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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산꽃지기 원문보기 글쓴이: 양산박
거리 12.9 km
소요 시간 8h 41m 8s
이동 시간 7h 26m 19s
휴식 시간 1h 14m 49s
평균 속도 1.7 km/h
최고점 1,051 m
총 획득고도 723 m
난이도 힘듦
백두대간 (白頭大幹) 21 – 조령산 (鳥嶺山)
첫 눈
양산박
아무 약속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
종일 가슴 설레게 한다.
이맘때쯤 찾아올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올 줄은 그저 몰랐지
세상일이 다 그런거지 뭐
기대하지 않았던 게 더 반가운게지
설레는 가슴에 첫눈이 쌓인다
프로로그
이렇게 이른 일요일 새벽에 따뜻한 이불을 걷어차고 숨가쁘게 아침밥을 차려먹고 한 시간쯤 전철을 타고 양재역에 내려 산악회 버스를 타고 산행을 떠나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오히려 산에 가지 않고 달리 할 일이 더 많다. 그렇다면 분명 다른 어떤 것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서 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다른 한편으로 역마살이 끼어서 그렇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역마살이라는 것은 진득하게 한군데 붙어있지 못하고 이리 저리 옮겨다니는 팔자를 타고 난 것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요즘 사람들은 옛날 사람에 비해 역마살에 걸린 환자들이 더 많이 늘어났다는 말일게다. 요즘은 옛날 도보나 말을 이용하여 움직이던 때에 비해 발달된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순식간에 옮겨다닐 수 있다.
역마살이 끼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소위 숙명론을 믿는 사람들이다. 즉,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운명을 타고 나기 때문에 이를 거스를 수도 없고 만일 바꾸려면 이름을 바꾼다거나 부적을 산다거나 하는 식으로 인위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한다.
내가 하는 모든 생각과 행동이 순수하게 나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인지 아니면 이런 모든 것이 운명에 의해 정해진 순서대로 진행되는 것인지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다. 이런 의문에 대해 답을 내려면 우선 ‘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명쾌하게 답을 내어야 한다. 나는 무엇인가? 현대과학이 밝혀낸 내용을 보면 인간은 500 ~ 700 만년전에 유인원에서 분리 진화하여 왔다고 한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포유류에 속한 인간이고 포유류는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뼈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체’이며 이 생명체는 더 깊이 파고 들면 (더 분해하면 ) 최종적으로 분자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우주가 빅뱅을 일으킨 이후에, 아니 어쩌면 그 기원은 더 멀리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지만, 분자가 어떤 형태로 모여서 생명체로 발전하고 계속 진화하여 오늘날 이 지구상에 있는 것처럼 여러형태의 생명체가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 생명체는 끊임없이 세포분열을 통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다가 마침내 정해진 구조와 다른 형태로 발달하게 되면 작동을 멈추고 유기물로 변한다. 그리고 그 유기물은 다시 무기물로 변환하여 다른 생명체를 이루는 원소가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설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내가 알기로는 사람이 죽어서 다른 동물이나 또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윤회인데 만일 죽은 후에 시신이 자연으로 돌아가 흙이 되어 다른 생명체를 구성하는 요소로 변하는 것을 윤회라고 한다면 종교에서 가르치는 선행이나 기도는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다. 선행을 하거나 악행을 저지르나 부처님께 기도하나 예수께 기도하나 모든 인간은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소멸하여 재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각 종교별로 육체에서 영혼(또는 혼백)이 분리되는 사후세계를 그리고 있으나 요즘같이 과학으로 말하는 시대에는 이를 증명할 수 없다. 많은 이들이 이를 증명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결국 사망 이후에 어떤 변화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소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여기부터는 단지 믿음의 문제요, 누가 (어느 종교가) 더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럴 듯하게 묘사하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희의론이 생겨나지만 모든 인간이 극악무도한 행동을 하지 않고 종교의 가르침이나 교육 등을 통해 인류가 선(善)이라고 정의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을 보면 무언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커다란 힘에 의해 지고(至高)의 선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 큰 손에 의해 선한 무리에 적응하지 못하는 존재나 파괴본능을 가진 존재 등 보편적 선에 위배되는 존재는 더 일찍 소멸되고 계속해서 좋은 쪽으로 발달 되는 것일게다.
