조성했으며 총 길이는 약6.3㎞에 이르는데, 발굴 결과 나성 곳곳에서 門址와 將臺址가 확인되었다. 문지는 북나성 일대에서1곳 동나성 일대에서5곳이 확인되었고, 장대지는 동나성 부근에서3곳 확인되었다.14) 그 가운데 능산리 일대에 위치한 동나성 제3문지는 당시 사비 도성을 출입하는 중심 관문역할을 하던 동문이 있던 곳으로 보인다.15)
한편 부소산성은 왕궁지로 추정되는 관북리 북쪽에 위치하며 현재의 부여읍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자리한 둘레2,495m에 이르는 포곡식 산성이다. 1980년대 이후 부소산성에 대한 집중적인 발굴 조사로 산성의 규모와 각종 유지가 속속 드러났는데, 성벽은 판축공법으로 축조되었고 출입문으로는 동문, 남문, 북문이 있었으며 성벽 중간 중간에 雉가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남문지는 관북리 일대에서 산성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잘 다듬은 판석 계단시설이 확인되며 다른 문에 비하여 규모가 큰 점에서 부소산성의 중심 성문이었을 것으로 판단된 다.16) 전술했듯이 신라와 당은 사비성 남쪽30리 지점에서 합세하여 네 방향으로 나누어 사비도성을 공격하였다. 여기서 말한 ‘사비성 남쪽30리’가 구체적으로 어디쯤인지 알 수 없을뿐더러17) ‘30리’가 나성을 기준으로 한 거리인지 아니면 궁성에서의 거리인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7월12일에 나당연합군이 도성을 포위하기 위하여 소부리 벌판으로 나아갔다고 한 점으로 보아 그곳이 나성 바깥쪽이었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이때 나당연합군의 첫 번째 공격 목표는 왕성 함락의 제1차 관문인 사비 나성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면 사비성 남쪽에 주둔한 나당연합군은 어느 방향으로 사비 나성을 공격해 들어갔을까? 지금의 능산리 일대에 있던 동문은 사비 나성의 가장 중요한 출입문이었고 외부와의 왕래가 비교적 용이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네 방향으로 진격한 나당연합군 가운데 최소한 하나의 부대는 능산리 방면으로 진격했을 것이다. 백제는 모든 병력을 모아 나당연합군에 대항했으나1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나성 방어에 실패하였다. 하루 만에 사비 나성을 깨뜨린 나당연합군은 왕이 있던 부소산성으로 포위망을 압축해갔다. 이에 백제는 차례로 좌평 覺伽와 상좌평 아무개 그리고 여러 왕자들이 여섯 좌평을 이끌고 나와 당군의 철수를 빌었으나 나당연합군은 모두 거절하고 왕성을 압박하였다.
7월13일 백제 의자왕은 성이 곧 함락될 것을 예견하고 왕자 孝를 비롯한 몇몇 측근과 함께 밤을 틈타 북쪽의 웅진성으로 피신하였다. 조선 후기 김정호가 제작한 청구도에따르면, 조선시대 부여와 공주는 육로와 수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육로는 금강을 오른쪽에 끼고 동북쪽으로 龍田驛과 蒙道面을 지나 鼎峙고개를 넘어 半灘面利仁驛을 거쳐 공주에 다다르고, 수로는 금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 곰나루에 도달할 수 있다. 삼국시대 사비와 웅진 사이의 교통로도 조선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나당연합군이 겹겹이 에워싸고 사비성을 공격하고 있던 상황에서 의자왕 일행이 성문을 나와 육로를 통해 웅진으로 갔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의자왕 일행은 부소산성 아래의 금강을 따라 배를 타고 웅진으로 가지 않았을까 한다.
의자왕이 왕성을 떠나자 둘째 아들 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성을 굳게 지켰다. 이때 태가 마음대로 즉위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태자의 아들 文思와 왕자 隆은 측근들과 더불어 밧줄을 타고 성밖으로 나가고 이어서 백성들이 그 뒤를 따르자, 왕자 태는 어쩔 수 없이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이로써 사비 도성은 나당연합군에 의하여 점령되었다.
Ⅲ. 반역과 투항
1. 예씨 일족과 웅진
잘 알려져 있듯이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공격하여 漢城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이자 문주왕은475년에 남쪽으로 내려와 웅진에 도읍하였다. 이후 성왕16년(538)에 사비로 천도할 때까지 웅진은60여년 동안 백제의 수도로서 정치, 군사,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그리고 사비 도읍시기에 웅진성은5方가운데 北方의 치소였고, 백제 멸망 후 각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나 당나라 군대가 주둔하던 사비성을 위협하자 당은 방어에 유리한 자연조건과 도성으로서의 인프라를 갖춘 웅진으로 거점을 옮겨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옛 백제지역을 통괄하였다. 백제의 方은 일종의 軍區로서 군사적 성격을 강하게 띤 지방조직이고18) 웅진도독부에는 줄곧 당나라 군대가 주둔하였다. 이런 점에서 문주왕이 급하게 남천하여 웅진을 수도로 정한 것은 웅진의 군사적 중요성이랄까 방어체제의 공고함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성왕 때 수도를 사비로 옮겨갔으나 웅진은 여전히 군사적 성격이 강한 도시로 남아있었다. 사비성이 함락되기 직전 의자왕 일행이 웅진으로 피신한 것도 ‘군사도시’웅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전술했듯이 최근 중국 산시성 시안시 郭杜鎭의 당나라 고분에서 백제유민 예군과 예식진, 예소사, 예인수3대의 예씨 일족 묘지명이 출토되었다. 이들 묘지에 의하면, 예씨 일족은 원래 중국에서 건너와 熊津 혹은 熊川에 정착하여 백제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선조들의 행적과 그들이 웅진에 정착한 시기를 묘지마다 약간씩 다르게 서술하였다. 「예군묘지명」에서는중국에 뿌리를 둔 선조가 永嘉(307∼313) 말에 난리를 피해 동쪽으로 가서 마침내 집안을 이루었다 하였고,「예소사묘지명」에서는초나라 낭야인이었던 禰嵩이 북위와 남송 사이의 전란 와중에 淮泗곧 회수와 사수 유역에서 배를 타고 遼陽을 거쳐 마침내 웅천
