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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 개관 지상 강좌
1. 고대 그리스 문화(고전고대문명, Classic Antiquity)
1. 에게 문명
기원전 3천년기와 2천년기 동안에 지중해 및 에게해 유역에서는 오리엔트와는 또 다른 에게문명이 발달하였다. 에게문명은 크레타문명과 미케네문명으로 이루어졌다. 소아시아계통의 크레타(Crete)인들에 의하여 기원전 3천년경으로부터 세워진 크레타사회는 오리엔트적인 강력한 왕권에 입각했으면서도 비교적 자유롭고 평등하며, 풍요롭고 세련된 청동기문명을 발전시켰으나 기원전 15세기에 북쪽에서 이주해온 미케네인들(Myceneans)에 의하여 멸망됐다.
기원전 2천년경부터 그리스본토에 침입해 온 미케네인들은 기존의 청동기문명과 자신의 전사적 성격을 융합하여 중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Pelloponnesos)반도에 웅장한 성채를 구축하고 여러 왕국을 세웠다. 미케네의 왕권은 오리엔트의 전체군주권과 다소 유사하지만 대규모 관개 농업이 아닌 포도 및 올리브 생산 등 집약농업과 목축에 기반했기 때문에 그 힘이나 규모가 훨씬 더 작았다.
트로이전쟁으로 상징되는 바와 같이 미케네사회는 기원전 13세기 중엽에 동지중해의 무역을 장악하고 소아시아 서부해안에 지출했으나 기원전 1100년경 북쪽에서 남하한 도리아안들(Dorians)에게 정복당했다.
2. 폴리스체제
고대 그리스의 역사는 기원전 800년경에 성립된 폴리스(polis)곧 도시국가와 더불어 시작된다. 폴리스는 미케네문명의 파괴 이후 무질서상태에서 안전을 위한 부족연합의 성격을 띄는 집주 곧 synoikismos를 통하여 이루어진 전사 공동체 국가이다.
혈연 및 지연으로 맺어져 있었으며 공동체와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했던 폴리스의 성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른바 폴리스적 동물 곧 정치적 관심이 높은 자유시민들이었다. 그 가운데 집주를 주도했던 부족장들은 대지주 귀족인 동시에 무장을 자비로 갖추었던 중장 기병으로서 정치, 군사적 실권을 장악했고, 일반 평민인 클레로스 소유농은 소규모 자영농으로서의 성격을 띠었다.
폴리스체제는 기원전 8세기 후반부터 안정됐다. 그리스인들은 척박한 토지와 건조한 기후로 농경이 용이하지 않자 일찍이 바다로 진출했다. 이들은 폴리스체제를 에게해의 여러 섬 및 소아시아 등 지중해 각지로 확산하는 식민운동을 통하여 지중해세계의 교역을 촉진했다. 이와 함께 폴리스 안에서도 수공업이 발전하고 평민층의 부유한 농민과 상공업자들이 출현하여 폴리스의 방위에 자발적으로 기여하게 됐다. 종래까지 귀족에게 독점됐던 중장보병 곧 Hoplites의 기반이 평민에게까지 확대되면서 방진밀집부대 즉 팔랑크스(Phalanx)제라는 집단전투의 전술이 도입됐다.
여기서 공동체 및 형제애의 의식이 심화됐으며 평민들의 정치적 참여의 기회가 확대됐다. 이는 폴리스의 정치가 귀족정에서 민주정으로 발전해 나가는 계기를 이룬다.
3. 스파르타와 아테네
폴리스 중에는 철저한 민주정으로 나간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귀족정의 형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스파르타는 정복민인 도리아인들이 세운 국가로서 피정복민인 노예(heliotai)와 주변인인 페리오이코이(perioikoi) 위에 소수(5-10%)의 시민 곧 스파르타인이 군림하였다. 따라서 전 시민의 전사화에 입각한 군국주의적인 국제(hoplites를 최초로 사용), 그리고 귀족정과 민주정이 혼합된 정치체제가 수립되었다.
반면 원주민들의 자발적 공동체인 아테네는 가장 전형적인 민주화의 길을 걸었다. 상공업이 발달했던 아테네에서는 빈부의 차가 심각해지면서 부채노예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기원전 594년 조정자 솔론(Solon)은 아테네 시민을 재산에 따라 4등분하여 정치참여권에 차등을 두는 금권정치를 실시했다. 제한된 조정에 각기 불만을 품은 귀족과 평민의 대립이 극심해지자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는 빈민층의 지지에 힘입어 비합법적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토지분배, 상공업장려, 대규모토목공사 및 공공제전 등을 통해 민중의 이익을 옹호했다. 기원전 502년 클라이스테네스(Kleistenes)의 행정개혁(기원전 502년)은 귀족의 행정적 실권을 무너뜨림으로써 민중(demos)에 의한 정치인 민주정치(democracy)의 기틀을 마련했다. 여기에 노예노동은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가능케하는 여가를 제공해주었다.
4. 페르시아전쟁과 펠로폰네소스전쟁
기원전 6세기 중엽에 오리엔트지역을 통일한 페르시아제국은 지중해세계로의 진출을 꾀하여 그리스사회와 충돌하게 되었다.(페르시아전쟁, B.C. 492. 490. 485) 여기서 승리한 그리스는 전제적인 오리엔트체제에 자유로운 그리이스체제가 승리했음을 자부했다. 특히 해군력이 강했던 아테네는 그리이스사회의 패권을 장악하여, 종전 후 페르시아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델로스동맹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아테네는 그 기금으로 민회참가자에게 수당을 제공하는 등 내부적인 민주화 및 복지를 꾀했으며 페리킬레스시대(457-429 B.C.)의 전성기를 맞이하여 문화의 꽃을 피웠다.
그러나 아테네의 주도에 불만을 품은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이의 대립은 그리스 폴리스들 사이의 내분인 펠로폰네소스전쟁(Peloponnesian War, B.C. 431-404)을 초래하였다. 그리스세계는 이 소모적인 전쟁 속에서 침체와 쇠퇴의 늪으로 빠져들고 급기야 기원전 338년에는 마케도니아의 지배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리스는 폴리스의 정치적 발전과 또한 쇠퇴를 경험하면서 인간적이고 합리주의적이며 현실주의적이면서도 이상주의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리스를 정복한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더대왕의 시대에 동방으로 진출하여 기원전 330년경에는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비록 알렉산더는 요절하고 제국은 분열되었으나 그리스의 문화는 오리엔트에 널리 전파되어 헬레니즘문명을 발달시켰다. 이는 지중해세계가 로마에 의해서 정복되는 기원전 1세기 후엽까지 지속되었다.
1. 로마와 지중해세계
기원전 8세기 경에 라틴족이 세운 조그마한 폴리스에 불과했던 로마는 기원전 6세기 말에는 이민족이었던 에투루리아인의 영향력을 물리치고 독립된 공화정을 세웠으며 3세기 초에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한 후, 기원전 1세기 말에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기원전 272년 로마는 그리스인, 켈트인, 삼니테인 등의 이민족을 몰아내고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했다. 로마는 기원전 3세기 중엽부터 약 100년에 걸쳤던 포에니전쟁을 통하여 이제까지 서부지중해를 장악하고 있던 카르타고를 점령했으며, 기원전 2세기 말에는 소아시아를 장악하여 동부지중해까지 진출했다. 로마는 이집트를 제외한 지중해전역을 확보한 것이다.
로마의 팽창은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강력한 시민군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의 폴리스와 마찬가지로 초기에 대지주 귀족들에게 독점되었던 정치적 참여권은 점차 대부분 중소자영농이던 평민들의 불만과 항의를 초래했다. 평민들은 2세기에 걸친 긴 투쟁, 이른바 신분투쟁을 통하여 기원전 3세기 초엽까지에는 형식상 귀족들과 평등한 권리를 획득하게 되었다.
2. 공화정의 위기와 제정의 성립
그러나 오랜 정복 전쟁에서, 특히 포에니전쟁에 종군하는 동안에 로마의 중소농민들은 농토를 돌보지 못하여 황폐케 하거나 귀족들에게 빼앗긴 채 몰락했다. 이들은 무산자 곧 자식이나 낳는 이외에는 국가에 전혀 기여할 수 없는 프롤레타리아가 되어 농촌을 버리고 로마시로 흘러들어왔다. 그러나 귀족과 정복전쟁에서 부와 권력을 획득한 새로운 유력자들은 토지를 매점하여 피정복노예노동에 입각한 대농장경영 곧 라티푼디움의 제도를 수립했다..