하지만 지고의 선은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옛날 선인들처럼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처럼 태어나고 병들고 늙고 죽어가는 자연의 이치에 따르는 것 그 자체가 큰 손이 영위하고자 하는 지고의 선이라 할 수도 있겠다.
내가 새벽잠을 줄이고 백두대간 산행을 떠나는 것은 그 큰 손이 그려놓은 세밀한 계획에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행해지는 역사(役事)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그 분이 그려 놓은 큰 그림에 따라 주어진 개개의 작은 의지가 펼쳐놓은 행동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난 그런 운명에 따라 백두대간을 떠나는 버스에 몸을 싣고 창가에 앉아 산행 들머리인 이화령에 닿을 때까지 부족한 잠을 청해 본다.
산행기
이번 산행 들머리는 이화령(梨花嶺 548m)이다. 내가 다니는 회사 근처에는 ‘이화령’이라는 식당이 있어 늘 그 이화령이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었다. 주로 갈비구이를 싸게 팔아 늘 손님이 북적대던 식당이었다. 잠이 들 듯 말 듯 편안하게 선잠을 자다 버스가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면서 뿌옇게 낀 성애를 닦아내고 밖을 보니 안개가 자욱하다. 모두들 주섬 주섬 산행채비를 하는데 아무도 말이 없다. 추수가 끝난 빈들판과 그늘진 산언덕에는 어제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고 남아 있다. 기대치도 않았던 눈산행을 할 수 있는걸까. 갈비집 이화령은 십여년 성황을 이루더니 어느날 문을 닫았다. 이사간 건물이 헐리고 그자리에 번듯한 새건물이 들어섰다. 버스는 감기걸린 목처럼 그렁그렁 거리면서 이화령 고개에 올라 휴게소 넓은 주차장에 들어섰다. 안개구름이 산허리를 감고 있는 듯 이화령 주차장엔 안개가 더욱 짙어 십여미터 떨어진 곳이 어렴풋이 보인다.
11월 말이니 눈이 오고도 남았을 계절이다. 어제 함박 내린 눈이 휴게소 주차장 군데군데 쌓여 있다. 어쩌면 밤새 얼었다가 아침에 녹기 시작했나보다. 일제시대인 1925 신작로(新作路)라는 이름으로 자동차가 통행할 수 있는 도로가 뚫리면서 백두대간길이 끊겼었다. 원래 이화현(伊火峴)으로 불리면서 사람의 통행도 많지 않던 고갯길이 신작로로 바뀌면서 고개이름도 이화령(梨花嶺)으로 바뀌었다. 배나무가 많이 자라서 이화령이라 불렀다고 하는 해석은 무의미해 보인다. 원래 이름인 이화현(伊火峴)이 무슨 뜻이었는가 하는 명쾌한 설명도 찾을 수 없다. 이 고개를 넘나들던 사람들은 순수 우리말인 ‘이우릿재’ 라고 불렀다는데 그 유래를 보면 고개가 험하여 산적이나 짐승의 피해를 모면하려 여럿이 모여서 다니는 길이라는 뜻이라 한다. 한글이 있었슴에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우리말을 한자음으로 표기하는 차음문자 또는 이두문자로 된 지명으로 인해 원래의 뜻을 찾을 수 없게 된 애닲은 대목이다. 일제는 그런 지명에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배꽃(梨花)으로 장식해 놓았고 우리들은 그 이름을 아무런 비판도 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우릿재’ (伊火峴)에 관한 이야기는 좀 더 흥미를 갖고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이화령에서 조령산으로 오르는 구간은 짧지만 초반 1 km는 거의 수직에 가까운 비탈길이다. 짙은 안개에 싸인 산길을 숨소리만 내면서 걷는다. 말은 안하지만 머리속에는 여러가지 생각이 혼재되어 흐른다. 지난번 백운산 구간처럼 안개속을 걷다가 내려갈 것인가. 이번 구간이 경치가 제일 아름답다고 하는데 그런 풍경을 못보고 간다면 얼마나 아쉬움이 클까.
