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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화 묘갈명(鄭太和 墓碣銘) - 강백년(姜栢年)
무릇 큰 집안을 이어나가자면 그 보전(保全)하는 일이 어려운 법인데, 오직 덕을 쌓은 집안은 복록(福祿)이 면면히 이어지고 대대로 명망 있는 재상을 배출한다. 지금 세덕(世德)을 논하는 자들도 반드시 정상(鄭相, 정태화)의 집안을 말하고, 상업(相業, 재상으로서 이룩한 업적)을 논하는 자들도 반드시 정상의 집안을 말한다. 그렇다고 보면, 선(善)을 쌓은 사람에게 하늘이 복을 내려 주는 이치는 마치 손에 부절(符節)을 쥔 것처럼 믿을 만하다.
삼가 살펴보건대,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복야(僕射)를 지낸 정목(鄭穆)으로부터 고려 시대에 현달하였고, 그 뒤 대대로 소문난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정사(鄭賜)가 정난종(鄭蘭宗)을 낳았는데, 정난종은 벼슬이 참찬(參贊)에 이르고 공신에 녹훈(錄勳)되어 군(君)에 봉해지고 익혜(益惠)라는 시호(諡號)가 추증되었다.
이분이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정광필(鄭光弼)을 낳았는데, 정광필은 상업(相業)이 매우 성대하였는 바, 예컨대 임금의 옷자락을 잡아당기고 울먹이면서 간쟁(諫爭)하여 기묘년(己卯年, 1519년 중종 14)의 사류[士類, 기묘 명현(己卯名賢)을 말함]들을 구해 준 일이 가장 현저한 업적이다.
이 분에게 문익(文翼)이라는 시호가 추증되었고 중종(中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는데, 곧 공의 5대조이다. 공의 고조(高祖)는 정복겸(鄭福謙)으로 강화 부사(江華府使)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증조(曾祖)는 정유길(鄭惟吉)인데 좌의정(左議政)을 지냈고 호(號)는 임당(林塘)이며 덕업(德業)과 문장(文章)이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할아버지는 정창연(鄭昌衍)으로 그 또한 좌의정을 지내다가 혼조(昏朝, 광해조를 말함)를 당해서는 문을 닫아걸고 바깥 출입을 하지 않으면서 자정(自靖)하였는데도 뭇 간사한 자들이 떼를 지어 비난하였으며 인조(仁祖) 초에 예전의 재상(宰相)을 지낸 사람인 까닭에 ‘오래전부터 경의 숙덕(宿德)을 흠모하였다.’는 유지(諭旨)가 있었다.
아버지는 정광성(鄭廣成)으로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를 지냈으며 일찍부터 화려한 가문을 드날리다가 낌새를 채고서 용퇴(勇退)하였으니 만절(晩節)과 청복(淸福)이 세상에 둘도 없을 만큼 뛰어났다. 선비(先妣)인 정부인(貞夫人)은 창원 황씨(昌原黃氏)로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황근중(黃謹中)의 딸인데, 만력(萬曆) 임인년(壬寅年, 1602년 선조 35) 정월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諱)는 태화(太和)요, 자(字)는 유춘(囿春)이며, 호(號)는 양파(陽坡)이다. 태어날 때부터 덕기(德器)가 있어서 그를 바라보면 장차 걸출한 사람이 될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나이가 겨우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중국 사람으로서 관상(觀相)을 잘 보는 자가 공을 보고서 진재상(眞宰相)이 될 인물이라고 칭찬하였다. 성장한 뒤에는 명망있는 동류(同流) 사이에서 서로 정승이 될 인재라고 허여(許與)하였다.
시장(試場)에 들어가면 공이 지은 글들이 모두 높은 등급에 뽑혔으므로 장상(張相)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호)이 칭찬하였다. 갑자년(甲子年, 1624년 인조 2년)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무진년(戊辰年, 1628년 인조 6)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에 배속되었다. 기사년(己巳年, 1629년 인조 7)에 천거를 받아 한원(翰苑)에 들어갔고, 그해 가을에는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으며 예조 좌랑(禮曹佐郞)에 제수되었다.
