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의 길로 들어서기까지
이 인쇄물을 우연히 손에 쥐었다. 컴퓨터로 문서작업을 해서 출력해 스테이플러로 철한 42장 분량 인쇄물이다. '춘천교구 임보나 전교사 전교일지'. 겉장이 상할까봐 누군가 비닐테이프를 정성스럽게 붙여놨다.
이 전교일지를 쓴 임보나는 1956년부터 1998년까지 42년 동안 강원도에서 복음을 전한 평신도 선교사 임숙녀(보나, 1929~2007)씨다. 임씨가 임종 전에 한 평생 선교사로 살아온 삶을 정리해 지인 몇 명에게 나눠준 것이다.
강원도 홍천에서 내로라하는 갑부집으로 시집간 임씨는 6ㆍ25 전쟁 통에 남편과 시아버지를 잃었다. 갓난아기를 안고 외롭게 신앙생활을 하는 그에게 호주 출신 선교사 조 필립보 신부(당시 홍천본당 주임)가 선교사의 길을 알려줬다. 그는 그때부터 서석ㆍ성산ㆍ포천ㆍ간성ㆍ원통 등 외딴 산골과 공소를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았다.
이 전교일지는 우리 기억에서 잊혀가는 궁핍했던 시절의 신앙생활 이야기다. 또 전쟁 미망인이 되어 22살 젊은 나이부터 하느님의 추수꾼으로 살아온 한 여성의 진솔한 신앙고백이다. 그의 삶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5)라는 말씀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전교일지를 정리해 6회에 걸쳐 싣는다.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 ---------------------------------------
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에 근무하다 1949년 21살에 결혼했다. 시댁은 강원도 홍천에서 두 번째 가는 부호였다. 시아버님께서는 슬하에 3남2녀를 두셨는데, 나는 막내며느리였다.
당시 시어머님이 작고하셔서 혼자 계셨던 시아버님은 나를 매우 아껴주셨다. 시댁은 외출하려면 대문을 두 개 지나야 할 정도로 집이 넓었다. 특히 가풍이 보수적이라서 여자들은 집안 어른들 허락을 받아야 밖에 나갈 수 있었다. 살림에 필요한 모든 것은 심지어 부식까지 남자들이 사왔고, 채소는 행랑에 사는 일꾼 부부가 길러 갖다 주었다. 시댁 여자들은 안채에서 살림만 했다. 워낙 대식구 살림이라 식모와 바느질 담당 아주머니가 있었고, 잔심부름하는 처녀애도 있었다.
걸인이 찾아와 "이 면장님댁에 구걸왔습니다"하고 소리를 치면 아주머니들은 그릇과 수저를 챙기고 밥상을 준비해 바깥채에 내가곤 했다. 시댁은 걸인용 수저와 밥상을 늘 따로 준비해 뒀다.
시아버님은 진짓상을 받으실 때마다 나를 상머리 옆에 앉히시고 집안 이야기를 다정하게 들려주시곤 했다. 가끔 천자문을 갖고 내 방에 오셔서 모르는 한자를 가르쳐주시기도 했다.
결혼 두 달 만에 임신을 하자 시아버님은 보약 다리는 것을 직접 챙기시고, 내가 약을 모두 먹은 것을 보신 뒤에야 나가실 만큼 아껴주셨다. 과거에 형님들이 조카들을 낳을 때는 그런 일이 없었기에 식구들은 놀라는 표정이었다. 내가 아들을 낳자 시아버님은 뛸 듯이 기뻐하셨다.
아기 백일잔치가 끝나자 시아버님이 친정에 다녀오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집을 나서는 날, 시아버님은 "외가에 처음 갈 때는 이렇게 하는 거란다"하시며 손자 이마에 손수 숯을 발라주셨다. 또 지폐 100장 묶음을 아기 포대기 속에 넣어주시면서 어깨를 다정하게 다독여 주셨다. "아범 모르게 주는 거다. 서울 가서 너 혼자 쓰렴."
친정에 도착한 지 사흘 만에 6ㆍ25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의 와중에 시아버님과 남편이 돌아가셨다. 바깥 대문 소리가 5리까지 들렸다던 대궐 같은 집은 인민군 집회소가 되었다가 아군 폭격을 맞았다. 집과 살림살이 어느 것 하나 남지 않고 불에 탔다. 나는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다.
시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그 많은 땅을 아들 3명에게 고루 분배해 놓으셨다. 나와 아들 몫으로 상속된 부동산도 많았지만 두 분을 잃은 터라 재산에는 관심이 없었다. 시댁에서는 22살 젊은 나이에 어린것만 바라보고 수절할 것 같지 않았는지 재혼을 바라는 눈치였다. 친가에서도 재혼을 권했다. 그러나 아들을 위해 내 행복을 포기하기로 했다.
"오직 주님께 의탁하면서 아들과 함께 살렵니다. 도와주세요. 주님!"
나에게는 미사시간만이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성당 밖으로 나오면 그저 앞날에 대한 근심과 한숨뿐이었다.
어느 날 친정 오빠한테서 연락이 왔다. 친가 어른들이 시댁 아주버니와 의논해 서울에다 사업체를 마련해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날 밤을 새우며 고민을 했다. 나이도 어린데 돈을 따라가다가 신앙을 잃게 된다면…. 다음날 시아주버니에게 "고맙지만 제가 나이를 더 먹으면 마련해 주세요"하고 말씀드렸다.
몇 주가 지나갔다. 성당(홍천본당)에서 레지오 마리애 회합을 마치고 나오는데 조선희 필립보 신부님께서 사제관으로 부르셨다. 조 신부님은 지도를 펼치시더니 서석면에 공소를 세우려고 하는데, 그곳에 가서 전교생활을 하지 않겠느냐고 물으셨다. 물론 나는 사양했다.
"저는 전교 경험이 없고 주님의 종이 될 능력도 없습니다."
"그 두 가지는 문제없습니다. 경험이야 이제부터 쌓으면 되고, 능력은 이제부터 공부하면 됩니다. 일주일 동안 생각해보고 대답해 주세요."
그날부터 밤잠을 설치면서 고민했다. 내게는 일찍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대신해 안살림을 맡아 하던 20살 위 큰형님(맏동서)이 시어머니나 다름없었다. 큰형님은 불심(佛心)이 깊으신 터라 내가 천주교 선교사가 되는 것이 마음이 들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홀로 된 어린 동서의 장래가 걸린 문제였다. 큰형님은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시더니 "자네 생각대로 하게나" 그 한마디만 하셨다. 누구 하나 조언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외로웠다.
저녁기도 시간에 내 아버지이신 주님께 지혜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올렸다. 내 앞에는 세속에 묻혀 돈을 버는 일과 주님의 여종으로 헌신하는 길, 이렇게 두 갈래 길이 있었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어느 쪽인가? '주님 당신 뜻대로 이 끌어 주옵소서'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는데, 신부님께 대답을 드려야 하는 날이 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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