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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역문첨록
■ 증(贈) 좌찬성 김공(金公) 신도비명(神道碑銘)
공의 휘는 준룡(俊龍), 자는 수부(秀夫)이며, 성은 김씨(金氏)로, 본래 신라의 후예이다. 고려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낸 거공(巨公)이란 분이 원주(原州)에 식읍(食邑)을 하사받고 원성백(原城伯)에 봉해졌으므로 자손들이 마침내 원주를 본관으로 삼았으니, 원주 김씨(原州金氏)는 이분에게서 시작되었다.
그 후 대대로 현달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고, 본조(本朝)에 들어와서는 원도공(元度公) 해(晐)가 있으며 5세를 내려와 절도사 말손(末孫)이 있는데 절도사 박영(朴英)과 이름을 나란히 한 벗이었다. 당시에 대성(臺省)에 발탁하려는 논의가 있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남에 따라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이분이 공에게는 고조가 된다. 증조 휘 안우(安祐)는 젊어서부터 명성이 자자했으나 일찍 죽는 바람에 별다른 성취를 하지 못하였고, 사후에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조부 휘 영(瑛)은 전설사 별좌(典設司別坐)를 지냈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두남(斗南)은 소경대왕(昭敬大王) 때의 명인(名人)으로서 지방관으로 나가 치적이 우수하여 귀하게 되었으며 89세에는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모친 정부인(貞夫人)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담양 도호부사(潭陽都護府使) 휘 희필(希弼)의 따님이다.
공은 장대한 외모가 아이 때부터 이미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으므로 보는 이들이 모두 크게 될 인물이라 기대하였다. 만력 36년, 우리나라 소경대왕 41년(1608)에 공은 23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또 관무재(觀武才)에 장원하여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로 승진하고 법성 수군만호(法聖水軍萬戶)에 제수되었다.
28세에 마량 첨절제사(馬梁僉節制使)에 제수되었고 능력을 인정받아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품하고 인동 도호부사(仁同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나 영천군수 겸 조방장(榮川郡守兼助防將)으로 자리를 옮겼다.
광해군이 폐위되고 사방에 기강이 무너지자 상이 암행 어사를 각지에 파견하여 군현들의 불법행위를 규찰하게 하였는데, 공은 관내를 잘 다스렸다 하여 특별히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그 이듬해에 북도 병마우후(北道兵馬虞候)로 자리를 옮겼고 겨울에 회령 도호부사(會寧都護府使)로 옮겼는데 또다시 치적을 많이 올렸다 하여 표리를 하사받았다. 인동과 회령에서 모두 정청비(政淸碑)를 세우고 백성들이 공이 떠난 뒤에도 공을 추모해 마지않았다.
천계(天啓) 8년, 우리나라 인조 6년(1628)에 공이 43세로 서해 절도사(西海節度使)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 체차되었고, 겨울에 중화 도호부사(中和都護府使)에 제수되었다가 1년 뒤에 영남 절도사(嶺南節度使)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3년이 지나 절충장군으로서 북도 절도사(北道節度使)에 발탁되었는데, 공이 그동안 북관(北關)을 출입한 것이 10년이나 되어 그 명성이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상태였으므로 군막에 소속된 아전과 군사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3년이 지나 모친인 정부인(貞夫人)이 별세하였는데, 공의 나이가 이미 50이 지났건만 여묘살이 3년 동안 곡읍(哭泣)을 지나치게 한 탓에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상을 마치고 기보 우방어사(畿輔右防禦使)에 제수되었다가 이어서 호남 절도사(湖南節度使)에 제수되었다.
그해 겨울에 오랑캐가 대거 공격하였는데, 우리 국경을 침입한 지 3일 만에 선봉이 이미 도성에 근접하였다. 상이 급히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하였으나 대규모의 병력이 뒤를 이어 치고 내려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말았다. 오랑캐의 형세가 워낙 막강하여 하루가 급하게 군사를 소집하니, 공이 곧장 병영(兵營) 휘하의 친히 거느리던 군사들을 동원하고 군현(郡縣)의 군사들을 수합하여 임금을 구원하러 나섰다.
