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법은 연을 좇아 생겨났다가
연이 다하면 흩어지느니라.
諸法從緣生
諸法從緣滅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집니다.
현재 맺고 있는 부모와 자식, 부부 등의 사람관계도 모두가 인연이요.
사업의 성패여부도 인과응보이며, 열심히 정진하여 도를 이루는 것도
인연업과(因緣業果)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대우주의 인연법에 다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것을 요즘의 젊은이들은 '자연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원인에 따른 결과,
곧 심은대로 거두고 지은대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의 법칙,
자연의 법칙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
우리는 과연 어떠한 삶을 좋은 삶이라고 생각합니까?
어떠한 삶을 복된 삶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1960년경, 교계에 거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노스님 한 분이
부산 범어사에서 열반에 드셨습니다.
스님의 성은 황씨(黃氏)요 법명의 하담(河潭)으로,
19세에 금강산 장안사로 출가하여 오로지 '나무아미타불'만을
불렀습니다. 스님은 앉으나 서나 '나무아미타불'만을 외웠고
일 할 때도 밥먹을 때도 '나무아미타불'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10여 년이 넘자 대화를 나눌 때도 '나무아미타불'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잠을 잘 때도 '나무아미타불'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하담스님은 30대 중반의 나이에 아미타불이 무량한
광명을 보고 견성을 하였고, 무량한 빛과 무량한 진리를
체득한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여 금강산에서 하산을 했습니다.
모든 중생들에게'나무아미타불'이라는 이 거룩한 단어 하나를
귀에 넣어줌으로 해서 중생들의 업장을 녹이고 죄업을
소멸시켜주고자 서울로 온 것입니다.
스님은 일제 강점기의 극장 선전원들이 사방에 영화 포스터를
붙인 통을 뒤집어쓰고 거리를 활보했던 모숩과 같이 앞에도
'나무아미타불' 뒤에도 '나무아미타불' 옆에도 '나무아미타불'을
써서 붙였고, 그것도 모자라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쓴 깃대를
등에 지고 커다란 목탁을 치며 하루종일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했습니다.
스님은 서울의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며
'나무아미타불'을 외웠습니다. 사람들의 귀로 '나무아미타불'
이라는 소리를 듣고, 눈으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글자를 보기만
하여도 그 만큼 업장이 소멸되고 공덕이 생겨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극락세계와 아미타불에 대한 법문을 들려주었고,
때로는 염불을 통한 업장참회법도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하기를 5년, 스님은 어떻게 술을 알게 되었고,
술을 입에 대자 대중스님들로부터 막식막행승(莫食莫行僧)으로
취급받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절에서는 곡차를 한다는 이유로
들어오지 못하게까지 하였습니다.
스님은 이절 저 절로 떠돌아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뼈 속 깊은 곳까지 부처님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떠한 구박에도 동요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도움을 주는 사람들에게는 '감사'보다 '축원'을 했습니다.
작은 친절에도 큰 도움에도 스님은 결코 고맙다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합장을 하고 "이 공덕으로 다음에 부처가 되십시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아이에게나 어른에게나, 남자에게나 여자에게나
조그만치라도 고맙게 해 주는 이에게는 합장을 하고 허리를 깊이
숙이며 한결같이 말했습니다.
"이 공덕으로 다음에 부처가 되십시오"
또 절 앞에 와서 술과 음식을 벌여놓고는 노는 사람들이 스님을
향하여 희롱조로 말을 겁니다.
"스님, 한잔 하실라오?"
"어, 거 좋-지."
그들이 내미는 술을 거침없이 들이키면 사람들은 장난 반, 놀림 반,
농담 반으로 질책을 합니다.
"스님, 곡차를 드셨소? 술을 드셨소?"
"술을 마시는 것을 보니 중이 아니구먼!"
하지만 스님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합장배례하며 오직 한 말씀만
하셨습니다.
"이 공덕으로 다음에 부처가 되십시오"
이렇게 '부처 되라'는 한마디 축원으로 일관했던 하담스님은 말년을
범어사에서 보냈습니다. 하지만 범어사는 당대의 대율사이신 동산
(東山)스님이 조실로 계시고, 계율이 엄한 사찰이었으므로 곡차를
좋아하는 하담스님을 반길 까닭이 없었습니다.
