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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전쟁4 - 멕시코는 스페인, 미국, 프랑스와 싸워 자력으로 독립하다!
14세기에 “아즈텍” 은 멕시코 고원의 주도권을 잡아 톨텍 제국을 무찌르고 텍스코코
호수 수중 도시 테노치티틀란에서 '치남파스' 라 불리는 수경재배 양식을 발전시켜
인구를 25만으로 국부를 키운 후에 이웃 도시 국가들을 정복해 "제국" 을 칭했습니다.
그후 흰색 피부를 가지고 나타난 스페인의 에르난 코르테스 군대 200명을 오래된 아즈텍
신화속의 신 "케찰코아틀" 로 여겼던 황제 몬테수마 2세는 저들을 극진히 환대하였으나
1519년 코르테스는 기습해 황제를 포로로 잡고 아즈텍을 유린하니 뒤늦게나마 반격합니다.
아즈텍은 코르테스를 쫓아냈으나 코르테스는 상관의 지시도 받지않고 침공했던지라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뒤쫓어 온 스페인군 1,000여명을 오히려 설득해 부대로 편입하고 아즈텍의 과도한 공물 요구와
인신공양 제례에 지쳐있던 다른 원주민 10만명의 협조를 받아 1521년 마침내 아즈텍을 멸망시킵니다.
그후 이달고 신부가 교구내 농민들과 포도와 올리브 재배를 시작하자 고율의 관세를 붙여 포도를
수출하던 스페인 농부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를 금지하니 분노한 이달고 신부는 1810년 반란
을 일으키나 멕시코에서 태어난 "백인 상층 크리올" 들이 스페인군에 협조하니 진압 당했습니다.
이후 스페인이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해 해외 식민지에 신경쓰지 못하자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각지에서 크리올들이 폭동과 반란을 일으키니.... 처음에 독립 운동에 회의적이던 멕시코의
크리올들도 다른 지역에서 반란이 성공하자 자신감을 얻고 반스페인 독립 투쟁에 합류합니다.
이달고 신부가 멕시코 주둔 스페인군에게 잡혀 죽은 후에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가
4년간 항쟁을 계속하나 독립운동가들의 힘은 약한지라.... 그 역시 1815년
스페인의 멕시코 식민지군 사령관인 아구스틴 데이투르비데에게 패배을 당합니다.
반란군을 진압했던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왕권 신수설 신봉자로 나폴레옹이 물러난 이후에
본국 스페인이 급속히 자유주의로 개혁되는 것을 보고는.... 누에바에스파냐에 충성하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1821년 멕시코 독립을 주장하던 반란군과 화해한후 멕시코의 독립을 선언합니다.
가마쿠라 막부시절 고다이고 천황(일왕)이 왕권회복을 위해 반란을 일으키자 가마쿠라 막부
에서 토벌을 위해 파견된 "아시카가 다카우지" 장군은 교토에 도착해 보니 반란세력이
만만치 않은지라..... 오히려 가마쿠라 막부를 배반해 천황편에 붙어서 막부를 공격해 멸망
시키고 천황도 제압한 후에 자신이 스스로 아시카가(무로마치) 막부를 세운 것과 유사합니다.
이후 아구스틴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모방해 스스로 황제 아구스틴 1세가 되어 멕시코 제국을
수립했으니 이때 멕시코 영토는 현재 미국 서남부 지역인 텍사스,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일대를
차지하고, 파나마 지협 이북의 중앙아메리카까지 모두 지배하고 있는 아구스틴 1세의 제국입니다.
그러나 1824년 공화주의자인 빅토리아와 안토니오 안나 장군의 쿠데타로 붕괴하여 19개주를
가진 공화정이 성립되었고, 부정부패와 독재를 일삼던 아구스틴 1세는 토스카나 대공국
의 일부였던 이탈리아의 리보르노로 추방당했으며.... 멕시코를 다시 식민지로 삼으려는
스페인의 재침공도 막아냈으나.... 1846년에 미국이 전쟁을 일으켜 멕시코시티를 함락 합니다.