척후병(斥候兵)을 멀리 내보내고 부대를 정돈하여 규율에 따라 행군하니, 오랑캐의 유격대가 사방에서 출몰하면서도 멀찍이 바라보기만 할 뿐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공의 부대가 직산(稷山)에 이르렀을 때 죽산(竹山)에 주둔하고 있던 호서(湖西)의 병력을 오랑캐들이 아주 드세게 공격하고 있었다. 체찰사 종사관(體察使從事官)인 박서(朴遾)가 죽산을 먼저 구원하려고 하자 공은 임금을 구원하는 것이 더 급하다고 하며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왕명을 받은 지 13일째 되던 날 용인(龍仁)의 광교산(光敎山)에 이르러 험한 지세를 이용하여 진을 쳤다. 임금을 구원하러 올라온 부대들이 모두 패퇴하고 호남의 병력만 남한산성으로 진격하여 전투태세를 갖추었으며 정예부대를 출격시켜 오랑캐의 유격대를 격파하고 수없이 목을 베었다.
그러자 오랑캐들이 이를 두려워하여 몽고군 및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이 이끄는 군사 수만 명과 합세한 후 안개 낀 새벽을 틈타 정면으로 진격하여 아군을 일격에 격파하려고 하였는데, 그 형세가 마치 비바람이 몰아치듯 하였다.
공이 군사들 앞에서 장검을 짚고 맹세를 하고는 화살이 쏟아지는 곳에 서서 죽기로 싸울 뜻을 보이자 군사들이 모두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오랑캐들이 진격과 퇴각을 반복하여 하루 종일 양군이 온 힘을 다해 싸웠다. 그러는 가운데 오랑캐의 날랜 기병이 아군의 후방에 있는 고개를 몰래 넘어가 상봉을 먼저 점거하고는 화살을 비 오듯 쏘아대기 시작했다.
공이 급히 용사 수백 명을 출격시키고 상봉을 앞다투어 오르게 하면서,
“지금이 바로 충신이 나라에 보답할 때이다.”
하니, 육박전에 나선 군사들이 모두 일당백(一當百)으로 싸웠다.
오랑캐 가운데 갑옷을 입고 깃발을 잡고 있던 자가 봉우리 위로 말을 타고 올라가 서더니 큰 깃발을 세우고 군사들에게 호령을 내리자 군사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공이 그자를 가리키며,
“저놈을 죽이지 못하면 적들이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하면서 더욱 싸움을 독려하여 총포를 일제히 쏘아 대게 하니, 깃발을 잡고 군사들에게 호령을 내리던 자와 좌우에 서 있던 추장들 가운데 함께 탄환에 맞아 죽은 자가 여러 명이었고 오랑캐 군사들 가운데 죽은 자들이 즐비하여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반면에 아군의 전사자는 겨우 수십 명에 불과했다. 크게 패한 오랑캐가 산에서 내려와 곳곳에 시체를 쌓아 놓고 이를 태우니 오랑캐 군중이 곡소리로 가득하였으며, 시각은 밤 2경이 거의 다 되었다. 공이 군중을 둘러보니 탄환이 이미 다 떨어졌고 군량미도 고갈되어 아침에 오랑캐가 필시 대거 들이닥칠 터인데 그렇게 되면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군진을 이동하여 군사들을 쉬게 할 생각으로 사방에 횃불을 벌려 놓아 마치 군사들이 있는 양 속여 놓고 야음을 틈타 몰래 군사를 이동하였다. 아침이 되어 오랑캐가 대거 들이닥쳤으나 보루들은 이미 텅 비어 있는 상태였고, 적들은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 감히 따라오지 못하였다.