오직 "범어사에 살고 싶으면 머물게 하고, 가고 싶으면 가도록
내버려두어라"는 동산스님의 지시 덕분에 범어사에 머물 수 있게
되었지만, 대중들과 함께하는 큰방에서의 생활이나 공양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뒤채에서 행자나 일꾼들과 함께 공양을 하고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아침공양이 끝나면 종일 나다니다가 저녁 늦게 돌아오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하담스님이 범어사 총무스님을
불렀습니다."석달 후에 내가 가야 되겠소."
하지만 총무스님은 농담처럼 들었습니다. 딴 곳으로 간다는 말씀인지,
세상을 하직한다는 말씀인지 조차 되물어 보지 않고 무심하게
흘려버렸습니다. 그 뒤, 가신다고 약속한 날 꼭 일주일 전에
총무스님을 다시 방으로 불러 꼬깃꼬깃 모은 10원 짜리, 100원짜리로
6만원을 건네주면서 부탁했습니다.
"나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네. 경책(經冊)한 권도 없고,
남들이 다 가지고 있는 농짝하나. 땅덩이 하나도 없어.
이게 전부니까 어려운 절 살림에 보태 쓰게."
그러고는 양말 속에 넣어 두었던 3만원을 따로 내어놓으며
말했다." 이 돈이면 내 초상 비용은 될거야."
하담스님은 가시겠다고 한 하루 전날, 손수 향나무를 넣어
달인 물로 목욕을 하고 미리 마련해둔 수의(壽衣)로 갈아입은 다음,
깨끗한 장소를 골라 목욕하기 전에 입던 옷을 모두 태워버렸습니다.
실로 남은 것이라고는 없었습니다.
수건하나, 양말 한 켤레 없었습니다. 오직 수의 위에 장삼과 가사를
차려입은 것 뿐이였습니다.
'3개월 후에 가겠다'고 했을때는 농담처럼 들었던 총무스님도 계속
되는 하담스님의 이상한 거동에 경각심을 일으켜, 가신다고 한 날
이른 새벽부터 세명의 젊은 승려들로 하여금 스님 곁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오전 10시가 되자 하담스님이 말했습니다.
"이제 내가 가야할 시간이 되었구나."
그때 곁에 있던 젊은 스님이 짓궂게 말을 던졌습니다.
"스님, 지금이 법당에서 마지 올리는 시간인지 오르십니까?
어찌 중이 되어가지고 부처님께 마지 올리는 시간에 가시려고
하십니까?"
"허, 듣고보니 그 말씀도 옳구려. 나를 일으켜주시오."
앉은 채로 조용히 열반에 들고자 했던 하담 스님은 젊은 승
려들의 부축을 받아 법당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법당 한
옆에 단정히 앉아 부처님께 올리는 사시마지가 모두 끝날 때
까지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사시마지는 끝났고, 스님은 옆에 있는 승려에게
부탁했습니다.
"이제는 할 수 없소. 나 좀 눕혀주소."
주위 승려들의 도움으로 반듯이 누운 하담스님은 조그마한
음성으로 게송을 읊었습니다.
원공법계제중생(願共法界諸衆生)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
원컨데 법계의 모든 중생 너와 나 할 것 없이
일시에 모두 성불하여지이다.
마침내 하담스님은 열반에 들었고, 당시의 범어사 총무스님은
땅을 치고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울부짖었습니다.
"아이구. 아이구. 진짜 도인 선지식(善知識)을 옆에다 두고,
눈 어둡고 귀가 멀어 몰라보았으니...."
우리 주위에는 수많은 삶이 있습니다, 그 많고 많은 삶의 방식
중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을 복된 삶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돈이 많아야 행복한 삶입니까? 이름이 높아야 행복한 삶입니까?
옆에 있는 사람들이 굽신굽신 절을 해야 행복한 삶 입니까?