사람이 되었다 하였으며, 「예인수묘지명」에서는후한 때의 平原處士 禰衡의 후손인 내주자사 禰善이 수나라 말기에 배를 타고 백제로 도망해 왔다고 하였다. 선조들의 이름과 활동도 묘지마다 차이를 보인다. 「예식진묘지명」에서
는 그의 조부는 좌평 譽多이고 아버지는 좌평 思善이라 하였고, 「예군묘지명」에서는증조는 福, 조부는 譽, 아버지는 善으로 모두 좌평의 벼슬을 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예소사묘지명」에서는증조는 대방주자사 眞이고 조부는 내주자사 善이며 아버지는 歸德將軍을 역임한 寔進이라 하였고, 「예인수묘지명」에서는증조는 내주자사 善이고 조부는 寔進이며 아버지는 素士라 하였다. 이처럼 예씨 일족 묘지에서는 그들의 출자가 전반적으로 매우 혼란스럽다.예씨의 시조와 백제 도래시기 그리고 선조의 이름과 관작이 묘지마다 다르다는 것은 예씨 가문이 후대의 족보와 같은 성문화된 家系譜를 갖고 있지 못하고 단지 구전으로 계보를 기억해 왔기 때문에 생긴 결과가 아닐까 한다.이런 점에서 예씨 일족 묘지에 기록된 그들의 출자, 특히 먼조상들의 이야기는 정확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부정확한 구전과 當代에 형성된 역사의식에 의하여 만들어진 측면이 많다고 하겠다. 따라서 웅진 예씨의 조상이 실제로 중국에서 건너왔는지 확신할 수 없다.19)
그럼에도 예씨 일족 묘지에서는 일관되게 자신을 웅천 혹은 웅진 사람이라 하여 지금의 충남 공주지방을 예씨의 근거지랄까 貫鄕으로 인식하였다. 「예식진묘지명」에서는그를 백제 熊川人이라 하였고, 「예군묘지명」에서는熊津嵎夷人이라 하였으며, 「예소사묘지명」에서는7대조 때부터 熊川人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예씨 가문이 웅진을 기반으로 백제의 지방세력으로 성장했음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중국도 마찬가지지만, 우리나라의 성씨는 대부분 특정 지역을 세력 근거지로 삼아 대대로 거주하며 가문을 형성·유지하였다. 백제도 예외가 아니어서 沙氏는 사비지역을 세력 기반으로 하였고,20) 苩氏는웅진지역을 그들의 근거지로 삼았으며, 燕氏는 지금의 충남 온양지방인 湯井城을 세력 근거지로 삼았다.21) 그 중에서 웅진의 세족 백씨는 동성왕 때 苩加가위사좌평이 됨으로써 그 위세가 최고조에 달했거니와, 그는 정치를 농단하고 급기야 동성왕을 시해한 후 加林城(지금의 충남 부여군 임천면 성흥산성)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동성왕을 이은 무령왕은 백가의 반란을 평정한 후 여러 귀족들을 골고루 등용하여 세력균형을 유지했는데, 이때 웅진의 백씨 세력이 몰락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를 계기로 예씨가 백씨를 대신해 웅진의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지 않았을까 한다.22) 예씨 일족은 사비 천도 후에도 그 세력을 여전히 유지하였다. 예식진과 예군 묘지명에 의하면 그들의 증조 福, 조부 譽多, 아버지 思善은 모두 좌평을 역임했는데, 예식진 혹은 예군의 생몰연대로부터 그들 선조의 활동시기를 추산하면 모두 사비시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23) 그들이 과연 묘지에서 말하는 좌평을 실제로 역임했는지 다른 자료에서 확인할 수 없으나, 웅진에 터를 잡고 성장한 예씨 일족은 사비 천도 후에도 막강한 세력을 유지했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아울러 나당연합군이 쳐들어온 의자왕 말년에 웅진에는 예씨 일족의 영향력이 강했을 것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사비성 함락에 직면한 의자왕이 웅진으로 피신한 것은 ‘군사도시’ 웅진의 세족인 예씨의 군사력을 활용하여 왕실을 보존하기 위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 웅진성의 반란
사비성을 함락한 나당연합군이 의자왕이 피신해 있는 웅진성으로 진격할 태세를 취할 즈음, 웅진성을 근거지로 삼아 왕실을 재건하려던 의자왕 일행은7월18일에 돌연 사비성으로 돌아와 항복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이때의 상황을 “의자왕이 태자와 熊津方領軍등을 거느리고 웅진으로부터 와서 항복했다”라 하였고,24) 구당서는“그 대장 禰植이 또 의자왕을 이끌고 와서 항복했다”라 하였다.25) 그래서 기존의 연구자들은 구당서에서말한 ‘대장 예식’과 「예식진묘지명」의주인공 예식진은 같은 사람이고, 나아가 예식은 삼국사기에서말한 ‘웅진방령’과도 동일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26)
예식과 예식진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은 예씨 일족 묘지에서 분명하게 말해준다. 우선 「예식진묘지명」에서예식진이 당에 항복하던 상황을 “이역의 정세를 점쳐 장안으로 해를 좇아 나아갔다[占風異域就日長安]”라 표현했는데, ‘占風異域’은 백제의 전쟁 상황을 관찰하여 정세를 미리 예측하고 임기응변으로 대응한다는 뜻이고, ‘就日長安’은 당나라 천자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를 좇아 수도 장안으로 갔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문장은 예식진이 나당연합군의 군세와 사비성 함락과 같은 전황을 파악하고 백제가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하여 당나라 황제를 좇아투항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예인수묘지명」에서“당이 하늘의 명을 받아 동쪽을 토벌하였으나(백제가) 당나라 조정에 조회하지 않자(예식진이) 곧 그 왕을 이끌고 고종황제에게 귀의하였다[有唐受命東討不庭卽引其王歸義于高宗皇帝]”라 하여,보다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서술하였다.
