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수필】
손자와 화장실
― 설날, 정체 도로 다급한 손자 용변
― ‘기적의 화장실’ 안내해 주신 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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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승원 수필】
손자와 화장실
― 설날, 정체 도로 손자의 다급한 용변
― ‘기적의 화장실’ 안내해 주신 분은?
윤승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설날이다. 아침 일찍 차례를 지내고 고향 선산에 성묘하러 나섰다. 아들이 운전하는 승용차다. 나는 손자와 함께 뒷좌석에 앉았다. 손자는 열한 살, 초등학교 3학년 생이다.
청양 선산에 가려면 고속도로를 타야 한다. 유성 톨게이트 가는 길. 시내를 벗어나기도 힘들었다. 구암 삼거리부터 극심한 정체 현상을 보였다.
손자의 제의로 ‘한자 주고받기 게임’을 했다. 할아버지가 먼저 한자를 말하면 손자가 이어가는 게임이다. 가령 할아버지가 ‘글월 문(文)’이라고 하면 손자가 ‘배울 학(學)’이라고 답한다. 중복하여 말하거나 더는 이어가지 못하고 중단하면 지는 게임이다.
한자 게임은 차량 정체 구간에서 더 큰 효과를 발휘했다. 길이 막혀도 지루한 줄 모르는 것은 유쾌하게 주고받는 한자 게임 덕분이다. 할아버지에겐 두뇌운동이다. 새로운 한자를 골똘히 찾아야 한다.
손자와 한자를 주고받으면서 끊임없이 이어가려면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이러한 집중력은 차창 밖으로 보이는 우주 만물이 모두 한자어로 연결된다.
건물이며, 초목이며, 동물이며, 이름을 가진 것은 모두가 한자 게임의 소재가 된다. 심지어 도로변 간판도 한자 이어가기 게임에 동원된다. 극심한 정체로 인하여 장대 삼거리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손자가 한자 게임을 중단했다.
갑자기 “소변이 마렵다”고 했다. 난감한 일이었다. 막히는 도로에서 어디에다 ‘볼일’을 본단 말인가. 아무리 나이 어린 손자지만 부끄러움을 아는 초등학생이다. 바지를 내리고 도로변에서 ‘볼일’을 볼 수는 없다.
승용차에 혹시 페트병이라도 있나 찾아보았다. 하지만 그런 용품을 미리 준비해 두었을 리 없다. 손자의 다급한 사정을 생각하니 할아버지 마음이 더욱 조급해졌다. 그때였다.
아들의 승용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갑자기 도로변에서 어느 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이거다. 어느 동네든지 작은 공원이 있다. 어린이와 노인을 위한 공원에는 반드시 공중 화장실이 설치돼 있다는 것은 할아버지의 오래된 상식이다.
▲ 갑자기 구세주처럼 나타난 도로변 공중화장실
아이들도 그렇지만 노인들은 소변을 참지 못한다. 특히 노년에는 급박요(急迫尿) 증상을 가진 분이 많다. 그래서 노인정엔 공중 화장실이 필수 시설이다.
오, 신이여! 저 높은 곳에서 언제나 내려다보시는 나의 자애로운 부모님이시여!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구세주처럼 도와주시는 부모님이시여. 오늘도 우리 손자 ‘오줌’이 급한데, 공중 화장실까지 긴급히 안내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할아버지의 이 같은 ‘감사의 기도’가 끝나자 손자가 싱글벙글했다. 시원하게 ‘볼일’을 끝내고 바지를 추스르면서 차에 올랐다. 나는 살아가면서 이렇게 큰 복을 누린다. 이런 복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부모님이 생시에 쌓으신 공덕이라고 믿는다. 선량하게 살아오신 부모님이 남에게 따뜻한 인정을 베풀어온 공덕이다. 부모님이 쌓아오신 공덕은 3대에 걸쳐 발복(發福)한다더니, 오늘날 손자에게도 작으나 크나 부모님 음덕이 알게 모르게 미치는구나.
더구나 오늘은 설날 아닌가. 부모님 산소에 성묘하러 가는 손자가 기특하여 도와주시는구나. 급박한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공중 화장실이 눈앞에 나타나다니 이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난감한 상황에서 걱정을 말끔히 해소해 줄 화장실이 눈앞에 우뚝 나타나다니. 이건 화장실이 아니다. 그야말로 ‘해우소(解憂所)’란 이름이 적절하다. 다급했던 손자의 ‘해우(解憂)’이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더 크게 걱정하면서 조바심쳤던 할아버지의 ‘해우(解憂)’라 하겠다.
마침내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대전에서 청양까지 몇 군데 극심한 정체 현상을 보였지만 그다지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다. 교통 소통이 대체로 원활한 편이었다.
성묘를 마치고 무사히 귀가했다.
저녁밥을 먹으면서 TV 뉴스를 틀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중국 베이징 특파원이 현지 소식을 전하는데, 오늘 내가 겪었던 다급한 사정과 흡사한 광경을 보여줬다.
다름 아닌 중국인들의 ‘고속도로 화장실’이었다. 중국인들이 춘절에 고향에 가려면 땅덩어리가 크고 넓어서 며칠씩 걸린다고 한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도로 정체가 심해 화장실 이용이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고속도로 화장실 앞에 길게 늘어선 줄. 여기서 용변이 급한 사람은 어찌하는가.
▲ 중국 특파원이 전하는 춘절 고속도로 화장실 앞 긴 줄(위 사진).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차에서 내려 도로변에 용변을 보는 장면(아래 사진) ※ 사진 출처 = 채널A, 저녁 7시 뉴스 화면 캡처
특파원의 TV 화면은 고속도로변에서 용변을 보는 사람을 그대로 보여줬다. 모두가 체면 불고하고 도로변에 쉬를 하는 장면이었다. 나는 또 한 번 감사하는 마음이 솟구쳤다.
오, 대한민국 좋은 나라. 이렇게 살기 좋은 나라에서 태어나 온갖 누릴 것 다 누리고 삽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성묫길에도 부모님 음덕을 입었습니다. 덕분에 손자가 깨끗한 화장실에서 시원하게 소변을 보았습니다.
저 높은 곳에서 따뜻한 눈길로 내려다보시면서 또 큰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늘에서 공중 화장실을 안내해 주신 분이 바로 부모님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
2024. 2. 10.(음력 1월 1일)
지환이 할아버지 윤승원 성묫길 풍경 記
첫댓글 ♧ 네이버 블로그 ‘윤승원 청촌수필’에서
◆ 高林 지교헌(철학자, 수필가,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2024.2.12.22:51
“손자와 화장실”을 잘 읽었습니다.
차 안에서 화장실을 가고 싶으면 정말로 곤란하지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쉽사리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소통되어
손자의 걱정거리가 해결된 것을 보고 기쁜 나머지
평생을 착하게 살다 가신 부모님의 은덕이 역사한 것으로
이해하시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성묫길에 일어난 일이니 더욱 공감하게 됩니다.
장천 윤승원 수필가의 모든 글이 그러하지만,
이 글도 많은 사람에게 읽혀서
깨달음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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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가 복사하여 보존하려 하니
복사가 되질 않는군요.
어찌하면 좋을지요? 혹시 가능하면
저의 이메일로 원고를 보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온 가정에 행복이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 성남 분당에서 청계산 지교헌 올림
▲ 답글 / 윤승원(필자)
존경하는 지교헌 박사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의 졸고를 예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과분한 격려 말씀 주시니 큰 영광입니다.
부탁하신 저의 졸고 수필 「손자와 화장실」 은
메일로 보내드립니다.
2024. 2. 13.
필자 윤승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