미국의 맥시코 침략의 시초는, 1803년에 갓 독립한 신생국가 미국은 미시시피강의 해운
이용을 위해 "프랑스령 뉴올리언스를 매입" 하고자 의회의 승인을 받아 프랑스에
특사를 파견했는데..... 이들은 당시 프랑스의 제1통령이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를 만났고 나폴레옹에게서 뉴올리언스 뿐만 아니라 루이지애나까지 덤으로 매입 합니다.
나폴레옹의 입장에서는 나폴레옹 전쟁과 아이티 혁명 등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제대로 된
식민지를 유지할수 없는 상황에다가, 황열병 때문에 당시 루이지애나 인구가 충분하지
못해서 개발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으로...... 어차피 루이지애나 같은 놀고
먹는 땅의 활용도 어려운데 그냥 미국에다 싸게 팔아 버리자고 결론을 내린 탓이었습니다.
특사단은 의회가 허락해준 권한을 넘어서는 통큰 제안을 받아들이니 귀국후 미국에서 갑론을박이
일어났으나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이 강력하게 밀어붙인 덕에 루이지애나 매입을 인준했으니
이 루이지애나가 지금의 루이지애나주 보다 훨신 넓은 땅으로 프랑스도 얼마나 되는지 감이
안 잡히는, 관리가 안되고 측량도 안된 땅덩어리라 "미국 영토는 2배 이상" 으로 늘어난 것 입니다.
미국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죽이고 쫓아내며 미친듯 서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는데
서부개척은 불과 30여년만에 한계에 도달했으며 그리고 서부지역의 불분명한 경계선은 또 다른
문제를 불러 일으켰으니 1821년 스페인으로 부터 독립한 멕시코와 국경을 접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독립과 동시 유카탄 반도 이북의 스페인 식민지의 영유권을 획득하여 지배하고 있던 멕시코는
중부와 서부 및 북부의 고원 지대는 건조지대라서 대규모 관개시설 없이는 제대로 농사
를 짓기 힘든 지역이었고, 누에바에스파냐 시절 스페인 식민 당국은 어차피 아메리카에
좋은 땅도 지천으로 남아도는데 굳이 사막지역을 개간할 이유는 없으니 개발에 소홀하였습니다.
19세기 초반 캘리포니아와 주변 영역을 포괄하던 알타칼리포르니아(Alta California) 준주의 인구는
85,000여명에 불과하였으며 테하스(Tejas) 준주의 경우 코만치족과의 충돌 문제로 스페인어 사용
인구는 겨우 7,000여명에 불과하였고 이마저도 대부분 루이지애나 인접 지역에 밀집해 있었습니다.
멕시코가 독립하기 1년 전인 1820년 스페인 정부로 부터 텍사스 일부 지역을 불하받은 미국인 이민자
들이 텍사스에 들어와 정착촌을 건설한 상태였으니 멕시코는 인정하지 않았으나, 이민자들과 협상
끝에 스페인어를 쓰고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을 조건으로 불하권을 인정했으며, 이후 멕시코의
정치불안을 틈타 미국인 이민자들은 텍사스로 빠른 속도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인구가 늘어나게 됩니다.
결국 미국인 이민자들과 멕시코계 주민들, 멕시코 정부와의 충돌이 잦아지며 미국과 멕시코 양국
은 모두 이 지역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니 미국은 텍사스를 3천만 달러에 구매하고자 했으나
멕시코는 이를 거부했고 그러는 동안 멕시코의 중앙정치 혼란은 가속화되었으니 미국인
이주민 세력은 계속되는 이주로 강해졌는데 텍사스 인구의 90% 가 미국인 이주민들 이었습니다.
지방에서 대농장을 가진 카우디요들은 사병을 거느리고 중앙정치에 간섭하니 정변이 끊이지
않았는데 이러한 중앙정치의 혼란을 잠재운 멕시코 대통령 산타 안나는 텍사스 이주민
세력에 최후통첩을 내리면서 "무장한 미국 이주민들은 무장해제 후 텍사스에서 철수
할 것." 을 명령했지만 그러나 미국인 이주민 세력은 이에 반발하여 대반란을 일으킵니다.