그럼에도 위의 「예인수묘지명」과구당서(권83) 소정방전에서는 단지 예식진이 의자왕을 ‘거느리고[將]’ 혹은 ‘이끌고[引]’ 당에 투항했다고만 하고, 어떠한 수단 혹은 방식으로 의자왕을 이끌고 투항했는지에 대해서 는 언급이 없다. 「예군묘지명」은바로 그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을 말해 준다. 「예군묘지명」에의하면, 예군이 당에 투항하던 상황을 “지난 현경5년에 관군 곧 당나라 군대가 本藩곧 백제를 평정할 때(예군이) 기미와 변화를 알아차리고 병기를 잡고 귀의할 바를 알았다[去顯慶五年官軍平本藩日見機識變杖劒知歸]”라 하였다. 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마지막 구절인 ‘杖劒知歸’이다. 漢書黥布列傳에서 한 고조의 사자 隨何가 회남왕 경포를 찾아가 “청하건대 대왕께서는 저와 더불어 병기를 잡고[杖劒] 한나라 왕에게 귀의합시다”라고 하자27) 회남왕이 ‘그 명에 따르겠다’라 하며 초나라를 배반하고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였다. 그리고 後漢書黨錮列傳서문에서 진나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한 고조가 군사를 일으키자 곳곳의 세력들이 함께 일어난 사실을 “한 고조가 병기를 잡고 일어나자[杖劒] 武夫들이 발흥하였다”라 서술하였다.28) 이러한 용례로 보아 ‘杖劒’은 군사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반란을 일으켜 일을 도모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예군은660년에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평정했을 때 백제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하고 망하리라는 기미와 정세의 변화를 알아차리고 군사반란을 일으켜 의자왕을 붙잡아 당에 귀순했다고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예군이 의자왕을 붙잡아 당에 항복한 사건에 직접 참여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 방식이 군사반란이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예식진묘지명」과기존의 문헌자료만으로도 예식진의 무리가 반란을 일으켜 의자왕을 붙잡아 당에 넘겼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였는데, 최근에 발견된 「예군묘지명」을통해 그것이 사실임을 재차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660년7월18일 직전에 웅진성에서 반란을 일으켜 의자왕을 붙잡아 당에 바친 ‘擧事’의 주동자가 예식진의 친형인 예군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예군이 군사반란의 주역이었다면, 그는 웅진 方城의 군사를 주로 활용해 반란을 일으켰을 것이다. 전술했듯이 예군을 포함한 예씨 일족은 대대로 웅진을 세력 근거지로 삼았다. 특히 웅진에 기반을 두고 동성왕 때 정권을 농단한 苩氏가문이몰락한 이후 北方웅진성의 군사는 예씨 일족의 세력권 아래에 놓이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따라 웅진성의 方領역시 예씨가 맡았을 가능성이 많은데, 실제 백제 멸망기의 웅진성 방령은 예군이었다.
지금까지 여러 연구자들은 구당서와삼국사기의의자왕 투항 기사를 서로 연관시켜 구당서의‘대장 예식’을 삼국사기에서말하는 ‘웅진방령’으로 추정하였다.29) 그것은 삼국사기의관련 기사 “義慈率太子及熊津方領軍等自熊津城來降”의 ‘熊津方領軍’을 ‘웅진방령의 군사’30) 혹은 ‘웅진방의 領軍’으로31) 해석한 것에 기인한다. 사실 ‘웅진방의 領軍’이 무슨 뜻인지 명확히 알 수 없거니와, 이 문장은 의자왕과 태자 등의 특정 인물이 당에 항복한 사실을 서술한 문장이므로 ‘熊津方領軍’의 ‘軍’을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 무명의 ‘군사’로 해석하는 것은 문맥상 자연스럽지 못하다. 만약 의자왕이 실제로 북방 웅진성의 군사를 이끌고 갔다면 ‘熊津方領軍’이 아니라 ‘熊津方軍’ 혹은 ‘熊津城軍’으로 표기하는 것이 올바르다. 삼국사기의인명 표기 방식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경우 성을 생략하고 이름만을 표기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熊津方領軍’은 웅진방성의 군사를 이용해 반란을 일으킨 ‘熊津方領禰軍’을 지칭한 것은 아닐까? 이러한 추론이 틀리지 않다면, 660년7월에 웅진방령 예군은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方城의 군사를 이용해 반란을 일으켜 의자왕을 붙잡아 당에 바치고 항복했다고 하겠다. 삼국사기(권5)는 “의자왕이 태자와 웅진방령(예)군 등을 거느리고 웅진으로부터 와서 항복했다” 하여 그러한 사실을 的確하게 지적하였다. 그러나 구당서는“그 대장 예식이 또 의자왕을 이끌고 와서 항복했다”라 하여 예군의 아우 예식진을 거사의 주동인물로 묘사하였다.32)
Ⅳ. 죽은 자와 산 자
1. 망산의 유혼
나당연합군의 백제 정벌은 웅진성의 예군과 예식진 형제의 반역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들에게 이끌려 사비성으로 돌아온 의자왕과 왕자들은 당과 신라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하였다. 660년7월13일 사비성 함락직후에 김법민이 항복한 부여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는 등의 치욕을 주었고, 같은 해8월2일 사비성에서 주연을 크게 베풀고 장병들을 위로할 때 무열왕과 소정방을 비롯한 연합군의 여러 장수들이 대청마루 위에 앉아 의자왕과 아들 융을 마루 아래에 앉히고 술을 따르게 하는 등의 수모를 주었다. 백제 정벌을 완수한 소정방은660년9월에 의자왕을 비롯한 왕자 대신 등1만 수천 명을 포로로 잡아 당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소정방이 붙잡아간 백제 포로의 숫자는 기록마다 약간씩 차이가 난다. 삼국사기(권5) 신라본기 무열왕7년 조에는 백제왕과 왕족 및 신료93명과 백성12,000명이라 하였고, 같은 책(권42) 열전 김유신전(중)에는 백제왕과 신료 등93명과 병졸20,000명이라 하였으며, 같은 책(권28) 백제본기 의자왕20년 조와 삼국유사(권1) 태종춘추공조에는 의자왕과 왕자 효·태·융·연 및 대신·장사88명과 백성12,807명이라 하였다.