중소자영농의 몰락은 토지소유농민층에 의존하던 로마의 시민군이 약화를 초래한 바, 이를 우려한 그락쿠스형제가 기원전 133년과 123년, 토지소유농민을 부활코자 했던 시도는 귀족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이제 로마의 군대는 로마를 지키려는 군대라기보다는 몇몇 군사적인 유력자들의 권력을 지켜주기 위한 사병집단으로 전락해 버렸으며, 이를 배경으로 군인정치들이 대거 등장했다. 한편 도시로 대거 유입된 빈민들은 교외에 무리를 이루어 살면서 기아, 치안, 질병, 화재 등 사회불안의 요소를 야기했다. 군인정치가들은 기원전 80년의 벌족파인 슐라와 평민파인 마리우스의 투쟁, 기원 전 60년 케사르, 크랏수스, 폼페이우스이 세력을 겨루었던 제 1차 3두정치, 기원전 43년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의 제 2차 삼두정치 등의 권력투쟁을 벌였다. 케사르의 양자인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1년 악티움해전에서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연합한 안토니우스에 승리하여 지중해세계를 통일했으며, 기원전 27년에는 아우구스투스가 되어 설립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제일의 시민 곧 프린켑스를 자처하여 원로원의 세력을 자신에게 복속시키고 군사권과 재정권을 장악한 독재자였다. 이집트의 정복으로 로마제일의 부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정복전쟁을 중단하고 국경의 방비, 세제개혁, 속주통치체제의 정비, 곡물의 무상분배, 대형 경기장인 콜롯세움, 기념비, 고층의 공동아파트, 공동목욕탕과 같은 대규모공건물의 건설 등 내체에 힘썼다. 또한 친위대를 설립하여 치안 유지에 주력했다. 이후 약 200년 동안 사회적 안정이 유지된 로마의 평화(Pax Romana)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는 중소농민의 몰락, 격심한 빈부격차, 도시의 빈민, 노예노동 등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정복전쟁의 전리품과 강력한 군사력 및 교묘한 행정력으로 은폐한 채, 곡물의 무상분배 및 투우 등의 오락을 통하여 시민들의 비판의식을 마비시켰던 이른바 빵과 써커스정책으로 유지된 위장된 평화에 불과했다.
또한 로마는 가부장적인 가족법, 재산권의 개념을 확립한 경제법을 확립한 시민법과 관대한 제국의 지배에 입각한 만민법의 법률체제를 완비하여 유럽 법체계의 골격을 이룩하였다. 한편 기원 후 30년경 유태지역에서 인류애에 바탕을 두고 성립된 기독교는 제정 초기 특히 네로황제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큰 세력으로 성장하여 313년에는 밀라노칙령으로 공인되었고 4세기 말에는 국교로 확립되었다.
3. 로마제정의 쇠퇴와 몰락
로마는 기원 후 2세기경 행정력이 약화되면서 군인들의 정권다툼으로 50년 동안 26명의 황제가 교체되는 병영황제의 시대를 맞이했다. 로마쇠퇴의 본질은 정복전쟁의 중단과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말미암아 노예의 수적 감소 및 생산성의 하락으로 나타난 경제적 침체에 있다. 노예제생산 및 라티푼디움의 경영이 어려워지자 대토지를 분할, 대여하여 경작게하는 소작인 즉 콜로누스제도가 나타났고, 경작 역시 곡물에 치중되면서 자급자족적인 자연경제로의 이행이 가속화되었다.
위기는 사회의 모든 분야에까지 확산되어 로마는 재정적 궁핍과 내란, 그리고 외민족 곧 게르만족의 침입과 극심한 혼란에 시달리게 되었다. 3세기 말엽과 4세기 초엽,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황제는 전제군주제를 도입하고, 로마 제국을 4등분하여 별도로 통치하는 4분치제로써 군사력과 행정력 및 징세를 강화하며, 그리스도교를 통하여 혼란을 수습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도 단기적인 효과에 그쳤을 뿐, 이미 기반이 붕괴된 로마사회는 몰락의 길로 치달았으며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의 침입으로 결정적으로 몰락했다.
서양 중세 사회의 형성과 발전
1.게르만족의 이동과 서로마제국의 성립
로마의 전성기, 라인강과 도나우강 너머의 게르만족은 부족제적인 원시생활을 영위했다. 계급분와는 미소했고 자유민은 수장과 그를 따르는 종사로 구성된 종사제라는 전사조직으로써 사회질서를 유지했다. 로마가 쇠퇴하는 3세기 경 게르만인은 로마로 유입하기 시작했고, 4세 중엽 중앙 아시아의 훈족(흉노족)의 서진에 따라 로마령 안으로 대거 이동했다. 초기의 평화적 이주는 곧 무력침공으로 바뀌었고, 5세기 말에는 프랑크족 등 새로운 종족에 의한 2차 침입이 이루어졌다.
게르만의 여러 왕국 중 유일하게 존속한 메로빙조의 프랑크왕국은 로마카톨릭을 수용해 게르만문화와 로마문화, 그리고 기독교신앙을 융합시킴으로써 중세유럽의 문화 및 사회의 기반을 닦았다. 로마교회는 로마제국의 몰락 후 로마문화의 유일한 계승자가 되었다. 로마교회는 게르만족의 개종을 위해 그리스도 및 십자가상을 존숭했는데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교회에서는 이를 비난해 우상금지령을 내렸다.(726) 동로마제국의 보호로부터 이탈한 로마교화에게는 새로운 보호자가 요구되었다.
732년에 이슬람을 격퇴한 챨스 마르텔의 아들 피핀 3세가 교황의 지원을 받아 프랑크왕위에 오르면서 카롤링 왕조가 새로이 열리고, 800년에 이르러 피핀의 아들 챨스는 교황 레오 3세에 의해 서로마제국 황제의 관을 받았다. 챨스대제는 전국을 여러 주로 나누어 그 장으로 백(count) 및 변경백(duke) 내지 공을 임명했으며 따로 감찰관(missidominici)을 파견해 지배권을 강화했다.
2. 중세사회의 형성과 성격
중세의 봉건제는 서로마제국의 쇠퇴와 이민족의 침입에 따른 사회적 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서로마제국은 프랑크족의 관습에 따라 동, 서 프랑크 및 이탈리아로 분할상속되면서 현재의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지역적 기원을 이루었다. 이 과정에서 카롤링왕조는 단절되고 지방관리들이 독립했다. 동프랑크에서는 신성로마제국이 건립되었으나 유명무실했고, 이탈리아에서는 교황과 신성로마제국의 투쟁으로 혼란이, 또한 서프랑크에서는 노르만의 침입과 함께 제후 세력의 강화가 나타났다. 여기에 이슬람, 마자르, 노르만 등 이민족이 잇따라 침입하여 10세기 말까지 무질서상태가 지속되었다.
여기서 무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강자인 기사들의 지배체제인 봉건제도가 프랑스 및 서부독일, 영국 등을 무대로 형성되었다. 지배계급인 봉건귀족은 국왕으로부터 말단기사에 이르기까지 쌍무적 계약관계에 입각한 주종제의 위계에 편입되었다. 주군은 봉신에게 봉토와 급료 등 생계수단을, 봉신은 주군에게 군사적 봉사 및 조언과 부조 등의 의무를 제공했다. 주종제는 지배계급 내부에서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기준을 이루었으나 현실적으로는 전쟁을 통하여 더욱 많은 문제가 해결되었다.
봉건제도의 또 다른 특징은 지방분권제이다. 모든 봉신은 자신의 봉토 안에서 영주 곧 주인으로서, 상급자 특히 왕의 간섭을 받지 않고 배타적으로 통치권을 행사하는 불입권을 보유했다. 따라서 중세 봉건사회에는 통일된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통치행위는 봉토마다 분권적으로 행하여졌다.
