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유튜브에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라는 썸네일이 떠올라
눈이 번쩍 뜨여서 그 설교내용을 들어봤습니다. 한국교회의 어떤 분이
성도들로 하여금 은혜의 보좌로 인도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적이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를 가지고 들었습니다. 구원을 받은 은혜와 아직 구할 은혜가
하늘에 쌓여 있다는 내용까지는 참 좋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간직한 은혜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주실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의 보좌는 바로 특별새벽기도회에 나와서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라는 말로 봉합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쌓아두신 은혜(시31:19)는 주를 두려워하고 주께 피하는
자에게 주시기 때문에 간절하게 기도하면 은혜를 주신다고 대미를 장식하더군요.
말은 맞지요. 그리스도 안에 쌓아둔 하늘의 은혜는 무한대가 맞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말을 합니다(골3:1) 바로 은혜의
보좌입니다. 따라서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땅에서는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 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고 말합니다(골3:2-4) 다윗이 노래한 것처럼 우리의 총 자산과 인생의
총소득과 장래의 보장이 그리스도 안에 간직되어 있으니 위엣 것을 찾으라 합니다.
중요한 문제는 그 은혜의 보좌에 어떻게 닿으며 어떻게 나아가는지 아는 일입니다.
지금 기독교인들 중에 교회에 안 나가려고 하는 이들이 23%나 된다는 통계가
있답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없는 게 아니라 마땅히 찾아야 할 길을
찾지 못해 교회 밖으로 뛰쳐나가 이리 저리 기웃거리고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들으면 기분이 좋고 감동스러우며 신앙이 즐겁고 행복하다고 여기면 그게
은혜라고 여기는 교회이기에 제목은 그럴싸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라고
붙이지만 그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는 방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베푸실 은혜만 실감나게 말하므로 아멘이 교회당에 가득합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간절하게 사모하는 이들이 실제로
그 긍휼과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믿음의 비밀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거룩하게 된 자로 발견이 되고(히2:11)
성령 안에서 주께 붙잡힘을 받아 하늘로 부름을 받은 자신의 정체감을
확립하고 우리에게 오셔서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시므로 그 안으로
옮겨 아들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하신 은혜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그 원수가 발판이 될 때까지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를 파악해야 합니다(히3:1)
그리고 자신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정렬이
되어 이상과 감정과 의지가 통일이 되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집중해야 합니다.
물론 성도들이 기도를 하지 않으니 특별새벽기도회라는 이름으로 기도하게
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 자리가 집단 확신을 주고 정신승리를
하는 정도라면 하나님의 뜻과 그 영광과는 거리가 먼 모임일 수가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예를 들고 왜 목이 쉬도록 기도하지
않고 세상과 하나님 중간에서 미지근하게 신앙생활을 하느냐 오직 하나님만
굳게 믿어야 되지 않느냐고 강력하게 외치더군요. 근데 라오디게아 교회의
근본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그들 밖에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지 못해 벌거벗고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 소경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먹음이
없기 때문에 이김이 없고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와 연합이 안 되는 겁니다(계3:20-22)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야 접속이 되고 접속이 되어야 공유가 이루어
질 터인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세례로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는 복음이 제대로 전파되지 않는 상태에서 간절하게 기도하라 열심을 내라고
함은 특새라고 하는 그 자리가 은혜의 보좌라고 하는 말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은혜, 이미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주시기로 한 복은
분명 어마어마합니다. 무제한이며 충만 그 자체입니다. 문제는 통조림 창고
안에서 통조림을 따는 재주가 없어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처럼 교회가 그 꼴입니다.
또 어떤 이는 로마서를 자신의 전성기가 되면 설교하려고 아껴 놨다가 로마서를
보다가 로마서 강해를 하면 전성기가 온다는 걸 깨달았다고 자랑하는 걸 봅니다.
바울의 심정과 로마서를 좀 아는 사람으로서 참 무안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로마서를 품은 바울이 어떻게 하든지 로마로 가야겠다고 몸부림을 쳤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지금 교회의 문제는 로마서적인 구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거듭난 것 하나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상속자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과 영광이
심령에 비치므로 심신으로 뻗어 나와 하나님의 업적을 드러내는 능력의 종들이
희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인데 로마서를 전성기 때에 설교하려고 아꼈다니
이게 말입니까 방구입니까? 로마서의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자기 진술입니다.
은혜의 보좌는 구약의 성전의 지성소 안 법궤 뚜껑입니다. 피가 발라져 있고
그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므로 지성소이며 그 곳에서 은혜를 베푸시므로
시은좌이며 은혜의 보좌입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씩 속죄와 정결의식을 하고
금등대와 떡상 향단 그리고 휘장을 거쳐 죽을 수도 있으니 방울을 달고 엄중한 자세로
들어가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하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하늘 아래에 이만큼 대단한
일은 어디에도 일어나지 않고 오직 성전 안 지성소에만 일어나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와 같은 율법의 제사를 그리스도께서 한 몸으로 십자가에서 일소하시고 개혁하신
후에 우리를 그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거룩하게 하신 다음 하늘로 부르십니다.
보좌 우편에 앉아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온전하게 되기를 간구하십니다(히7:25)
물론 땅에서 태어난 우리가 거듭나서 하늘에 앉힌 사실까지도 많은 시행착오와
고초를 겪고 난 다음에 터득하는 것이지만 거기서 그치지 말고 우리를 속량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아들의 명분을 주시고 진리를 알게 하셔서 그 몸인 휘장 안에
열려 있는 생명을 길을 따라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주심을 알고
그 길을 답습하고 또 답습하여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훤히 열리도록
듣고 또 듣고 세우고 또 세우고 달리고 또 달려서 드디어 그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며 길길이 뛰면서 그 은혜의 영광의 찬송을 목이 터져라 부를 수 있기를...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