이로부터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에 이르기까지 삼사(三司,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옥당(玉堂, 홍문관)에서는 수찬(修撰)ㆍ교리(校理)ㆍ부교리(副校理)ㆍ응교(應敎)ㆍ부응교(副應敎)를 지냈고, 사간원(司諫院)에서는 정언(正言)ㆍ헌납(獻納)ㆍ사간(司諫)을 지냈고, 사헌부(司憲府)에서는 집의(執義)를 지냈고, 춘방(春坊, 세자 시강원)에서는 설서(說書)ㆍ사서(司書)ㆍ필선(弼善)을 지냈는데, 모두 보덕(輔德)을 겸임한 것이 세 번이고 줄곧 이조(吏曹)의 정랑(正郞)과 좌랑(佐郞),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성균관(成均館)의 직강(直講)ㆍ사예(司藝)ㆍ사성(司成), 예빈시(禮賓寺)ㆍ제용감(濟用監)ㆍ사복시(司僕寺)ㆍ장악원(掌樂院)의 정(正) 등을 겸임하였으며, 항상 지제교(知製敎) 겸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와 한학 교수(漢學敎授)ㆍ의사 교수(醫司敎授)를 겸대(兼帶)하였다. 다만 경오년(庚午年, 1630년 인조 8) 1년 동안은 부모 봉양을 위하여 외직으로 나가 통진 현감(通津縣監)을 지냈다.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에는 특명으로 호서 관찰사(湖西觀察使)에 제수되었고, 다시 조정에 들어와 승지(承旨)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이조(吏曹)ㆍ호조(戶曹)ㆍ예조(禮曹)의 참의(參議)와 병조(兵曹)의 참지(參知)를 역임하고서 부제조(副提調)로서 비국(備局, 비변사(備邊司))과 괴원(槐院)을 겸임하였다.
경진년(庚辰年, 1640년 인조 18)에 또 특명으로 승진하여 우윤(右尹)에 제수되었고, 이어 내직(內職)으로는 대사간(大司諫), 도승지(都承旨), 병조ㆍ형조ㆍ이조ㆍ호조ㆍ예조의 참판(參判)을 역임하면서 동지성균관사(同知成均館事)를 겸임하였으며, 외직(外職)으로는 관서(關西)와 영남(嶺南) 지역을 안찰(按察)하였다.
갑신년(甲申年, 1644년 인조 22)에 또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발탁 제수되었고, 이어 한성 판윤(漢城判尹), 대사헌(大司憲), 이조ㆍ예조ㆍ형조ㆍ공조의 판서(判書)를 역임하면서 지경연사(知經筵事)ㆍ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ㆍ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ㆍ도총관(都摠管)ㆍ좌빈객(左賓客) 등의 직임을 겸임하였다.
대배(大拜, 정승에 임명되는 일) 이후로는 연이어 태좌(台座, 의정부의 세 정승을 말함)에 거의 30년 동안이나 재임하였는데, 우의정(右議政) 한 번과 좌의정(左議政) 두 번과 영의정(領議政) 여섯 번을 지냈고 호위 대장(扈衛大將)을 겸임하였으며, 간간이 서추(西樞, 지중추부사를 말함)를 겸대하였다. 이것이 곧 공의 전후 이력(履歷)이다.
공은 전재(全材, 완전한 재능)가 일찍부터 드러나서 갑술년(甲戌年, 1634년 인조 12년)에 문사(文士)를 선발하여 화사(華使, 중국 사신)를 접빈(接儐)할 때에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에 추천받았고, 을해년(乙亥年, 1635년 인조 13)에 수부(帥府)를 설치하여 만약의 사태를 대비할 때에는 원수(元帥)의 종사관에 추천받았다.
병자년(丙子年, 1636년 인조 14) 겨울에 원수의 막하(幕下)에 부임할 때 임금으로부터 활과 화살을 하사받고 서너 명의 비장(裨將)을 데리고 길을 출발하였다. 정축년(丁丑年, 1637년 인조 15) 정월에 우리 군대가 토산(免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적(賊)의 기병(騎兵)이 갑자기 대규모로 쳐들어오자 원수(元帥)는 도망해 버리고 대군(大軍)이 무너져 버렸다.