귀족들의 봉토는 로마의 대농장의 영향을 받은 장원으로 구성되었다. 영주의 땅을 빌려 사는 대가로 그의 직영지를 경작해주는 부역을 바쳤던 농민은 영주에게 예속되어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었으며, 인두세, 혼인세, 상속세 등 온갖 세금을 납부했다. 이러한 농민이 곧 중세농노(serf)였는데, 고대노예와 달리 독립된 가계를 형성할 수 있었으며 장원 및 촌락의 오랜 관습인 공동체적인 권리를 보유하여 영주에 맞설수도 있었다. 이러한 중세의 사회경제적 제도가 바로 장원제 혹은 영주제 혹은 농노제이다.
3.중세유럽의 경제적 변화
10세기에 이르러 봉건제가 안정된 서유럽은 성장과 팽창의 경향을 보였다. 곧 10세기부터 말이 끄는 바퀴달린 철쟁기, 3포제 등 농업기술상의 혁신과 농업생산성의 향상으로 인구가 늘어났으며, 11세기에는 대대적인 개간운동이 일어나면서 봉건제는 동유럽지역으로까지 확산되었다. 이에 필요한 노동력의 확보과정에서 12, 13세기에는 농노의 부담이 감소되는 추세가 나타난다.
이상의 변화는 상업과 도시의 발달을 자극하여, 10세기 후엽에서 11세기에 걸쳐 본래의 성곽 밖에 상공업자층의 새로운 성곽이 형성되면서 중세도시 및 시민이 출현했다. 특히 동방 즉 이슬람 및 비잔틴과의 원거리무역은 향료와 비단 등의 사치품과 교환할 모직물산업의 발달을 촉진했다.
이에 따라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의 이탈리아 항구도시와 플랑드르 및 북독일 지역의 도시가 발전하고 유럽각지에는 시장의 그물망이 확산되었다. 중세도시는 도시공동체의 투쟁을 통하여 12세기까지에는 영주의 예속에서 벗어나 경제활동의 자유 및 정치적 자치권을 획득했으며, 이는 농민을 자극해 농노의 신분적 해방에 기여했다.
도시경제활동의 중심은 도시공동체투쟁에 앞장섰던 상인길드와 이로부터 새로이 독립한 수공업길드였다. 길드의 성원인 주인 밑에서 도제와 직인의 과정을 통해 직업수련을 한 수공업자는 길드의 심사에 합격하면 주인으로 독립하여 길드에 가입할 수 있었다. 길드는 성원 상호간의 평등과 상부상조를 존중하여 모든 성원의 생계기반이 유지될 수 있도록 자유경쟁을 억제하고 원료, 작업시간, 생산기술 및 판매가격 등을 통제했다. 이러한 길드규제는 당시의 협소한 경제규모에 합당했으나 기술혁신을 억제하여 중세말의 경제적 침체와 사회불안을 심화시켰다.
중세의 경제적 발전도 13세기 말부터 개간의 중단, 지력고갈, 부역노동의 비효율성 등으로 퇴조하기 시작했다. 특히 14세기 중엽, 전유럽을 휩쓴 흑사병은 인구의 1/3을 감소시키고 수요부족 및 노동력부족을 초래하여 많은 경작지를 유기시켰다. 농업침체로 인한 수입감소에도 불구하고 동방사치품에 밋을 들여 화폐가 필요했던 영주는 부역을 강화하는 '봉건적 반동'의 행태를 보였다.
이에 농노들의 도망이 속출하고 자끄리의 반란(1358),와트 타일러의 난(1381) 등 농민반란이 빈발했다. 농민반란은 진압되고 말았지만 영주에게 압력을 가해 부역지대가 현물 또는 화폐지대로 대체되는 지대의 금납화 내지 농노제폐지의 과정이 서서히 이루어졌다. 서유럽에서의 농노제는 소멸되고 농민들은 소작농 내지 자영농 혹은 농업노동자로 변신한 반면, 봉건세력이 강하고 농민 공동체적 유대가 미약했던 동유럽지역에서는 농노화가 강화되어 재판농노제(Second Serfdom)가 수립되었다.
수요부족 및 노동력부족과 임금상승은 도시에서 더욱 심각하여, 길드의 규제가 강화되었다. 여기서 길드와 길드, 상인과 수공업자, 주인과 직인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어 14세기에는 피렌체 치옴피의 반란(1378) 등 도시대중폭동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자본주의의 선구적 요소들은 이러한 불안 속에서 성장했다. 협소한 길드체제에서 벗어난 선대제에 입각한 대량생산, 세계시장을 겨냥한 원거리무역, 복식부기 등의 합리적인 기업방식을 채택한 자끄꾀르, 메디치가, 푸거가 등 대상인 및 은행가들은 화폐라는 새로운 형태의 부를 부각시킴으로써 봉건적인 경제체제를 붕괴시켰는데 기여했으며, 군주 및 교황 등 정치세력과 결탁해 르네상스와 민족국가의 형성 등 근대유럽의 새로운 움직임에 중요한 움직임을 제공했다.
또한 왕은 이에 필요한 관료와 상비군 및 통일적인 조세제도의 운영을 위하여 부유한 상공업자에게 접근했다. 특히 과세에의 협찬을 위해 성직자, 봉건귀족, 시민의 세 신분으로 구성된 신분제의회가 소집되었는데 이는 왕권이 강화되면서 유명무실해졌다. 17세기의 절대주의체제는 이러한 과정의 완성 혹은 절정이라 할 수 있다.
주종제가 가장 전형적으로 발달되어 봉건귀족의 세력이 강력했던 프랑스에서의 중앙집권화는 귀족의 수와 세력을 대폭 감소시킨 백년전쟁과 함께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영국 역시 프랑스 내의 봉토를 상실한 백년전쟁, 백년전쟁에서 패배한 봉건귀족들 사이의 권력투쟁이었던 장미전쟁을 거치면서 작지만 견고한 중앙집권적 민족국가로 발전해간다.
독일은 게르만적 요소가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과는 정반대의 현상을 보인다. 유명무실했던 신성로마제국하에서 귀적들은 소군주화하여 지방분권적 영방국가가 난립했다. 이러한 상태는 1871년의 통일로 극복될 수 있었다. 고대로마의 전통이 강했던 이탈리아에서는 일찌감치 봉건제가 소멸되고 북부의 도시국가, 남부의 노르만 봉건왕국, 중부의 교황령 등으로 분열되었다. 이탈리아도 독일과 마찬가지로 1861년에야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한편 8세기 이래 이슬람의 지배가 계속되었던 이베리아반도에서는 기독교인들의 탈지회복운동이었던 재정복운동을 통해 에스파니아와 포르투칼의 두 독립왕국이 탄생하였다.
4. 근대유럽사회의 탄생
1.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교재 개관 참조
2. 유럽사회의 경제적 팽창과 자본주의의 태동
15세기 초엽까지 동방세계에 비해 열등하고 고립되었던 서유럽이 근대사를 주도한 원동력은 진취적이고 탐구적인 르네상스의 개척정신이었다. 이는 우선 동양에 이르는 선항로개척 및 신대륙 발견 등, 지리상의 발견으로 나타났다. 이에는 기독교 전도라는 종교적 동기와 동양에 대한 호기심 외에도 향료, 비단, 귀금속 등 동양물산을 아라비아나 이탈리아 상인의 중개 없이 직접 구입코자 한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동기가 크게 작용했다. 지중해무역로에서 완전히 소외되었던 포르투갈과 에스파니아에서 항로개척을 처음 시도한 것은 시사적이다. 당시 나침반과 해도, 지구의 등 항해술의 발전과 견고하고 무장력이 뛰어난 배를 만들 수 있는 조선술의 발전은 이상의 동기를 성취하는 현실적 뒷받침이 되었다. 또한 통일된 민족국가의 중앙집권적 군주는 원거리항해에 필요한 자금 및 군사력을 제공할 수 있었다.
