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임금이나 신하가 쓰던 모자를 익선관(翼善冠)이라 한다. 모자 뒤에 매미날개가 달려 있다.
조선 태조의 어진 영조의 어진
* 익선관의 유래에 대해서.
조선 (정확히는 고려 말)과 명나라에서 사용하던 왕관 및 관모로 중국에선 청나라에게 남명이 멸망하면서 폐지되었다. 조선의 경우 대한제국이 들어서면서 폐지되었다고 생각되었지만 이후에도 황룡포를 입은 고종이 익선관을 계속 쓴 어진이나 사진 등이 존재한 것으로 볼 때 완전히 폐지된 건 아니고 양장이나 군복과 함께 번갈아가며 쓴 것 같다.
조선 세종대왕시절에 명에서 익선관(翼善冠)이라 재명명하여 이 이름이 굳어지게 되었다. 이 오사절각향상건의 모양이 매미의 날개 모양과 닮았다 하여 '매미 선(蟬)'을 써서 익선관(翼蟬冠)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즉, 매미날개 1쌍을 모자의 뒷부분에 부착한 왕관을 임금님께서 쓰신 것인데, 왜 매미날개를 모자에 부착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조용진 교수의 명저, "동양화 읽는 법"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임금이 정무를 볼 때 쓰는 익선관(翼蟬冠)도 단지 멋지게 보이려고 그런 모양을 한 것이 아니다. 관에 붙은 매미날개(蟬翼)는 거추장스럽지만 육우(陸羽)가 말한 오덕(五德)을 항상 염두에 두고자 디자인된 것이다.
1. 매미의 입이 곧은 것이 마치 선비의 갓끈이 늘어진 것을 연상하게 하므로 매미에게는 학문(文)이 있고,
2. 이슬을 먹고 사니 맑음(淸)이 있다.
3. 사람이 애써 가꾼 곡식이나 채소를 먹지 않으니 염치(廉恥)가 있으며
4. 다른 곤충들과 달리 집이 없이 사니 검소(儉素)함이 있고
5. 겨울이 되면 때맞춰 죽으니 신의(信義)가 있다.
이것이 매미의 다섯 가지 좋은 점이라고 하였다.
정무에 임하는 사람은 항상 이 매미의 오덕(五德: 文, 淸, 廉, 儉, 信)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임금이나 신하 모두 매미 날개를 관모에 붙여 사용했었다.
첫댓글가장 오래된 것은 세종대왕이 쓰던 익선관으로 본다. 이는 임란 때 왜적이 탈취해 간 왕실유물인데, 국내 한 수집가가 일본에서 구입해 반입했다. 이 익선관 안에는 훈민정음 해례본 이전의 제자해(훈민정음 창제 과정의 풀이)가 들어 있어 세종대왕이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모자에 새겨진 용무늬에 사조(四爪) 즉 4개의 발톱이 묘사돼 있기 때문이다. <세종실록> 1444년(세종 26년)에 사조용의(四爪龍衣)를 입었는데 다음 해에 명(明)으로부터 오조용복(五爪龍服)을 하사받아 입었다고 돼 있어 오조용복(五爪龍服)으로 바뀌기 전의 것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익선관은 검은 바탕천에 금실로써 용, 모란꽃, 넝쿨무늬로 ‘王’, ‘卍’, ‘壽’ 등이 수놓아져 있다. 이 외는 고종과 순종의 익선관이 현존하고 있다. 조선 후기 익선관을 토대로 상상해 그린 것을 1만 원권의 세종의 의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익선관은 이마전과 하단부, 굴곡진 상단부로 구성돼 있으나 지폐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뿔 또는 매미 날개 모양처럼 솟은 절상각(折相角)은 없다. 매미처럼 오랜 세월을 공부와 덕을 쌓아서 왕위에 올라 백성을 위해 선공후사(先公後私
翼善冠(翼蟬冠) (익선관) / 임금은 곤룡포를 입고 매미 날개를 위로 향하는 익선관을 쓰고 집무한다. 이유는 매미의 5덕을 염두에 두고 선공후사의 봉사정신으로 정사를 베풀라는 뜻이다. 익선관은 복두(幞頭 : 과거 급제자가 쓰는 관)에서 유래한 관모의 일종으로 조선의 국왕ㆍ왕세자가 정사를 볼 때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머리에 쓰는 관(冠)이다.
이 모자의 형태는 2단으로 꼭대기에 턱이 져 앞턱은 낮고 뒤턱은 높다. 뒤에는 매미날개 모양의 소각(小角) 2개가 위쪽을 향해 비단으로 싸고 꼭대기 뒤에 두 뿔이 뾰족하게 솟아 올라있다. 이를 송대(宋代)에는 절상건, 명대(明代)에는 익선관(翼善冠)이라 불렸다. / [출처] 익선관|작성자 필사즉생
첫댓글 가장 오래된 것은 세종대왕이 쓰던 익선관으로 본다. 이는 임란 때 왜적이 탈취해 간 왕실유물인데, 국내 한 수집가가 일본에서 구입해 반입했다. 이 익선관 안에는 훈민정음 해례본 이전의 제자해(훈민정음 창제 과정의 풀이)가 들어 있어 세종대왕이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모자에 새겨진 용무늬에 사조(四爪) 즉 4개의 발톱이 묘사돼 있기 때문이다. <세종실록> 1444년(세종 26년)에 사조용의(四爪龍衣)를 입었는데 다음 해에 명(明)으로부터 오조용복(五爪龍服)을 하사받아 입었다고 돼 있어 오조용복(五爪龍服)으로 바뀌기 전의 것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익선관은 검은 바탕천에 금실로써 용, 모란꽃, 넝쿨무늬로 ‘王’, ‘卍’, ‘壽’ 등이 수놓아져 있다. 이 외는 고종과 순종의 익선관이 현존하고 있다. 조선 후기 익선관을 토대로 상상해 그린 것을 1만 원권의 세종의 의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익선관은 이마전과 하단부, 굴곡진 상단부로 구성돼 있으나 지폐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뿔 또는 매미 날개 모양처럼 솟은 절상각(折相角)은 없다. 매미처럼 오랜 세월을 공부와 덕을 쌓아서 왕위에 올라 백성을 위해 선공후사(先公後私
翼善冠(翼蟬冠) (익선관) / 임금은 곤룡포를 입고 매미 날개를 위로 향하는 익선관을 쓰고 집무한다. 이유는 매미의 5덕을 염두에 두고 선공후사의 봉사정신으로 정사를 베풀라는 뜻이다. 익선관은 복두(幞頭 : 과거 급제자가 쓰는 관)에서 유래한 관모의 일종으로 조선의 국왕ㆍ왕세자가 정사를 볼 때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머리에 쓰는 관(冠)이다.
이 모자의 형태는 2단으로 꼭대기에 턱이 져 앞턱은 낮고 뒤턱은 높다. 뒤에는 매미날개 모양의 소각(小角) 2개가 위쪽을 향해 비단으로 싸고 꼭대기 뒤에 두 뿔이 뾰족하게 솟아 올라있다. 이를 송대(宋代)에는 절상건, 명대(明代)에는 익선관(翼善冠)이라 불렸다. / [출처] 익선관|작성자 필사즉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