공은 이 갑작스럽고 다급한 시기에 남은 병졸들을 수습하여 고을의 관청을 근거지로 삼아 화살과 돌멩이가 빗발치듯 날아오는 전장(戰場)에서 힘껏 싸워 다수의 적을 살상(殺傷)하였다. 이에 적은 크게 기세가 꺾이어 퇴각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공을 장(壯)하게 여기어 임금에게 보고하기까지 하였다.
소현 세자(昭顯世子)를 배행(陪行)하여 심양(瀋陽)에 들어가게 되자, 임금이 공을 재국(才局)이 있다고 칭찬하며 보덕(輔德)에서 체직시키어 국내에 남게 하라고 명하였다. 그해 6월에 호남(湖南) 지방에 안찰사(按察使)를 보내게 되었는데, 임금이 그날 즉시 개정(開政)하여 하비(下批)하고 면대해 유시(諭示)하기를, “경(卿)이 토산(免山)에서 해낸 일을 가상히 여기어, 이에 발탁하여 한 방면(方面)을 맡기는 벼슬을 제수하노라.”고 하였다.
임오년(壬午年, 1642년 인조 20)에 공이 영남 지방에 안찰사로 내려갈 때에도 임금이 또 면대하여 유시하기를, “남쪽 변경의 일이 중대하여 다시 경으로 하여금 혼자만 애쓰게 하여 미안하다.”고 하였다. 이에 앞서 조정의 의도가 존주(尊周, 명(明)나라를 존숭함을 말함)에 있어서 명나라에 비밀히 보낸 문서가 있었는데 공이 그때 관서(關西)의 변경에 재직하면서 그 일을 관여하여 알고 있었다.
이윽고 그 일이 누설되자 청인(淸人)들이 그 문제를 우리측에 따지어 책임을 캐물었다. 이에 공은 급히 남쪽 변경에서 체임되어 관서 지역으로 부임하였는데 임금이 이 일을 안타깝게 여기어 전례보다 후한 하사 물품을 내려 주었고 공은 밤낮없이 길을 달려 엿새 만에 봉황성(鳳凰城)에 도달하였다. 저들이 갖가지로 공갈(恐喝)하였으나 공이 그들의 따지는 말에 척척 대답을 잘하여 일이 마침내 끝나게 되었다.
기축년(己丑年, 1649년 인조 27) 봄에 우의정에 임명되어 연경(燕京)에 사행(使行)을 갔다가 돌아왔고 그해 가을에는 좌의정에 승진하였는데, 조금 뒤에 내간상(內艱喪)을 당하였다. 이에 임금이 공을 기복(起復, 거상(居喪)중인 신하를 직에 임명하는 것)하기로 논의하여 다시 정승에 임명하였는데, 공이 성의를 다 바쳐 다섯 번이나 상소를 올리자 이에 중지하였다.
신묘년(辛卯年, 1651년 효종 2)에 복상(服喪)을 마치자 영의정에 임명되었고, 갑오년(甲午年, 1654년 효종 5)에는 휴가를 청하여 어버이를 찾아가 뵙겠다고 하자, 임금이 특별히 어버이의 나이를 물어보고는 즉시 그 관질(官秩)을 높여주라고 명하였으며, 또 공이 멀리 살고 있어서 어버이를 그리워하여 나랏일에 전념하지 못하게 될까 염려하여 공의 어버이에게 서울로 들어오도록 유시하였다.
어버이가 서울에 오자 즉시 희생을 보내 맛있는 음식을 제공토록 하였는데, 세상을 떠나기에 미쳐 조문(弔問)과 부의(賻儀) 및 증직(贈職) 등을 특별히 우대해 주었다. 어느 날에는 공이 상중에 몹시 애훼(哀毁)를 하다가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중사(中使)를 공의 집에 보내어 ‘상중에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목숨을 잃게 되면 효도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타이르면서 권도(權道)를 따르라고 간곡히 면려하였다.