최초로 인도항로를 탐색한 포르투갈은 15세기 말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가는 인도항로를 개척했다. 이후 포르투갈은 인도, 중국 등지에 무역거점을 확보해 동방무역의 실권을 장악했다. 한편 에스파니아 여왕 이사벨라의 후원을 받은 콜롬부스는 대서양항해를 통해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했으며(1492), 마젤란은 이 항로를 통해 필리핀을 항해하고 세계일주를 완수함으로써 지구구형설을 실증했다.(1552) 에스파니아의 탐험가들은 아메리카에 기존하던 아즈텍 및 잉카제국을 정복하고 북미에서 중남미일대에 이르는 식민제국을 건설해,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아프리카 흑인노예를 이용한 금은채굴과 사탕 및 담배 등 재배농업에 종사했다.
지리상의 발견은 새로운 동양물산이 저가로 대량 유입되는 계기를 이루어 유럽인의 일상생활을 크게 변화시켰다. 특히 대량의 귀금속은 유럽물가가 크게 오르는 가격혁명을 야기했으며, 넓은 해외시장은 원료 공급지 및 판매 시장으로서 유럽의 상공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유럽경제의 중심은 이슬람 및 지중해세계에서 대서양 및 인도양으로, 즉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에서 대서양연안의 민족국가로 옮겨졌다. 이리하여 16세기에는 교역상품의 다양화와 급격한 증대, 시장의 대규모확대, 근대기업형태 및 금융제도의 출현, 이윤과 자본축적의 증대 등 혁명적 발전의 면모를 보이는 상업혁명이 일어났다. 이후 유럽은 동양의 문명권과 활발히 접촉해 유럽주도적인 세계사를 성립시킴으로써 세력을 팽창시켰다.
3. 절대주의 시대
이상의 경제적 발전은 절대주의적인 정치체제와 그 경제적 이데올로기인 중상주의를 등장시켰다. 절대주의시대로 불리우는 16-18세기의 유럽은 사회, 경제, 문화 면에서 근대적 발전이 두드러졌지만 봉건적 요소도 잔재했다. 중세말부터 국가통합의 중심이 되었던 왕권은 이 때 절정에 달해 절대주의국가 내지 절대왕정의 정치체제를 이루어, 관료제와 상비군제도 및 전국적인 조세제도와 통일적인 사법제도를 설치했다.
절대주의국가는 근대적인 국민국가라기보다는 국왕과 왕조의 이익을 위한 국가였다. 잔재된 봉건적 부담, 길드제도 등은 자유로운 경제발전을 저해했으며, 시민계급과 귀족계급의 세력갈등은 절대왕권의 군림을 허용했다. 국왕은 절대주의체제의 운영에 요구되는 막대한 화폐를 중상주의 경제정책으로 동원했다. 중상주의는 귀금 속의 축적을 시도한 초기의 중금주의, 이를 무역의 차액으로써 실현시키려 한 무역차액설, 수출상품생산을 강조한 중공업주의, 원료공급지 및 판매시장을 확보하려는 식민지정책 등 여러 단계를 거쳤다. 특히 경제활동 전반에 걸쳐 국가의 보호와 통제가 요구된 바, 중상주의는 국가주의라는 정치적 면모를 지녀, 유럽의 민족국가건설에 포괄적인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이처럼 절대주의는 국가권력과 경쟁활동의 결탁가능성을 내포했고, 국왕은 독점권을 비롯한 경제적 특권을 상공인에게 남발해, 수입증대 및 초기자본주의적 발전을 꾀했다. 그러나 이는 자본주의의 순조로운 발전을 저해하기도 하였으니, 영국의 모함상인조합은 적절한 예이다. 한편 거대한 자본을 축적한 대상인들은 도시길드의 제약을 피해 농촌의 분산된 작업장에 기반한 선대제와 집중된 작업장에 입각한 공장생산형태인 메뉴팩츄어를 조직해 당시의 자본주의를 크게 발전시켰다.
카알 5세와 필리페 2세 때에 정치적 우위를 확보한 에스파니아는 신대륙에서 유입된 막대한 귀금속을 비능률적인 관료제, 궁정과 귀족의 사치, 전쟁비용 등에 낭비하고 국내 산업기반을 전혀 육성하지 못했다. 에스파니아는 17세기에 이류국가로 전락했다. 에스파니아의 식민지였던 네덜란드에서 13세기 경부터 모직물산업 및 시민계급의 성장이 현저했다. 필리페 2세때 에스파니아의 카톨릭신앙에 입각한 중앙집권적인 통합정책에 반항한 북부 7주는 연방제의 공화국으로 독립했다.(1581) 이후 네덜란드는 모직물과 중개무역에 입각한 자본주의를 발전시켰으나. 17세기에 영국과의 경쟁에서 패해 유럽경제의 주도권은 영국과 프랑스로 넘어갔다.
프랑스는 백년전쟁의 마무리과정에서 전형적인 절대주의체제를 점진적으로 수립해 나갔다. 이 기반 위에서 대표적인 절대군주 루이 14세는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 중상주의정책으로써 국부와 국력을 신장시켜 프랑스가 유럽의 중심국가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루이 14세 말기, 무리한 종교적 통합정책은 신교도의 산업세력을 위축시켰고, 대외적 팽창정책은 당시 유럽 국제정치의 원리였던 세력균형으로 좌절되어, 17세기 말 프랑스의 재정상태는 악화되었다.
엘베강 동쪽의 동유럽에서는 관리와 군인 등의 봉사귀족으로 종사하면서 영지 내 농민에 대한 지배권을 허용받아 재판농노제를 확립한 귀족, 미약한 시민계급, 부자유한 농노로 구성된, 봉건적 성격이 강한 절대왕정이 수립되었다. 16세기 독일은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장기간의 분쟁, 지방 분권적인 할거주의, 경제중심지의 대서양연안으로의 이동 등, 정치, 경제적으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또한 30년 전쟁으로 크게 황폐했으며, 각 영방국가의 주권이 확립되어 통일국가로의 발전이 좌절되었다. 프로이센은 독일의 영방국가 중 가장 급속히 발전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때, 지주귀족인 융커계층의 지휘에 입각한 유럽 최강의 군대 및 능동적인 관료기구로써 군국주의적 성격이 강한 프로이센 절대주의를 확립했다. 오스트리아계승전쟁(1730-1748), 7년전쟁(1756-1763)으로 강대국의 지위를 굳히고 중상주의정책으로 상공업을 육성한 프리드리히대왕은 "국가제일의 공복"을 자처한 가부장적인 절대군주였다.
러시아의 경우, 9세기 노르만족과 슬라브족의 유합으로 건설된 키에프공국은 13세기 이후 200여년간 몽고의 지배를 받았다. 비잔틴제국의 후계자를 자처한 이반 3세와 자칭 짜아르 이반 4세 때에 국가적 통합이 이루어졌으나 몽고와 비잔틴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었다. 유럽적인 근대국가를 지행한 피오트르대제는 가혹한 농노제에 기반해 유럽문화의 도입, 근대산업의 부흥, 근대적인 관료제와 군대의 양성을 시도해 유럽의 절대왕정보다 훨씬 더 강력한 절대체제를 수립했다. 18세기 후반 에카테리나 2세는 피오트르가 시도한 황제정치를 확립했지만 농노제에 입각한 강력한 전제정치라는 기본구조는 변함없었다.
한편 오스트리아는 절대왕정의 수립에 실패하여 엉성한 제국체제를 유지했으며, 강력한 봉건귀족으로 말미암아 국가통합이 미약하고 산업발전이 부진했던 폴란드는 18세기 후반에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에 의한 영토분할로 멸망했다.
15세기 말에 영국의 튜더왕조는 정치, 경제적 발전 및 국민의식의 성장을 바탕으로, 의회에 입각한 강력한 절대왕정을 수립했다. 헨리 8세 때에 종교개혁으로 기반을 다진 절대왕정은 엘리자베스 1세(1558-1603)에 와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튜더시대로부터 청교도혁명(1640)에 이르는 시기에 영국사회에서 일어난 변화는 혁명의 배경을 이룬다. 인구증가 및 농업기술의 향상, 모직공업의 육성은 목양을 위한 엔클로저운동을 초래해, 농촌의 공동체적 성격이 파괴되고 농업자본주의가 출현했으며 런던의 정치적 비중이 커졌다. 여기서 크게 성장한 지주계층인 젠트리(향신)는 하원을 통해 중앙정치를, 치안판사직을 통해 지방행정을 장악했다. 재산과 교양에 입각해 영국민의 대표로 자처한 이들은 영국의 헌정적 전통을 중시했으며, 칼뱅 계통의 청교주의를 신봉했는데, 이는 자영농민 및 도시의 소시민층에도 널리 전파되어 교육 및 정치적 각성의 역할을 했다.
