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 으로 모든 식구들이 도착 했지만 어머나는 병을 얻으셨다 풍토병이 시초 였지만 치료에 소홀하여 당신도 회생치 못한다는걸
아셨는지 " 어서 독립이 성공 되도록 노력하고 성공하여 귀국할때 나의 유골과 인이 어미의 유골 까지 가지고 돌아가 고향에 묻어라 " 고 말씀 하시고 운명을 달리 하셨다 50 여년 고생만 하시다 독립을 보시지 못히고 원통히 돌아 가셨다 어머니는 팔십 평생
" 고용 " 두 글자를 외면 하셨다 돌아 가실 때도 손수 옷을 꿰매고 밥을 짓는 등 일생 동안 다른 사람의 손으로 당신의 일을 시켜 보지 못하셨다 당시 민족 주의와 공산 주의를 내세운 7 당이 있었는데 한국 국민당 한국 독립당 조선 혁명당은 광복진선 소속의 원동지역 3 당 이며 조선민족 혁명당 조선민족 해방동맹 조선민족 전위동맹 조선혁명자 연맹 4 개 단체는 민족전선 연맹 소속 이었다 각 당들은 통일을 논의 했으나 결렬되고 3 당 ( 광복전선 ) 이 통합 하였지만 실질적 으로 5 당이 통합 한것과 같다
나는 국무회의 주석 으로 피선되고 워싱턴에 외교 위원부를 설치 하고 이승만 박사를 위원장 으로 취임케 하였다 이후 중국 정부에 " 광복군(한국 국군) 결성을 허락해 줄것을 요청 하여 장개석 장군 으로부터 승인 연락을 받고 이청천을 광복군 총사령관에 임명 하고 미국 하와이 동포들이 3 - 4만원을 보내 왔다 나는 독립 운동에 관련된 일을 하였던 장본인은 물론 그 가족을 소홀히 하지 않고 친가족 까지 챙겼다 광복진선 9개 단채 (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미주국민회, 하와이국민회, 애국당
부인구제회, 단합회, 동지회 ) 와 관련된 가족은 물론 독립운동 으로 희생된 유가족 등 500 여 동포를 대가족 으로 간주 하여 이들 보호에 힘쓸수 밖에 없었다 상해를 시작으로 남경으로 한구를 경유하여 중경으로 장사로 광주로 유주로 기강으로 토교, 동감에 이르러 새로지은 가옥 4개 동에 거주 하도록 하였다 그중에서도 임시 정부와 독립당과 광복군은 삼위일체로 중심 인물은 한독 당원 이었으며 아쉬운 것은 중국이 대일 전쟁을 5년 이나 계속 하여 한국 군대를 조직 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겨우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중경에 설치하고 총사령관 이청천, 참모장 중국인, 재무과장 중국인 , 고급참모 최용덕 , 한인 참모장 왕일서 제 1 지대장 김원봉( 중경, 남안 50여명 ) 제 2 지대장 ( 이범석 섬서성 두곡 200 여명 ) 제 3 지대장 김학규 ( 안휘성 부양대원 300 여명) 이었다 초기에 대외 관심을 끌지 못 했는데 어느날 가슴에 태극기 기장을 달고 애국가를 부르며 들어서는 청년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화북 각지의 왜군 부대를 탈출한 한국인 학병들 이었다 그들은 " 우리는 어렷을때 일본의 교육을 받아오다 징병 으로 왜군에 입대 하였는데 부모와 조부모의 비밀 교훈 으로 광복군을 알게되어 찿아 왔다 " 했다 이때 부터 활기가 되살아 났고 연합군 인사들 까지도 감격해 하였다 제 2 지대장은 O S S 주관자 싸전트 박사와 합작 하여 비밀 훈련을 실시 하여 3 개월 교육울 마친
요원들은 조선에 밀파되어 왜의 기관 파괴, 정탐공작을 미국 작전부장 도노반 이 협력 했다 이때 요원들은 훈련 식사에 미국 전투식량이 급식 됬다 모험성이 풍부한 자는 파괴 기술을, 지적 능력자는 정탐역을, 눈 밝고 손재주 있는자는 무전기 사용법을 익혔다 외에도 폭파술, 사격술, 비밀 도강술 등을 훈련 했다 이때 왜적 ( 일본 ) 이 무조건 항복 했다는 소리를 듣게 됬다 희소식 이라 느끼는 감정 보다는 허탈 하고 서운한 감정을 느꼈던건 수년동안 애를 써서 참전을 준비 하여 조직적, 체계적 으로 비밀 무기와 전자 장비를 휴대하여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에 침입, 각종 공작으로 민심을 선동 하고 각종 전자 장비와 무기를 비행기로 운반 사용할것을 미국 육군성과 긴밀히 합작 하였는데 체 해 보지도 못한것을 생각하니 지금 까지 들인 정성이 아깝고 미래가 걱정 되기 때문 이었디 다시 생각 하건데 18 세에 붓을 던진 이후 시종 유랑 생활 이었으니 장련읍 사직동 생활에서 모친을 모시고 종형 (從兄) 남매 일가와 거주 하며 2 -3 년 머무르고 그후 문화, 안악 등지 에서 몇개월 또는 몇년간 머문곳은 상해, 불란서 조계 에서 4년간 가족과 같이 생활한 것이다 아내를 잃은 이후 10 여년 동안 어머님은 인이와 신을 데리고 본국에서 지내시고 나만