어쨌든 소정방은 백제 원정에 참여했던 당나라 군사와1만 수천명의 백제 포로를 이끌고 사비성에서 금강 수로를 따라 내려가 황해를 건너 登州(지금의 산둥성 펑라이시蓬萊市)를 거쳐 귀환하였다. 그런데 당시 당고종은 측천무후와 함께 洛陽(지금의 허난성 뤄양시洛陽市)에 머물며 정무를 보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낙양을 향해 갔을 것이다. 그렇다고 백제 포로 전부가 낙양으로 간 것이 아니라 중요 인물만이 낙양으로 압송되었다. 「대당평백제국비명」에서말한 의자왕과 태자 융을 비롯한 外王13명 그리고 대수령 대좌평 沙宅千福과 國辨成이하700여 명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외의 백제 포로들은 낙양까지 가지 않고 당나라 각지에 안치되었는데, 일부는 徐州(지금의 장쑤성 쉬저우시徐州市)와 兗州(지금의 산둥성 옌저우시兗州市)에 정착하였다.33) 낙양에 도착한700여 명의 백제 포로 가운데 일부는11월1일 낙양궁의 남쪽 정문인 측천문 앞에서 열린 포로 헌상식에 참석하였다. 당시 낙양에서 당의 백제 정벌 소식과 포로 압송상황을 직접 견문한 일본 견당사 伊吉連博德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왕 이하 태자 융을 비롯한 왕자13명과 대좌평 사택천복, 국변성, 孫登이하37명 등 총50명을 朝堂에 바쳤다고 한다.34) 여기서의 조당은 당고종과 문무백관이 모인 측천문 누각을 지칭하거니와, 그 자리에 의자왕 말년에 정권을 농단하고 정치를 문란케 한 사람으로 지목되는 왕비 恩古도 동석했던 것으로 보인다.35) 당이 의자왕 등의 백제 포로를 조당에 바치는 의식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 알 수 없으나, 당문종 太和3년(829)에 고금의 여러 사례를 참작하여 정리한 凱旋儀式을 통하여 당대의 포로 헌상 절차를 대략 유추할수 있다. 우선 금위병이 성문 밖에 정렬한 가운데 전승을 축하하는 행렬이 피리와 퉁소 등의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鼓吹令의 인도에 따라 행진하는데, 포로들은 그들을 따라 성문 안으로 들어간다. 성문을 들어가서 황제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조정의 관리들이 승전을 축하하고 치하한 후, 太廟로 이동하여 태묘 문밖에서 전승을 고하고 포로를 바치는 의식을 행하였다. 태묘에서의 예를 마치고 다시 포로를 이끌고 황제가 있는 성문 누각으로 가서 황제에게 바치면 별도의 의식에 따라 전승을 칭찬하고 격려한 다음 포로를 내보내는 순서로 진행되었다.36)
실제 당 태종이 돌궐의 頡利可汗을 사로잡아 태묘에 바친 사례를 살펴보면, 위에서 소개한 승전 축하 및 포로 헌상의식과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정관4년(630)에 병부상서 李靖이 이끄는 돌궐토벌군이 힐리가한을 붙잡아 장안에 이르자, 먼저 포로를 태묘에 바치고 아뢴 후 태종이 의장대가 도열한 順天門樓에 나아가 관리와 백성들이 마음대로 와서 참관하도록 하는 가운데 담당 관리가 힐리가한을 데리고 그앞에 이르렀다. 태종은 힐리가한의 죄목을 일일이 나열하며 책망하자 힐리가한이 울면서 사죄하였으므로 그의 죄를 용서하고 가속들을 모두 太僕에 안치했다고 했다.37)
소정방이 붙잡아 간 의자왕 등의 백제 포로 헌상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삼국사기(권28)와 자치통감(권200)에서, 고종이 낙양궁 남쪽 중앙 성문인 측천문 누각에 올라가 백제의 포로를 접수하고 의자왕을 꾸짖고는 모두 용서해 풀어주었다고 한다. 이는 당 태종이 힐리가한을 처리한 절차와 유사한데, 아마 측천문 남쪽에 위엄을 갖춘 의장대가 도열하고 수많은 관리와 낙양 백성들이 보는 가운데 의자왕 일행이 고종 앞에 이끌려 나오자, 고종이 죄목을 열거하며 책망하였으므로 의자왕이 잘못을 빌고 용서를 구하자 고종은 그 죄를 용서한 후 석방하여 낙양의 어느 지역에 안치했을 것이다.38) 그 자리에는 백제 공격에 참여한 소정방과 김인문을 비롯한 당과 신라 군장들이 대거 참석했음은 물론 伊吉連博德을 비롯한 일본 견당사와39) 다른 외국 사절 및 당나라 관리들이 참관했음직하다.
나라를 잃고 온갖 수모를 당하며 당나라에 붙잡혀간 의자왕은 힐리가한이 그랬던 것처럼 울분과 좌절 속에서 나날을 보내다가 얼마 후 병으로 죽었다. 이에 당은 의자왕에게 金紫光祿大夫衛尉卿을 추증하고 옛 백제의 신하들이 喪禮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였으며,40) 망산의 孫皓와 陳叔寶묘 왼쪽 언덕에 장사지내고 비석을 세웠다.