엘리자베스 여왕 사후, 스코틀랜드 출신의 스튜어트왕실은 프랑스적인 절대왕정을 도입해 의회를 비롯한 영국의 헌정적 전통을 무시하고 자의적인 전제정치를 실시했다. 1640년, 스코틀랜드 반란의 수십을 위해 11년만에 소집된 의회는 국왕과 전면 대립하고 하원의 젠트리는 왕당파와 의회파로 분열하여, 내란 곧 청교도혁명이 발발했다.(1642) 전자는 국교회를 중심으로 한 궁정 및 보수적 지주와 후진적인 농민, 후자는 청교도를 중심으로 한 근대적인 지주와 상공인 및 수공업자와 자영농민 등의 지지를 받았다.
젠트리 출신인 크롬웰에 의해 조직된 청교도군대는 의회파를 승리케 했으나, 의회파는 곧 일률적인 장로제 실시 및 왕과의 타협을 모색하는 다수파인 장로파와, 군대의 장교세력에 입각해 철저한 신앙의 자유를 옹호한 독립파, 수공업자와 소상점주를 기반으로 한 일부 진보적인 장교와 사병들로 구성되어 보다 민주적인 체제를 지향한 수평파로 분열되었다. 여기서 주도권을 장악한 크롬웰은 공화국을 수립했으나(1653)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사회윤리를 강요했다. 특히 항해조례(1651)로써 중상주의정책을 실시해 네덜란드에 대한 영국의 경제적 주도권을 확보했다. 그러나 크롬웰 사후, 독재 및 금욕적인 생활에 싫증을 느낀 국민은 다시 왕정복고를 단행했다.(1660)
청교도혁명은 그 주도세력이 신흥시민계급이 아닌 젠트리였기 때문에 사회, 경제적 변화는 초래하지 못했다. 그러나 절대왕정의 전제정치에 항거해 입헌적 자유 및 신앙의 자유를 확립하려 했으며, 훗날 민주주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 청교도혁명은 전제정치의 강화와 가톨릭의 부활을 꾀한 제임스 2세를 추방한 명예혁명(1688)으로 완결되었다. 여기서 의회의 입법권과 과세권이 확인돼 입헌군주제가 수립되었다.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으로 수립된 새로운 정치체제는 산업혁명에 이르는 길을 닦았다.
5. 시민혁명과 산업혁명
1. 미국혁명
17세기부터 영국의 신대륙 식민활동은 본격화되어,18세기 초 청교도를 비롯한 이주민은 북아메리카 동부해안에 13개의 영국식민지를 건설했다. 북부에는 자영농업 및 상공업이, 남부에는 노예를 사용하는 농장경영이 행해졌으나, 불평등한 신분제가 부재하는 식민지 전체를 통해 자유와 자치의 전통이 뿌리내렸다.
그러나 해외식민지 경쟁에서 주도권을 확보해 제국체제의 편성을 도모한 영국은 죠지 3세의 즉위 (1760) 후 인지세와 차 세의 부과 등 중상주의적인 식민정책을 채택했다. 식민지인들은 "대표없는 곳에 과세없다."는 원칙으로 맞섰으며, 이는 1775년의 독립전쟁으로 폭발했다. 식민지대표들은 독립선언을 공포해(1776. 7. 4) 생명, 자유 및 행복추구의 자연권을 촉구했다. 유럽열강의 경쟁관계를 이용해 독립에 성공한 미국혁명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이고 헌정적이라는 성격을 띠나, 민주주의적인 성격도 가미되어 있다. 그러나 신분제 및 구제도가 부재했던 관계로 사회혁명으로서의 성격은 미약하다.
2.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프랑스혁명은 자유, 평등, 우애의 이념을 표방한 시민계급을 중심으로 본건적인 구체제와 절대왕정을 타도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발전의 길을 연 전형적인 시민혁명으로, 그 근본원인은 승족(제1신분), 귀족(제2신분), 평민(제3신분)이라는 봉건적인 신분제에 입각한 앙시앙레짐(구제도)에 있었다. 제3신분은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됐으며, 그 중 상인, 제조업자와 더불어 법률가, 의사, 문필가 등의 자유직업인 등으로 이루어진 부르주아지 즉 시민계급은 지리상의 발견 이래 재력과 교양이 크게 성장했음에도 귀족 및 정권으로부터 소외되고, 길드와 같은 봉건적 구속으로 많은 제약과 불이익을 당했다. 농민은 농노신분으로 해방됐지만 봉건적 부담 및 국가에 대한 세금 등으로 불만을 지녔다.
악화일로를 걷던 프랑스재정은 미국독립전쟁에의 참전으로 결정적 위기를 맞아, 구제도의 모순을 혁명으로 이끄는 계기를 이뤘다. 특권계급에의 과세 및 왕실경비에의 삭감을 통해 재정위기를 극복하려던 시도가 귀족과 왕실의 반발로 실패하자, 루이 16세는 1614년 이래 소집되지 않았던 신분제의회인 3부회를 소집했다.(1789년 5월)
3부회에서 표결방식을 둘러싸고 신분간에 충돌이 벌어지자, 제3신분의 대표들은 별도로 국민의회를 성립시켰으며, 이에 자극받은 파리의 민중들은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해 혁명적 분위기를 지방으로까지 확산했다. 혁명의 성공을 위해 농민의 지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국민의회는 봉건제 (유상)폐지선언 및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했다. 인간은 자유롭고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선언한 인권선언은 근대민주주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문헌의 하나로 자연권 주권재민의 원리 및 신성한 재산권을 확인하는 동시에 압제에 대한 저항도 자연권에 귀속시킴으로써 혁명이 저항하는 시민사회의 기본 이념을 밝혔다.
파리민중의 지지를 확보한 국민의회는 교회재산을 몰수하여 재정문제를 해결하고, 길드 및 동업조합과 내국관세 및 통행세를 폐기해 자본주의발전을 도모했으며 앙시앙 레짐의 복잡한 사법구역과 행정구역을 정리하고, 귀족계급의 아성이었던 고등법원을 폐지했다. 이리하여 확정된 "91년헌법"은 프랑스 사회를 권력분립에 입각한 단원제의 입헌군주제와 유산계급의 지배체제(능동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으로의 구분)으로 규정지웠다.
1791년 새로이 소집된 입법의회는 국내외의 반혁명움직임에 대항해 혁명전쟁을 시작했다(1792년 4월). 전쟁을 위한 의용군의 소집은 민중의 애국애와 혁명열기를 드높여, 왕권이 정지되고 국민공회가 다시 소집되었다.(1792년 9월). 국민공회에서는 상층부르주아지를 배경으로 한 지롱드당과 중산적 부르주아지 및 소생산자층에 기반한 자코뱅당이 대립했는 데, 후자는 1793년 혁명전쟁의 불리한 전세와 지방의 반혁명움직임, 또한 민중세력을 배경으로 쟈코뱅독재를 확립했다.(1793년 6월) 이리하여 채택된 93년헌법은 보통선거권, 노동권과 생존권, 공공의 지원을 규정한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헌법이었다. 또한 국민공회는 봉건제의 무상폐지를 선언했다.
93년헌법의 실시는 당시 국내외의 불리한 정세로 평화시까지 보류되고, 국민공회는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하는 공안위원회의 강화, 국민총동원령, 최고가격제 등에 입각한 공포정치를 시작했다.(1793년 10월). 1794년 봄 이후, 정세의 호전에도 불구하고 도시와 농촌의 독립적인 소생산자의 자유롭고 평등한 '덕의 공화극'을 이상으로 쟈코뱅의 단결을 외치던 로베스피에르는 당내에는 분파적 움직임을 보이던 당통 등의 온건파와 에베르 등의 과격파를 처단하면서 쟈코뱅의 전제적인 약화 및 파리민중(샹-뀌로뜨)과의 유대의 단절을 초래했다. 이에 반로베스피에르파는 로베스피에르를 단두대로 보낸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공포정치를 종식시켰다.(1794년 7월)
95년 헌법으로 유산계급의 제한선거에 의한 양원제 입법부와 5명의 총재가 주도하는 행정부가 구성됐다. 그러나 총재정부는 전쟁에 따른 경제난과 우파인 왕당파와 좌파인 공화파로부터 동시에 압력을 받는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군대에 의존했다.