이때부터 어선(御膳, 임금이 궁중에서 먹는 음식)을 공에게 자주 나누어주고 문병하는 궁중의 의원들이 잇달았으며, 나라에 의심스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번번이 공에게 자문하곤 하였고, 주사(籌司, 비변사)에 명하여 공의 집에 찾아가 일을 상의하라고 명하기까지 하였으나 공은 사양하고 응대하지 않았다.
병신년(丙申年, 1656년 효종 7)에 상복(喪服)을 벗고 궁궐에 나아가 임금에게 숙배(肅拜)하자 임금이 특별히 궁중에서 빚은 술을 내리어 공으로 하여금 취하게 한 뒤에 등대(登對)하도록 하였다. 또 별당(別堂)에서 서너 명의 재신(宰臣)들과 함께 사대(賜對)하였으나 공이 사적(私的)으로 뵙는 일이라는 이유로써 사양하다가 임금이 강요하다시피 한 뒤에야 그 자리에 나아갔다.
임금이 좌우의 신하들을 물리치고 변방의 일을 공에게 상의하면서 친히 술잔을 들어 공에게 술을 권하였으며 도검(刀劍)과 허리띠를 하사하였다. 또 사고(賜告)하는 비답에 이르기를, “경을 궁중에 끌어들인 뒤로부터 내가 잠자는 일도 잊고 밥 먹는 일도 아랑곳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경이 내 곁을 떠나니까 마치 팔과 다리를 잃은 것과 같아 마치 물고기에게 물이 없는 것과 같았고 장님에게 길잡이가 없는 것과 같았다.”고 하였으니, 그 의지하고 신임한 것이 이와 같았다.
현종(顯宗) 기해년(己亥年, 1659년 현종 즉위년)에 이르러 처음에 원상(院相)으로서 승정원에 머물러 있다가 그만두고 나오게 되자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공제(公除)할 때까지만 그대로 머물도록 하였다. 임인년(壬寅年, 1662년 현종 3)에 연경(燕京)에 사행(使行)할 때에는 초구(貂裘)를 하사하고 서교(西郊)에서 궁중의 술을 내리면서 공의 자제(子弟)들과 함께 입참(入參)하도록 명하였으며, 한결같이 선조(先朝) 때의 특전(特典)을 따라 우대하였다.
정미년(丁未年, 1667년 현종 8)에 공이 의정(議政)에서 체직되고 공의 중씨(仲氏, 정치화(鄭致和)가 그 대임(代任)이 되었다. 신해년(辛亥年, 1671년 현종 12년)에 기사(耆司,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나 병 때문에 조정에 배명(拜命)할 수가 없자 임금이 가마를 타고서 입조(入朝)하도록 명하였는데, 공은 가마를 사양하고 걸어서 나아갔다. 궁궐의 섬돌에 이르자 황문(黃門, 내시(內侍)를 지칭함)에 명하여 공을 부액(扶腋)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곧 공이 조정에 벼슬하면서 실제로 있었던 사적(事蹟)이다.
계축년(癸丑年, 1673년 현종 14) 10월에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춘추(春秋)가 72세였다. 부음(訃音)이 조정에 알려지자 임금이 깜짝 놀라 애도하고 조회를 중지하였으며 정해진 의례에 맞게 조문하고 부의(賻儀)를 내리었으며, 춘궁(春宮, 세자를 말함)도 또한 관원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염습하고 장사를 치르는 데 필요한 여러 도구들을 모두 관청이 도와주었고 별도로 관재(棺材)까지 하사하였으며 중사(中使)가 장례를 감호(監護)하였다.
또 별도로 간절하게 측은히 여긴다는 성지(聖旨)를 내리어 특별히 3년에 한하여 늠록(廩祿)과 제수(祭需)를 내려주게 하였으니, 이것은 모두 특별하게 우대해 준 은전이었다. 그해 12월에 과천(果川)의 치소(治所) 북쪽에 있는 관악산(冠岳山) 밑의 선영(先塋)에 장사지냈는데, 부유(負酉) 방향의 언덕이다.