그후 힐리가한이 울화병으로 스스로 비통해하였으므로 그를 우위대장군으로 삼고 전택을 주어 위로하였으나 마음의 병이 깊어져 정관8년에 마침내 죽었다. 태종은 그를 歸義王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荒王이라 하였다.38) 의자왕의 경우는 太廟에 헌상하는 절차가 생략되었다. 660년 당시 낙양에는 태묘가 없었고, 神龍원년(705)에 비로소 낙양에 태묘와 사직이 설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邙山은 진령산맥에서 뻗어 내린 崤山의 줄기로, 서쪽은 지금의 허난성澠池縣에서시작하여 동쪽으로는 鄭州市북쪽의 廣武山에 이르기까지 약190㎞에 걸쳐 뻗어 있는 야트막한 구릉형 산지이다. 특히 낙양 북쪽의 약50㎞의 망산을 북망산이라 한다. 낙양은 전후13개 왕조가 도읍을 정할 정도로 역사적으로 번창한 곳이고, 북쪽의 망산은 무덤 조성에 적합한 토질과 지형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東周시대부터 당·송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왕공귀인들이 이곳에 묻혔다. 최근 중국의 망산고분군조사 결과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망산은 여섯 왕조의 여러 왕릉24기와 배장묘를 비롯한 대략10여만 기의 고분이 산재할 정도로 중국 최대의 고분 집중분포지이다.41) 백제 의자왕의 묘도 수많은 망산 고분 중의 하나일터인데, 구체적으로 어느 고분이 의자왕의 무덤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의자왕은 晉나라의 포로가 된 오나라의 마지막 왕 손호와 수나라의 포로가 되어 낙양에서 죽은 陳나라 마지막 왕 진숙보의 무덤 옆에 묻혔다고 하나, 손호와 진숙보의 무덤 위치를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의자왕의 무덤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이 망산의 淸善里에 묻혔으므로 의자왕 역시 그 부근에 묻혔을 가능성이 있으나, 청선리가 구체적으로 지금의 어느 지역인지 명확하지 않다. 현재 중국에서는 허난성 뤄양시 孟津縣 送庄鎭 鳳凰臺村서북쪽 어느지점에 의자왕의 무덤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국에서 의자왕의 무덤을 봉황대촌 부근으로 비정하는 이유는, 진숙보의 아우인 陳叔明과 陳叔榮의 묘지명에서 그들이 망산 鳳臺原혹은 鳳臺里에 묻혔다고 하기때문이다.42) 수·당대에는 가족 공동묘역 조성이 유행하였다.43) 그렇다면 진숙보의 무덤도 그 부근에 있을 터인데, 봉대원 혹은 봉대리는 지금의 봉황대촌이이다. 따라서 의자왕의 무덤은 진숙보의 묘 왼쪽 곧 봉황대촌 서쪽 혹은 서북쪽에 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의자왕 무덤이 봉황대촌 부근에 조성되었다는 추론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그럼에도 뤄양시 북쪽 망산 일대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현재 孟津縣 送庄鎭봉황대촌 서북쪽 일대는 오랜 세월에 걸친 풍화작용으로 기존의 여러 봉분은 거의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후대 마을이 들어서고 농경지로 개발되는 과정에 훼손되어 큰 고분 몇 기를 제외하고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1995년에 충청남도에서 충남대학교 박물관에 의뢰한 의자왕 무덤 찾기 조사사업에서도 봉황대촌에서 북쪽으로4㎞ 정도 떨어진 구릉 일대에 의자왕 무덤이 있을 것이라 추정했을 뿐 구체적인 지점은 확정하지 못하였다.44) 이처럼 의자왕은 망국의 한을 품고 당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었으나 아직 무덤조차 확인되지 않고1,300여년 동안 망산을 떠도는 유혼으로 남아 있다.
2. 예씨의 영달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가 온갖 고초와 수모를 당하고 죽은 후에도 망산을 떠도는 의자왕의 처지와 달리, 웅진에서 군사반란을 일으켜 백제왕실의 마지막 명줄을 끊은 예군과 예식진은 대를 이어가며 당에서 영화를 누렸다. 660년9월에 의자왕 일행과 함께 당에 들어간 예씨 형제는 백제 토벌의 공로를 인정받아 당으로부터 후한 대우를 받고 당을 위해 복무하였다. 최근 중국 산시성 시안시에서 발굴된 예군과 예식진을 비롯한 예씨 일족 묘지와 여러 문헌을 통해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예군이 의자왕과 함께 투항하자 당 고종이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여 그에게 右武衛滻川府折衝都尉를제수하였다. 그후 예군은 다시 백제로 돌아와 웅진도독부의 관리가 되어 백제 유민을 안무하고 신라의 팽창을 견제하였다. 그가 백제에 머무는 동안 두 차례 일본에 다녀왔는데,45) 그 공로로 예군은 左戎衛郎將이 되었다. 이어서 그는 右領軍衛中郎將겸 熊津都督府司馬에 임명되었다.
웅진도독부 사마로 복무하던 예군은670년6월 혹은7월에 고구려 부흥운동을 함께 토벌하자는 신라의 제안을 받고 그 일을 협의하기 위해 신라에 갔다가 그곳에 억류되었다.46) 약2년 동안 신라에 붙잡혀 있던 예군은672년9월에 兵船郎將겸이대후, 萊州司馬왕예, 本烈州長史왕익 등의 당나라 관리들과 함께 당으로 송환되었다. 당에 돌아온 예군은672년11월 右威衛將軍에 임명되어 당의 관리로 살다가678년2월에 雍州장안현 연수리에서 죽었다. 예군이 죽자 당고종은 그의 공적과 옛일을 생각하여 오래도록 상심하여 슬퍼하고, 견포300段과 속미300升을 내려주고 장사에 소요되는 모든 것을 관청에서 지급하도록 하였으며, 홍문관학사 겸 본위장사 王行本으로 하여금 장례를 監護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의 묘지 말미에서 “공의 후손은 계수나무와 난초 향기 가득하고, 七貴47)에서 시작된 영화는 자손대대로 이어졌구나. 꽃다운 이름은 이후 세대까지 흘러 후대의 자손에 아름다운 씨앗을 심었도다” 운운한 점으로 보아, 예군의 자손 역시 당에서 영화를 누리며 살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예군의 동생 예식진도 당으로부터 후대를 받고 당 왕조를 위해 복무하였다. 예식진과 아들 예소사 손자 예인수 묘지의 내용을 종합하면, 그는 의자왕 일행과 당에 들어가 歸德將軍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東明州刺史가 되어 백제 고지로 되돌아왔다. 동명주는 웅진도독부 산하의7주 가운데 하나로, 熊津縣·鹵辛縣·久遲縣·富林縣을 거느리고 있었다. 동명주의 치소로 보이는 웅진현은 지금의 충남 공주시 일대이고, 구지현은 연기군 전의면이며, 부림현은 공주시 신풍면 지역으로 비정된다.48)
비록 노신현의 현재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전의면은 공주의 북쪽이고 신풍현은 공주의 서쪽이라는 점에서 당시 동명주는 웅진도독부를 둘러싸고 있던 중요한 지역이었다고 하겠다. 예식진은 그러한 지역의 자사가 되어 당의 백제고지 통치에 참여하였다.그후 예식진은 좌위위대장군으로 승진하였다. 그것은 아마 동명주자사로 재직할 때의 공로 때문인 듯한데, 이를 계기로 그는 당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그는 來遠郡開國公혹은 來遠縣開國子柱國에 봉해졌으나672년5월 위기에 처한 웅진도독부를 구원하기 위해 백제로 가던 도중49) 萊州黃縣(지금의 산둥성 롱커우시龍口市)에서 객사하였다. 예식진은 예군과 함께 의자왕을 붙잡아 당에 투항한 후12년 동안 당왕조에 봉사하였다. 그의 묘지에서 “높은 벼슬의 영화를 누렸고 고관의 직책을 연이어 맡아 별이 보검을 요동치게 하고 달이 雕國에 가득하였으며, 황제의 은혜는 여러 차례 흡족하게 빛났고 총애를 사방에서 융성하게 받았다”라 하여 그의 영화로운 삶을 노래하였다. 예식진의 영화는 아들 예소사와 손자 예인수에게도 이어졌다. 예소사는 아버지의 공적 덕분으로15세에 유격장군 長上에 임명되어 당 조정에서 숙위한 이래 용천부우과의, 용원부좌과의, 臨漳府折衝, 左豹韜衛左郞將, 우응양위우낭장, 좌감문중랑, 淸夷軍副使, 운휘장군 좌무위장군에 연이어 임명되었으며 상주국 내원군개국공의 관작을 받았다. 그리고 예인수는 일찍이 명위장군 우효위낭장이 되었다가 얼마 후 秦州三度府果毅로 좌천되었으며 汝州梁川府果毅와 虢州金門府折衝을역임하였다. 이들 외에도 예군과 예식진의 다른 자손들도 당에서 영화를 누리며 살았을 것이다.