산타 안나가 직접 지휘하는 멕시코군은 알라모 등지에서 큰 승리를 거두며 진격했으나
정작 산 하신토 전투에서 텍사스 반군에게 대패하고 포로로 잡혀서 텍사스의 독립
을 인정하는 조약을 맺고 풀려나지만 그러나 산타 안나가 잡혀있던 사이 멕시코
정부는 그를 대통령직에서 파면시킨 상태여서 산타 안나의 조약엔 효력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대통령에 재선된 산타 안나는 텍사스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고 다시 군대를 보내
제압하려 했으며, 텍사스는 저항하면서 양측의 산발적 충돌이 계속되었는데 신생 텍사스
공화국 내부에서 독립파와 연방합류파의 치열한 권력투쟁 끝에 연방합류파가 승리하여
텍사스는 미국의 주로 합류하기로 하고, 미국 역시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문제가 커집니다.
멕시코 입장에서는 미국이 제멋대로 반란군들이 강점한 자국의 영토를 가져가버린 셈
이었고, 미국 입장은 "이웃의 독립국가가 요청을 해서 이를 받아들였을 뿐이다."
라는 태도였으니, 멕시코는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했으나 오히려 군사행동은
미국이 먼저 개시했으며..... 특히 미국은 텍사스 하나로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미국 대통령 제임스 포크는 팽창론자로서 공공연히 태평양 출구인 캘리포니아까지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강경파로 1846년 4월 25일, 양군간에 무력충돌이 발생하고 미군 16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히게 되자 미국은 이를 빌미로 멕시코에 전쟁을 선포하는데 멕시코는 미국과의 전쟁을 원하지
않아 충돌을 피했으나 미군이 전쟁선포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국경에서 충돌을 일으킵니다.
이 충돌이 멕시코 국경 너머에서 벌어진 것이라... 반전주의파였던 에이브러햄 링컨이 멕시코에
선전포고를 하러온 포크 대통령에게 충돌이 벌어진 장소를 정확히 지도에 찍으라고 했지만
이에 불응하자 반전주의파는 협상을 하기로 결정하지만 그러나 반전주의파의 힘이 너무
약했던지라 미국은 멕시코에 대한 전쟁을 지지하면서 선전포고가 이루어지고 전쟁이 시작됩니다.
리오 그란데 국경에서 미군이 강을 건너며 공세를 개시했으니 멕시코 북부 건조지역은 점과
선 형태로만 행정력이 닿던 수준이었고, 멕시코의 인구와 산업이 밀집되어 있던 중부
지역과는 거리가 상당히 먼 편이라 개전 초기부터 주요 전투에서 미군에게 패배합니다.
그러니 국경 방위는 실패한 것인데..... 멕시코는 890만이나 미국은 2,320만이니 인구도 적고
장비나 훈련에서 뒤떨어진 멕시코군이 미군의 전면공세를 저지한다는 것은 불가능 했습니다.
미국의 공세는 캘리포니아에 초점을 맞추었으니 7월 7일, 미 해군 프리깃함이 몬테레이에 지상군
을 상륙시키면서 전면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멕시코는 캘리포니아의 미국 정착민들
의 대반란까지 겹치며 수세에 몰렸고 멕시코군의 반격 조차 미국 테일러 장군에 의해 좌절됩니다.
멕시코 영토 로스 앙헬레스(로스 앤젤레스)가 포위되고 12월 16일에 애리조나의 주도 투손이 함락
되었으며..... 1847년 초에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뉴멕시코 전역에서 미국의 승리가 확실시됩니다.
태평양 출구를 확보했음에도 멕시코가 항복하지 않자 미국은 멕시코 본토로 공세를 개시했으니 압도적
해군전력을 활용한 미군은 멕시코 영토 남단 수도 멕시코시티 동쪽에 위치한 최대항구 베라크루스에
지상군을 기습적으로 상륙시켜 함락한 다음엔 제2전선을 형성하여 멕시코 시티로 진격하기 시작합니다.
주력부대도 호응하여 북쪽에서 남하하기 시작했으니 멕시코 측은 미국이 멕시코 중부로 내려오면
아이티혁명 이후 아이티를 재차 침공했던 프랑스군 마냥 질병으로 떼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심한 배멀미를 앓으며 섬나라에 온 아이티 침공 프랑스군과는 별 저항을 받지않고
멕시코 북부 영토를 뚫고 들어온 보급 체계가 잘 갖추어진 미군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 였습니다.