아니면 하담스님 처럼, 겉으로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주위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푸대접을 받으며 살지만, 자기 마음속에
꾸준히 무엇인가 간직하고 혼자 누리는 기쁨속에 살다가 마지막까지
다른 사람의 신세를 지지 않고 가신 분을 행복하게 가신 분이라고
해야 합니까? 판단은 각자가 능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의
진실에 비추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스스로를 다시한번
돌아보십시오, 지금의 '나'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과연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를......
실로 우리는 세세생생(世世生生)토록 익힌 버릇 속에서 우리의
진심(眞心), 우리의 참된 마음을 잃은 채 살고 있습니다.
언제나 망상과 욕심과 갈등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업을 쌓고 쌓아
지금 이 시간, 이 공간에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무감각한
상태에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를 망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앞날에
펼쳐지게 될 너무나 당연한 일까지도 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이루고자 한다면 삶을 올바로 직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삶의 뿌리가 무엇이며, 삶의 뒤편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삶의 뿌리는 바로 대우주에 가득 차 있는 생명력이고, 삶의 뒤편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물론 삶의 뒤편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 주변의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부모·형제·친척·스승·친구......
그 영전 앞에서 분명히 눈물을 흘리며 통곡을 하고 슬퍼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슬피 울면서 나에게도 숨이 떨어질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껴 본적이 있습니까?
'나도 죽는다. 그것이 한달 후가 될지 일년 후가 될지 십년후가
될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나도 죽는다. 이 몸뚱이는 한줌 흙이 되고,
나의 모든 것은 흩어지고 헛도니 것이 된다' 이러한 생각이 가슴에
오롯이 꽂혀 잇습니까? 젊은 친구의 죽음을 대하면서 '청춘이 아깝다'
며 슬피 울지만, 그 친구처럼 '나도 죽는다'는 것을 잘 느끼지 못하며
사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오래도록 감정에 휘말리고 욕망에
끌려가고 '나'만의 사랑에 빠져 무감각해진 상태, 무감각이 습관화된
업보중생(業報衆生)의 삶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 오늘
날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다시 한번 늙음과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고려말의 나옹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세월이 사람을 채찍질하여 어서 늙어 없어지라 하네
그 속에서 기쁘다고 몇 번이나 하하호호 하였으며
슬프다고 몇 번이나 애고대고 하였더냐
그러다가 흙 속의 백골이 되면
천년 만년 지난날을 후회만 하네.
이 나옹스님의 말씀처럼, 황금을 가지고 흰머리를 검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약으로 흰머리를 검게 만드는 것은 '눈감고 아웅'하는
것 일 뿐, 실제로 돈으로 흰머리를 다시 검게 할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늙음을 막고 죽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돈으로 극락을
살 수 없습니다.
눈을 크게 뜨고 바른 삶의 길을 보아야 합니다. 무감각하고 습관화된
삶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행복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부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를 비교해 보십시오. 부처님도 '나'
와 꼭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부처님은 진리의 생활을 하셨고, 우리는 엉뚱한 길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아들딸인 불자들조차 그분의 가르침 속에서 살기보다는,
모습에 끌려가고 소리에 끌려가고 피부에 와닿는 감촉에 속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럼 복된 삶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의 주어진 책임을 미루지 말고 적극적으로
완수하라.'
이것이 팔만대장경에 기록된 부처님의 가르침의 요지요,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密)의 도리입니다.
진리에 의지하여 지혜롭게 사는 실천하는 삶. 그와 같은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나'의 업
때문임을 긍정하고 업을 녹인다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물론 이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이기적인 생각과 감각적인 삶을
살아온 우리가 바른 길, 진리의 길로 나아가기란 어렵습니다.
몰라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오랜 습관 때문에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불경 속에서도 그것을 쉽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불자들이 즐겨 읽는 <<아미타경>>은 극락을 주제로 다룬 경전입니다.
지극히 행복한 곳이 극락입니다. 그 극락은 어디에 있는가?
<<아미타경>>은 "서쪽으로 10만억 국토를 지나면 극락세계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서쪽으로 10만억 국토!
먼저 '서쪽'이라고 한 것은 동양의 오행사상(五行思想)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다섯으로 구성된 오행
중 목은 동쪽이요 푸른색이며, 화는 남쪽이요 붉은 색입니다.