Ⅴ. 예씨 형제의 변명-맺음말을 대신하여
구당서(권199)와 신당서(권220) 백제전과 삼국사기(권28) 백제본기에 의하면, 멸망 당시 백제의 인구를76만호라 하였다. 반면 「대당평백제국비명」에서는24만호620만 명이라 하였고, 삼국유사(권1) 변한·백제조에서는 전성기 백제의 인구가15만2,300호라 하였다. 백제 전성기가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인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76만호와24만호 그리고15만호 사이에 격차가 너무나 커 과연 백제의 인구가 얼마였는지 가늠하기 힘들다.50)
한편6세기 후반에서7세기 전반 백제 도성에는1만여 家戶가 살았다고 한다.51) 멸망기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터인데, 한 가구당5명으로 잡으면 사비성의 상주인구는 대략5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52) 그런데 신라와 당은 사비성 전체 인구의3.6배에 달하는18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사비성을 공격하였다. 그렇다면 사비성 함락과 백제멸망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고, 상주인구와 병력이 사비성보다 훨씬 적었을 北方웅진성도 마찬가지 운명에 처할 것임을 쉽게 예견할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에는 약탈과 파괴, 그리고 대량의 인명 살상이 수반된다. 특히 고대의 전쟁은 약탈전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645년에 당 태종이 고구려 白巖城(지금의 랴오닝성 랴오양시 옌저우성燕州城)을 공격할 때 “성을 빼앗으면 반드시 그곳 사람과 물건들을 모두 싸움에 참여한 사졸들에게 상으로 주겠다”라 하였고, 백암성이 항복하자 태종이 말을 바꾸어 약탈금지령을 내렸으므로 李勣이 “사졸들이 다투어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죽음을 돌보지 않는 것은 노획물을 탐하기 때문입니다”라 하며 불만을 토로하였다.53) 그리고 수양제 때 水軍을 이끌고 평양성에 쳐들어간 來護兒가 군사를 풀어 약탈하느라 대오를 갖추지 못하는 사이에 고구려군이 그들을 습격하여 깨뜨렸다는 것은54) 모두 고대전쟁의 약탈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또한 신라 진흥왕은 대가야를 정벌한 후 공을 세운 사다함에게 良田과 노비200명을 상으로 주었고, 백제 멸망 후 소정방은 김유신·김인문·김양도에게 백제 땅의 일부를 食邑으로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그런데 이는 모두 정복당한 나라의 백성이고 땅이었다. 견훤이 경주에 쳐들어가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고 경애왕을 사로잡아 죽인 사례에서 단적으로 볼 수 있듯이, 도성이 무너지면 궁궐과 관청의 창고는 물론 귀족들의 저택과 민가는 노략질의 대상이 되었다.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을 함락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후 왕과 대신들을 잡아가두고 군사들을 풀어 마음대로 죽이고 약탈하였으므로 黑齒常之가 두려움을 느껴 주위 사람들과 함께 도망쳐 부흥운동에 투신했다고 한다.55) 평상시 사비성에 거주하는 인구보다 몇 배 많은 군대가 도성에 들어가 민가를 약탈한다면, 백제 백성들은 흑치상지처럼 공포와 두려움에 떨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의자왕이 피신해 있던 웅진성의 백성 역시 마찬가지 공포를 느꼈을 것이다.
더욱이 당시 백제는 정치가 문란하여 지배층 안에서 심각한 분열과 대립이 나타났고, 거듭된 전쟁으로 경제가 파탄에 이르렀으며, 국왕과 일부 귀족들의 무절제한 사치와 향락으로 민심은 이미 백제 왕실을 떠났다. 의자왕 말년 즈음에 여러 마리의 여우가 궁궐에 들어왔는데 그 중의 흰여우가 상좌평 책상 위에 앉았다든지, 태자궁의 암탉이 참새와 교미했고 궁중의 홰나무가 사람 우는 소리를 내며 울었으며, 두꺼비와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였다는 등의 괴현상들이 자주 나타났다고 한 것은 민심이 떠난 백제의 멸망을 예고하는 징조였다.