미군이 진공해 오니 1847년 9월 13일, 수도 멕시코시티의 관문인 차풀테펙 전투에서 멕시코
수비군이 2,600명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내며 참패해 마지막 방위부대도 붕괴되어 버립니다.
미군은 불과 200여명의 피해를 입었고 지체없이 수도 멕시코시티로 침공해서는 9월 15일,
멕시코군과 민병대의 결사적인 저항에도 멕시코시티가 함락되고 멕시코 정부는 피난
갔으며 멕시코군은 포로 포함 7,000명의 인명피해를 내면서 재기불능의 상태에 빠집니다.
이 전투로 전쟁 승패가 갈렸으니 미 해병대 찬가(Marines' Hymn)의 첫 구절 "'몬테수마의 궁전에서
트리폴리의 해변까지(From the Halls of Montezuma,)"' 에서 나오는 '몬테수마의 궁전' 이 바로
이 차풀테펙 전투가 벌어진 곳이며..... 이곳에서는 6명의 멕시코 유년 사관생도들이 끝까지 저항
하다가 전사했고 멕시코는 이들을 "소년 영웅(Niños Héroes)" 으로 현재까지도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후에도 군인은 물론 국민들까지 들고 일어나 결사항전을 지속한 멕시코였으나, 미군이
계속해 공격해오면서 각지에서 계속 참패만 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멕시코에 피해만
늘어나며 불리해졌으니 이렇게 더는 승산이 없고 미국의 점령지만 늘어나는 꼴이
되자 결국 멕시코 정부는 항전을 포기하고 항복이나 다름없는 협상을 미국에 제의합니다.
1848년 2월 양국은 과달루페 이달고 협정을 체결해 전쟁을 끝냈는데 멕시코는 텍사스의 미 연방 합류
를 인정했으며, 국경을 리오그란데강으로 삼는 것에 동의했고 그와 별개로 캘리포니아, 유타, 네바다
3주 전체와 뉴멕시코, 애리조나주의 대부분, 콜로라도주의 절반 이상과 와이오밍주 남부 지역, 캔자스
와 오클라호마, 텍사스주의 일부에 달하는 거대한 영토를 겨우 1,500만 달러에 강제로 팔아야 했습니다.
멕시코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전쟁을 계속했다면 캘리포니아는 물론이고 소노라주와 치와와주
까지 합병당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멕시코는 완전히 미국 영토가 되었을지도 모르니 실제로
미국의 강경론자들은 "멕시코 전체를 미국에 병합하자!" 라고 주장을 했으나, 멕시코 전체를 합병
한다면 미국 인구의 1/3이 넘는 멕시코인들을 모두 학살하거나 추방할수도 없으니... 미국은
멕시코 영토의 55% 를 뺐었지만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멕시코인 인구는 수십만명을 넘지 않았습니다.
이후 미국은 계속해서 윌리엄 워커 등의 필리버스터를 파견하여 멕시코의 바하 캘리포니아, 소노라,
치와와 북부 주 및 테우안테펙 지협 영토까지 노렸으며 더 나아가 미국 주변의 안정이라는
명분 하에 유카탄 공화국, 리오 그란데 공화국 등 멕시코 내의 분리주의를 적극 조장하고 지원합니다.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에 걸친 북아메리카의 땅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가를 완성했으며,
서부개척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되면서 무서운 속도로 발전을 해 나가기 시작했으니
그후 이 전쟁에서 멕시코로부터 획득한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 텍사스 모두 구리, 금,
석유, 우라늄등 온갖 광물자원들이 쏟아져나왔으니 미국은 자원의 축복 까지 받았습니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멕시코는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었으니 잃어버린 영토는 한반도의
11배가 넘는 240만km2 55% 의 강역을 잃었고 또한 강력한 중앙정부를 제창하던
대통령 산타 안나는 패전 책임으로 실각하고 이후 멕시코는 지방분권적인 연방형성파에
의해 주도되니 강력한 중앙정부가 형성되지 못하고 계속되는 정치적 혼란을 맞이하게 됩니다.