이때 전사한 오랑캐의 패장 백양고라(白羊高羅)는 지위가 높은 오랑캐 장수로서, 전투를 잘하고 전공을 많이 세워 선칸(先汗)이 사위로 삼아 오랑캐들로부터 추중을 받는 인물이었다. 한편 아군이 행군을 하던 중 밤에 놀라 군중이 혼란해지자 큰 소리로 외쳐 대기를,
“주장(主將)을 위해 이미 온 힘을 다해 싸워 적들에게 승리를 거두어 놓고도 아무런 원조도 받지 못한 채 졸지에 이런 변고를 당하고 말았으니 이렇게 부질없이 죽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하고는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공이 휘하의 기병 수백 명과 함께 수원(水原)에 이르렀으나 군사가 없어 남쪽으로 내려가 다시 군사를 모아 다음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감사 이시방(李時昉)이, 오랑캐가 두려워 싸움터로 구원하러 오지 못한 탓에 절도사가 공을 세운 것에 대해 마음속으로 부끄럽기도 하고 질투가 나기도 하여 사실과는 달리 말을 바꾸어 보고하였고, 종사관 박서는 이전에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해 마음속으로 화가 난 상태라 그 또한 상에게 공을 비방하는 말을 올렸다.
공이 죄를 받게 되자 대신(大臣) 이성구(李聖求)와 최명길(崔鳴吉)이 전투에서 승리한 상황에 대하여 극구 설명하면서,
“전공은 많고 사실상 죄는 없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이 때문에 이시방은 귀양을 가고 공은 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호란이 끝나고 난 뒤에는 공이 늘 어영 중군(御營中軍)으로 있었으나 몇 년 동안 병으로 나가지 못하고 집안에 있었다. 병을 위문하러 온 손님들마다 모두 공이 병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였으나 공과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명(李溟)은 그렇게 생각지 않아서 그의 아들에게만 슬쩍 말하기를,
“아무개가 어찌 중국을 공격하는 일을 도울 사람이겠는가. 그의 병은 낫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 임경업(林慶業)과 유림(柳琳)이 모두 청나라를 도와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가도(椵島)와 금주(錦州)의 전투에 내몰려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숭정 12년, 우리나라 인조 18년(1640)에 김해 도호부사(金海都護府使)에 제수되었고, 1년이 지나 영남 절도사(嶺南節度使)에 제수되었는데 이 직임은 두 번째로 맡은 자리였다. 그래서 군중(軍中)의 일은 예전 재임할 당시에 만든 규정을 그대로 이행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듬해에 병이 심해짐에 따라 상소를 올려 절도사의 직책을 사직하고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서 10여 리를 가다가 객관(客館)에서 객사하니 향년 57세였다. 이때 큰 별이 남방에 떨어졌다. 의정 김류(金瑬)와 원두표(元斗杓)가 조당(朝堂)에 있다가 부음을 듣고는 깜짝 놀라 말하기를,
“천명이로다. 남방에 별이 떨어지더니 과연 훌륭한 장수 한 명을 잃고 말았구나.”
하였다.
상이 특별히 일로(一路)에 명하여 상여를 호송하게 하고 유사(有司)에게 의례에 따라 부의(賻儀)를 보내게 하였으며, 제문(祭文)을 내려 공의 공업에 대해 장성(長城)처럼 의지하였노라고 칭송하였다. 공은 만력 14년(1586, 선조 19) 12월 23일에 태어나 숭정 15년(1642, 인조20) 11월 5일에 별세하였고, 그해 12월 12일에 양천현(陽川縣) 남산(南山)의 선영에 안장되었다.
공은 성품이 침착하여 훌륭한 지략을 많이 갖추었고 겸손한 태도로 군사들을 사랑하였으므로 부하들이 공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지방 수령에서부터 연수(連帥)에 이르기까지 군대를 통솔한 수십 년 동안 공은 규정을 엄하게 하고 공과(功過)를 명확히 하였고 형벌을 내릴 때는 반드시 신중히 하였다.
권세에 아첨하지도 않고 개인적인 욕심을 좇지도 않았다. 관청을 집으로 삼아 생활했기 때문에 귀가해서 머물 만한 번듯한 집도 없었고 거처와 복식이 열사(列士)로 있을 때처럼 소박하였다. 공이 별세한 뒤에 집으로 운구해 돌아왔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초상을 치르기 위한 제반 일들을 모두 남의 도움을 받아 마련하였으니, 사람들이 모두들 공을 훌륭하게 여겼다.