사비 도성을 함락한18만 명의 나당연합군이1,000명 정도의 상비군이 주둔하는 북방 웅진성을 공격하면56) 웅진성으로서는 중과부적으로 방어가 불가능하다. 전쟁에서 패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 돌아간다. 게다가 당시 의자왕은 이미 민심을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씨 형제는 백제 백성들의 목숨과 재산을 온전히 보전하기 위해 민심이 떠난 의자왕을 붙잡아 나당연합군에게 바치고 항복했다고 변명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들이 백제 멸망에 마지막 일격을 가해 왕조를 연합군에게 넘겼다는 점에서 후대의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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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멸망 최후의 광경29
中文提要57)
百濟滅亡之最後的光景
權悳永*
最近在中國陜西省西安市,連續發掘了四方百濟遺民禰氏一族的墓誌銘。這些墓誌記載了禰氏的由來、其先祖的活動以及諸多有趣的內容。筆者在此通過對百濟滅亡當時,禰氏一族所起作用的詳細分析,試圖生動還原百濟滅亡之最後的光景。公元660年7月,羅唐聯合軍進攻百濟首都泗沘城,百濟義慈王丟下泗沘城而逃往熊津城。當時這個作為北方治所的軍事都市熊津,正是禰氏家族的勢力根據地。禰軍與其弟禰寔進無法同十八萬的羅唐聯合軍抗衡,於是可能作為熊津方領的禰軍發動了叛亂,捉拿義慈王交與聯合軍,向敵方投降。領導羅唐聯合軍滅亡百濟的蘇定方,將以義慈王和王子為首的一萬兩千余百濟俘虜帶回唐朝。到達唐朝後的義慈王在唐高宗面前,遭受作為亡國之君的恥辱,不久便客死他鄉,被埋葬於洛陽北面的邙山。然而,捉拿義慈王的禰軍、禰寔進兄弟卻在唐朝取得高官厚祿,享受榮華。不僅如此,他們的子孫也在富貴榮華之中,盡其天壽。無論古今內外,戰爭所帶來的只有掠奪破壞以及大量的人命殺傷,特別是古代戰爭,其性質就是赤裸裸的掠奪戰。羅唐聯合軍在攻陷了泗沘城之後又進攻熊津,由於熊津力量的寡不敵衆,根本無法形成防禦。戰爭失敗,最終的受害者只能是苦難的百姓,再加上當時的義慈王已經失去民心,在此種形勢下禰氏兄弟所能選擇的出路,除了投降之外,別無他法。禰氏一族的墓誌銘證明了這樣的事實。關鍵詞禰氏墓誌, 百濟, 泗沘城, 義慈王, 熊津, 禰軍, 禰寔進, 邙山
논문투고일: 2014.10.4 논문심사일: 2014.11.12 게재확정일: 2014.11.27
각주
1) 董延壽·趙振華, 「洛陽, 魯山, 西安出土的唐代百濟人墓志探索」, 東北史地
(2007-2), 8∼11쪽.
2) 金榮官, 「百濟遺民禰寔進墓誌紹介」, 新羅史學報10(2007), 374∼379쪽; 拜根興, 「百濟遺民‘禰寔進墓志銘’關聯問題考釋」, 東北史地(2008-2), 29∼30쪽.
3)張全民, 「唐禰氏家族墓的考古發現与初步硏究」, 西安地區中韓歷史文化交流學
術硏討會會議資料(2011), 52∼59쪽; 「新出唐百濟移民禰氏家族墓志考略」, 唐史論叢14(2012), 52∼68쪽.
4) 王連龍, 「百濟人‘禰軍墓志’考論」, 社會科學戰線(2011-7), 123∼129쪽.
5)김춘추의 입당 시기가647년이었음은 權悳永, 古代韓中外交史-遣唐使硏究(서울: 일조각, 1997), 25∼31쪽 참조.
6) 三國史記권7, 문무왕11년 답설인귀서.
7) 三國史記권5, 무열왕6년10월.
8) 日本書紀권26, 齊明6년7월.
9) 舊唐書권4, 고종 현경4년11월.
10) 정구복·노중국·신동하·김태식·권덕영, 개정증보역주 삼국사기(3, 주석편 상)(성남: 한국학중앙연구원, 2011), 186∼187쪽.
11) 新唐書권220, 백제전.
12) 김영관, 「나당연합군의침공과 백제의 멸망」, 百濟의滅亡과 復興運動(대전: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6, 2007), 107쪽.
13) 서정석, 「웅진·사비도성의구조」, 百濟의城郭(서울: 학연문화사, 2002), 122∼127쪽.
14) 朴淳發, 「사비도성의구조-羅城構造를 중심으로」, 泗沘都城과百濟의 城郭(서울: 서경문화사, 2000); 朴淳發·成正鏞, 百濟泗沘羅城Ⅱ(대전: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2001).
15) 이병호, 「사비도성의구조와 축조과정」, 백제의建築과 土木(대전: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15, 2007), 122쪽.
16) 이병호, 앞의 논문(2007), 115∼116쪽.
17)나당연합군이 합세한 사비성 남쪽30리 지점을 지금의 충남 부여군 석성면 부근(정구복·노중국·신동하·김태식·권덕영, 앞의 책, 2011, 187쪽) 혹은 충남 강경시 부근(김영관, 앞의 논문, 2007, 108쪽)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
18) 山尾幸久, 「朝鮮三國の軍區組織」, 古代日本と朝鮮(東京: 學生社, 1974), 167∼168쪽; 盧重國, 百濟政治史硏究(서울: 일조각, 1982), 259∼260쪽; 정동준, 「백제5方制의 지방관 구성에 대한 시론」, 한국고대사연구63 (2011); 동아시아속의 백제 정치제도(서울: 일지사, 2012), 260∼269쪽.
19) 권덕영, 「백제유민 禰氏一族묘지명에 대한 斷想」, 史學硏究105(2012),
20) 盧重國, 「百濟의南遷과 지배세력의 변천」, 韓國史論4(서울대국사학과,1978); 百濟政治史硏究(서울: 일조각, 1982), 166쪽.
21) 李基白, 「熊津時代百濟의貴族勢力」, 百濟硏究9(1978); 韓國古代政治社會史硏究(서울: 일조각, 1996), 178∼183쪽.
22) 권덕영, 앞의 논문(2012), 19∼20쪽.
23) 예군을 기준으로 세대 간의 간격을30년으로 잡으면 아버지 禰善은648년,조부 禰譽는618년, 증조 禰福은588년 경에 사망한 셈이므로 그들의 활동시기는 대개 사비시대와 겹친다.
24) “義慈率太子及熊津方領軍等自熊津城來降”(三國史記권5, 무열왕7년).
25) “其大將禰植又將義慈來降”(舊唐書권83, 열전 소정방). 한편 新唐書(권111) 열전 소정방전에는 “其將禰植與義慈降”이라 하여 다소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26) 金榮官, 앞의 논문(2007), 374∼379쪽; 拜根興, 앞의 논문(2008), 29∼30쪽. 한편 王連龍은 앞의 논문(2011) 126쪽에서 대장 예식을 예식진과 관련시키지 않고 예식을 예군이 개명한 다른 이름이라 하여 두 사람을 동일인으로 보았다. 그러나 예식과 예식진은 음이 비슷할 뿐만 아니라 예소사와 예인수 묘지명을 통해 보면 王連龍의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27) “臣請與大王杖劒而歸漢王”(漢書권34, 鯨布列傳).
