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란'을 위한 메모 | |
이계삼
새 학년이 시작된다. 시간은 강물처럼 흘러가는데, 인간은 중간 중간에 깃대를 꽂아 앞과 뒤를 구획한다. 언제나 그러했지만, 지난 한 해도 쉽지 않은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내가 내 인생을 사랑하는 만큼, 세상의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만큼, 이 세상을 둘러싼 묵시록적인 어둠이 깊어져가는 것을 느끼는 나날들이었다. 시간이 한 분깃점을 향해 치달아갈 때, 거기에 잇닿은 고통의 기억들은 소리 없이 바스러지려 한다. 그리고 새로운 분깃점으로부터 모든 것이 달라지기를 바라는 가멸진 그리움만이 꼿꼿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또한 의식의 기만임을 안다. 시간은 바늘끝만큼의 오차도 없이 이어져 있고, 우리는 이 끝없는 인과(因果)의 연쇄 어느 한 지점에 자리잡고 앉아 함께 흘러가고 있을 따름이다. 새천년이 시작되었지만, 2001년 이후의 세상이 조금도 새로워지지 않았듯이, 이 시간대 위에 펼쳐진 그대와 나의 삶은, 이 세상은, 지겹도록 ‘여전할’ 것이다. 오직, 시간만이 자신의 보폭으로 일정하게 전진하고 있을 뿐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은 2007년 2월이지만, 내 기억의 회로는 2007년 1월1일이 아니라 2006년 12월 어느 날에 잇닿아 있다. ‘1월1일’이라는 분깃점이 무슨 의미가 있나. 나는 다만 ‘기억의 분깃점’을 푯대삼아 살아간다. 그 날은 몹시 추웠고, 지역에서 몇몇 분들과 ‘한미FTA 저지 실천단’을 꾸려서 매주 하루씩 해오던 시내 선전전을 하는 날이었다. 그날 선전전을 하기로 한 시외버스터미널은 나이든 할머니들이 풋고추, 버섯, 나물 소쿠리들을 내놓고 앉아 종일 해동무하는 작은 장터이다. 입구에는 허름한 분식집들이 처마를 맞대고 떡볶이며 튀김, 어묵, 순대 따위를 팔고 있다. 동영상 액정 화면을 틀기 위해 전기를 끌어쓰려고 한 가게에 부탁을 하니 흔쾌히 허락해 준다. 옆 가게 여기저기서 “우리 꺼 쓰이소”하면서 자기들끼리 한바탕 웃는다. 그 웃음들이 참 선하고 밝다. 우리가 나눠준 유인물도 열심히 읽고, 서명도 먼저 해 주고, 동영상도 같이 구경해 준다. 그런데, 그 앞에 서서 유인물을 나눠주면서 유심히 보니, 역시나, 손님이 없다. 요새 세상에 누가 그런 ‘후진’ 가게에서 한끼밥을 먹으려 할까, 손님이 있을 리 없다. 어묵솥 김은 설설 끓는데, 떡볶이와 순대는 점점 말라가고 쪼그라드는 것 같다. 한 시간 넘어 지켜보았지만, 그 가게들에 드나든 손님은 손에 꼽을 정도다. 선전전을 끝내고, 야간자율학습을 하는 우리 반 아이들 생각도 나고 해서 떡볶이와 순대, 튀김을 싸들고 자전거를 타고 학교로 간다. 우열반 제도 아래서 우수반 아닌 ‘평반’인 우리반 아이들은 환한 불빛 아래 멍하니 앉아 있다. 수능까지 갈 것도 없이 대부분 수시모집으로 내신만 반영하는 대학에 가게 될 아이들이 기말고사가 끝난 지금 무슨 공부 의욕이 있을까. 아이들은 만화책을 보거나, 졸거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죽인다. 이 아이들은 대부분 이름조차 낯선 인근 사립대학의 긴 이름을 가진 학과로 진학할 것이다. 그렇게 4년을 다니고 대학을 졸업하면 그때는 또 어떻게 될까. 지금도 ‘전쟁’인데, 앞으로도 ‘전쟁’이다. 야자가 끝나면 다시 학원 봉고차를 타고 학원엘 가서 열두시까지 수업을 들어야 하겠지. 녀석들의 부모들은 아까 그 분식집처럼 하루 매상 얼마 되지 않는 가게를 겨우 꾸려가거나, 혹은 하루 품삯을 모아 살림을 살거나, 빚으로 겨우 버텨나가는 농사를 짓는 분들이다. 이 녀석들 수업료며 휴대폰 요금이며 학원비 대는 일이 얼마나 힘겨울지는 짐작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내가 봉지를 풀어놓으니 아이들은 환호성 울리며 환장을 하며 먹어제낀다. 