광교산에서의 승첩에 대하여 모든 이가 칭송하였건만 공은 말하기를,
“이때 임금이 치욕을 당하고 있는데 군사를 통솔하는 신하로서 성 아래에서 싸우다 죽지 못하였으니, 죄를 지은 것이다. 달리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하였는데, 그때 공의 마음속 생각은 ‘불행히도 위급한 때를 만나 임금이 성 아래로 내려와 항복을 하는 마당에 신하로서 목숨을 버렸어야 부끄럽지 않을 것이요, 오랑캐를 격파한 것으로는 자랑할 것이 못 된다.’라고 여겼을 것이다.
어떤 임무를 맡더라도 사양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공로를 차지하려고 하지 않고 목숨 바쳐 선도(善道)를 지킬 것을 굳게 다짐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충신의 의리이다. 공은 평소 집에 있을 때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였으며, 바깥에서는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고 남들과의 교유에 신의를 지켰다.
공의 선친이 올바른 행실로 명성을 얻게 된 원천이 바로 이것인데 공이 이처럼 잘 지켜서 잃지 않았던 것이니, 대체로 공의 훌륭함은 그 유래가 있다고 하겠다. 부인 임씨(林氏)는 본관이 순창(淳昌)으로,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 휘 계(繼)의 따님이다.
지난날의 훌륭한 말씀과 행실을 많이 알아서 한결같이 허물을 만들지 않는 것으로써 자신을 신칙하였으므로 외부에서 뇌물을 바치거나 여자를 통한 청탁이 전혀 들어오지 않았으니, 이는 모두가 부인이 현명했기 때문이다. 공이 별세하고 16년이 지난 효종 9년(1658) 12월 18일에 부인이 76세로 별세하였으며, 다음 해 2월 27일에 남산에 부장(祔葬)되었다.
아들 넷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은 경문(敬文), 한문(漢文), 인문(仁文), 현문(炫文)이고, 사위는 정상(鄭相)이다. 경문은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을 지냈으며, 나이 80에 수직(壽職)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아들 셋을 낳았는데, 춘장(春章), 진원(振遠), 형원(亨遠)이며, 딸 하나를 두었는데 사위는 참봉 이온(李薀)이다. 진원은 몽협(夢協)을 낳았고, 형원은 딸 둘을 두었는데 사위는 신필경(申弼卿), 이익휴(李益休)이다.
한문은 해서 절도사(海西節度使)를 지냈으며 의금부 도사인 석(碩)을 낳았다. 또 딸 둘을 두었는데 사위는 이진성(李震晟), 윤수손(尹首孫)이다. 석은 몽상(夢商), 몽량(夢良)을 낳았는데 몽상은 생원이고 몽량은 훈련원 정(訓鍊院正)이다. 딸 둘을 두었는데 사위는 안후선(安后宣)과 엄집(嚴䌖)이며, 엄집은 진사이다.
인문은 사복시 판관(司僕寺判官)을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덕원(德遠)을 낳았는데 형조 판서이고, 덕원이 몽양(夢陽)을 낳았는데 사간원 정언이다. 딸 둘을 두었는데 사위는 유헌장(柳憲章)과 한종범(韓宗範)이며, 유헌장은 진사이다. 현문은 병조 정랑을 지냈다.
아들은 홍원(弘遠)이고 사위는 윤해(尹楷)인데 모두 진사이다. 홍원은 몽단(夢端)을 낳았고, 또 딸 하나를 두었는데 사위는 성임(成任)이다. 정상은 통덕랑(通德郞)에 올랐으며, 중희(重煕), 중윤(重胤)을 낳았는데 모두 진사이다. 또 딸 하나를 두었는데 사위는 정규제(鄭奎齊)이다.