28) “及漢祖杖劒武夫勃興”(後漢書권67, 黨錮列傳).
29) 노중국, 백제부흥운동사(서울: 일조각, 2003), 57쪽; 金榮官, 앞의 논문(2007), 375쪽; 拜根興, 앞의 논문(2008), 29쪽; 노태돈, 삼국통일전쟁사(서울: 서울대출판부, 2009), 152쪽; 최상기, 「예군묘지의연구동향과 전망-한·중·일 학계의 논의사항을 중심으로」, 목간과문자12(2014), 72∼74쪽.
30) 李丙燾, 國譯三國史記(서울: 을유문화사, 1977), 86쪽; 정구복·노중국·신동하·김태식·권덕영, 개정증보역주 삼국사기(2, 번역편)(성남: 한국학중앙연구원, 2011), 178쪽.
31)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상)(평양,1958), 136쪽.
32) 백제 멸망 직후 예군과 예식진은 의자왕을 이끌고 당에 투항한 공로로 각각 右武衛滻川府折衝都尉(정5품)와 歸德將軍(종3품)의 관작을 받았다. 품계를 기준으로 보면 예식진이 예군보다 높은 관작을 받았으므로 예식진이 의자왕의 투항에 보다 많은 공을 세웠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예식진이 받은 귀덕장군은 투항한 藩國수령에게 주는 직무가 없는 武散官인데(舊唐書권42, 직관1) 비하여 예군이 받은 우무위산천부절충도위는 수도권의 萬年縣滻川鄕에주둔하던 절충부의 요직이다(王連龍, 앞의 논문, 2011, 126쪽). 이런 점에서 투항 직후 당으로부터 받은 관직의 품계만으로 누가 ‘거사’의 주역이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33) 資治通鑑권202, 儀鳳원년2월.
34) 日本書紀권26, 齊明6년7월.
35) 日本書紀(권26) 齊明6년10월조에 “백제 의자왕과 그의 처 恩古, 아들 隆, 신하 좌평 千福·國辨成·孫登등 모두50여 명이 가을7월13일에 蘇將軍에게 잡혀 당에 보내졌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의50명은 伊吉連博德書에서 말한 ‘조당에 바쳐진 의자왕 등50명의 포로’를 지칭하는 것으로 판단되므로 恩古역시 포로 헌상식에 참석했다고 할 수 있다.
36) 舊唐書권28, 音樂 新唐書권23(下), 儀衛(下).
37) 新唐書권215(상), 돌궐전; 資治通鑑권193, 정관4년.
39) 日本書紀권26, 齊明6년7월.
40) 「)부여융묘지명」에서의자왕은 ‘棘署곧 大理寺에 올라 영화의 길을 열었다’고 한 점으로 보아 그는 죽기 전에 대리시의 어떤 관직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41) 洛陽市第二文物工作隊, 「洛陽邙山陵墓群的文物普査」, 文物(2007-10), 43∼59쪽.
42)“(大業)十一年正月二十八日辛酉卜兆于雒陽縣安山里鳳臺原”(「隋故禮部侍郎通議大夫陳府君(叔明)之墓誌銘」); “(大業)八年五月十五日终于縣廨春秋卅六九年正月丙子朔廿一日丙申葬于邙山之鳳臺里”(「陳叔榮墓誌」).
43) 張福有·趙振華, 「洛陽, 西安出土北魏与高句麗人墓志及泉氏墓地」, 東北史地(2005-5), 16∼19쪽.
44) 충청남도·충남대학교 박물관, 백제의자왕묘 찾기 현지조사(1995), 54∼59쪽. 이 조사를 바탕으로 지난2000년4월에 충남 부여군은 망산을 떠도는 의자왕의 유혼을 달래기 위하여 봉황대촌의 의자왕 무덤 추정지에서 靈土返魂祭를 올리고 그곳 흙을 가지고 돌아와 같은 해9월에 부여 능산리 백제왕릉원에 의자왕의 가묘를 조성하였다. 가묘는 전실과 주실로 구성된 석실묘로, 주실 중앙에 봉황대촌에서 가져온 영토를 넣은 목관을 안치하고 입구에 묘지석과 매지권을 함께 묻었다.
45) 日本書紀(권27) 天智3년5월조와4년9월조 및 善隣國寶記(上)에 인용된 「海外國記」에따르면, 예군은664년4월경에 百濟鎭將이던 웅진도독 유인원이 보낸 郭務宗과 함께 일본에 다녀왔고, 다음해7월에 劉德高와 함께 또 다시 일본을 다녀왔다.
46) 三國史記권6, 문무왕10년7월.
47) 한나라 때 외척으로서 국정을 장악했던 일곱 집안으로, 권력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48) 정구복·노중국·신동하·김태식·권덕영, 개정증보역주 삼국사기(4, 역주편 하)(성남: 한국학중앙연구원, 2011), 443쪽.
49) 拜根興, 앞의 논문(2008), 30∼31쪽; 권덕영, 앞의 논문(2012), 28∼29쪽.
50) 김기섭은 백제가 멸망할 당시의 인구를24만호120만 명으로 잠정 집계하였고, 백제의 전체 병사는 약6만 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백제와근초고왕(서울: 학연문화사), 2000, 86∼90쪽).
51) 周書권49, 백제전; 翰苑권30, 蕃夷部백제.
52) 이는 옛 사비성의 중심지였던 지금의 부여읍과 부근의 초촌면, 석성면, 장암면, 규암면의2014년10월 현재 인구43,444명과 비슷한 수치이다. 부여군의 인구에 대해서는 부여군청 홈페이지(http://www.buyeo.go.kr) 참조.
53) 三國史記권21, 보장왕4년.
54) 三國史記권20, 영양왕23년6월.
55) 舊唐書권109, 열전 흑치상지; 新唐書권110, 열전 흑치상지; 資治通鑑권201, 용삭3년9월.
56) 周書(권49)와 北史(권94) 백제전에 의하면, 백제의 方에는1,200명 이하700명 이상의 군사가 있다 하였고, 한원(권30) 백제전에 인용된 괄지지에는中方인 古沙城에1,200명의 군사가 주둔하고 나머지 방에 각각 많게는1,000명 적게는700명 내지800명이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북방
웅진성에는 평상시1,000명 정도의 군사가 주둔했을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