혈혈 단신으로 동포들의 집에 의탁 하거나 새우잠을 자는 옹색한 집단 생활을 계속해 왔다 일본의 항복으로 나는 중경 에서 상해로 돌아와 기다리던 6,000여명 에게 인사말을 한곳이 新 홍구공원의 축대 였는데 13 년전 윤봉길 의사의 거사 장소 였던 것이다 10 일쯤 머물다 27년 만에 상해 출발 3시간 만에 김포 비행장에 도착 하였다 환영 연회가 덕수궁 에서 열렸는데 식탁이 400 여개로 미국 군정 하지 중장이 참여 하고 있었으며 서울 뿐만 아니라 인천, 개성등 각지 에서도 임시정부 환영회가 거행 되었는데 38선 이북 에서는 환영회 대신 무상한 욕설을 반포 했다 하니 쓴 웃음이 나왔다 28년을 밎은 나는 남한을 순회 하기로 하고 인천을 찿았다 22세때 인천 감옥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복역중 23세때 탈옥 했으며 41세때 17년 징역형을 살다가 최종 인천 감옥 노역중 특사로 감형, 가석방 되었던 곳이다 다음에 마곡사를 찿았고 김복한 면암 최익현 선생께 인사 하고 유가족을 위로 하였다 마곡사를 찿은건 48년전 일개 승려로 있다가 일국의 주석이 되어 돌아오는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열사의 유골을 환국 시켜 용산 효창 공원에 안장 하였다 이어 삼남 지방 으로 향했다 김포 에서 제주도에 이르렀다 高, 夫 梁 삼씨의 시조인 삼성전을 둘러 보았다 다음 충무공 이순신이 왜적을 물리친 한산도를 방문 하고 진해, 통영, 여수, 보성을 거처 광주, 나주,함평, 김제, 창원, 진전 으로 찿아 다녔고 전주와 목포, 군산, 강경 등지를 찿아 다니며 애국 지사 유족을 위로 하고 망명, 유랑 시절 도와 주었던 후손 들을 찿아 인사를 드렸다 그러한 이후 서북 지방을 순찰 하였다 춘천, 강화를 거처 개성 에서 만월댸와 선죽교를 구경 하였다 장단, 고령포 에 있는 경순 왕릉에 참배도 하였다 나의 소원을 묻는다면 첫째도 둘째도 세번째도 조국의 독립 , 완전 자주독립 이라 말할 것이다 그런 뒤에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더라도 제 나라의 빈천이 남의 밑에 사는 부귀 보다 영광 스럽고 희망이 많기 때문이다 옛날 일본에 간 박제상은 " 내 차라리 계림의 개, 돼지가 될지언정 倭王 (왜왕) 의 신하로 부귀를 누리지 않겠다 " 는 말에 진정 공감하는 바이다 나는 공자, 석가 예수의 도를 배웠고 그들을 성인으로 숭배 하거니와 그들이 합 하여서 세운 천당,극락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 민족이 세운 나라가 아닐진데 우리 민족을 끌고 들어가지 아니할 것이다
민족 이란 완연히 있는것 이어서 내 몸이 남의 몸이 못 됨과 같이 이 민족이 저 민족이 될수 없는것은 마치 형제도 한집에서 살기에 어려움이 있는것과 같은 것이다 둘 이상이 합하여 하나가 되자면 하나는 높고 하나는 낮아서 위에서 명령 하고 다른 하나는 밑에서 복종 하는 것이 근본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는 일부 소위, 좌익의 무리는 혈통의 조국을 부인 하고 사상의 조국을 운운 하며 혈족의 동포를 무시 하고 사상의 동무와 프롤레타리아트 의 계급을 주장 하며 민족 주의 라면 진리권 외에 떨어진 생각인 것 같이 말하고 있다 심히 어리섞은 생각이다 철학도 변하고 정치 경제의 학설도 일시적 이거니와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 이다 어느 민족이나 종교, 이념, 경제적 정치적 이해 충돌로 갇혀서 싸운 민족이 