버얼건 떡볶이 국물 묻혀가며 한입 가득 오물거리는 아이들, “쌤, 알라뷰”하며 기어오르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짜슥들….”하며 객쩍은 웃음만 지을 따름…. 밤 열시가 되었다. 야자가 끝나고, 아이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주번 아이와 교실을 치우고, 교무실 내 자리로 와서 잠시 앉아있었다. 목전에 닥친 한미 FTA와 이 지역의 가난한 이들의 삶을, 고등학교 공부를 잘 못 따라가는 우리 반 아이들, 그 촌놈들의 삶과 슬픔을 잠시 생각한다. 이제 나도 퇴근해야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아까 선전전을 했던 시외버스터미널을 다시 지나야 한다. 갑자기 닥친 한파에 거리는 인적이 없고 찬바람만 몰아친다. 장갑을 끼고, 중무장을 하고, 이어폰을 꽂고 천천히 자전거를 몬다. 찬바람이 답답한 마음을 잠시나마 틔워주는 느낌이다. 시외버스터미널 근처에 이르러 그 가게들은 어떻게 됐을까 싶어 자전거를 세우고 고개를 뽑아보니, 그 가게들만이 아직 환한 불빛을 밝히고 있다. 몹시 추운 이 시간, 거리에는 아무도 없는데, 아아, 그 아주머니들은 열한시가 넘은 지금에서야 마무리를 한다. 커다란 국솥에 남은 걸 따라 붓고, 수세미로 북북 문댄다. 뜨거운 김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몇 시부터 이 가게 일을 시작했을까, 아홉시에 문을 여니 열네시간은 넘었을 것이다. 오늘 매상은 얼마일까, 몇 만원 되지 않을 것이다. 팔다가 남은 것들은 다 어떻게 할까. 한참을 바라보는데 눈물이 그렁그렁해진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전거 페달을 세차게 밟았다. 이어폰 속으로 한영애의 노래가 흐른다.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 번 해 주세요” 한영애의 컬컬한 목소리는 신의 제단 앞에 선 여사제의 주문처럼 내 가슴을 웅얼거리며 훑어내린다. 나도 그 사제의 뒤에 엎드려 하늘님 앞에 엉엉 울면서 따지고 싶은 격정이 치받아오른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흐른다. 세상이 왜 이런가. 왜 이 세상은 정직하고 착한 이들의 슬픔으로 넘쳐나는가. 저 모리배들이 제 멋대로 민중의 고통과 슬픔을 농단하는 동안, 저들은 왜 이렇게 추운 날 국솥을 씻으며 열 몇시간동안 손님 없는 가게를 지키면서 살아야 하는가….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남아 내 의식의 분깃점이 되어 있다. 눈물이란 대개 자기연민이나 자기도취 둘 중 하나이기가 쉽다. 그러므로 눈물을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만, 나는 그날의 눈물로써 오랜 세월 뒤척여온 내 번민들과 악수할 수 있었다. 슬픔도 때로 힘이 된다. 나는 채식처럼 담담한 슬픔에 기대어 이 글을 쓴다. 나는 내 친구들을 하나씩 둘씩 사색의 화톳불가로 불러 모으고 싶다. 내가 사는 곳은 변방이지만, 어디서건, 사색이 길어 올린 ‘행동’은 우리를 언제나 ‘생의 한 가운데’에 있게 한다. 그리고, 이 묵시록적인 어두움 속에서 어떻게든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될 시간들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나는 세상이 점점 나아질 것이라는 ‘헛된 믿음’에 대해 말하려 한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세상이 어떻게 되건 자신과 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희한한 역설이 있다. 