공의 배필인 정경 부인(貞敬夫人)은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부인의 선고(先考)는 민선철(閔宣哲)이고 사섬시 봉사(司贍寺奉事)를 지냈다. 부인은 성품이 유순하고 현숙하여 부덕(婦德)이 훌륭하였으며 신해년(辛亥年, 1671년 현종 12년) 4월에 공보다 2년 앞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은 67세였다. 공의 묘소 왼쪽에 부장(祔葬)하였다.
5남 3녀를 낳았는데, 정재대(鄭載岱)는 첨정(僉正)이고, 정재숭(鄭載嵩)은 승지(承旨)이고, 정재악(鄭載岳)은 부솔(副率)이고, 정재항(鄭載恒)은 별검(別檢)이고, 정재륜(鄭載崙)은 숙정 공주(淑靜公主)를 아내로 맞아 동평위(東平尉)의 작호(爵號)를 받았는데 공의 중씨(仲氏, 정치화(鄭致和)에게 출후(出後)하였다. 딸들은 현감(縣監) 이명기(李命耆), 사인(士人) 이두령(李斗齡)과 송규성(宋奎成)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 소생이 3남 2녀인데, 아들은 정청(鄭聽)ㆍ정응(鄭應)ㆍ정헌(鄭憲)이고, 딸들은 사과(司果) 목윤선(睦胤善)과 현감(縣監) 박시민(朴時珉)에게 시집갔다. 첨정(僉正, 정재대)은 첨정 이민백(李敏白)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정덕선(鄭德先)ㆍ정욱선(鄭勖先)ㆍ정각선(鄭覺先)이고 막내는 아직 어리며, 딸들은 사인(士人) 이만직(李萬稷)과 신도(申濤)에게 시집갔다.
승지(承旨, 정재숭)의 전취(前娶)는 군수(郡守) 최여두(崔汝)의 딸인데, 1녀를 낳아 사인(士人) 박상선(朴尙先)에게 시집갔고, 후취(後娶)는 통제사(統制使) 이지형(李枝馨)의 딸로서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부솔(副率, 정재악)은 판서(判書) 김남중(金南重)의 딸에게 장가들어 5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정희선(鄭希先)이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며, 딸들은 사인(士人) 구정주(具廷柱)와 윤덕준(尹德駿)에게 시집갔다.
별검(別檢, 정재항)은 군수(郡守) 박천영(朴千榮)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동평위(東平尉)는 1남 1녀를 두었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이명기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이진백(李震白)이고, 딸은 사인(士人) 박두상(朴斗祥)에게 시집갔다. 송규성은 1남을 낳았는데 아직 어리다. 내외(內外)의 여러 후손들이 모두 30여 명이다.
아! 문익(文翼, 정광필(鄭光弼) 이후로 대대로 충정(忠貞)이 독실하여, 공에게 이르러 능히 선대의 가업을 계승하고 모범적인 행실을 따라서 조정 신하들 중에 덕망이 으뜸이었다. 그리하여 성색(聲色)을 움직이지 않고서도 대응하기만 하면 마침내 분란이 해소되었으므로, 마치 산악(山嶽)이 움직이지 않으면서도 은택이 만물에 미치는 것과 같았으니, 위대하도다.
하물며 백씨(伯氏)와 중씨(仲氏)가 번갈아 정석(鼎席, 정승의 지위를 말함)에 재직하고 4대가 연이어 기사(耆司)에 들어간 사례는 옛날에도 드물게 있는 일이었고, 양조(兩朝)의 은혜로운 비답(批答)이 매우 많아서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며, 계의(契誼, 임금과 신하의 마음이 일치함을 말함)의 융합(融合)함은 진실로 세상에 드물 정도였다.