오르막 산길은 무덤을 지나면서 잠깐 평평해지다가 곧바로 또 다시 치고 올라간다. 이미 내공이 쌓인 자유인들은 ‘이정도 쯤이야 ‘ 하면서 묵묵히 걸어 오른다. 왼쪽 충북 괴산군 연풍면쪽은 경사가 좀 누그러지지만 오른쪽 문경쪽 비탈은 경사가 심하다. 그 비탈진 곳에 수령이 수십년은 됨직한 소나무가 늠름하게 서 있다. 안개를 두르고 서 있는 모습이 신령스럽기까지 하다.
노박덩굴
까실쑥부쟁이
쉬지 않고 턱까지 올라오는 숨을 참아가며 오르던 산길이 잠시 숨을 고른다. 헬리포트 위에는 어제 내린 눈이 녹지 않고 남아서 겨울로 들어가는 길표시를 해 놓았다. 이미 겨울 채비를 완벽하게 갖춘 회원들이 얼굴에 흐르는 진땀을 훔쳐낸다. 물을 마시고 겉옷을 한겹 벗겨낸다. 아이젠을 만지작거리다 그냥 배낭에 넣는다. 이정도 눈은 아이젠 없이도 걸을만하다는 판단에서다. 여전히 짙은 안개에 휩싸인 헬기장엔 억새풀이 바람에 흔들린다.
헬기장을 지난 길은 제법 평탄한 흙길이다. 굵은 참나무가 호위병처럼 늘어서 있는 호젓한 길을 걷자니 땀이 식은 몸에 차가운 기운이 느껴진다. 선두팀은 시야에서 사라진지 오랜데 갑자기 떠들썩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 목소리는 점점 가까워 지더니 우리가 지나친 길 저 뒤에서 한 무리의 산객들이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왁자지껄 떠들면서 오는 모습이 보인다. 울산에서 새벽 세시에 출발해서 왔다는 산악회원들은 금새 우리를 지나치고 산모퉁이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제까지 대간을 걸으면서 다른 산악회원들과 이렇게 조우하는 경우가 드문 일인데 이번에는 이렇게 섞이기까지 한 걸 보면 이 조령산이 유명세를 타는 모양이다. 이들을 조령샘에서 다시 만났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걷다가 조령산에서 헤어졌다.
계요등 (鷄尿燈) 열매 : 꽃이 예쁜 꼭두서니과 여러해살이 풀이다. 중부 이남에서만 볼 수 있다.
조령샘
조그만 너덜지대를 지나 산모퉁이를 지나자 앞서가던 울산 산악회원들이 쉬고 있다. 그들은 쉬면서도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산을 쩌렁쩌렁 울린다. 그들앞에 파란색 플라스틱 조롱박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조령샘이 있었다. 한 바가지 마시면 십년이 젊어진다는 약숫물 물줄기가 힘센 청년 오줌 줄기마냥 끊임없이 흘러나온다. 차가운 물맛이 일품이다. 다른 산행기를 보면 수년전에도 똑같이 이렇게 물이 흘러 내렸는데 아직도 흐르는 걸 보면 조령산의 명물샘으로 봐도 좋을 듯 하다. 샘물 위에는 큰 버드나무 두 그루가 자라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한 나무가 서로 떨어져 자란 것인지 원래 두 그루의 나무가 이어져 있는 것인지 두 나무 사이를 속이 빈 나무줄기가 이어져 있다. 한 여름 지친 산객들이 물 마시고 체할까봐 버들잎 띄워 마시라고 이렇게 자라난 걸까. 우리는 이렇게 한 잔 약숫물로 목을 축이고 지나가지만 명물 조령샘은 또 얼마나 많은 세월을 이 자리에서 흘려 보낼까. 우물가에 자라는 저 버드나무는 또 얼마나 많은 세월동안 그 자리에 서서 지나가는 산객들을 바라보고 있을까. 이곳에서는 바쁘게 흐르는 시간이 잠시 멈춰있는 느낌이 든다.