그 밖에 이진성은 아들 하나를 두었고 윤수손은 아들 둘을 두었고 홍원은 앞의 아들 외에 또 아들 하나와 딸 하나가 더 있다. 정중희는 아들 둘을 두었고 정중윤은 아들 하나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어리다. 서출(庶出)로는 아들딸 여섯 명을 두었는데, 아들 셋은 내문(乃文), 전문(全文), 회문(會文)이며, 딸 셋은 군수 박정상(朴廷翔), 감사 원만석(元萬石), 감목(監牧) 이익상(李益常)의 첩이 되었다.
내외 적서(嫡庶)의 아들, 손자에서 증손, 현손의 대에 이르기까지 어린아이를 모두 합치면 백여 명이 된다.
그 명(銘)은 다음과 같다.
용맹 떨친 무신다움은 / 矯矯虎臣
공후의 간성이요 / 公侯干城
충의로 쌓은 공적은 / 忠義之積
만인이 우러러보니 / 萬夫之望
그 이름 백대에 전하리 / 百代之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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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주01] 소경대왕(昭敬大王) :
소경은 선조(宣祖)의 시호이다.
[주02] 관무재(觀武才) :
임금이 친히 열병(閱兵)한 뒤에 당상관으로부터 그 아래의 군관 및 한량에게 보이는 무과 시험이다.
[주03] 북관(北關) :
오늘날의 함경북도 지방을 이르는데, 여기서 관(關)은 마천령(摩天嶺)을 가리킨다. 마천령 이남은 남관(南關)이라고 한다.
[주04] 몽고군 …… 명 :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은 모문룡(毛文龍)의 부하 장수로서, 모문룡이 복주(伏誅)된 뒤에 등주(登州)와 내주(萊州)로 들
어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명군의 공격을 받고 청나라에 투항한 이들이다. 병자호란 때 청 태종(淸太宗)은 청병(淸兵) 7만 8000명 이
외에 이들 명나라 반군이 이끄는 한병(漢兵) 2만 명과 몽고병(蒙古兵) 3만 명 도합 12만 8000명의 원정군을 구성하여 조선을 침입
하였다.
[주05] 선칸(先汗) :
청 태조(淸太祖) 누르하치를 가리킨다.
[주06] 주장(主將) :
전라 감사 이시방(李時昉)을 가리킨다. 당시의 전황은 이러하다. 인조 14년(1636) 12월 20일에 근왕(勤王)의 명을 받은 이시방은
6000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그달 29일에 전라 병사 김준룡(金俊龍)과 함께 남한산성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이듬해 1월 2일에 양지(陽智)에 도착한 이시방은 김준룡을 선봉장으로 삼아 군사 2000명을 이끌고 먼저 진군하게 하고 자신은 본대
를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 1월 4일 수원(水原)과 용인(龍仁) 사이에 있는 광교산(光敎山)으로 진출한 김준룡은 전투태세를 갖추고
남한산성과의 연락을 취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청장(淸將) 백양고라(白羊高羅)가 병력 2000명을 광교산 동쪽 일대에 배치하여 남한산성과의 연락을 차단하고 주력 5000
명을 이끌고 총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백양고라가 아군에 의해 전사함으로써 청군은 순식간에 전열이 와해되고 조선군은 이 틈을
타서 일제히 반격을 가하여 청군을 대파하였다.
이 싸움은 병자호란 중에 청군과 싸운 최대의 전투이자 최초의 대승으로 기록된다. 이때 김준룡의 부대는 본대인 이시방으로부터 군
량과 무기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결국 수원으로 철수하게 되었고 철수 도중에 많은 군사를 잃었다. 한편 이시방은 김준룡의 부대가 수
원으로 철수했다는 소식을 패전에 의한 퇴각으로 잘못 알고 1월 7일에 휘하군을 이끌고 공주(公州) 방면으로 철수했다.
[각주]
[주-D007] 연수(連帥) :
절도사(節度使)를 가리킨다.
[주-D008] 열사(列士) :
하급 군관을 이른다.