멕시코는 한심한 졸전을 펼쳤는데 수십년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 육군은 쿠바
와 필리핀에서 현지 원주민들의 민심이반, 섬 지역에서 미국 해군의 압도적인
화력 우세로 인한 스페인 해군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미국 육군에 맞서 선전하게 됩니다.
결국 보급과 질병 문제로 항복했지만 중대 단위의 멕시코 비정규군 기병대가 숫적으로 두배나
많은 미군을 격파한 산 파스쿠알전투 사례를 생각하면..... 산타 안나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미국에 패전한 멕시코는 대지주와 교회등 보수주의자와 공화정을 지지하는 자유주의자로 갈려서
서로 대립하니 사포텍 출신 원주민인 베니트 후아레스는 자유주의 정부에 입각해 가톨릭 교회
와 군인의 특권을 폐지하자 보수주의자들의 쿠데타로 물러나 북부 케레타로에서 자유주의자를
규합해 1년간의 전투 끝에 멕시코시티를 점령해 대통령이 된 후에 2년간 외채 동결을 선언합니다.
프랑스 나폴레옹 3세 황제는 파리에서 영국 및 스페인과 회담후 동결된 채권을 받기 위해 1861년 12월
1만명의 연합군을 베라크루스에 상륙시키는데 나폴레옹 3세는 물러난 보수주의자와 접촉해 멕시코
를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야심을 드러내자 영국과 스페인군은 철수하고 프랑스군이 증파됩니다.
전쟁은 6년동안 계속 되었으며 뿌에블라에서 멕시코인들이 압도적인 열세 속에서도 최정예 프랑스
외인부대를 격파하는 짜릿한 승리(La batalla de Puebla) 도 맛보았지만, 다수의 강력한 외세
침략군에게 최종적으로는 군사적으로 패퇴하는데.... 이 전쟁은 최소 15개국이 관련 되었고 6년간
멕시코 정부군 12,000명, 멕시코 왕당파 20,000명 포함해 5만명의 군인이 사망한 국제전이었습니다.
멕시코는 베니토 후아레스를 중심으로 끝까지 항전했으며 이 전쟁의 후유증
으로 나폴레옹 3세가 5년후 1871년에 벌어진 보불전쟁에서 패배하면서
멕시코는 결국 자력으로 모든 외세를 물리치고 진정한 독립 공화국이 됩니다.
1862년 5월 5일 벌어진 뿌에블라전투에서 멕시코 연방군 '이그나시오 사라고사' 장군은 성동격서
뛰어난 위치선점, 탁월한 지휘로 양과 질에서 압도적인 프랑스군을 대파하는데 '원주민 의용군'
인 싸까뽀악스뜰라스(zacapoaxtlas) 들이 정글칼인 마체떼(Machete)만 들고서, 용감하게
프랑스군을 유인하여.... 멕시코 연방군은 소수의 포병 부대로 프랑스군을 협공하여 궤멸시킵니다.
싸까뽀악스뜰라스는 뿌에블라 지방 지역 거주 인디오들로써, 원주민(Indigena; 인디헤나)
을 차별 대우하는 조국 멕시코의 자주독립을 위해 다수의 인디오들이 마체떼
한 자루만 들고 전쟁터에서 산화하는데 뿌에블라 분지에서 고립된 프랑스 연합군
을 소수의 멕시코 기병들이 외곽을 선회하면서 진군을 방해하는 양동작전을 펼쳤습니다.
이 전투에서 최고 수훈갑은 적들보다 빠른 정찰을 하고, 견제 임무를 수행한 멕시코 기병대
였으니 당시 멕시코군 복장은 1. 2. 멕시코 연방군 3. 4. 멕시코 근위대 5. 멕시코 의용군
이고, 프랑스 침공군 복장은 1. 지휘 장교 2. 일반 보병 3. 알제리인 주아브 외인부대 입니다.
멕시코의 매년 5월 5일은 '어린이 날' 이 아니고 <뿌에블라 전투 승전 기념일; La batalla
de Puebla> 인데.... 대부분의 멕시코 지역은 공식 공휴일이 아니지만, 뿌에블라
주는 공식 공휴일이며, 매년 이 날엔 대규모 재현 행사와 주민들이 큰 퍼레이드를 합니다.