토는 중앙이요 푸른색이며, 금은 서쪽이요 흰색이며, 수는 북쪽이요
검은색입니다.
이에 준하여 극락의 방위를 서쪽으로 잡은 까닭은 흰색, 곧 깨끗한
쪽으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10만억 국토를 지나간다'고
할 때의 '10'은 십악업(十惡業)을 가리킵니다.
몸으로 짓는 ①살생 ② 도둑질 ③삿된 음행, 입으로 짓는 ④거짓말
⑤ 욕설 ⑥이간질 ⑦아첨, 뜻으로 짓는 ⑧탐욕 ⑨분노 ⑩삿된 생각
등의 열가지 업을 십악업이라 합니다.
중생이 십악법을 극복하기란 생각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완전히
극복하기란 참으로 힘이 듭니다. '거짓말을 말아야지',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지' 결심하고 또 결심하지만 완전히 극복하기란 어렵기
그지없습니다. '말아야지' 하면서 또 저지르고 '안 해야지' 하면서
또 되풀이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미타경>>에서는 '10'뒤에
'만억'을 붙여서 서쪽으로 10만억 국토를 지나가야 극락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바르고 착학 깨끗하게 살기 위한 끊임없는 반복! 극락을 그와 같은
끊임없는 반복, 끊임없는 수양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몇번
해보고 되지 않는다고 하여 포기할 일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노력
하면 지극히 행복한 극락세계가 우리 앞에 저절로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극락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이 계십니다. 범어 '아미타'를
시간적으로 번역하면 무량수(無量壽), 공간적으로 번역하면 무량광
(無量光)입니다. 한량없는 수명과 한량없는 광명을 갖춘 아미타
부처님, 우리는 무한한 시간과 한없는 공간에 충만되어 있는 변함
없는 진리의 부처님인 아미타불과 하나가 되어 지극히 행복한 극락의
삶을 누릴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제자는 이 극락세계에서 살아야 합니다. 부디 지금 이
자리를 회피하지 말고 지성(至誠)으로 삽시다. 한번 두 번, 스무번
백번으로 나쁜 버릇이 고쳐지지 않는다고 하여 포기하지 말고,
성 '誠' 한 글자를 마음 깊이 새겨 지성으로 삽시다.
지성의 삶!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예불을 올릴 때 외우는 지심귀명례
(至心歸命禮)의 '지심'도 지성을 다하는 마음입니다. 따라서
지심귀명례는 "나에게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치고도 흔들림이 없는,
지성 다한 마음으로 예배를 올린다"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지성껏 살겠다는 맹세가 지심귀명례 입니다.
지성껏 살면 깨끗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화엄경>>·<<법화경>>
등 모든 불교경전의 내용도 이 원점에 대한 것입니다. 모순 없는
원점에서 잘못 흘러나와 오늘의 여기에 이르렀지만, 다시금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하고 멋지게 승화된 원점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를 설하고 있습니다. 그 결론은 지성을 다하고
지성의 마음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선종(禪宗)의 가르침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선종을 대표하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직지인심은 "내가
지닌 본래의 마음인 지성의 마음을 가리킨다"는 말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지성의 마음을 가리켜 인식시키고
깨어나게 하는 것이 직지인심 입니다.
"지금 네가 마음, 마음 하는 것은 감정과 욕망의 때가 낀 잘못된
마음이다. 네가 참으로 지녀야 할 마음은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지성의 마음이다."
이것을 깨우쳐주는 것이 직지인심 입니다.
그리고 견성성불은 견성(見性), 곧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지성의
마음을 체득하여 잘 유지하면 욕망과 감정과 분별쪽으로 흘러가지
않게 되고, 저절로 완벽한 지성의 성자이신 부처를 이루게 된다는
뜻입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선종의 가르침이나 불경의 가르침이 조금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같이 욕망 족으로 쫓아가지 말고 지성의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가르침입니다.
지성의 마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그대로 극락이
되고 원점이 되고 불국정토(佛國淨土)가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끝-
▶ 우룡큰스님의 법어집 【불교신행의 주춧돌-출판사 : 효림】에서
일부 발췌 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서쪽을 향해 저도 무진장 노력해야 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