ⓒ 한국고전번역원 | 최채기 (역) |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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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公諱俊龍, 字秀夫, 姓金氏, 本新羅苗裔也。 高麗時, 有吏部尙書巨公, 賜食邑原州, 封原城伯, 子孫遂爲原州人。 原州之金始此。 其世多達人、顯者。 入本朝, 有元度公晐。 五世有節度使末孫, 與朴節度英齊名爲友。 當時有擢用臺省之議, 己卯諸人敗而不果, 於公爲高祖。 曾祖諱安祐, 少有名譽, 早世不成, 追贈左贊成。 祖諱瑛, 以典設司別坐, 追贈吏曹參判。 父諱斗南, 昭敬時名人, 以治行高第貴, 八十九, 以大年至同中樞。
母貞夫人金海金氏, 潭陽都護府使諱希弼之女也。
公魁偉, 自爲兒戲已不與凡兒等, 見者皆期以遠大。 萬曆三十六年, 我昭敬王四十一年, 公二十三, 以武科發身爲宣傳官。 又以觀武才壯元, 陞訓鍊主簿, 爲法聖水軍萬戶。 二十八, 爲馬梁僉節制使, 以能陞折衝, 爲仁同都護府使。 二年改榮川郡守、兼助防將。 及光海廢而四方無紀, 上分遣繡衣察諸郡縣不法, 公特以治理賜表裏。 其明年, 遷北道兵馬虞候, 冬, 移會寧都護府使, 又以多績賜表裏以賞之。 仁同、會寧, 皆有政淸碑, 百姓追思不已。
天啓八年, 我仁廟六年, 公四十三, 爲海西節度使, 尋遞。 冬, 爲中和都護府使。 一年爲嶺南節度使。 三年以折衝擢拜北道節度使。 公出入北關前後十年, 威名已著, 軍吏、士大悅。 三年, 貞夫人卒, 公已五十, 居廬三年, 哭泣幾滅性。 旣除喪, 爲畿輔右防禦使, 仍爲湖南節度使。 其冬, 虜大擧攻我, 入我境三日, 先驅已薄國都。 上急出幸南漢, 大兵繼至, 南漢受圍, 虜勢盛强, 召兵日急。 公卽起營下親兵, 行收郡縣兵勤王, 遠斥候, 整戎卒, 師行有律。 虜遊騎四出, 亦觀望而已, 不敢逼。 至稷山, 湖西兵在竹山, 虜攻之甚急。 體察從事朴遾欲先救竹山, 公言勤王之急, 不從也。 受命十三日, 至龍仁光敎山, 據險而陣。 諸勤王之師皆已敗沒, 湖南兵獨專薄南漢, 以爲聲勢, 出勁兵擊破虜遊騎, 斬馘甚多。 虜患之, 合蒙古、孔、耿兵數萬, 乘曉霧直前, 欲一擊破之, 勢若風雨。 公杖劍誓衆, 立矢、石之所, 以示必死, 士皆殊死戰。 虜且進且却, 終日力鬪。 虜以輕騎潛踰後嶺, 先據上峯, 矢下如雨。 公急出勇士數百爭登, 曰: “此正忠臣報國之秋也。” 薄戰士皆一當百。 虜有被甲執旗立馬峯上, 建大旗令衆, 衆皆合聚。 公指之曰: “彼不殺, 賊不退。” 督戰益力, 衆砲俱發, 執旗令衆者與諸酋長左右立中丸, 一時死者數人, 而虜衆死者相枕藉, 不可計數, 我兵死者僅數十。 虜大潰下山, 處處積屍燒之, 虜中皆哭聲, 夜幾二更矣。 閱軍中, 砲丸已盡, 軍食乏。 朝日虜必大至, 不可當, 欲移陣休士卒, 乃列炬爲疑兵, 潛師夜行。 至朝, 虜果大至, 則空壘, 亦畏伏不敢追。 虜敗將死者白羊高羅, 虜之貴將, 以善鬪功高, 先汗以女妻之, 重於虜者也。 我兵中路夜驚軍亂。 大呼曰: “爲主將, 旣力戰勝之, 卒有變, 徒死無益。” 皆散去。 公與麾下騎士數百至水原, 患無兵, 欲南下更收兵爲後計。 監司李時昉畏胡不赴亂, 心內慙忌節度之有功, 反辭以
