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구] 순대국밥, 혼밥과 혼술을 위해 내려온 천사?
겨울과 어울리는 순댓국을 맛볼 수 있는 국밥 골목을 가다
한때 농경 국가였던 우리나라는 공업 국가가 되며 도시화를 겪었다. 도시화는 옛것을 그냥 허물고 새것을 급히 세우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사라져가는 것이 도시에는 많다. 한때는 소중한 보금자리나 일터였던 곳이, 혹은 피와 땀이 담긴 곳들이 개발을 명목으로 묻히거나 버려졌다. <도시탐구>는 언젠가 누군가는 그리워하고 궁금해할 지금은 사라지거나 희미해진 그 흔적들을 답사하고 기록해 나갈 예정이다. -편집자주-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어린 시절 기자가 살던 동네에 시장이 있었다.
시장에는 큰 솥에 돼지의 여러 부위를 함께 넣고 끓여내는 국밥집이 있었다.
출입문과 간판이 있는 번듯한 가게가 아니라 광장시장의 맛집들처럼 시장 통로 한가운데에 자리한 작은 점포였다.
얼마나 작은 식당인지 테이블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큰 솥을 뒤로한 주인 앞에는 각종 양념과 식재료, 그리고 도마가
놓인 판자가 있었는데 그 빈 구석에 앉으면 그냥 식탁이었다. 국밥과 김치만 놓을 수 있는 크기였다. 바(Bar)나 회전초밥집
구조를 생각하면 된다.
(2021. 12. 13) 영등포시장 순대골목의 천안집. 이 가게 사장님은 40년 넘게 순댓국을 팔았다고 한다.
그곳엔 항상 누군가가 식사하고 있었다.
뜨거운 김을 후 불고 뚝배기를 저어서 한 수저 뜨면 국물과 밥 그리고 고기가 한 번에 올라오는 모습을 보고 어린 시절의
기자는 그 맛이 궁금했더랬다. 하지만 빈 자리에 앉아 “국밥 한 그릇이요” 하고 외칠 용기가 나지는 않았다. 국밥은 어른의
음식이었으니까. 왜냐하면, 그 국밥은 누릿한 군내를 이겨내야 하거니와 술을 곁들이는 음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거기 손님들은 대부분 술과 함께 국밥을 먹었다. 그래서 기자는 어른이 되면 저 국밥을 꼭 먹어봐야지 하고 생각했더랬다.
대학을 간 후에야 알게 된 그 음식의 이름은 순댓국이었다. 밥과 함께 말아 먹어서 순대국밥.
전통시장의 순대 골목
순댓국은 돼지의 뼈와 고기를 푹 고아 우려낸 국물에 각종 돼지 부위를 썰어서 얹어 내는 음식이다.
하지만 이름과 달리 순대는 순댓국의 주재료가 아니다. 이는 가까운 순댓국집에서 주문해 보면 아는데
순대는 단 몇 점 고명으로 들어갈 뿐이다. 국물을 우려낼 때 함께 들어가 풍미를 내는 재료는 아니다.
심지어 서울 구로동 구로시장의 순대골목에 가면 순대가 없는 순댓국이 나온다. 순대 대신 내장과 고기가 듬뿍 담겼다.
하지만 뭐가 들어갔든 순대국밥은 우리네 아버지들이 떠오르는 음식이다. 후루룩 먹고 일에 복귀해야 하는 식사로도,
술과 곁들여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주기에도 그만이다.
(2021. 12. 13) 영등포시장의 순대골목 입구.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12. 13) 영등포시장의 순대골목
순댓국은 구로시장의 순대골목처럼 한 거리를 이루는 곳이 많다. 영등포시장 순대골목이 한때 대표적인 곳이었다.
‘순대골목’ 간판이 걸린 시장 골목에 아홉 곳의 순댓국집이, 그 골목 외곽에도 여러 곳의 순댓국집이 영업하고 있었다.
영등포시장은 1956년에 개설된 만큼 역사가 오랜 순댓국집이 여러 곳이다. 그중에서도 호박집은 1966년에 문을 열었다.
“시어머니가 시작하셨고 제가 일한 지는 40년이 넘었어요. 내외부는 많이 바뀌었지만 같은 장소에서 장사하고 있습니다.”
호박집 윤사장님의 말이다.
이름까지 밝히기는 창피하다면서도 말을 계속 이어갔다.
국물을 우려내려면 많은 시간이 들어간다며 솥을 열어 보여주기도 했다.
지금은 보기 어려운 광경이지만 오래전 이 골목에는 다양한 복색의 사람들이 복작거렸다고도 했다.
(2021. 12. 13) 영등포시장 순대골목의 호박집. 1966년부터 이 골목에서 순댓국을 팔고 있다.
(2021. 12. 13) 호박집의 순댓국. 기본찬에 머릿고기가 나왔다.
영등포시장의 위치가 그렇다.
주변에 기차역이 있고 서울 서남부 지역과 인천과 경기 지역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한다. 주변에 유흥가도 있어 국밥으로 여흥을 마무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지금은 영등포 상권의 분위기처럼 영등포시장 분위기도 조금은 가라앉은 느낌이 든다.