조령샘 버드나무
이어진 나무계단을 올라선 능선에는 북쪽 연풍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다. 나뭇가지에 얼음꽃이 만발했다. 밤새 찬바람에 섞여 있던 수분이 나뭇가지를 붙들고 있다가 얼어버린 것이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으려 나무를 꼭 잡고 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아직 추위가 약한 탓인지 상고대가 자라다 멈춘 것 같다. 산에서 내려오는 산객에게 높은 곳에는 상고대가 더 많이 피었더냐 물으니 고만고만 하다고 한다. 길가에 조밀하게 자라는 잣나무숲에도 그리다 만 겨울풍경이 펼쳐져 있다. 짙은 안개가 감춰버린 조령산의 멋진 풍경 대신 이렇게 상고대가 보상해주고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자연은 이렇게 공평해서 누구에게나 조금씩 보물을 나눠주는가 보다.
조령산(鳥嶺山 1017 m)은 우리가 들머리로 삼은 이화령에서 3 km 남짓 되지만 쉬엄 쉬엄 걸으니 두 시간쯤 걸렸나보다. 이 산이름을 따온 새재(鳥嶺 제3관문)까지는 5 km 쯤 더 가야 한다. 가까이 있는 이화령 대신 먼데 있는 조령이라는 고개이름을 따서 대표적인 산이름을 지은걸 보면 그 고개가 갖고 있는 쓰임이나 지명도가 이화령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 있다. 기록을 보면 1925년 일제가 3번 국도를 건설하면서 이화령을 뚫기 전까지 군사적 또는 상업적으로 문경새재가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상에 이르기 전 만나는 잣나무 숲
조령산은 고작 천미터 조금 넘는 높이의 암봉이다. 백두대간이 백두산에서 시작해 동쪽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면서 한반도를 동서로 나누다가 소백산을 만나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려오는 이 조령산 구간에서는 대간길이 경상도와 충청도를 남북을 가르며 흐른다. 이 북쪽은 충청북도 연풍이요 남쪽은 경상북도 문경이다. 옛날 경상도 사람들이 한양으로 갈때 주료 이용하던 고개가 새재 즉 조령이었다 한다. 한자로 새鳥 고개嶺으로 쓰면서 해석하기를 고개가 너무 높고 험하여 새도 넘지 못한다고 한다. 나는 이번 산행을 하면서 이런 해석이 얼마나 과장되고 왜곡되었는지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왜곡된 이미지는 실제로 충청도 나아가서는 충청이북 지역과 경상도사이에 정신적인 경계선을 그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새재 즉 조령은 해발고도 650 m 로 주변에 있는 이화령 ( 548 m )이나 하늘재 (계립령 520m) 에 비하면 좀 높은 편이나 임진왜란 이후 우마차가 드나들 정도로 길이 잘 닦여져 있었으니 이 조령이라는 고개이름은 물리적인 측면보다는 정신적으로 경상도를 고립시킨 경계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조령산 정상에 닿을 때는 안개가 많이 걷혀 있었다. 전국적으로 극심한 미세먼지가 이곳 조령산에도 파고 들어 아름다운 조망을 덮고 있으나 원래 태생이 아름다운 여인은 허름한 옷을 입어도 예쁘게 보이듯이 하얀 암봉으로 이루어진 조령산줄기의 환상적인 모습은 미세먼지를 뚫고 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설악산 준봉들의 빼어난 아름다움에 직접 비교하기에는 적절치 않겠으나 주변 주흘산과 부봉 등 주변 산들과 함께 이룬 산군(山群)들은 어딜 내놔도 손색이 없을 만큼 웅장하고 아름답다. 날씨 좋은 날에 하룻밤 비박을 하면서 전체적인 산세를 조망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게 드는 빼어난 산이다.