세상이 나빠질수록 “무슨 상관이야”며 마음속에서 세상을 패대기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과 갈수록 더 세차게 부대끼며 살아야 할 것 같다. 모든 지표들이 그것을 예견하고 있다. 언젠가 <한겨레>를 보다가 좀 서글퍼진 적이 있다. 박종운이라는 사람이 쓴 글 때문이다. 그는 1987년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박종철 열사의 대학 선배이다. 박종철 열사는 당시 수배중이던 박종운의 행적과 관련하여 강제 연행되어 고문받았고, 결국 죽고 말았다. 그래서 그 또한 ‘살아남은 386세대’의 한 상징으로 자주 언급되던 사람이다. 그가 정치계에 입문하여 한나라당에서 밥을 먹는 ‘떨거지 정객’의 하나가 돼 있다는 것은 대략 알고 있었는데, 그가 이러저러한 계기로 ‘왜냐면’ 지면을 통해 밝힌 저 6월 항쟁의 정신, 혹은 (자신이 그 적자(嫡子)임을 자처하는) ‘종철이의 인간존중 정신’은 좀 아찔했다. "맛없는 음식점에 가지 않으면 결국엔 그 음식점이 문을 닫게 되듯이, 휴대폰을 우리가 사 주기 때문에 이건희가 부자가 되듯이, 시장경제는 정성이 부족한 자는 외면하고 충성심이 투철한 자에게 보상을 내릴 뿐이다." 박종운은 내가 만난 그 분식집 아주머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주머니, 그리 정성이 부족해서 어떻게 장사를 하겠어요? 그러니까 망하는 거야.” 그래, 정성 넘치는 당신이나 잘 살게나…. 또 한 사람 있다. “혀를 깨물고 죽는 한이 있어도 물러서지 않”을 테니 “돌아오지 않는 화살이 되어 결전의 전장으로” 달려가자던 우리의 전대협 의장, 하이틴 잡지에 주윤발을 제치고 인기투표 1등을 먹었던 왕년의 그 ‘홍길동 오빠’가 있다. 그가 국회의원이 되어 한미 FTA도, 이라크 파병에도 꼬박꼬박 찬성표를 던지더니 지금은 언론 말고는 아무도 관심 없는 정계 개편에 한몫 열심히 거들고 있다. 그가 눈에 힘 잔뜩 주고 카메라 앞에 서 있는 걸 보면 왜 그리 웃음이 나는지…. 이른바 386 명망가들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 제 아이들을 유치원에서부터 십몇년간 극렬한 경쟁의 노예로 내몰며, 자신의 계층상승 욕망을 제 자식에게 덮어씌우는데 집요하고도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면서도, 입만 열면 교육문제를 걱정하는 학부모들이 또한 386세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다. 6월 항쟁을 겪으며 세상을 바꾸려 애쓴 사람들의 숫자가 조금 더 많아졌을 뿐이다. ‘민주화’라는 사이비 언술에 취해 세상은 ‘저절로, 당연히’ 좋아질 거라 믿고 있는 동안 인간다운 삶의 근거는 조금씩 때로 세차게 허물어져왔다. 그리고 지금 우리 앞에는 ‘전체주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다. 1987년 이후 무엇이 바뀌었을까. 지배의 양식이 바뀌었을 따름이다. 폭력을 통한 지배로부터 절차를 통한 지배로, 군인의 지배로부터 부자와 엘리트의 지배로, 변했을 따름이다. 지배는 더욱 공고해졌다.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죽음의 시궁창이 되어버린 새만금 갯벌에, 폐허의 대추분교에, 아니면 술 취한 농민들이 허수아비처럼 춤추는 FTA 반대 시위 현장에 한번 가 볼 일이다.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믿음이 얼마나 가련한 기대인지 느낄 일이다. 이제 한국 사회는 기업이 지배한다. 몇 가지 의미심장한 사례가 있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동국대 강정구 교수 사건 당시 “강정구 교수의 강의 들은 학생은 취업할 때 불이익 주겠다”고 나선 적이 있다. 요즘 사람들, 불의를 보면 (무조건) 참아도 불이익을 보면 못 참는데, 취업시 불이익이라니…. 