서울지하철 2호선 서울대입구역 근처 ‘봉천중앙시장’에도 순대촌이 있다. 정확히는 예전에 봉촌중앙시장이 자리했던 곳에
순대촌이 있었다. 재래시장은 현대식 마트가 되었고 '순대촌' 간판은 떼인 지 오래였다. 다만 마트와 통로를 마주하고 순댓국집 다섯 곳이 영업하고 있다.
(2021. 12. 14) 봉촌중앙시장의 순대촌. 통로 오른쪽은 마트가 자리하고 왼쪽으로 순댓국집이 있다.
“시장 자리에 마트가 들어설 때 맞은편 자리로 식당들을 몰았어요. 예전엔 근처 분들이 많이 찾았는데 지금은
멀리서도 오세요. 어르신들이 많지만 젊은 분들도 많죠. 유튜버들이 불쑥 들어와 손님들이 불편해할 때도 있고요.”
순댓국집 16년 차인 '산골' 사장님의 말이다.
이 식당은 주방 앞자리가 인기라고 한다. 손님 접시에 고기가 떨어지면 더 썰어주니 그럴 수밖에 없어 보인다.
(2021. 12. 14) 봉천중앙시장의 산골.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2021. 12. 14) 산골의 모듬고기.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봉천중앙시장은 봉천고개 근처에 자리했다. 오래전 서울 곳곳으로 일 다녀오는 신림동과 봉천동의 노동자들이 오가는
길목이었다. 시장과 국밥집이 생길 수밖에 없는 위치다. 다만 전통시장은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해 마트로 변신했고
몇몇 국밥집만 남아 추억을 맛보는 곳이 되었다.
낙원동 국밥 골목
서울 종로 탑골공원 담장을 따라 낙원악기상가로 가는 길에 나오는 골목에도 국밥집이 많다. 이 골목 주변으로
열 곳이 넘는 국밥집이 있다. 한 그릇에 2천원짜리 우거지 국밥도 유명하지만 순대국밥과 돼지국밥으로 유명하다.
(2021. 12. 15) 서울 종로 낙원동의 국밥 골목
지난가을 이 골목의 식당들이 국밥 가격을 5천원에서 6천원으로 올려서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대표적 서민 음식인 국밥의 가격이 올랐다는 취지였다. 물론 한 그릇에 8천원 받는 순댓국집도
많지만 여전히 순대국밥은 싼 가격에 고기를 푸짐히 먹을 수 있다는 서민 음식 이미지를 갖고 있다.
“점심시간에는 근처 직장인들이 많습니다. 물론 탑골공원에 나들이 오신 어르신들 비중이 크죠.”
이 골목의 대박집과 나주국밥 사장님들의 말을 종합했다.
이 골목은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악사들이 모인 곳이었지만 지금은 서울은 물론 수도권 노인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다.
점심시간이 지나도 골목 분위기는 활기찼다. 사장님들은 가게 앞에 놓인 솥들을 열어 보여주기도 했다. 식재료는 물론
맛에도 자부심을 가진 듯 보였다. 한동안 골목을 지켜보니 국밥집 손님들은 주로 돼지국밥을 시키는 모양새였다.
간혹 순대를 썰어서 올리기도 했지만.
(2021. 12. 15) 낙원동 국밥 골목을 걸으면 국물을 우려 내는 솥들을 볼 수 있다.
(2021. 12. 15) 고기를 써는 나주국밥 차영호 사장님.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순댓국과 돼지국밥의 차이는?
이번 취재를 하다 보니 궁금증이 하나 생겼다. 순대국밥과 돼지국밥의 차이는 무엇일까.
문헌도 찾아보고 음식 관련 커뮤니티에도 물어보았다. 일반화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고명으로 들어가는 게 순대 위주냐 고기 위주냐 라는 단순한 분류도 있었고, 육수를 내기 위해 넣는 뼈와 고기의 비율에 차이가 있다고 분석하는 전문가도 있었다.
짧은 글로 정의할 수도 없거니와 모두가 수긍할 수 있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닌 듯했다. 물론 정확한 분석과 분류, 그리고 명쾌한 정의는 중요하다. 하지만 사람의 감정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거나 수학적 척도로 매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대국밥과 돼지국밥의 정체성을 칼같이 정의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2021. 12. 14) 봉천중앙시장 산골의 모듬고기 안주.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이번 취재를 위해 순댓국집 여러 곳을 방문했는데 혼자 와서 먹는 손님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그들은 그저 한 끼를 때운다기보다는 순댓국을 음미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일까 순대국밥이 마치 그들의 마음과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마침 기온이 내려갔다. 뜨끈한 국밥이 제격이다. 시장한 데다 마음마저 헛헛하다면 순대국밥을 찾아보면 어떨까.
거기에 반주 한잔을 곁들인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마음 맞는 벗이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혼자라도 용기를
내보면 어떨까. 순대국밥은 어쩌면 혼밥과 혼술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내려온 천사인지도 모른다.
※ 참고 자료
김찬별, 《한국음식, 그 맛있는 탄생》, 로크미디어.
박정배, 《한식의 탄생》, 세종서적.
신현배, 《우리 음식 맛 이야기》, 현문미디어.
황교익, 《수다쟁이 미식가를 위한 한국음식 안내서》,시공사.
허영만, 《식객 15》, 김영사.
첫댓글 광주에서 점심 먹은집이 생각 나네요
정말로 풍성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