총재정부 하에서 지위를 굳힌 혁명군 지휘자 나폴레옹은 주변의 절대주의 국가들이 공세를 가하자, 이를 계기로 무능한 총재정부를 쓰러뜨리고 통령정부를 수립했다(브뤼메르 쿠데타, 1799년 11월). 나폴레옹은 1808년경에 이르러 영국을 제외한 유럽대륙을 혁명의 이념하에 제패했다. 그는 국내정치에도 탁월해, 철저한 중앙집권체제의 확립, 프랑스은행의 설립, 카톨릭교회의 부활, 나폴레옹법전의 편찬 등을 통해 사회를 안정시켰다.
영국을 군사적으로 굴복시키지 못한 나폴레옹은 베를린칙령(1808)으로써 대륙과 영국과의 통상을 금지해 영국의 고립을 꾀했다. 그러나 이는 각국의 반나폴레옹적인 감정을 유발했고, 궁극적으로 나폴레옹은 무모한 러시아원정에서 패하면서 몰락했다. 나폴레옹은 혁명의 계승자라기보다 군사적 정복자였지만, 혁명의 성과를 수용해 프랑스 시민계급 및 재산권, 행정제도를 확립시킴으로써 프랑스 사회의 제도적 틀을 이루었다.
3. 산업혁명
18세기 후반 서유럽에서는 시민혁명과 함께 또 하나의 혁명 즉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각종 기계의 발명 및 기술혁신으로 이루어진 생산력의 비약적이고 지속적인 발전은 전 산업분야에 파급되면서 경제구조와 사회구조, 그리고 정치에 큰 변화를 야기했다. 산업혁명은 민족국가 간의 치열한 상호경쟁, 광대한 식민지와 시장의 보유, 초기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른 기업가계층의 광범위한 활력과 함께, 르네상스 이래 지속돼온 세계에 대한 합리적 태도 및 무한한 지배의 욕구 등 지리상 발견 이후 유럽의 모든 발전이 누적된 복합적 결과였다.
농업자본주의가 일찍 성립됐으며, 명예혁명 이후 정치, 사회적 안정과 상인층의 성장이 이루어졌던 영국에서는 특히 18세기 이후 농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식량생산은 증대됐지만 소농이 몰락하여 산업예비군으로 형성되었다. 여기에 넓은 해외시장과 중세적 제약이 없는 국내시장, 석탄과 철광 등 풍부한 자원, 영국은행 등 근대적 금융제도는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자극해 산업혁명의 최초의 움직임을 가능케 했다.
면직물 공업 분야에서 시작된 새로운 기계의 발명으로 종래의 가내수공업적인 단계를 넘어서서 새로운 공장제 생산이 출현했으며, 이는 제철공업 및 석탄공업을 자극하고, 교통과 통신을 발전시켰다. 종전의 농업사회와는 다른 산업사회를 출현시키고 풍요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공하여 신석기 시대의 농업혁명 이후 인류의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산업혁명은 또 한편 자본가계급 곧 부르주아지와 임금노동자계급 곧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양단 계급을 형성시켜 분배문제, 노동문제, 도시문제 등 각종 사회문제와 정치, 경제적 투쟁을 야기해 현대 사회가 아직도 직면해 있는 많은 과제를 남겨놓았다.
6. 시민사회의 발전
나폴레옹의 몰락 후 유럽열강은 혁명전의 상태로 복귀하려는 정통주의의 원칙에 따른 비인회의(1814-1815)로써 '유럽의 협조'체제를 다졌으며,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억압하는 보수적이고 반동적 비인체제를 수립했다. 그러나 비인체제는 1820년대 초부터 도전을 받았다. 미국은 먼로주의(1823)로써 메테르니히의 라틴아메리카의 간섭을 배격했고 영국도 이에 동조했다. 또한 민족주의와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유럽지식인들은 그리이스 독립운동(1821-1829)을 적극 옹호했다. 점차 "유럽의 협조체제"는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금가기 시작했다.
1. 영국의 점진적 개혁
일찍이 식민지 경쟁에서 승리하고, 산업혁명을 통해 경제 및 사회구조에서 크게 변모된 영국은 1820년대 초부터 메테르니히체제에서 벗어나 점짐적 개혁이라는 독자노선을 걸었다. 1830년대 말부터 자유를 확립한 (심사령의 폐지. 카톨릭교도해방령) 영국은 7월혁명의 자극을 받아 선거법 개정을 단행했다.(1832)
이는 산업혁명에 따른 인구이동의 결과를 수용한 것으로, 부패선거구의 폐지 및 신흥공업도시에의 배정을 통해 선거권이 산업자본가에게는 확대되었으나 노동자들에게는 미치치 못했다. 이와 함께 자유당과 보수당이라는 양대정당이 성립되어, 정당정치에 입각한 의회 정치라는 원칙이 확립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참정권을 획득한 산업자본가들이 곡물법, 보호관세, 항해 조례 등을 폐지해(1840년대 후반),자유방임주의의 원칙을 확립했다.
산업자본가층에 협조했으나 별무소득이었던 노동자들은 참정권을 요구하는 차티스트운동을 독자적으로 전개하여, 근대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이룬 {인민헌장}을 작성했다. 당시로서는 시기상조였던 이 운동은 비록 실패했지만, {인민헌장}의 원칙은 수차에 걸친 선거법개정으로 점차 실현되나갔다.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한 시정책도 강구되 19세기 초 이래 공장법이 여러번 제정됐으며, 20세기 초에는 국민보험법으로 강제적인 의료보험 및 실직보험제도가 마련됐다. 언론, 출판의 자유 및 교육의 보급도 확산시키는 등, 산업혁명이 초래한 문제들을 점진적으로 해결해 간 영국은 19세기 후반의 빛나는 빅토리아기를 맞이하고 20세기 초에는 민주적인 복지국가로의 길을 열었다.
2. 프랑스 혁명과 반동
1830년 프랑스의 7월혁명은 비인체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했다. 과격한 당파의 수령인 샤를르 10세의 반동정치와 자유주의의에 대한 자의적인 탄압은 자유주의 언론에 주도된 민중봉기 곧 7월 혁명을 초래했다.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는 전 유럽으로 크게 고무된 벨기에는 독립하고 스위스에서는 자유주의체제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지에서의 시도가 좌절되면서 자유주의 내지 민족주의운동의 확산은 저지되었다. 그 원인은 지식인 등에 한정된 자유주의가 민중 속에 뿌리내리지 못했으며, 사회경제적 후진성으로 부르즈와지의 세력이 미약했던 데에서 찾을 수 있겠다.
7월 혁명으로 탄생된 프랑스 7월 왕정은 소수의 부르주아지에 의해 주도된 자유주의체제였다. 여기서 산업혁명도 진전되어, 증대된 노동자집단은 결합을 통해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노동자에게는 탄압적이었고, 영국과의 경쟁에서는 소극적이었던 7월왕정은 광범위한 불만을 야기했다. 여기에 1847-1848년의 경제위기와 1848년 2월의 선거권 확대 요구로 사회가 불안한 가운데 정부의 강경대응은 2월 혁명을 초래해, 제 2공화정이 탄생했다.