조령산 정상에는 다른 산에서 볼 수 없는 나무 비석이 세워져 있다. 사람 키만큼 큰 나무조각에 ‘산악인 지현옥’이라 쓰고 다른 한면에는 그녀의 산악인으로서의 양력을 적어 놓았다. 들꽃처럼 산들산들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영원한 자연의 품으로 떠난 지현옥 선배를 기리면서 청주에 있는 그녀의 모교 서원대학교 등산부에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61년에 논산에서 태어나 81년 서원대학교에 입학하여 등산부에 가입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에베레스트 8000 미터급 산들을 정복하고 99년에는 안나푸르나 정상에 올랐다가 하산하는 길에 사고를 당해 운명을 달리한 지현옥이라는 여성산악인을 기리는 마음을 담아 놓았다. 누구나 태어나고 죽는 것이 인생인데 지현옥은 당시 남자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세계 최고봉 등정을 여성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대한민국 여성들을 옥죄고 있던 멍에 하나를 벗겨주는 큰 일을 해내었다.
우리는 조령산 정상에서 잠시 머물다 뒤에 오는 단체팀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신선암봉을 향했다. 정상에서 내려와 조금 걸어가니 앞이 탁 트인 조망처가 나온다. 조령산 정상에서는 나뭇가지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신선암봉과 928봉 그리고 오른쪽으로 주흘산과 부봉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응달에는 서설이 쌓여 있고 햇빛에 드러난 바위 봉우리들은 태고적 자연미를 그대로 간직한 채 아름다움을 뽐낸다.
엷은 안개옷으로 갈아입은 신선암봉 주변의 산군.
가파른 내리막길도 계단이 있어 안전하다
아직 가보지 못한 여정에 어떤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설치한지 오래되지 않은 나무데크 계단이 끝없이 내려간다. 그리고 올라간다. 틈틈이 조망이 트이는 바위가 나타나고 그 때마다 우리는 감탄사를 연발한다. 아름답다. 정말 아름답다. 바위에는 또 수십년 인고의 세월을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살아갈 소나무들이 한 폭의 동양화처럼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바위산 끝에 두 번째 이정표인 신선암봉이 있었다.
신선암봉(神仙巖峰 937 m)은 신선이 둘러 앉아 주변 경관에 흠뻑 빠져들만큼 멋진 조망을 보여준다. 인간의 발길이 닿기 이전부터 수백만년 동안 빗물에 씻기고 바람에 날려 하얀 바위가 편편하게 다듬어지고 그 위에 또 다시 흙이 쌓인다. 아주 작은 바위틈에 솔씨가 날아 앉아 싹을 틔우고 수십년 성상을 견디며 크게 자란 소나무의 기상이 의연해 보인다.
신선암봉을 오르며 바라본 앞으로 가야 할 암봉들
신선암봉을 떠받치고 있는 멋진 바위언덕
지나온길 ; 조령산이 역광을 받아 실루엣으로 비친다.
정상석 뒷편으로 928봉과 부봉(釜峰) 등줄기가 마치 설악의 공룡능선처럼 뻗어 있다.
신선암봉에서 잠시 머물다 또 다시 긴 나무계단을 타고 끝없이 내려간다. 이 계단이 없다면 어떻게 다닐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스스로 던져본다. 아니 불과 수년전만 해도 이런 근사한 나무계단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 때는 힘도 들었겠지만 사고도 더러 발생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무계단이 무척 가파르다.
12:56 꾸구리바위로 내려가는 길목 : 이 아래에서 바람을 피해 점심 먹을 자리를 찾았다.
꽤 긴 산행으로 시장기가 느껴진다. 오후 1시가 되었으니 새벽밥 먹은 것이 벌써 다 내려간 모양이다. 날이 차서 그런지 갈증도 느껴지지 않아 4시간 산행하는 동안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신선암봉과 928봉 사이 깊은 골 아래 바람이 들지 않는 양지쪽에 자리를 잡았다. 넓은 자리가 없어 회원들이 작은 그룹으로 옹기 종기 모여 앉아 있다. 늦게 도착한 별동대는 주변을 둘러 보고 좀 넓은 바위 주변에 모여 들었다. 약간 경사진 바위에 버너를 설치하고 산중오찬을 준비한다. 끓는 물에 생낙지와 전복이 들어간다. 7명이 먹는 밥상이 무척 푸짐하다. 산행횟수가 늘어갈수록 점심밥상은 더욱 푸짐해지는 느낌이다. 생선 삶은 물에 라면을 끓이니 해물라면이 된다. 여기에 햇김치와 갓김치 그리고 볶음김치가 얹혀지고 귀한 술방울이 목줄기를 타고 넘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과일로 부페식당같은 점심을 마무리한다.