공의 여러 아들들이 능히 치명(治命, 정신이 온전할 때 남기는 유언을 말함)을 따라 짧은 비갈(碑碣)로 신도비(神道碑)를 대신하니, 그 훈계를 가슴에 새기어 공경히 받드는 점도 또한 가상한 일이다. 불후(不朽, 묘비문을 짓는 일을 말함)의 부탁을 재주가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아서, 삼가 세계(世系)와 관력(官歷)만을 서술하고 감히 반 마디 말일지라도 외람되게 부풀려 기록함으로써 공의 평소 뜻을 저버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생각건대, 덕(德)이 융슝하여 보시(報施)가 풍성(豐盛)하였고, 지위가 높았는데도 더욱 겸손하고 조심하였네.
비갈(碑碣) 하나를 그 봉분(封墳) 앞에 세웠으니, 무궁토록 광채를 드리우리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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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鄭太和 墓碣銘[姜栢年]
凡代大家維難其保, 而惟積德之門, 福祿綿長, 世出名相。 今之論世德者必曰鄭相之家, 論相業者亦必曰鄭相之家。 信乎! 福善之理如執契矣。 謹按東萊之鄭自僕射諱穆顯于麗代, 世有聞人。 入我朝, 有諱賜直提學生諱蘭宗, 位參贊, 策勳封君, 贈諡翼惠。 生領議政諱光弼, 相業甚盛, 如牽裾泣諫, 救己卯士類爲最著, 贈諡文翼, 配享中宗廟, 卽公五代祖也。 高祖諱福謙, 江華府使、贈領議政。 曾祖諱惟吉, 左議政, 號林塘, 德業、文章伏一世。 祖諱昌衍亦左議政, 當昏朝, 杜門自靖, 群吠狺然。 仁祖初, 以舊官相, 有久慕宿德之諭。 考諱廣成, 知敦寧府事, 蚤揚華貫, 見幾勇退, 晩節淸福, 於世寡二。 妣貞夫人昌原黃氏, 觀察使諱謹中之女, 以萬曆壬寅正月擧公。
公諱太和, 字囿春, 號陽坡。 生而有德器, 望之知其爲傑魁人。 年纔五, 華人善相者稱以眞宰相。 及長, 重流輩間以相夔許之。 入試場, 所製皆高等, 張相谿谷稱之。 甲子, 中進士。 戊辰, 登文科, 隷槐院。 己巳, 薦入翰苑。 秋, 陞典籍, 拜禮曹佐郞。 自是至丙子, 遍歷三司。 於玉堂修撰、校理、副校理、應敎、副應敎, 於諫院正言、獻納、司諫, 於憲府執義, 於春坊說書、司書、弼善, 而皆以兼輔德三。 而一以兼經吏曹正・佐郞、政府舍人及直講、司藝、司成、禮賓・濟用・司僕・掌樂正等職, 帶知製敎、兼校書校理、漢學醫司敎授。 只庚午一年, 爲養出監通津。 丁丑, 以特除觀察于湖西, 入拜承旨, 歷吏・戶・禮參議、兵曹參知, 以副提調兼備局、槐院。 庚辰, 又以特除陞右尹, 內而歷大司諫、都承旨、兵・刑・吏・戶・禮參判而兼同知成均, 外而按關西、嶺南。 甲申, 又以擢拜判戶曹, 歷判尹、大司憲、吏・禮・刑・工判書, 而兼知經筵・春秋・義禁、都摠管、左賓客等任。 大拜而後, 連居台坐垂三十年, 右台一, 左台二, 領台六, 而兼扈衛大將, 間帶西樞, 此乃公前後履歷也。 公全材早著。 甲戌, 選文士接華使也, 以遠接從事辟。 乙亥, 設帥府, 備緩急也, 以元帥從事署。 及丙子冬, 赴帥幕, 受弓矢之賜, 帶數裨而行。 