없거니와 지내어 놓고 보면 그것은 바람과 같이 지나가는 일시 적인 것이오 민족은 필경 바람 잔 뒤의 초목 모양으로 뿌리와 가지를 서로 걸고 한 수풀을 이루어 살고 있다 좌,우익 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 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사상도, 신앙도 변하지만 혈통으로 이루어진 민족은 영원히 흥망성쇄 공동 운명 인연에 한 몸으로 이땅 위에 남는 것이다 세계 인류가 네요, 내요 없이 한집에 살면 좋겠지만 이는 인류의 최고요 최후의 희망 이나 이상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멀고 장래의 일이다 현실의 일은 사해 동포의 크고 아름다운 목표를 향하여 인류가 향상하고 전진 하는 노력을 하는것은 좋은 일이요 마땅히 할 일이나 이것도 현실을 떠나서는 안되는 일이다 현실의 진리는 민족마다 최선의 국가를 이루어 최선의 문화를 낳아 길러서 다른 민족과 서로 바꾸고 서로 돕는 일 이다 이것이 내가 믿고 있는 민주주의요 인류의 현 단계 에서 확실한 진리다 우리는 자주독립의 나라를 세운뒤 다음으로 지구상의 인류가 진정한 평화와 복락을 누릴수 있는 사상을 만들고 실현 하는 것이다 나의 정치 이념은 자유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일 개인 또는 일계급 에서 온다 일 개인은 독재요 일계급은 파쇼다 계급 독재인 것이다 독일의 나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는 물론 이고 우리나라의 조선도 계급 독재였던 셈이다 유교, 그중에서도 주자학 철학으로 사상, 학문, 사회, 가정,개인 까지도 규정 했다 주자학 이외의 학문은 발달 하지 못하고 예술, 경제, 산업에 까지 미첬다 우리나라가 망하고 민혁이 쇠잔한 원인 이다 언론의 자유는 매우 중요하다 언론의 자유가 없으면 나라의 진보도 없다 공산당이 소련식 민주주의란 헤겔의 변증법 , 포이에르 바하의 유물론, 아담 스미드의 노동 가치론을 가미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따르자는 것이다 자연계의 변천이 변증법에 의하여 아니함은 뉴톤, 아인쉬타인 등 과학자들의 학설이 분명 하다 언론의 자유, 투표의 자유, 다수결에 복종은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교육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사랑의 덕과 법의 질서가 우주 자연의 법칙과 같이 준수 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조선 국가의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의견을 국정에 반영하는 제도와 과거시험, 암행어사 제도는 연구 할만 한것이다 인류가 현재에 불행한 근본 이유는 仁義가 부족 하고 자비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모든것을 살펴 볼때 우리 민족이 주연 배우로 세계 무대에 등장할 날이 보이는듯 하다 사랑 하는 처자를 가진 가장은 부지런 할수 밖에 없다 한없이 주기 위함이다 힘드는 일은 내가 앞에서 하니 사랑하는 동포를 아낌이요 줄거운 것은 남 에게 권하니 사랑하는 자를 위하기 때문이다 민족의 행복은 계급 투쟁 에서 오는것도 아니요 개인의 행복이 이기심 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1949년(74세) 서울에서 조국의 통일을 위한 남북 협상을 희망한다고 발언 하고 금호동에 백범 학원을 , 3월에 염리동에 창암 학원을 세웠다
6월 26일 낮 12시 36분 경교장 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 의 총에 맞아 운명, 7월 5일 국민장 으로 효창 공원에 안장, 1969년 서거 20주년 8월 23일 남산에 백범 김구 동상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