聞; 從事遾旣心怒不從己言, 亦毁於上。 公當得罪, 大臣李聖求、崔鳴吉極言戰捷狀, 曰: “功多實無罪。” 以故時昉竄, 公得免。
旣事平, 公常爲御營中軍, 家居數年, 以病不出。 客來問者皆憂其不起, 而李公溟素善, 私謂其子曰: “某也豈助攻中國者也? 其疾固也。” 時林慶業、柳琳皆被驅從椵島、錦州之役矣。 崇禎十二年, 我仁廟十八年, 爲金海都護府使。 一年爲嶺南節度使, 再任也, 軍中事, 復修前時約束而已。 明年, 疾甚, 上疏乞解印綬, 輿疾行十許里, 客死館次, 年五十七。 時有大星隕於南方。 議政金瑬、元斗杓在朝堂, 聞訃
至, 驚曰: “天也! 南方星隕, 果然失一良將!” 上特令一路送喪, 有司致賻如儀, 賜祭文稱其功業倚如長城云。
公生於萬曆十四年十二月二十三日, 卒於崇禎十五年十一月五日, 其十二月十二日, 葬陽川縣南山族葬。 公沈毅多大略, 謙恭愛士, 能得人之死力。 自二千石以至連帥, 禦軍數十年, 嚴約束, 信賞罰, 繩墨必謹。 不媚權貴, 不循私枉, 以官爲家, 歸則居無室廬, 居處、服食樸如列士時。 及歿而歸, 家貧, 凡喪事依人以辨, 人莫不賢之。 光敎之捷, 萬口多之, 而公曰: “當此之時, 主辱矣, 將兵之臣不死城下, 罪也。 他尙何說哉?”
其心以爲不幸遭値傾覆, 乘輿下城, 爲人臣滅身不爲愧, 破虜不爲多。 雖受任不辭, 慨然不以功業自居, 以守死善道爲心, 此忠臣義也。 公平生居則孝於事親, 友於兄弟; 出則忠於事君, 與人交而信。 此先大夫以行誼立名, 公能守而不失如此, 蓋其賢有自云。
夫人林氏, 籍淳昌, 軍資監主簿諱繼之女也。 能多識前言往行, 一以無過自飭厲, 門無苞苴、女謁, 皆夫人之賢也。 公歿十六年, 而孝宗九年十二月十八日, 夫人七十六歿, 後年二月二十七日, 祔葬南山。
有四男一女: 男敬文、漢文、仁文、炫文, 壻鄭相。 敬文, 司宰監僉正, 年八十, 壽爵僉知中樞府事。 生三男: 春章, 振遠, 亨遠。 有一女壻參奉李薀。 振遠生夢協。 亨遠有二女: 壻申弼卿、李益休。 漢文, 海西節度使。 生碩, 義禁府都事。 有二女壻: 李震晟, 尹首孫。 碩生夢商、夢良。 夢商, 生員; 夢良, 訓鍊院正。 有二女壻: 安后宣, 嚴䌖。 䌖, 進士。 仁文, 司僕寺判官, 追爵吏曹判書。 生德遠, 刑曹判書。 生夢陽, 司諫院正言。 有二女壻: 柳憲章, 韓宗範。 憲章, 進士。 炫文, 兵曹正郞。 男弘遠, 壻尹楷, 皆進士。 弘遠生夢瑞。 有一女壻成任。 鄭相, 通德郞。 生重熙、重胤, 皆進士。 有一女壻鄭奎齊。 李震晟一男, 尹首孫二男, 弘遠又一男一女, 鄭重熙二男, 鄭重胤一男一女, 皆未長。 庶出子女六人。 三子: 乃文, 全文, 會文。 三女: 郡守朴廷翔、監司元萬石、監牧李益常妾。 內外嫡庶子孫, 至曾玄之世幷未長者, 百有餘人。 其銘曰:
矯矯虎臣, 公侯干城。 忠義之積, 萬夫之望, 百代之名。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