2월 혁명에는 사회주의자들을 비롯한 급진세력이 참여해, 노동자의 결사의 자유 및 노동권이 보장되고, 실업자구제를 위한 국립작업장의 폐쇄를 계기로 6월 폭동을 일으켰으나 군대의 힘으로 진압되었다. 오히려 급진세력에 대한 보수적인 지배층과 농민 등의 경악은 정체불명의 루이-나폴레옹을 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48년 2월)
프랑스 제 2공화정의 초대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은 보수파와 급진파의 대립 및 공화주의자 내부의 갈등을 이용한 쿠데타(51년 12월)로써 독재권을 장악하고 급기야 국민투표에 의해 나폴레옹 3세가 되어 제2제정을 수립했다.(52년 12월) 나폴레옹 3세는 농민의 얕은 정치의식과 군대의 복종을 배경으로 한 "보나파르티즘"이라는 독재정치로서 자유주의 및 입헌적 절차를 탄압하는 한편, 상공업의 장려 및 대규모 토목사업, 적극적인 외교정책으로 국민의 인기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850년대 말부터 경제불황과 외교적인 실패 속에서 흔들렸던 나폴레옹은 독재의 완화 및 의회정치의 부활 등 다소 양보를 하지만, 비스마르크의 독일통일정책의 술수에 말려든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몰락한다.(1870) 패전의 혼란 속에서 파리의 사회주의자와 노동자들은 '파리코뮌'이라는 폭동을 일으켰으나 (1871) 임시정부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제 3공화정을 수립했다(1875)
3. 독일과 이탈이아의 통일
비인회의로 독일은 35개의 군주국과 4개의 자유시로 정비되었으며, 오스트리아에 비해 프로이센의 비중이 커졌다.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를 제외시킨 관세동맹으로 통일의 첫걸음을 내딛고, 현실정치가 비스마르크의 정책을 통해 통일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세력을 꺾고 통일된 독일제국을 수립했다(1871).
독일제국은 25개의 국가로 구성된 연방국가의 형태를 취했으나 프로이센의 군국주의와 보수적인 관료주의가 기본성격을 이루었다. 반면 독일제국에서 제외된 오스트리아는 근대적인 국민국가라기 보다는 많은 약소민족의 집합체로서의 성격을 띠는 오스트리아, 헝가리의 2중왕국을 형성했다.
4. 미국의 도약
건설 초기 미국은 연방주의와 분리주의의 대립 속에서 서서히 국가적 통합을 이룩하고(워싱턴) 19세기 초에는 민주주의 기반을 구축했다.(제퍼슨,잭슨) 또한 나폴레옹시대에 일어난 미영전쟁(1812-1814)으로 국민의 통합과 공업발전이 촉진되었고, 이에 대한 자각으로 먼로주의가 선언되었다(1823).
또한 이민 및 서부개척운동을 통해 인구가 증가하고, 현재 영토의 대체적 윤곽이 잡히는 (1850)속에서 능력위주의 개인주의적이고 진취적인 프론티아정신도 함양되었다. 서부개척과 때를 같이한 산업혁명은 공업화를 촉진했다. 여기서 공업적 자본주의 및 연방주의를 옹호하는 동북부와 노예제에 입각한 면화재배의 대농장경영에 따라 자유무역 및 지방분권을옹호하는 남부 사이에 괴리가 심화되고, 이는 남북전쟁으로 폭발했다.(1861-1865) 북부의 승리로 끝난 전쟁의 결과, 국가의 단합, 남부 중산계급의 형성, 공업 및 교통수단의 발전에 따른 경제혁명 등이 이루어져 자본주의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5. 러시아의 짜르체제
피오트르의 근대화로 18세기 중엽에 유럽열강의 지위에 오른 러시아는 농노제와 짜르의 전제정 등 가장 낙후된 구조에 입각해 있었다. 유럽 자유주의의 물결은 러시아의 군대주의를 지향하는 데카브리스트의 반란(1825)을 초래했으나 곧 진압되었다. 이후 극심한 반동정치 속에서 소위 '인텔리겐찌야'라는 지식인층은 러시아에 부재된 시민계급을 대신해 근대적 개혁을 추구했는데, 이들은 유럽지향적인 서구주의와 러시아 지향적인 슬라브주의로 분열되어 있었다.
18세기 중엽 크리미아전쟁에서 패전으로 국제적인 낙후성을 실감한 러시아는 농노해방(1861)을 중심으로 내정개혁을 단행했으나, 전제정치는 본질적으로 변혁되지 않았다. 인텔리겐찌아 사이에는 허무주의와 무정부주의자, 농민계몽에 나선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 등이 나타났으나 별 무성과였다. 그러나 1890년대부터 본격화된 상업혁명으로 마르크스주의적인 사회민주당과 중산계급에 입각한 자유주의적인 입헌민주당이 출현했다. 사회민주당은 20세기 초에 볼세비키와 멘셰비키로 분열했다.
6. 사회주의의 발전
사회주의는 산업혁명으로 발전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사상체계로 등장했다. 생 시몽, 푸리에, 오우엔 등의 초기사회주의자들은 계몽과 설득을 중시한 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했다. 사회발전의 원동력인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은 생산양식과 생산관계를 변화시켜 계급투쟁을 초래하고, 계급투쟁의 역사 중 한 단계인 자본주의는 그 자체의 모순으로 몰락해 계급없는 사회주의 사회가 도래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붕괴를 촉진하기 위한 노동자의 단결을 촉구해 국제노동자협회를 조직했다. 이후 사회주의는 서구에서는 선거와 의회, 노조 등을 통한 노동문제의 점진적 해결을 중시한 사회민주주의로, 러시아를 비롯한 동구에서는 폭력과 혁명으로 일시에 사회주의를 건설하려 한 공산주의계열로 갈라졌다.
제국주의와 제 1 ,2차 세계대전
1.제국주의의 개념
넓은 의미의 제국주의는 하나의 국가가 그 정치, 경제, 군사적 지배를 다른 사회 내지 영토에 확장시키려는 태도 내지 정책을 의미한다. 그러나 좁은 의미의 제국주의 곧 1870년대 이후의 제국주의는 현대적 의미를 띤 용어이다.
19세기 말엽 고도로 발전한 유럽의 자본주의는 잉여자본이 형성되는 단계를 맞이한다. 1870년경부터 생산과 자본의 집중현상이 강화되어, 신디케이트, 카르텔, 트러스트 등의 기업결합과 은행에 의한 사업지배 및 은행 자체의 집중이 진행되면서, 종전의 자유경쟁은 독점자본주의 및 금융자본주의의 단계로 넘어갔다.
독점의 강화는 노동계급의 저항을 강화시켰는데, 특히 후발 자본주의국가의 경우, 급속한 산업화는 독점을 강화시키고 대규모의 프롤레타리아집단을 산출하여 사회적 갈등을 심화시켰다.
이는 사회내부의 문제를 외부로의 팽창을 통하여 은폐하려는 제국주의정책을 부채질했다. 일지 감치 인도 등의 해외식민지를 확보하여 완만한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경제대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었던 영국과 산업화를 꾸준히 지속시켜왔으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낙후되면서 독점적인 금융자본을 발전시킨 프랑스 등 선진자본주의 국가 이외에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미국, 일본 등 새로운 국가들이 참여해 제국주의경쟁은 더욱 치열해졌으며 식민지 내지 半식민지로 전락한 아프리카, 아시아의 후진지역에서는 강한 반발이 나타났다. 이는 군사적 우위확보를 위해 군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선진국 상호간에는 국제적인 긴장상태가 나타났다.
2. 제 1차 세계대전
1차 대전은 제국주의열강 사이의 긴장이 외부적 충돌로 표출된 경우였다. 독일통일을 이룬 비스마르크는 열강의 이해관계에 따른 동맹과 협약의 방식을 통해 현상유지 및 프랑스의 고립을 꾀했다. 1880년대까지 유럽의 국제질서는 독. 오. 이의 3국동맹(1882)과 독.오.로의 3제동맹(1881) 등을 통해 평화와 균형을 유지했다.
그러나 친정체제에 돌입해(1890) 적극적인 제국주의정책 곧 세계정책을 추구한 빌헬름 2세는 유럽의 국제적 긴장을 격화시켜,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를 상호 접근케 했다. 이리하여 유럽의 강대국들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3국 협상과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3국 동맹의 두 진영으로 나뉘어 대립했다. 발칸 및 중동에 대한 독일의 야심에 대해 영국은 이집트, 페르시아 남부 및 아프가니스탄으로, 프랑스는 모로코로, 러시아는 페르시아북부와 발칸방면으로의 진출을 꾀해 견제코자 했다.
이리하여 중동에서는독일의 3B정책(베를린-비잔티움-바그다드)과 영국의 3C정책(카이로-케이프식민지-캘커타)이, 모로코에서는 독일과 프랑스가 대립했다. 특히 각기 팽창을 꾀하는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의 대립으로 정치적 혼란이 심했던 반칸은 '유럽의 화약고'로서 열강의 투쟁무대가 됐다. 국제긴장을 완화시키려는 시도도 별무효과였다.