丁丑正月, 師次兎山, 賊騎猝大至, 元帥遁, 大軍潰。 公於倉卒間, 收餘卒, 據縣館, 交矢石力戰, 殺傷多, 賊大挫而郤, 人皆壯之, 至聞於上。 及陪昭顯入瀋, 上稱有才局, 命遞輔德而留之。 其六月, 按湖節, 卽日開政, 下批面諭曰: “嘉卿兎山之事, 擢授方面之任。” 壬午, 按嶺節。 上又面諭曰: “南邊事重, 復使卿獨賢。” 先是, 朝廷意在尊周, 有密款於皇朝, 公在西藩與知之。 及事泄, 爲淸人査詰, 公遽遞南臬而西, 上閔有加錫。 公星馳六日, 達鳳凰城, 彼恐喝萬端, 公隨問善對, 事得已。 己丑春, 拜右議政, 有燕京行。 秋陞左台, 俄丁內艱。 上議起復, 還拜相, 公瀝血疏至五, 乃寢。 辛卯, 服闋, 拜領台。 甲午, 乞暇歸寧, 上特詢親年, 卽命超其秩, 且慮公居遠思親, 不得專心國事, 仍諭以入京, 至卽歸餼, 俾供滫瀡。 及捐館, 弔、賵、贈特優。 一日聞公毁而病, 遣中使誡以滅性非孝, 敦勉從權。 自是頻分御膳, 醫問交道。 國有疑事輒詢, 至命籌司就議, 公辭不對。 丙申, 服除出肅, 特宣醞使醉, 後登對。 又於別堂偕數三宰臣賜對, 公以私覿辭, 强而後進。 上屛議邊事, 親擧以觴之, 賜以刀、帶。 且於賜告之批, 若曰: “自卿引入, 使予忘寢而不知食。” 又曰: “如失股肱, 如魚之無水, 瞽之無相。” 其倚毗如是。 逮顯宗己亥初, 以院相留院, 及罷出, 特命限公除, 仍留。 壬寅, 燕行賜貂裘、宣醞, 西郊命子弟竝入參, 一依先朝特典。 丁未, 公遞議政, 仲氏代之。 辛亥, 入耆司, 病不能廷, 上命以肩輿入朝, 公辭輿而詣。 及陛, 命黃門扶掖, 此乃公立朝實蹟也。 癸丑十月, 易簀于正寢, 春秋七十二。 訃聞, 上震悼輟朝, 弔賻如儀。 春宮亦遣官弔。 斂窆凡具皆官庀, 別賜棺材, 中使監護, 又別降懇惻之旨, 特令限三年, 賜廩祿、祭需, 皆異數也。 十二月, 葬于果川治北冠嶽山下先兆負酉之原。 媲貞敬夫人驪興閔氏, 考諱宣哲, 司贍寺奉事。 柔嘉淑悊, 得婦道甚。 辛亥四月, 先公二年卒, 得年六十七, 祔公墓左。 有五男三女: 載岱, 僉正; 載嵩, 承旨; 載岳, 副率; 載恒, 別檢; 載崙尙淑靜公主, 受爵東平尉, 出後公仲氏。 女縣監李命耆、士人李斗齡、宋奎成。 側室有三男二女: 男聽、應、憲, 女司果睦胤善、縣監朴時珉。 僉正娶僉正李敏白女, 生四男二女: 男德先、勖先、覺先, 次幼。 女士人李萬稷、申濤。 承旨前娶郡守崔汝㞳女, 生一女, 士人朴尙先。 後娶統制使李枝馨女, 生二女, 皆幼。 副率娶判書金南重女, 生五男二女: 男希先, 餘幼。 女士人具廷柱、尹德駿。 別檢娶郡守朴千榮女, 生一男, 幼。 東平一男一女, 皆幼。 李命耆生一男一女: 男震白, 女士人朴斗祥。 宋奎成一男, 幼。 內外諸孫摠三十餘人。
噫! 自文翼以後, 世篤忠貞, 至于公能繩武率行, 爲朝德首。 不動聲色而應卒解紛, 猶山嶽不運而澤及於物。 偉哉! 況伯仲迭居鼎席, 四代連入耆司, 古所罕有。 兩朝恩批甚多, 不能盡載而契合之融實曠世矣。 諸胤克遵治命, 以短碣替牲, 繫其銜訓祗愼, 亦可尙已。 不朽之托, 以不才辭不得, 謹敍世系及歷官, 而不敢猥釀半辭以負公素志。 銘曰:
維德之隆矣, 報施豐。 維位之崇矣, 益謙沖。 維一碣志其封矣, 垂耀乎無窮。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