푸짐한 점심밥상
늦게 도착한 만큼 길어진 식사시간을 뒤로 하고 무거워진 몸을 일으켜 세운다. 또 다시 가파른 백두대간을 걷는다. 한문희 총대장님이 무전으로 위험구간을 지나야 하니 빨리 오라고 재촉한다. 바위와 바위 사이 깎아 지른 절벽앞에 긴 행렬이 멈춰 서 있다. 길은 외길 긴 로프가 매어져 있으나 산행에 익숙치 않은 다른 산악회 회원들이 바위와 씨름을 하고 있다. 바위 건너 총대장님이 빨리 건너 오라며 재촉하신다. 우리 자유인들 차례가 되자 모두 수월하게 로프구간을 지나간다. 정체로 인해 그 짧은 구간에서 30분 정도 소요되었다.
얕은 개울을 건너는 어미소가 송아지를 바라보는 심정일까 ? 앞서 넘어간 한문희 총대장님이 노심초사 뒷팀을 바라보고 있다.
위험구간을 지나는 대원들
이까짓 바위 낭떨어지쯤이야. 수십년을 밤낮없이 암릉을 지켜보는 소나무가 의연하다.
밀어주고 당겨주면서 가파른 암릉구간을 지나간다.
928봉을 지나면서 이런 로프구간을 서너개 지나야 한다. 그 때마다 다른 산악회의 억센 장정들이 군대에서 배운 유격훈련 시범을 보이면서 연약한 여성회원들을 이끌어준다. 자유인 산악회에는 연약한 여성회원은 없다. 모두 익숙한 줄타기 시범을 보이면서 유유히 내려간다.
초겨울로 접어든 하루 해가 짧다. 위험구간을 다 지나고 나니 길은 다시 한적한 흙길이다. 그리 크지 않은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낙엽이 길을 덮고 있다. 짧은 하루 해가 서산 마루로 천천히 내려 앉는다. 깃대봉 갈림길에 도착하니 4시 40분이다. 제 3관문까지 1 km는 3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다. 좀 늦었지만 깃대봉은 어떤 모습일지 호기심을 떨쳐버리기 어려운 별동대는 잠깐 깃대봉에 다녀오기로 했다. 배낭을 갈림길에 내려 놓고 재빨리 깃대봉으로 뛰어 오른다. 해는 뉘엿뉘엿 나뭇가지 사이로 땅거미를 흘리며 사라져 간다. 나뭇가지로 인해 조망도 없는 깃대봉에 가슴속에 숨겨두었던 호기심을 내려 놓았다. 그냥 별로 특별한게 없다.
산행 내내 곁에서 따라다니는 주흘산 부봉이 어느새 가까이 와 있다.
깃대봉(835m)은 전국에 같은 이름을 가진 봉우리가 참 많다. 옛날 핸드폰이 없던 시절, 전화도 무전기도 없던 시절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 성을 지키는 군인들에게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이란 시각적인 것이 전부였다. 이 깃대봉에 약속된 색깔의 기를 올려 신호를 보냈으리라. 밤에는 봉화를 피워서 시각적인 신호를 보냈다. 이 봉우리 아래 조령관에서 곧바로 올려다 보이는 곳이 이 깃대봉이니 그 중요성이 꽤 컸을 것이다.
깃대봉에는 깃대가 없었다. ~ 좀 썰렁
새재 제 3관문인 조령관으로 내려가는 산길은 아직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돌로 된 산성을 따라간다. 왼쪽 즉 연풍면 방향으로만 성벽이 쌓여져 있는데 이 성벽은 조령관문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조령관문은 규모가 꽤 큰 성문이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이 새재의 중요성이 그다지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듯 싶다. 성문앞에 세워진 안내문을 보면 임진왜란때 왜군들이 이곳에서 집결하여 북진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 후 1708년 숙종 34년)에 이 곳에 성을 쌓고 비로소 3중 관문을 완성하였다고 하는 것을 보면 이 성의 축성 목적은 왜적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어쩌면 청나라 군대를 견제하려고 쌓은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제3관문에서 깃대봉으로 이어지는 성벽이 북쪽을 향해 서 있다.