멕시코 영화 <Cinco de mayo; 5월 5일> 에 보면 멕시코 병사들을 독려하는 이그나시오 사라고사
장군... 오합지졸을 이끌고 대승을 거둔, 위대한 멕시코 장군 '이그나시오 사라고사 세긴' 은 전투
중 얻은 장티푸스로 수개월 뒤에 사망하니 아직 젊은 향년 33세라는데 다시 벌어진 1863년
3월 29일 푸에블라 공성전에서 이 때는 반대로 멕시코 연방군이 중과부적으로 섬멸되고 맙니다.
멕시코 영화 <Cinco de mayo; 5월 5일> 보면 소수의 기병대로 정찰 및 견제 임무를 하던
멕시코 기병대가 돌격하고 또 프랑스 주아브 용병들의 돌격하는데 인디오 자원병들의
선전으로 고지를 선점한 멕시코 포병들이 포격을 가하는데 3개의 주아브 외인부대는는
식민지인 알제리인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당시 프랑스는 물론 유럽 최강의 보병부대 였습니다.
당시는 보급을 현지조달하는 경우가 많으니 저 주아브외인부대도 약탈에
열중했는데 프랑스 침공군에 가담한 벨기에군은 총 8,500명의
군대를 파견하였고 오스트리아는 정규군 대신에 자원병을 파견했습니다.
베니트 후아레스는 남북전쟁중으로 미국의 지원을 받기 힘들자 보수주의자와 합의
하고 나폴레옹 3세도 권유해 오스트리아 황제인 합스부르크 왕가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친동생으로 북이탈리아 총독이던 막시밀리아노(Maximiliano)를 새
황제로 모시는데 그의 아내는 벨기에 국왕 레오폴 1세의 딸 샤를로트 였습니다.
막시밀리아노 1세는 베니또 후아레스의 토지개혁을 적극 지지하여 교회와 지주들의 분노를 사고,
이미 붕괴된 멕시코 국가 재정을 자기 개인재산로 유지했던 불쌍한 황제였다는데 합스부르크
왕실 후계 1순위 황손 자존심 때문에, 기어이 멕시코를 보란 듯이 강국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멕시코의회는 프랑스군의 전뱅 비용에다가 병사들 급료까지 지급하기로 하고 프랑스
군이 1868년까지 주둔하기로 했지만 남북전쟁을 마친 미국이 먼로주의를
외치며 아메리카에서 유럽군대의 철수를 요구하는데다가 프로이센과
전쟁이 임박해지자 프랑스는 약속을 어기고는 1867년 3월 프랑스군을 철수시킵니다.
그러자 베니또 후아레스는 군대를 몰고 공격해 3월 14일 케레타로전투에서 막시밀리아노군대를
격파하고 멕시코시티를 점령해 대통령에 오르니.... 황제는 이용만 당하다가, 결국은 께레따로
(Queretaro)시 외곽에서 6월 19일 '멕시코 만세(Viva Mexico)!' 를 외치면서 총살되고 말았습니다.
베니토 후아레스는 자기의 사회주의적 이상과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막시밀리아노 황제를 철저히
이용하다가 무참히 총살 시켜버렸으니 아무리 대의를 위하는 일이라도 그렇게 까지 잔인
했으니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신념에 가득찬 사람들이니 IS 테러리스트들도 그러한가 봅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으로서는 멕시코 하면 떠오르는게 “애니깽” 인데, 저 사건을 이야기
하자면 미국 얘기부터 시작해야 하니...... 미국은 1863년에 캘리포니아주의
세크라멘토에서 네브래스카주의 오마하를 잇는 길이 2,826킬로미터 (1756마일)
대륙횡단 철도를 건설하는데 노동력이 부족하니 대거 중국인을 노동자로 수입합니다.
이후로도 여러 철도가 건설되었고 캐나다 대륙횡단철도도 건설되는데, 미국은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의 땅을 철도 공사용으로 무상몰수하니 이에 생존권 투쟁을 벌인 아메리카 원주민이
철도건설을 저지해 습격하기도 하고 또 난공사인지라 저 철도의 침목 하나마다 중국인들의 죽음과
맞바꾼 것이니... 중국인들은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등지에 차이나타운을 건설할 권리를 얻었습니다.