세르비아 청년에 의한 오스트리아황태자 암살사건은 협상 및 동맹의 망에의해 곧 세계대전으로 발전했다. 독일은 단기전을 꾀했으나 마른느전투에서 실패하여 장기적인 참호전의 양상이 벌어지고, 일본, 이탈리아 등이 연합국에 참전하는 등 전쟁이 확대됐다. 전국을 타개하려던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공격은 미국의 대독감정을 악화시켰고, 이는 미국의 연합국 참전(1917, 4월)으로 이어져 대전의 향배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후 독일 및 동맹국에는 패색이 짙어져갔고, 1918년 가을부터 동맹국들의 항복이 시작됐다. 독일은 키일군항 수병의 반란(1918,11)등 혁명기운이 고조되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휴전에 응함으로서 1차대전은 종식됐다.
유례없이 장기적이고 대규모였던 전쟁에서는 참호전, 화학전, 잠수함을 비롯한 현대적 무기의 출현 등 새로운 전쟁의 양상이 나타났고, 각국은 전쟁의 자원을 조달하기 위한 총동원체제에 들어갔으며 전 생활은 전쟁체제 속으로 돌입하였다. 그러나 국내의 군수산업발달은 노동계급의 지위를 다소 향상시키기도 했으며, 여성의 사회적 참여를 촉진시켰다.
3. 러시아혁명
한편 연합국 편에서 동부전선을 담당하던 러시아에서는 2차례의 혁명이 발생했다. 농노해방 이후 공업이 발전하던 러시아에서는 1890년대 이후 산업혁명의 단계에 돌입해 시민계급과 노동자계급이 형성되고 자유주의와 마르크스주의 등의 사회주의사상이 확산이었다. 사회구조의 급변에도 불구하고 짜아르의 전제정치는 탄압만을 가했고, 노일전쟁으로 말미암은 물가고는 국민의 불만을 가중시켜 '피의 일요일'의 봉기를 초래했다(1905,1).
황제는 10월 칙령으로써 자유주의적인 헌정개혁을 약속했으나, 곧 후퇴시켰다. 특히 수상 스톨리핀은 보수주의자로서 혁명을 저지하고 부농을 포함한 자영농민층을 형성하려는 농업개혁 및 교육개혁 등 점진적인 개혁으로 입헌정치를 구현코자 했다.
1차 대전의 발발과 러시아의 참전은 스톨리핀의 시도를 좌절시켰다. 식량부족을 비롯한 생활난이 극심한 가운데 당시의 황제 니콜라이 2세는 현실감각을 결여하여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 1917년 3월 페테르부르크에서는 공장노동자들의 자발적인 파업과 시위 및 병사들의 협조로 2월 혁명(3월 혁명)이 발발했다.
여기서 로마노프왕조가 종식되고 입헌적 자위 및 광범위한 사회개혁을 약속하는 임시정부가 수립됐으나, 전쟁수행과 경제난,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와 볼세비키의 도전, 반혁명 쿠데타의 실패 등으로 약체를 면치못했다. 밀봉열차를 타고 망명지에서 귀국한(4월) 레닌은 볼세비키에 새로이 합류해(5월) 적위군을 창설한 트로츠키의 도움을 받아 무장봉기로써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사회주의혁명인 10월혁명(11월혁명)을 일으켰다. 이리하여 수립된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은 독일과 단독강화조약을 맺었다.
4. 베르사이유체제
1차대전은 기존의 국가질서를 크게 변화시켰다. 미국은 대전기간에 유럽에 무기와 식량을 공급하면서 경제력을 향상시켰고, 전후 유럽을 대신한 공산품의 수출국, 세계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따라서 전후처리를 위해 열린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대통령 윌슨은 제국주의의 지양 및 자유와 자치에 입각한 새로운 평화질서를 제안했다(14개조).
그러나 이 원칙은 무시되고 회의는 전승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막대한 배상금과 군비제한 등 패전국에 대한 철저한 응징으로 일관됐으며, 그 결과로 베르사이유조약이 나타났다. 또한 오스트리아, 러시아, 투르크등 전제적인 제국들의 해체와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폴란드을 비롯한 새로운 독립국가의 형성으로 이른바 "베르사이유체제"라는 국제질서가 나타났다.
국제협조와 영구평화의 정착이라는 베르사이유체제의 기본정신에따라 국제연맹이 창설됐으나 집행 및 제재능력의 결여로 실효성이 희박했다. 특히 1차대전중 새로이 출발한 소비에트러시아의 국제연맹으로부터의 배제는 1939년의 독.소 불가침조약으로까지 이어져 나찌독일의 침략정책을 부추기는 하나의 원인을 이룬다. 그러나 그 보조기구인 국제노동기구의 창설은 노동자의 안녕과 복지향상을 국제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베르사이유체제의 가장 큰 결함이라 할 수 있는 막대한 배상금으로 말미암은 독일의 경제파탄이 유럽경제에 혼란을 초래하자 유럽 전승국에 대한 채권국이었던 미국은 차관제공 및 배상금의 액수감소로써 해결을 모색했으나, 1929년의 세계공황으로 미국에 대한 전채상환은 흐지부지됐다.
이와 함께 군비축소가 모색되고 부전조약이 체결됐으나 나찌의 등장으로 무효화되었다. 유럽의 국제정치를 긴장시킨 1929년의 대공황과 베르사이유체제를 부정하는 나찌 및 파시스트의 등장, 근대화에 이어 제국주의정책을 시도한 일본의 군국주의적인 체제는 유럽에 큰 파문을 던져 각국은 군비확장에 주력했다. 국제연맹도 일본의 만주사변, 독일의 라인란트 진주, 전승국임에도 불구하고 베르사이유체제에 불만을 품은 이탈리아의 이티오피아침공에 직면해 무력함이 입증됐다.
특히 에스파니아에서는 중간파와 좌파의 연합전선인 인민전선의 공화정부와 프랑코정권이 영도하는 우파의 반란군 사이에 내란이 벌어졌다.(1936). 영.불.소 등은 정부군을 지원했으나 프랑코는 독.이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파시스트정권을 수립했다(1939). 이상의 과정에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추축이 성립됐다(1937).
4. 제 2차 세계대전
베르사이유체제의 내적인 모순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제 2차세계대전은 1차세계대전과 연속선상에 있으며 따라서 제국주의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독일은 38년부터 39년에 걸쳐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병합하고 소련과는 불가침조약을 맺는 등 팽창의 야심을 명백히 드러냈다. 그러나 영국, 프랑스등의 국가는 독일의 행동을 견제하지 않고 방치하였으며, 1939년 독일의 폴란드침입과 함께 유럽 각국은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게 된다(1939).
4개년 계획으로 군비확장에 주력해 온 독일은 단찌히와 서부 폴란드를 병합했고, 소련도 동부폴란드와 발트3국 등을 점령했다. 이탈리아의 발칸진출이 용이치 않았던 반면, 독일은 승승장구로 서쪽의 덴마아크, 노르웨이, 네덜란드에 이어 마지노 방어선만 믿고 소극적으로 항전하던 프랑스까지 점령해 괴뢰정부를 수립함으로써 소련을 제외한 유럽대륙을 장악했다.
그러나 처칠이 지도하는 영국의 치열한 항전, 드골이 지도하는 자유프랑스군과 프랑스 국내 레지스탕스의 저항, 미국의 참전 및 소련과의 이해 갈등 속에서 독일은 패전의 국면으로 치달았다. 일본은 동남아시아로의 진출을 보장받기 위해,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공격했으나(1941, 11), 1942년 여름 이후 다른 추축국가들과 함께 역전의 국면을 맞았다. 이에 따라 연합국의 수뇌들은 카이로(1943), 얄타(1945, 2), 포츠담(1945, 7)등지에서의 회담을 통해 전후 국제질서에 큰 변수로 작용했다. 뭇솔리니 정권이 붕괴된 이탈리아가 추축국 중 가장 먼저 항복한 후(1944, 6), 독일(1945, 5)과 원자탄이 투하된 일본이 항복하면서(1945,8) 2차 세계대전은 종식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