인조 14년(1636년 병자년)에 청나라의 침범으로 인해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으나 막강한 무기를 앞세운 청군에 결국 항복하는 굴욕을 당한 이후 마치 소 잃고 외양간이라도 고치는 심정으로 이런 방어진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실제로 이 성문의 날개를 보면 문경쪽이 아니라 연풍쪽으로 나 있다. 이는 북쪽을 방어할 목적으로 지어진 성이라는 의미이다. 당시 북쪽이라면 당연히 청나라이니 혹여나 다시 한 번 북침을 당하면 남쪽으로 피난가면서 시간을 벌 요량으로 축성했을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제3관문의 뒷태
제3관문 앞태
5시 30분 조령3관문을 지나 고사리(古沙里)로 내려가는데 쥐꼬리만큼 남아 있던 햇빛이 산속으로 사라지고 길위에는 어둠이 깔렸다. 차도 다니지 않는 잘 닦여진 흙길이 걷기에 편안하다. 카페와 팬션이 있는 상업지구를 지날 때는 어둠속에 가게들이 불을 밝힌다. 지나다니는 길손이 많아서 그런지 이곳의 개들은 낯선 사람을 봐도 짖을 줄 모른다. 6시가 다 되어 고사리 주차장에 도착하여 산행을 종료하였다. 주차장 옆 가게 옆에서 라면 등으로 간단한 하산식을 갖고 하루를 마감하였다.
오후 5시 20분 새재에서 산행을 마친다.
에필로그
이번 산행에서 가파른 위험구간에 나무계단을 설치하여 산행이 편안했다. 처음 조령산으로 오르는 구간에 설치된 나무계단에는 문경시에서 사과, 오미자 등을 홍보하는 광고물이 아담한 크기로 부착되어 있었는데 신선암봉이나 928봉에 설치되어 있는 계단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이를 보면서 백두대간 전 구간 위험한 곳에 안전장치를 설치하고 그 비용을 국내외 기업의 광고비로 충당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져 본다. 어떻게 하는가는 좀 더 두고 생각해 봐야겠지만 일종의 스포츠 마케팅을 활용하는 것이다. 기업은 광고를 할 수 있어 좋고 지자체는 예산을 절약할 수 있어 좋다. 어쨌든 지리산에서 백두산까지 이어지는 백두대간길이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본다.
산행할 때 한 쪽 스틱을 사용하였다. 지난 구간에서 무릎에 통증이 왔을 때 이현구 대장이 스틱 한쪽을 빌려주어 사용해 보니 무릎이 훨씬 편안하였다. 이번에도 13km를 걷는 동안 한 쪽 스틱만 사용했는데도 무릎 통증이 없다.
또 한 가지 좋은 소식은 9월 초부터 괴롭히던 어지럼증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계속 하루에 한 일씩 멀미약을 복용하다가 지난 금요일부터 약을 안먹었는데도 어지럼을 느끼지 않는다. 초반 이비인후과에 다녔지만 이석증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그 뒤로 차츰 몸이 적응했나보다. 참 좋은 일이다.
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어지럼증이 사라졌다니 다행이네요.
명품 산행기 잘 읽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지루한줄 모르고 빠져들게 읽어내려가는 명품 산행기~~~박상복님과 같이 백두대간을 할수 있다는것이
행복합니다^^~~
이렇게 멋진 해설을 해 주시는
분하고 같이 산행 할 수 있어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꾸벅
자유인22기 별동대 작가님 회를 거듭 할수록 작품이 명품이 되어가고 있네요.
잘보고 퍼갑니다.수고 하셨습니다.그리고 감사 합니다.
아주 좋아요. 어지럼증도 없어지셨다니 더욱 좋코. . . . 23일 뵙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