전경련은 경제교과서가 반시장-반기업 정서를 부추긴다며 경제교과서 446군데를 수정하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삼성 이건희가 고대에서 봉변당했을 때 고대 학생들은 거기에 가담한 동료 학생들을 사납게 공격했다. 이건희를 존경하는 거야 자기네 자유지만, 그래도, 친구, 아닌가. “고대생들은 이제 삼성에 취업하기 힘들겠네, 약오르지롱”하는 누군가의 선동에 공포를 느꼈음에 틀림없다. 누가 이들을 소심하다 질책할 것인가. 이미 이 사회는 기업의 식민지가 돼 있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일은 ‘실체의 괴멸’이다. 나는 아파트에 대해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슬프다. 아파트는 자신의 내면과 이웃으로부터 격절될수록, 혹은 자연 세계와의 육체적 교섭이 거세될수록, 요컨대 ‘집’의 실체로부터 멀어질수록 ‘비싸다’. 욕망이 부풀린 허상만이 남아 실체의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다. 거기에는 집’이 가진 영혼의 가치는 없고, 오직 보육의 안락함, 브랜드 가치, 경제적 과시 욕망, 학군, 거래의 편의성 따위만 남아 있다(‘힐 스테이트’ 위에 ‘캐슬’ 있고 그 위에 ‘타워 팰리스’가 있어요. 거기서 본 하늘은 참 ‘푸르지오’. ‘e-(얼마나) 편한 세상’인가). 이 시대 경제는 ‘노동’이라는 땀의 실체가 아니라 ‘자본의 유동’이라는 허상이 지배한다. 돈이 돈을 만든다. 이를테면 환율, 이자율, 주식, 부동산 시세와 같은 공허함의 상징 기제 말이다. 노동을 해서는 돈을 벌 수 없으니 사람들은 부동산을 사거나, 주식을 사거나, 펀드에 투자하거나, 그것도 안 되면 로또를 하거나, 그러다가 막다른 곳으로 몰리면 결국 가족의 명운을 걸고 ‘바다이야기’ 속에 풍덩 빠지고 만다. 2002년 우리나라의 부동산 가격이 3,500조원이었는데, 4년 사이에 6,000조원으로 늘었다고 한다. 4년만에 국민들의 부동자산 70%가 증가했지만, 이것은 ‘거품’이다.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하는. 그렇게 가상으로 상승한 자산을 담보로 은행에서 돈을 빌려 새 집을 사거나, 자동차를 사거나, 자식들 대학을 보낸다. 이 허상의 지배는 사회 모든 영역에 전이된다. 논술 열풍만 놓고 봐도,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교육’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논술은 실체-교육적 가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학벌이라는 상징 기제-허상-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논술조차 변별력이 없어 가위바위보로 신입생을 뽑는다면, 논술학원 자리에 가위바위보 학원이 들어설 것이다. ‘허상의 지배’는 허상을 향한 경쟁에서 탈락한 존재들을 난민으로 풀어놓는다. 이 난민들의 이름은 신용 불량자, 이주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 청년 실업자이다. 부모들이 죽도록 공부를 시키고 아이들이 죽도록 공부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난민이 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 체제는 난민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야만 유지된다. 서로 난민 되지 않기 위해 줄달음치는 사회에서 믿고 기댈 곳은 ‘가족’밖에 없다. 우리 사회의 가족주의는 갈수록 강화될 것이다. 그리고 ‘아픔’에 대한 감수성은 현저히 퇴화할 것이다. 김선일, 전용철, 홍덕표, 하중근의 죽음만 떠올려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대중들의 감성은 결국 ‘내던져짐’으로 몰려간다. 