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집-무의자박물관에서
남민욱
옛날 아들 둘에 딸 열두 명을 둔 아비가 있었다. 그 중 다섯은 호적에 올리지도 못한 채, 여섯 명은 역사에 이름은 올리나 조졸(早卒)하여 가슴에 묻는다. 금지옥엽 큰 아들(진종)은 아비에 앙심을 품은 여종이 독살을, 또 한명은 아비에 의해 산해진미 쌓인 고대광실 뒷마당에서 뒤주에 갇힌 채 굶어죽는다. 만인지상으로 백성은 다스렸으나 자식 운을 거스르지 못했던 조선 21대 왕 영조는 아들에게 비정했으나 딸에게는 자애로운 아버지였다.
남양주시 평내로 9번지에 있는 <궁집>은 이순이 넘어 얻은 막내딸 화길옹주가 구민화에게 시집갈 때 재목과 대목장을 보내 지어준 집이다. 궁의 대목이 사가의 집을 지을 수 없는 관례를 어기면서 딸의 살림집을 마련해 준 것이다. 하여 택호가 ‘궁집’이 된 옹주의 사가를 영조는 여러 번 방문했다고 한다. 건립연대가 확실한 조선시대 양반가옥이라는 학술적 가치가 인정되어 1984년 중요 민속문화재 제130호로 지정되었다.
규모는 크지 않으나 세련된 장인의 솜씨가 돋보이는 궁집은 백봉계곡 낮은 산자락에 싸여있어 아늑한 느낌을 준다. 사랑채 누마루와 석재를 다듬어 마감한 배수로까지 어느 한군데 소홀함 없는 아담하고 격조 있는 집이다. 안채 규모에 비해 안방이 크고 넓은 것으로 보아 안주인이 사용하는 공간을 많이 배려한 듯하다.
조선왕조실록은 영조의 딸 사랑을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고 전한다. 화평옹주에게도 능원대군의 옛집인 이현궁(梨峴宮)을 주면서 경복궁의 소나무를 베어 수리하게 했고, 화협옹주의 병세가 깊어지자 사가에 행차하여 밤늦도록 딸의 머리맡을 지킨다. 사위 정치달이 죽었을 때도 중전 정성왕후의 상중이라 백관들이 만류함에도 기어이 화완옹주의 집에 가서 딸을 위로하고 왔다고 한다.
집이 없으면 집을 지어주고, 병이 나면 의원을 보냈으며, 상심하면 찾아다니며 위로해주는 아버지에게도 불가항력의 딸이 있었다. 화순옹주는 말다툼 끝에 사도세자가 던진 벼루에 맞아 남편이 죽자 곡기를 끊어 영조가 거듭 밥을 먹으라고 종용했으나 끝내 아사하고 말았다. 자식 때문에 마음 편한 날이 없었을 것 같은 아비가 83세까지 장수한 것이 신기하다.
13살에 결혼하여 궁집에 살던 화길옹주도 1남 2녀를 두고 스물한 살에 병을 얻어 사망한다. 막내딸의 죽음을 안타까이 여긴 영조는 10만 냥을 보내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화협옹주가 죽었을 때도 10만 냥, 현 화폐가치로 20억 원이나 되는 장례비를 과다 지출한 것이 조정에서 문제시되었다고 한다. 평소 수라도 소량으로 들고, 곤룡포는 낡을 때까지 입을 만큼 검소했던 영조의 파격이 눈물겹게 느껴지는 일화이다.
조선의 왕족들은 1세기 전 폐족이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구민화의 후손들도 고택을 지키지 못하고 떠났다. 맞은편 언덕에 있던 화길옹주의 묘도 평내 택지지구가 들어설 때 이장해갔다고 한다. 사람살이만 이사를 오가는 게 아니다. 유택에 들어 안식을 누리던 옹주도 이사를 가고, 먼데 있던 집이 이사 오기도 한다.
무의자박물관을 구성하는 <군산집>은 순조의 큰며느리 신정왕후의 친정집의 일부로 군산상고 야구장 확장 시 헐리게 된 것을, 구한말 송병준 대사의 가옥이었던 <용인집>도 후손의 몰락으로 매각한 것이다. 연당을 품은 운치 있는 다실도 강감찬 장군 유적지의 사당으로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조성 때 옮겨왔다.
무의자(無衣子)는 ‘옷을 벗은 사람’ ‘욕심을 벗어던진 사람’이라는 뜻으로 서양화가 고 권옥연의 아호다.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대한민국에 초현실적인 화풍을 일으킨 미술계의 대물이다. 그는 연극계의 대물인 부인 이병복과 함께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와 외국인에게 자랑스럽게 우리 문화를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인 공간을 계획하며 1963년 궁집을 인수한다. 이후 반세기에 걸쳐 주변의 논밭과 산을 확장해 조성한 8000여 평에 해체위기에 놓인 고택들을 옮겨와 복원하여 연극, 음악, 영화촬영, 학술회 등을 열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꾸며 <무의자박물관>으로 명명했다.
비슷한 연대에 지어진 옛집 일곱 채와 구씨 가의 마름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초가 두 채, 전시관을 아우르는 경내에 있는 모든 것에 이들의 철학과 예술관이 담겨있다. 자연 상태인 숲과 완만한 구릉과 언덕, 뜰 곳곳에 놓인 석물과 목물, 초목 한그루도 있을 만한 자리에서 박물(博物)을 이루고 있다. 어쩌면 군산집 뜰에 앉아, 연못에 설치한 특설무대에서 열리는 공연을 보고, 용인집 대청마루에 앉아 국밥을 나누는 그 자체가 집단이 행하는 예술이지 싶다.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작은 음악회를 열고, 연극을 올리고, 시를 읊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까지의 지난했을 과정이 “철모르고 덤벼들어 반생을 쏟아 부었지만 혼자 힘으로 끌고 가기에 힘에 부친다”는 이병복의 한마디에 함축되어있다.
해마다 11월11일 11시에 열리는 <가랑잎Day>는 경내에 수북하게 쌓인 낙엽을 치우는 행사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였지만 풍류한마당 속에 빈대떡을 부치고, 고기를 굽고, 국밥을 말고, 막걸리를 권하며 오찬을 나눈 다음 작업이 시작되었다.
사물놀이패가 따라다니며 독려하니 힘들기보다 신명이 난다. 한편에서는 낙엽을 쓸고, 또 한편에서는 자루에 끌어 담고, 담은 자루를 운반용 차량에 실어 옮기며 가랑잎과 작별하는 행위, 노동도 무의자박물관에서 하면 예술이 된다.
쉼 없이 떨어지는 나뭇잎, 옷을 벗어던지는 자연의 몸짓에서 무의자를 닮아가는 나목을 본다.
지난해 88 세로 타계한 권화백은 뒷산 참나무아래 잠들어있다. 장난감 같은 작은 향로 한 개가 누군가 이곳에 있다는 유일한 표식이다.
부인이 향로 위에 담배 한 개비를 올린다. 무대미술의 개척자로 40여 년 간 자유극단을 이끌며 연극 100여 편을 무대에 올린 이병복, 그는 물신숭배자들이 들끓는 세상임에도 최근 박물관을 문화재단으로 만들었다. 영조에서 화길옹주, 강감찬까지 그들의 혼이 보우하여 이곳의 미래가 진정한 예술가이자 무의자의 화신이 꿈꾸는 문화공간으로 거듭 발전해나갈 것이다.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