일본 최초의 해외이민은 1868년 미국인 Van Read 에 의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의 계약
이민 153명이었으며, 같은 해 괌(Guam) 섬으로의 이민 42명도 반 리드의 알선으로 떠났고
또 1869년에는 독일인 슈넬(Shnell) 의 알선으로 아이즈(會津)・ 와카마츠(若松) 번의
사무라이등 40명이 미국 캘리포니아주로 출국해 와카마츠 콜로니(若松コロニー)를 건설합니다.
1883년에는 36명의 인부가 진주 채취를 위해 호주 Thursday Island로 출국했는데 1885년 이후
하와이로의 본격적인 집단이민이 개시되면서 제1기는 계약이민시대(1885‐1898) 3만명이고,
제2기는 자유‐계약이민 시대(1899‐1945), 제3기는 자유이민시대(1946‐1972년)로 구분됩니다.
조선인의 해외 첫 이민은 1902년 12월 인천항에서 102명이 갤릭호를 타고 해가 바뀌어
하와이 호놀룰루 항에 도착하였고 이후 3년간 총인원이 7,500명에 달했지만
중국인과 일본인의 하와이 이주는 이보다 훨씬 빨랐고 숫자도 더 많았는데......
동양인 이민은 1863년 1월 1일 링컨이 "흑인 노예해방" 을 선언한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노예에서 해방된 흑인 대신에 값싼 "동양인 노동자" 를 받아들여 노예 노동을 시키기 위함
으로 1896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주들은 앨런 공사에게 조선인 이민을 요청하는데
당시 독립국이던 하와이를 미국이 합병하게 된다면..... 중국인 노동자를 더 고용하기
어려운지라 그럼 일본인 노동자를 견제할 세력이 필요한 탓에 조선인을 불러들인 것입니다.
당시 중국인들이 1863년 미국대륙횡단 철도 건설과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로 오래전 부터 미국에
너무 많은 이민을 온 탓에 차고 넘친지라..... 미국은 1882년 중국인 이민 금지법을 시행하고
있었는데 이제 하와이를 미국이 합병하면 미국법을 적용받으니 농장주들에게는 큰일이었습니다.
힘겨운 노동을 하면서 가족이 없었던 조선인 노동자들에게 작업능률이 오르고 과외 일손
이 늘 것을 기대하며“사진결혼” 방법을 하와이 농장주들이 추진하였으니 지상낙원
에 가면 돈많은 신랑과 결혼도 하고 공부도 시켜 준다는 달콤한 유혹에 하와이로
시집가겠다는 한국의 처녀들은..... 1910년 부터 15년간 1000여명 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하와이에서 보낸 사진은 대부분 이민올 때 찍은 것이어서 호놀룰루 부두에서 힘든 노동에
찌들여 "늙어버린 신랑" 을 처음 대한 처녀들은 속았다며 실망이 몹시 컸다는데.....
이웃 일본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며 자주 파업을 벌였습니다.
조선 노동자들이 하와이에 오면 일본 노동자들의 파업은 수포로 돌아가는지라 조선인들을 하와이가
아닌 "멕시코 이민" 을 가게 만들자는 꾀를 내니 일본은 조선신문광고를 통해 1905년 4월 1,033명
조선인을 태운 배가 제물포를 떠나 5월 멕시코 유카탄반도 살리나 크루즈(Salina Cruz)에 도착합니다.
조선인을 맞이한건 노예계약이나 다름없는 "애니깽 선인장 농장" 노동으로 이민자를 지원해
줄 정부(국가)도 없는지라 외롭게 투쟁해서는 1909년에 이르러 조선인들은 노예신분 에서
간신히 벗어나는데.... 하지만 조선은 왜놈들에 의해 쇠망하는지라 미국으로 건너가거나
쿠바로 또 다시 이민을 가거나 아니면 멕시코 내륙으로 또는 그냥 그곳에 정착을 하게 됩니다.
이후 멕시코에서 6세대 까지 내려온 후손들은 현재는 모두 3만명 정도로 추산되니 메리다 지역
에 5천명이 살고있으며 티후아나, 베라 크루즈 등지에도 많고 또 바다 건너 쿠바에도 조선인
후손들이 살고 있는데....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냈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