몸도 마음도 자아를 상실한 무리들, 초조에 내몰린 외톨이, 부정적 정서가 가득한 자, 사회적 결합 없는, 그래서 잠시 잠깐의 불이익이 떨어지더라도 폭발적으로 분출하기를 기다리는 대중으로 조직된 사회가 된다. 신뢰 집단도 신뢰할 가치도 없다. 이러한 무사회 상황에서 방향감각을 잃은 대중들이 ‘내던져짐’의 반작용인 충동적 열광으로 분출할 곳을 찾을 것이다. 허상이 한껏 부풀려놓은 거품이 붕괴하고, 실체의 괴멸이 물리적인 압박으로 우리 삶을 옥죄어올 때, 이 사회는 결국 20세기 전반기처럼, 파시스트에게 수습을 내맡길 것이다. 이제 새로운 페다고지가 만들어져야 한다. 여기에 교사의 몫이 있다. 교사의 물적 기반-봉급-은 새삼스럽지만 교육부장관이 주는 것이 아니고, 교육감이 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들의 봉급은 민중의 세금이다. 교사는 공공성에 복무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현실주의자라 믿는다. 그러나 그 현실감이란 대개 나날의 삶의 시야에 갇혀 자신이 속한 집단의 타성이 닦아놓은 길을 미끄러져가면서 얻은 윤활감이며, 눈앞의 이해관계에 갇힌 단견이기 쉽다. 현실은 그런 것이 아니리라. 인간의 최후의 건강함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구체적 대상성’이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인 한, 우리에게는 구체적인 대상과 맺고 있는 구체적인 관계가 있다.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서 오고 가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면, 그 걸음걸이로써 이 대지와 새롭게 연결될 수 있다면, 교단에서 아이들을 ‘바라보지’ 않고, 아이들의 땀과 숨결로 직접 맺어질 수 있다면, 인터넷을 끄고 직접 거리로 나와 행동할 수 있다면, 저 미친 아파트 광풍으로부터 제 영혼의 ‘집’을 지킬 수 있다면, 먹거리 중에 극히 작은 일부라도 제 손으로 거두어 먹을 수 있다면, 침묵과 타율이 일상화된 교무실에서 저 옛날의 ‘벌떡 교사’가 지치지 않고 분연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준다면, 저 악마같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로부터 연대와 보살핌의 영토를 향해 한걸음이라도 내딛을 수 있다면, 세상은 희망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혼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해선 기존의 길을 끊고 헤매는 시간이 필요하다. 방황은 언제나 환영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곳저곳에서 제 방식으로 분출하는 ‘세상의 꼴통들’을 사랑하고, 또한 존경한다. 얼마지 않아 닥쳐올 ‘미증유의 혼란’을 향해 착실히 나아가는 이 침묵과 안정을 차라리 두려워해야 한다. 조금씩 전체주의가 준동하고 있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시인 김수영은 ‘혼란’을 이렇게 그리워했다. "혼란’이 없는 발전소의 건설은, 발전소가 없는 ‘혼란’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다. 이러한 자유와 사랑의 동의어로서 ‘혼란’의 향수가 문화의 세계에서 싹트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미미한 징조에 불과한 것이라 하더라도 지극히 중대한 일이다."(김수영, <시여 침을 뱉어라>, 1968년, 중에서) <월간 우리교육 2007년 3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